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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바즈 루어만의 현란한 영화 덕분에 <개츠비 열풍>이 정점을 찍었다. 페이퍼 백의 판매량은 미국 전체 판매량에서 2위까지 올랐고 전 세계적으로 2천 5백만 부가 팔렸으며 42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P.22
책의 내용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저자의 학창시절처럼 <위대한 개츠비>는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친 적이 없었으니까. ‘열풍’과 ‘정점’의 시공간 속에 있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작가인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조차 없으니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책에 대한 이토록 진지한 찬사를 읽어 내려가는 건 당장은 무리였다. 책을 덮었다. 언젠가 다시 펴리라......
가족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케이블에서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다. 이미 세 번쯤은 본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다. 그런데 세 번을 볼 때까지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 캐릭터가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스콧 피츠제럴드. 매일 밤 시간여행을 떠나는 남자 주인공 길 펜더(오웬 윌슨 분)가 파리의 파티에서 만난 많은 예술가 가운데 이제서야 피츠제럴드(톰 히들스턴 분)의 허세스러움과 젤다의 예민한 성격, 이 부부의 삶의 태도. 헤밍웨이와의 ‘우정과 전쟁’까지... 마치 처음 본 장면처럼 새롭게 색이 입혀졌다. 모린 코리건의 책을 덮기 전까지 읽은 내용만큼만, 딱 아는 만큼 보였다. 모린 코리건의 ‘피츠제럴드 예찬’을 다시 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을 다시 읽기 위해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위대한 개츠비>보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조금 더 주효할 것 같다. 모린 코리건은 여느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개츠비>를 작품 그 자체의 구조론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생애와 그가 살아간 시대를 통틀어 모든 요소들을 작품에 대입하고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오해를 풀어나가면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를 그의 글로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이야기와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만을 보면 '사치'와 '허세'로 점철될 이미지들에 피츠제럴드의 정치, 사회관과 딸에게 보낸 메시지들을 더하면 그는 확실히 입체적으로 흥미로운 작가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부자의 모습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만큼 계급에 대한 인식도 꽤나 분명하게 갖고 있었던 시민이었다.
내가 내린 위대한 책의 정의란 이렇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무궁무진한 작품. -P.26
나름대로 서평을 계속 쓰고 있고 평론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떤 한 작가의 작품을 뜨겁게, 일관되게, 읽을수록 더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건 비범한 집착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웠다. 평론가이자 학자로서, 독자이자 지지자로서 이 작품을 쉰 번 넘게 읽은 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나갔을 지 생각해보면 더더욱 더 부럽다.시간에 쫓겨 때로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의무적으로 읽고 아무렇게나 써서 '남겼다'는 이유로 '날려'버린 책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황석영/작가 : 국어교사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는데 끝나고 나니까 선생님들이 “ <삼포 가는 길>로 시험문제를 낼테니 한번 풀어 보세요.” 그래서 10문제를 냈는데 제가 4문제를 겨우 맞혔습니다. 그러니까 점수로 따지면 100점 만점에 40점이죠.]
[손석희/앵커 : 과락이네요.]
[황석영/작가 : 낙제점수죠. 제가 통탄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문학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왜 정답이 꼭 하나만 있냐. 이제 문학교육의 경우에도 대개 외국의 사례나 그 문학교육의 의의를 보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을 갖고 통째로 그걸 감수성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고 창의성을 키워내는 식으로 접근 하는데 우리는 문학을 사지선다형으로 교육을 하는 게 문제가 있다고 봐요.
‘대한민국 3대 구라’ 황석영 작가가 얼마전 JTBC 뉴스룸에 나와 손석희 앵커와 나눈 인터뷰이다.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자신도 답을 맞추지 못했다는 문학가들은 황석영 작가 말고도 많다. 문학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문학의 속성에 비추어 가장 훌륭한 문학 교육은 차라리 ‘안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논술이 입시에 편입되면서 필독도서의 난이도는 훨씬 높아진다. ‘아무나’ 읽을 수 없는 것들을 다루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는 작가와 작품과 줄거리는 많지만 늘 어른이 되어 그것을 ‘다시’ 읽는다. 물론, ‘다시’ 읽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나라의 정규교육과정을 충실하게 밟아온 주입식교육의 수혜자로서 내게는,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때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읽은 문학이 너무나 많다. 저 멀리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공영방송에서 서평을 기고하고 있는 저자 모린 코리건도 이런 제도적인 상황은 피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고, ‘계속’ 읽게 되었으며 고등학교 때 읽고 한 번도 그 가치를 되새겨 본 바 없는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솔직히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나만의 ‘위대한 개츠비’를 찾고 싶어졌을 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