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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시인수첩 시인선 39
박성현 지음 / 문학수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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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내고 병을 얻은 시인이 있다.

 

어느여느 때보다 조금  지친 퇴근길한강 철교 위에서.

그가 병을 얻고    시집을 읽고 있었다.

 

시집을 '촤르륵넘겨 시를 한두  읽어보다가

다시 시작으로 돌아와 시인의 말을 읽었다.

 

그러나 "아직, 해가 머물러 있다"(김종삼). 병은 혼자 아픈 것이지만 

여전히 해는 내 곁에 머물러 있다.             - p.5 시인의 말 중에서


'해가 있다'는 말에도 여전히 그의 병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시인의 말에 조금  오래 머물렀다.


병과 그가 간신히 붙잡은 것과 

그의 곁에 머물러있다는 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더라도

'시인의 ' 끝난 지점부터 시작되는 약간의 여백이

있고 싶은 만큼 계속 머물러도 되, 귀한 볕받이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의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도 시의 제목처럼 뜨겁던 여름이었던가.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진다',

 가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공간이 주는 끈적함이, 

익숙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온도도 습도도 아니지만

한참을 서서  대청과 부엌을 쳐다보고 있었던  같다.

 

시를  헤아릴  없었다.

일부러 벌려놓은 자간과 행간들의 의미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 모르는 자간이나 행간이

아는 괜찮은  계산된 '사이'보다 편안한 때가 있다.

나는 그 '폭염' 때처럼 한참을 서서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픈 자를 보면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사람.

아주 가끔은 직접 '빙하'를 뽑기도 하지만,

부치지 못한 엽서와 편지들 띄우지 못한 종이배 생각에 마음 바쁘고

저녁처럼 찾아온 저승사자에게 치고 싶은 농담도 많은 사람.

 

'날짜가 지난 신문'에서 영원을 찾는 사람.

해결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넘어와버린 현재에서, 남몰래 빚을 갚는 사람.

'시민'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던 순간 아니면,

내가 어느 세계의 시민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고통스러워진 사람.

 

어느날 갑자기무너진 땅에서하늘에서우주에서

다시 '생의 감각' 찾아 하염없이 걷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걷고, 말하고, 우는 것 같았다.  

시를 보는 내내 미간이 일그러졌다.

안쓰러움부끄러움답을 모르는 답답함이 뒤섞여 주름이 잡혔다.

 

빙하가 그렁그렁한 눈을 가진 이에게 시집을 선물 받았다.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시에 서린 눈물과 서늘한 바람들이 송구스러웠다.

 

아무래도, 눈치도 없이 하염없던 바람이 숱한 화자들을 살려냈나보다.

'녹슬어 가는 자전거에도 붙어 있다'  바람이.

덧붙여.
그의 시집은 지금이다. 에일 듯한 바람이 불기 전.
‘곧 추워질거야. 그러니까 옷을 단단히 챙기고 지금을 살아.‘
트렌치 코트 때를 놓치고 어색하지만 유용한 겨울 코트를 껴입으며 읽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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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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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롤로그. 가장 낯선 모습이 가장 친숙하다

 

 작가인 오스터가 과거의 자신을 복원하는 고고학적 작업에 동원하고 있는 도구는 언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p. 364 ) 

  가장 낯선 모습이 때로 가장 친숙하다. 그 친숙함은 본능이나 타고난 기질같은 것으로부터 온다. 가면을 오래 쓰다 보니 잊고 있던 민낯을 만나게 되는 때가 그렇다.

 

 

내면보고서에 관한 내면 보고서

 

  당신은 저자가 유년기의 추억을 내면의 보고서로 완성시킨 글을 읽으며... 다른 독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굳이 2인칭의 누군가가 서술하도록 설정한 것이 새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기억에 대한 신뢰성을 더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표지디자인에 대한 취향만큼이나 작가의 문장에 대한 취향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가 쓴 서술방식이나 문체는 당신이 책을 끝까지 읽도록 격려해주지 않았다. 저자는 끊임없이 기억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 하는데 어쩐지 당신은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지점에서는 - 기억이 아주 구체적으로 재현될수록 - 오글거리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당신은 오히려 책을 읽을 때보다도 그 오글거리는 문체를 빌려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 서술방식의 매력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엉뚱한 생각이 많았다. 훌륭한, ‘미국의 가장 위대한산문가의 글을 알아보는 데 영 안목이 없었던 당신은 우습게도 이 책의 편철 방식에 대단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책은 실로 꿰메어 제본하는 정통적인 사철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철 방식으로 제본된 책은 오랫동안 보관해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최근 구매한 책들과 다른 하드 커버에, 민트색 갈피끈도 반가웠고, 책갈피를 늘 잃어버리고, 책갈피 없이는 읽던 곳 마저 잊어버리는 당신은 그 리본끈을 매만지며 참 감사하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폴 오스터에게서 끝까지 어떤 인상도 받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당신에게 다행스럽게도 하드커버와 갈피끈 못지 않게 반가운 몇 단어가 나타났다.

 

지루함. 단조로움. 외로움. 잊혀짐. 글쓰기. 편지.  

 

당신은 바로 거기서 스스로 혼자 있는 법을 배웠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중략) 당신의 자아가 당신에게서 질질 흘러 나간다고 느껴질 때면 당신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느낌에 빠진 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p.53”

  

 "그때까지 당신은 줄곧 글쓰기 행위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향하는 몸짓, 다른 이에게 가 닿으려는 노력으로 생각해 왔다. (중략) 그 당시엔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 p. 193  

 

  이 작가의 모든 유년시절 가운데 당신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어린 몽상가'에 대한 기억이었다. 당신도 그랬으니까.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이 여럿이 있는 것보다 편했고 에세이, 소설, 만화 등 읽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읽었던 당신의 유년시절에도 돌이켜보면 꽤 훌륭한 몽상들이 가득했었다.

 

  지금 당신이 폴 오스터가 과거를 복기하던 때보다 훨씬 젊다는 걸 떠올린 당신은, 그제서야 이 산문가 앞에 붙은 영예로운 수식어들에 하나씩 공감한다. 지금 당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뱉어내는 데도 허덕거리기 일쑤인 당신에게 한 달 전, 일 년 전, 오 년 전, 십 년 전, 이십 년 전 쯤의 일들을  배운만큼의 언어로 복기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이 생각이, 가능성에 대한 궁금함이기보다, 행여 가능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다. 하이라이팅 효과로 과장된 기억, 또는 너무 어두운 나머지 곧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본 기억의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 직전의 상태로 겨우 남아 있는 장면들을 다시 살려낸다는 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에게 당신은 여전히 미안하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그가 2인칭의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유년시절을 타자화했듯이, 당신도 그의 기록을 통해 자아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면 당신 역시 못지않은 위대한 독자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직은, 이토록, 타인의 삶에 무심하다는 걸, 당신의 식은 가슴과 좁은 품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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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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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센 언니의 조건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틈틈이 읽으려고 사무실에 책을 가져갔다. 조금씩 읽다가 덮어 세워두려던 나는 나도 모르게 책등을 뒤집어 놓는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 내 책상 위 이 책을 보고 , 얼마나 더 열심히 안 하려고 그러나라는 생각을 할까봐...^___^

  천성이 민폐 끼치는 것을 못하게 태어나서 주어진 자리에서 늘 열심을 다 했지만, 내게도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적어도 열심히 하는 척은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같다.

 

  이 책의 저자인 사노 요코의 글을 읽으며 배우 윤여정을 떠올렸다는 리뷰를 더러 보았다. 나 역시 백번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다. 윤여정 배우의 캐릭터나 인터뷰를 볼 때면 수십 년의 나이차에, 살아온 세월이 절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꼰대스럽-’지 않은 무언가가 느껴진다. 시쳇말로 걸크러쉬의 원조라고 해야 하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거나 같은 세대를 누렸다는 것이 괜한 동질감을 주는 때도 있다. 하지만, 사노 요코의 글을 읽으며 문득, 어떤 시대를 살고 있건 존재로서 깨어있다는 것, 익숙한 것에 딴지를 걸고,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고, 좀 자주 이기죽거리는 모습에서 닮고 싶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2. 냉소에 관하여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 처음엔 3~5명 소수정예로 하기로 했는데 하나, 둘 빠져나가고 어느새 원어민 강사와 나 둘만 남아 의도치 않게 일대일 개인 레슨을 받게 되었다. 그때 대화는 거의 다 잊었지만 딱 한 장면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How about your personality? In a word?”

 

  나는 준비한 면접 질문이 나왔을 때처럼 신나게 대답했었다.

 

 “I think that my character is so cynical!”

 

  이 장면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건, 첫째는 나를 바라보던 그 외국인 강사의 놀란 눈 때문이고, 둘째는 네가 방금 내뱉은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쓴 것이냐는 강사의 물음에 당황했던 나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냉소적(冷笑的): 쌀쌀한 태도로 업신여기어 비웃는. 또는 그런 것.

 

  물론, 그때 나는 규범적인 정의보다는, 좀 지적이고 멋진 표현으로 사용한 것이지만 막 만으로 열여덟을 넘긴 여고생에게서 나온 그 단어가 그다지도 의외였을까.

 

  어찌됐건 나는 지금도 내 성격을 설명하는 몇몇 단어 가운데 냉소를 빠뜨리지 않는다. 지식이든, 상식이든, 잡식이든 아는 말과 듣는 말이 많아질수록 타인의 말과 상황을 비꼬는 실력도 날로 늘고 있다. 얼마 전, 기사에서 냉소적인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에 비해 돈을 덜 번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돈을 많이 못 벌었나 싶기도 하고, 또 다른 연구에서는 비꼬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창의력을 요하는 일에 더 좋은 성과를 얻는다는 결론도 있던데 지금이라도 그런 일을 찾아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3. 다시 쓴다면......

 

  단어가, 글이, 문체가 작가 그 자체로 보이는 에세이를 오랜만에 봤다.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작가의 자아가 좀체 보이지 않는 글은 개인적으로 좀 답답하다. 사노 요코, 그녀가 어찌나 자기와 자기 일상을, ‘신변을 잡스럽게 기록해 놓았던지...... 그녀가 본 영화, , 그녀의 친구, 동료 어느 것 하나 직접 겪어본 것이 없지만, 거꾸로 내가 본 영화, , 내 친구, 동료를 그녀가 본다면 어떤 말을 해 줄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영화를 해피엔딩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빈자와 부자, 추녀와 미인, 행복과 불행, 리얼한 것과 거짓된 것 어떤 생활이 계속되든 끝나든, 사람의 일생이란 그 안에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 갖고 있으며, 거적이든 얼룩 하나 없는 비단옷에 싸여 있든, 사는 것은 아름답다고...”

                                      - 리얼리티는 궁상맞은 것 중에서 -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녀는 나와는 살아간 시대도, 나라도 같지 않다. 그런데 20165월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냉소적인 젊은이는 그녀의 글에서 낯섦과 친숙함을 동시에 느낀다.

 

  편리해진 밥통(가전)은 시민의 감각으로-

  집을 꾸미고 싶은 속물 근성은 에너지로-

  궁상맞은 일상은 리얼리티로-

  어둡고 삐뚤어진 근성은 지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는 그녀의 그 무딘 듯, 날카로운 생각들을 지켜보며 문득 어떤 아줌마, 어떤 할머니가 되어 갈 것인가 생각해 봤다. 내 평생에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그래도 언젠가 제대로 를 쓰고, 그녀가 보여준 그 격하게 솔직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 '냉소적'으로 채워보고 싶다. 예쁘게 쓰지 않을 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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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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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703.

두께: 5cm.

무게: 1075g.


  책 외관의 물리적 정보는 숫자 그 너머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단말기를 활용한 전자책까지 향유되는 때에 이 책은 쉽게 휴대할 수도 없고독서대에 고정하기조차 쉽지 않은, 물리적 제약을 감내하게 한다그리하여 대체로 방 책상, 또는 침대 머리맡에 그 무게를 안착시켜 두고이 비범한 저자의 이야기에 가만히, 서서히 끌려 내려가는 독서를 할 수밖에 없다.

 

 의 무게와 제목의 섬뜩함,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의 서늘함에 짓눌렸던 마음은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하게도 진정이 된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나는 그것이 저자가 독자에게 모든 사력을 다해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가족과 혈통에 관한 역사를 자기의 기억에만 의존해 기록하지 않았다. 앞서 자신의 가족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도움, 고증에 가까운 자료 분석과 가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복원해 낸 시공간들은 마치 19세기~20세기를 넘나드는 대하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내가 읽고 있는 이 소설같은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실화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때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섬찟함은 피해갈 수 없다.

 극적으로 선과 악, 혹은 신과 인간, 죄와 법, 처벌과 용서같은 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적어도 입장을 가져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사실 그런 강박을 내려놓기로 한 순간, 그의 이야기들이 더욱 빠르고 생생하게 전달됐다. 판단의 유보가 내 인생의 철학적 가치관을 세우는 데 사보타주가 될 수도 있겠지만 첫 700쪽은 그렇게 읽기로 한다.

 

 이클 길모어를 포함한 모든 그들이 받은 상속에는 황금만 존재하진 않았다. 아니, 황금만 빼면 무엇이든 존재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종교와 종족의 전쟁, 정착과 이주, 억압과 분노 그리고 저항과 보복으로 땅을 적신 피의 역사, 피의 상속.

 

 자마저 조심스럽고 두렵게 만드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이해관계자인 마이클 길모어는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악의 파멸과 모두의 자유로움을 당기고 싶었던 절실함은 분노, 책임의 전가, 증오가 아닌 침착함으로 전체를 아우른다. 이 기록이 어떻게 책을 써야 할까가 아닌 앞으로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리 길모어의 살인과 그에게 내려진 사형집행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이에 대한 판단과 해석이 사회적, 철학적 합의마저 이뤄낸 사건이었다. 그에 대해 그 피를 나눠가진 형제의 자격으로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놀랍지만, 그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기로 결심한 이후에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야 하지 않았을까.

 

"이쯤해서 베시(어머니)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 내가 결혼해서 들어온 집안이 겨우 탈출한 나의 집안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탈출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중략)그녀로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녀가 내린 결정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p. 151

  

 이클 길모어의 형제, 부모, 부모의 부모, 전 대까지 거슬러가는 이야기-어느 지점부터는 이 책 어디엔가 가계도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게리 길모어 사건이후, 저자가 가족이라는 관계로 겪어야 했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 그 어떤 것이라도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명히 일어난 비극적인 결과 앞에 수십, 수백 가지의 가능했던 원인을 대입시키는 과정들에 수많은 만약에를 붙여본다.   

만약에... 그때 외할아버지 윌이 자신의 아버지의 괴물같은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만약에 어머니 베시가 엄격한 모르몬교의 문화 속에서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할머니 페이가 아버지 프랭크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알려주었더라면, 페이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형 게리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지 않았다면... 만약에...’

 

 히 그는 어머니의 삶과 그녀의 가족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르몬교의 역사까지 파고드는데, 그럼에도 만일 이 사건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p.101) 관련된 어떤 사건도 지나칠 수 없다는 태도는 그가 얼마나 그의 가족사를 덮친 악의 기운을 뿌리 끝까지, 그리고 완전히 파멸시키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자는 다시 한 번 이 책의 무게는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서툴게, 모호하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무게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그 전설적인 이야기가 끼쳤을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의 가슴속 깊이 운명에 대한 예감뿐 아니라, 뭔가 다른 것에 대한 예감을 심어놓았다. 우리가 들은 것은 먼 과거 잔인한 땅에서 일어난 옛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p. 104

 

  책의 결론이 한 개인의 인격 형성에 가정환경이, 혈통이, 특정 민족과 종교, 문화가 얼마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평범하고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한 것에 대해 다행스러워만 하는 것도 경계하고 싶다. 다만, 오히려, 가능하다면 나의 피에 조금이라도 섞인 모든 뿌리에 대해 탐구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얼마 전 본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대사 몇 구절을 함께 옮긴다.

 

우린 단지 운이 좋았던 거에요

그게 당신일 수도 있었고, 나일 수도 있었고, 우리 중 누구일 수도 있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고

학대하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에요

 

때로 잊기 쉽지만, 우린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가요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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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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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기대평]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구성에서는 신간다운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나는 저자의 이력에서 불현듯 시선이 멈췄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의 로망조차 없었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조금은 친근하고 쉬운 감동을 줄 것 같다.
 어쩌면 저자가 <죄와 벌>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교 5학년부터 연결되기 시작했을지 모를 ‘러시아와의 인연',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과 그로부터 변경을 따라 ‘조금씩’ 이동해 가며 알게 되었다는 여행의 멋과 맛들이 담겨있다면 더 좋겠다.

 

 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기 전 가졌던 기대가 모두 무너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정착해 살고 있는 저자만이 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찾아내고 싶었다. 여행자인 듯, 현지인인 듯, 이방인인 듯 저자의 '위치'가 오묘하고 그 시선이 다채로웠지만, 책을 몰입해서 읽게 되기까지는 그녀의 이야기방식에 조금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책을 펴고 한동안은 먼 나라의 여행서처럼 간접경험이라는 이름으로 가늠해가며 읽어갔던 것 같다. 


  책에 소개된 많은 예술가의 이름을 들어 안다거나, 그들의 작품을 접해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의 모든 메시지를 감당해 낼 수는 없다. 여전히 내게 러시아나 폴란드, 그리스, 프랑스남부는 낯설고 어렵다. 방위를 따지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유럽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스노비즘'의 혐의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겉멋이 잔뜩 든 멋진 문화생활의 일부로 즐기고 말게 돼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예술작품이기에 이해없이도 영감이, 감흥이 절로 일기를 바라는 건방진 관람객이 돼 있었던 건 아닐까.

 "여행은 대개 여행자의 경제적 여유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그것은 여행자의 삶의 안정보다는 불안을 보여줄 때가 많다. (중략) 그래서 여행을 인문과 관련시키는 것이 스노비즘의 혐의를 피해가고자 하는 교활함의 발로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인문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여행은 불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시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들어가는 글에서...

 

 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톨스토이도, 카잔차스키나 괴테, 쇼팽도 아닌, 고려인 화가 니콜라이 박의 이야기였다. 몇 권의 평론서에서 디아스포라에 관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지만 그의 삶과 예술작품을 함께 놓고 생각해보는 디아스포라는 좀 뭉클함이 있었다.

"이것은 니콜라이 박뿐만 아니라 고려인이라는 이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들은 이야기로 동아시아적 풍경을 그려내지만) 이마저도 한반도의 특수성에 포섭된다기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저서에 기대는 듯 보인다." p. 192

 

"다문화 연구자 니콜 라피에르는 "산책자는 망명자가 됐고, 그의 삶과 사유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떠도는 신세가 됐다."고 말했는데 이는 니콜라이 박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 p. 192

 

 아스포라에 대해 나도 모르게 어느 한 쪽으로 분명히 구별되는 색을 찾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코리안 다이스포라에게 한국의 관습과 '한국적인 미'를 집요하게 찾아내려던 시선은 그리하여 "니콜라이 박" 에서 "박"의 흔적과 뿌리만 주목하려 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슴이 따뜻해진다기보다는 머리가 몇 도 쯤 식혀지는 책이다. 책의 제목과 표지를 보며 탁 트인 공원의 풀향기를 상상하거나 적어도  유럽이나 러시아에 대한 낭만을 떠올린 사람이라면 더더욱 차가워지는 이성을 발견할 것이다. 에세이로 분류되는 책이기 때문에 저자의 자아가 어느 정도 노출이 될 것인지 궁금했는데. 저자는 '그들을' 따라 유럽의 곳곳을 걷는 데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평론치고는 가볍고 단순한 편이지만, 에세이로 생각하면 무게감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책의 절반쯤은 깨끗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대단히 현학적이지도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고민들을 이어가게 된다.

 

"예술가들이 조국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것은 그들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들이 남기고 간 공간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화와 예술을 보는 나의 눈은 어떠해야 하는가?"
"예술가에게 생계나 생활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예술가들의 공간과 흔적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가는-혹은 편집자는- 이제는 잘 쓰이지도 않는 '변경(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의 땅)'이라는 단어를 굳이 택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세계 지도를 한 번쯤은 펼쳐 놓고 보기를 권한다. 각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더불어 역사적 사건과 예술가들이 넘나든 땅.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 국경을 초월한 예술과 예술가들의 생애. 화려하지만도, 대단히 젠틀하고 멋있지만도 않은 -때로 유치하기까지 한- 일상들을 살펴보는 것에는 얼마쯤의 지식과 지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파리에서 확인해야 할 프랑스적인 것의 실체란 제국의 변방으로부터 몰려든 천재들이 프랑스라는 바탕색에 계속해서 덧입힌 다양한 덧칠들이 아닐까 싶었다." - 쇼팽과 바르샤바 중에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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