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통 - 상처입은 중년의 마음 회복기
마크 라이스-옥슬리 지음, 박명준.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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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라는 것이 나만 곱게 지나갈 리가 없다. 곱게? 그래, 고운 삶을 사는 이는 누구이며, 도대체 몇이나 될까? 있겠지만 많이 궁금하지 않다. 이젠 부럽지도 않다. 나는 나일뿐이며, 삶은 삶일 뿐이다. 우리가 자신을 잘 대하기 위해 애를 쓰건 말건, 삶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마흔 지나고 겪게 되는 권태 혹은 무력감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꽤나 공감이 되었다. 물론 나는 항우울제나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만큼 힘들다거나 하지 않지만, 인생에 있어 중압감으로 오는 피로함과 비루함, 불안함으로 비슷한 심리에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인간극장에서 아이가 많은 집 이야기 편은 놓치지 않고 보는 것처럼, 우울감 유사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는 데서 위로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지, 아마 그런 맥락일 것이다.

 

이 책의 이 분투기가 나에게, 단순히 한편의 상처 입은 중년의 마음 회복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 이유.

 

앞으로 나는 이 책을 또 몇 번인가 반복해 읽으면서 위로를 구하는 사이클이 생길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나지만, 나의 배우자도 직장에서, 집에서, 분투중이라 마음관리가 필요한 사람인데 라는 데에도 생각에도 미쳤다.

 

정말 나에겐 예사롭지 않은 책이고, 나머지 인생을 살며 몇 번은 이 책 재독삼독하겠지 싶으다.

 

 

독일 작가들은 우울증의 대가들이다. 대학에서 읽은 수많은 독일 책의 주인공들은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좌절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시달렸다. 파우스트는 그중에서도 할아버지 격으로 중년의 삶에서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근원적인 우울증에 빠진 인물이며 삶을 기억할만한 것으로 남기기 위해 기꺼이 악마와 계약을 체결한 인물이다. 요즘 존재론 절망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곳곳에서 그런 사람을 목격한다. ... 책은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

 

“<네덜란드>에서 조지프 오닐은 부모로서 겪는 피로감을 잘 그려냈다.

 

우리 삶에서 이런 증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권태다. 일터에서 우리는 지칠 줄 모른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주 작은 원기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로운 권태감에 빠져든다. 밤에 제이크가 침대에 가자마자 우리는 조용히 물냉이와 반투명 국수를 먹는데 아무도 그걸 치울 기운이 없다. 교대로 욕실에 들어가 씻고서는 티비 쇼가 끝나기 전에 잠에 빠지고 만다.

 

우울증과 부모됨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 아니다. 둘 다 인생에서의 급격한 사건이며 아주 긴 고투이기에 편안해지기까지는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한다.

 

우울증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다면

책의 마지막 장이자 최고의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자기연민, 분노, 비난을 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며, 삶은 삶일 뿐이다. 우리가 자신을 잘 대하기 위해 애를 쓰건 말건, 삶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아이를 키우는 일에 뛰어든다.

 

삶이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빙빙 도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 몇 시간씩이나 물끄러미 소파에 앉아서 내 머릿속의 시간을 되돌리고 예전으로 돌아가 상황을 개선시켜보려고 했지.”

 

나는 우울증을 보이지 않는 모욕이라고 불러. 아무도 그 병을 볼 수 없지.

 

다른 사람도 이걸 겪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게.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그렇게 약하고 멍한지, 예전의 나의 반도 못 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나는 행복하게 자랐고, 충분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은 관심과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즐겁고 폭넓은 자유를 누렸다. 나는 왜 내가 인정과 칭찬과 위신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네 명의 아이가 자라는 가정이라면 재빨리 그 반대를, 즉 관심이 나에게 머무는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내가 다시 시작한 또다른 것은 체스다. 그리고 나는 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그러지 않는다. ... 나는 질 때마다 그 불쾌함의 도가니 속에 앉아서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이 정말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몇 달 전의 나에게 그것은 거의 세상의 끝이었다. 이것은 단지 무작위적인 순간이며, 성공과 실패는 다루기 힘든 개념이다. 우리가 하는 것들을 다른 용어의 틀에 집어넣는 것이 최선이다.

 

그 다음에는 이것이 있다. 이 책.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 책은 꼬리를 무는 생각 때문에 혼란스럽고, 공포감에 정신이 나가고, 밤에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두 눈에 끔찍한 질문을 던지는 당신을, 우울증 초기에 있는 나의 가련한 동료 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이것이 모두 계략이라는 것을, 핑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나를 위해 쓰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이기고 지는 게임이고, 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였다. 그러나 누구에게, 그리고 왜 나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걸까?

 

경쟁의 반대는 연민이다.

 

나는 정확히 당신이 묘사한 것처럼 느꼈어요. 다른 사람이고 싶은 갈망, 세상에 존재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고 내가 없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갈망 말이에요.”

 

나는 뇌의 질환이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은 라이프스타일이나 스스로의 선택, 나약한 성격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기이한 일에 대처하지. 그건 대개 여러 달이 걸리는 것 같아. 대처라는 게 단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건 인생을 바꾸는 과정이고, 오랜 동안 겪게 되지. 그러고 나면 좀더 많은 주름과 회색 머리칼, 그리고 뱃살처럼 두둑해진 경험과 함께 다른 세상을 맞게 되는 거야.

 

자주 인용되는 사례는 노예 에픽테토스의 경우다. 그는 주인에 의해 쇠사슬이 채워졌지만 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피부를 금속 잠금장치에 비벼대며 벗어나려고 해봐야 오히려 자신을 다치게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받아들여라. 비가 퍼붓는데 피신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면, 물에 젖는 것이 얼마나 나쁠지 또는 해가 반짝이면 얼마나 좋을지에 관해 고민하지 마라. 그냥 물에 젖어 그게 정말 어떤 기분인지 겪어봐라. 그것이 이 병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 내가 이제 겨우 이해하게 된 역설이다.

 

레몬나무는 죽었다. 그것을 몇 달 동안 불행했다. 물론 겨울 동안 안으로 들어와야 했고, 어둠이 발언하기 시작한 지난 연말까지는 거의 늘 생기넘쳐 보였다. 나는 화분에 심고, 영양분을 주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그저 레몬나무를 나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열매는 녹색이었고 딱딱했다.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개씩 떨어지더니 나중에는 한꺼번에 수없이 떨어졌다. 결국 겨우 아홉 개 정도만 남았다. 불길한 비늘 같은 것이 나뭇가지를 휘감고 오르기 시작하며 녹색을 옅은 갈색으로 바꾸어놓았다. 아마 그것은 우울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소설이었다면 그 나무를 모방하여 자연주의적인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개화하는 나무를 나의 쇠약과 연결하고, 나의 회복을 나무의 죽음과 연결하고, 하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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