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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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포스팅 거의 하지 않지만 따봉은 비교적 열심히 누르고 다닌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에 상당히 동의하지만 잘 사용한다면 나름대로 SNS로 얻는 것도 많다. 10년 전만 해도 잡지, 신문에서나 볼 수 있던 양질의 글을 요즘엔 어렵지 않게 SNS로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력과 글솜씨 뛰어난 일반인이 바로 작가가 되는 시대라 팔로잉 설정만 잘하면 허튼 피드 없이 유익한 정보를 신문 보듯 받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뉴스피드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글로 채운다는 건 결국 취사된 입장의 의견만 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페이스북엔 '차단' 기능도 있다. 이것은 뉴스피드를 좀 더 정교하고 편협하게 다듬는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 사회가 부정성의 과잉이 아닌 긍정성 과잉 상태가 병리적 상태를 빚는 '자기 착취'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타자의 추방> 역시 긍정성 과잉을 지적한다. 차이는 <피로사회>는 성과 주체 자신의 긍정 과잉을 문제로 삼고, <타자의 추방>은 주체를 둘러싼 타인의 긍정성 과잉을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소통을 중요시하는 SNS 시대에 이 무슨 말인가.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10-11p)"

 

내가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글들은 내가 선택한 나와 '같은 것'들이다. 꼭 차단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SNS의 영리한 알고리즘은 내 '좋아요'와 '팔로잉'을 기반으로 하여 내 취향에 맞는 피드만 내놓는다. 당장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를 살펴보면 안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단체가 추천 그룹으로 떠있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몸짱 여인들의 몸매 사진이 추천 피드에 떠있을 것이다 (ㅎㅎ).

 

어쨌거나 이런 같은 것들의 창궐은 저자의 말대로 '긍정성의 지옥'이다. <피로사회>와 마찬가지로 '부정성' 자체가 꼭 나쁘지 않다는 전제에서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50p)"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p)"

 

현시대는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라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인 '잡다함'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다. 우리는 우리가 취사선택한 타자들의 내부로 들어가 에고를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SNS에서 취사하여 다듬은 사유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긍정적 조작(89p)'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로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한다는,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기만적 소통의 시대에서 진짜 타자는 추방되어버렸다. 저자는 이 논리를 밀고 나가 시대의 궁극적 문제를 지적한다. 타자를 경청하지 않는 시대에서 고통은 전적으로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고통은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 현학적이고 매끄러운 철학자의 논리지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경청해야 할 타자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의 세월호를 이용하고 조롱하는 타자들을 생각해보자. 3년이 지나 세월호가 뭍으로 나온 지금 어느 사람은 세월호 침몰 음모론을 어떤 책임감도 없이 끊임없이 주창한다. 어느 사람은 오뎅 리본 사진을 찍어 올린다. 솔직히 난 둘 다 혐오스럽다. 그런 인간성들이 탐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이해나 경청의 대상이 되기는 끝까지 어렵다고 느낀다. 이 경우엔 타자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정신건강이 유지될 것 아닌가. 역시 이론과 실제는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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