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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예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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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녀에게 물었다

발가락이 얼마나 귀여운데?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또 물었다

발가락이 얼마나 예쁜데?

그녀는 또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또또 물었다

발가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그녀는 또또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또또또 물었다

발가락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녀는 또또또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또또또또 물었다

너의 발가락은 얼마나 귀한데?

그녀는 또또또또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드디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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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에서

현재

우리 그만 이혼해요.”

아내의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소리다. 늘 그렇지만, 그 말이 내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이혼을 하면 뭐가 좋지? 아내나 나에게나 이혼을 하는 게 이로울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가 될 것도 없다.

그러지 뭐

아내는 그의 커다란 눈을 더욱 더 크게 뜨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그런 부라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 찌푸린 이마를 펴며 아내는 말했다.

아이는 어떻게 할 거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뭐.”

아내는 나를 흘겨보더니,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아내가 나간 방문 쪽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 여자란.

날이 너무 더웠다. 목욕이나 해야겠다. 혹시나, 아내가 있을까 해서,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아내가 들을까 봐 발소리를 죽여 가며 욕실까지 걸어갔다. 혼자서 즐기는 오랜만의 목욕이다. 물을 받고 있으니, 문득 아내와 결혼하게 된 때가 생각난다. 아내와 나의 결혼은 정말 우습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과연 우스운 것이었을까. 후후.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2. 과거

- 삶이란 죽고자 하는 무엇인가를

계속 자기에게서 밀어내는 것,

삶이란 우리들에 있어서

허약하고 낡은 모든 것에 대해

무섭고 무자비한 것

- 니체

Kenny-GThe Moment가 집안을 온통 휘젓고 있다. 그의 섹스폰 소리는 나의 휴식을 편안한 길로 가게 해준다. 목욕을 시작하기 전, 창문은 모두 닫고 문은 꼭꼭 걸어 잠근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선미의 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촌의 어느 비디오방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복잡한 거리를 걷다가 문득, 너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 행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선미의 대인기피증과 나의 대인공포증은 우리를 어딘가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그때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비디오의 화면이 진행되는 동안, 긴장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선미의 몸을 더듬는 작업을 마치 항상 하던 일인 양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까. 쾌락의 시작은 쾌락의 끝이었고,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은 영화의 마감과 함께 끊어져버렸다. 경험이 없었던 우리는 쾌락의 절정을 이루지 못했고, 쾌락의 어느 순간에서 그렇게 헤어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 이루지 못한 쾌락의 절정을 맛보기 위해 목욕을 준비한다. 쾌락의 절정에 서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절망감. 나는 그 절망감으로 욕실에 물이 넘칠 때까지 한참을 누워서 그녀 생각을 했다.

목욕물이 넘치면 수도꼭지를 잠근다. 피곤해진 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한다. 맨손체조, 쿠샵, 자전거 타기 등 스트리킹은 한 시간쯤 계속된다. 땀을 한 바가지쯤 흘리고 나면, 조금씩 식욕이 돋는다. 먹는 건 언제나 나중 일이다.

욕탕에 들어가면, 펄펄 끓던 물이 많이 식어 있다. 텀벙, 몸을 완전히 담근다. , 이 시원함. 온몸에 묵을 때를 벗길 때의 시원함은 마치, 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과거, 사람에겐 얼마나 많은 과거가 있었던가? 과거가 없는 사람은 미래도 없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과거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때타월이 나의 때를 벗겨낸다. 나의 과거를 벗겨내고 있다.

동전을 던져 운명을 결정하던 때가 있다. 지희를 만난 것은 내가 학교 신문사 차장으로 한참 바쁘게 지내던 때다. 지희의 집은 우리 집에서 10분쯤 거리에 있다. 수업이 끝나고 지희와 함께 집에 가는 날이면, 나는 항상 지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지희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여자의 마음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나였던 터라, 지희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지희에게 지나친 부담을 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어느 날, 지희와 한바탕 싸우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지희에게 꽃을 선물할까 말까로 한참 고민하던 중, 동전을 던져보기로 했다. 동전을 세 번 던져, 앞면이 많으면 줄 것, 뒷면이 많이 나오면, 안 줄 것. 동전은 뒤쪽이 더 많이 나왔따. 나는 뚜렷이 결정하지 못했다. 에이, 모르겠다. 주자. 내가 지희에게 꽃을 준 뒤로, 지희는 나를 피했다.

그 후 내가 지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는 지희에게 끔찍한 말을 해주었고 결국, 지희에게 상처만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런 상처는 곧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나는 동전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를 벗기다 보니, 묵은 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살갗이 빨갛다. 온힘을 다해 때를 벗겨낸다. 지난 기억을 지워내듯이, 내 온몸의 때는 욕탕 속의 물로 흡수되어, 맑던 물을 더럽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했다. 목이 마르다. 양동이에 담은 물을 몸에 쫙쫙 뿌리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후,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오렌지. 선미는 오렌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가 오렌지를 좋아한 것은, 그녀가 떠먹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처음 만나, 커피를 마실 때, 그녀는 커피를 조그만 차 스푼으로 떠서 먹었다. 선미는 그게 더 좋다고 했다. 만약, 그녀가 처음 만날 때부터 그렇게 커피를 떠서 먹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걸로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천성적인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난 후면, 오렌지주스를 마시거나, 오렌지를 사 먹었다. 그것은 그녀의 기호품이었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오렌지가 먹고 싶어진다.

오렌지주스가 내 목을 시원하게 통과한다. 그녀의 신 맛이 떠오른다.

다시 욕탕으로 들어가, 비누칠을 했다. KENNY-G의 테이프 앞면이 다 돌아가고, 뒷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KENNY-G의 섹스폰 연주소리는 언제나, 과거와 현실, 미래의 순간적인 사고들을 온통 뒤죽박죽 만들어 놓으면서, 날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비누칠을 하고 나니, 온몸이 미끈미끈하다. 난 이 감촉이 너무 좋다. 평소에 거칠거칠하던 살결이 비누를 칠하고 나면, 마치, 선미의 살결같이 고와진다.

선미와 전화를 처음 밤을 새던 날이었다. 오빠, 나 무서워. 선미는 무섭다며 전화를 잡고 놓지를 않았다. ? 거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선미네 집은 신촌 부근에 있었다. 몰라, 애들 데모하나봐. 오빠, 전화 끊지 마. 그래, 알았어. 안 끊을께. 나는 그저 선미가 떠는 얘기를 무심코 듣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관심 있는 건 선미의 이야기와 어떻게 하면, 선미와 하룻밤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라디오나 TV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미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선미의 고운 살결을 구석구석 더듬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난 선미가 하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 신동집 오렌지에서

비누칠을 다하고 난 뒷면, 물을 몇 번이고 뿌려주면서 몸 구석구석을 제대로 닦아주어야만 비누는 완전히 닦여져 나간다. 손으로 내 몸을 구석구석 닦아낸다. 이것은 선미의 살결이야. 나에게 주문을 외면서 그녀의 몸을 더듬지 못하는 아쉬움에 대한 대리만족을 한다. 비누는 잘 닦여져 나갔다. 선미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선미와 헤어지게 된 건, 이런 내 욕심 때문이다. 나는 선미에게 말했었다.

선미야, 오늘 집에 들어가야 돼? , ? 저기 저…… 오빠, ? 오늘 나랑 같이 있지 않을래? ? 그냥…… 선미의 안색이 변했다. 오빠! 오빠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 오빠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섹스, 섹스! 그때 비디오방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오빠는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몰라? 실망했어! 선미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놀라 속으로 외쳤다. 선미야……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희에게 무엇을 실수했는가를.

지희는 내가 그녀를 곧 편안하게 해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편안하게 해주기보다는 그녀를 증오하고, 그녀에게 욕을 해댔고, 그녀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결정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동전던지기를 하지 않았다.

비누를 말끔히 닦아냈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목욕을 하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제 머리를 감을 차례다. 머리를 감을 때, 샴푸로 감을까? 비누만을 칠할까? 하는 고민은 항상 나를 괴롭힌다.

선미의 머리냄새는 좋았다. 선미와 포옹을 할 때마다 난 선미의 머리냄새에 취하곤 했었다. 선미의 머리냄새가 나는 샴푸를 찾기 위해, 어느 날은 슈퍼에서, 샴푸냄새를 일일이 맡아보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미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냄새의 샴푸는 없었다. 난 선미에게 물었다.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 무슨 샴푸 쓰니? 샴푸 안 써. 나는 놀라 물었다. 그럼? 비누로 감아. 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나니, 머리가 까칠하다. 내 머리는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부드러워지지가 않는다. 머리에 묻은 물기를 제거한다. 이제 목욕은 끝난 건가? KENNY-G 테이프 뒷면이 다 돌아갔나 보다. 다시 The Moment가 흐른다. 몸에 묻은 물기를 제거하고, 그 상태로 소파에 털썩 주저 않아 담배를 하나 입에 문다.

선미를 만나면 항상 듣고 싶던 노래였다. 나는 한 번도 선미와 이 노래를 같이 들어본 적이 없다. 선미와는 한 번도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선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 한편을 보면, 거기에 대해서 하루 종일 얘기하는 게 선미의 일과다. 책을 한권 읽으면, 내가 알아먹을 때까지 하루 종일을 이야기한다. 분석하고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분석하는 것이 선미의 유일한 낙이었다. 선미는 나에 대해 세밀히 분석했을 것이다. 선미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듯했다. 나는 선미에 대해 잘 모른다. 음악소리가 조금씩 사라져갈 즈음, 초인종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조금 있으니 그 소리는 또 들린다.

현관문으로 가서 숨을 죽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웬 여자가 서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못 보던 여자가 서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 저기요, 저 지희라고 하는데요…… 갑자기 숨이 탁 막히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지희…… 지희가 저렇게 변한 건가? 지희는 나를 찾았다. , 난데, 잠깐만…… 난 이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깜빡 내가 지금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걸 잊어버릴 뻔 했다. 난 옷을 입으려다가 망설였다. 우리 집엔 웬일일까? 벌써 그녀를 본 건 일 년이 넘었는데. 어쩌면…… 어쩌면…… 나는 옷을 내팽개치고 알몸인 채로 현관문을 확 열어젖혔다. 거기엔, 빨간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탕에 은빛 나는 별표가 군데군데 새겨진 미니스커트를 입은 화려한 옷차림의 지희가 유혹적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를 본 지희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웃으며 나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오랜만이라는 인사가 꽤 매혹적인데요.”

당황할 줄 알았던 내 생각에 찬물을 끼얹은 건 지희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희는 문을 잠그고 들어와, 나를 마루에 눕혔다. 더욱더 웃지 못 할 상황은 그 후에 일어났다. 지희는 나와의 격렬한 섹스를 마친 후, 마치 내가 그녀를 범한 것처럼 혼자서 훌쩍이면서 말했다.

선배, 선배가 그럴 줄 몰랐어요. 나 이제 어떡해. 나랑 결혼 안하면 고소할 거예요.”

지희의 말에 대해, 나는 잠깐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누가 뭐 하지 말랬나? 네가 나 먹여 살릴래?”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은 이루어졌다.

3. 현재

그대의 것이 아니거든 보지를 말라!

그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라면 보지를

말라!

그래도 강하게 덤비거든

그 마음을

힘차게 불러 일으키라!

- 괴테 파우스트에서

목욕을 끝내고 지금 나는, 아내와 식사 중이다. 식사 중에도 우리 부부는 별다른 대화가 없다. 늘 조용하다.

밥 좀 더 줘

아내는 말없이 밥 한 그릇을 담아온다.

위자료는 충분히 드리죠

고마워

몇 마디 대화가 오고가지만, 굉장히 형식적이고 틀에 박혀 있다.

이혼은 언제쯤 할 거지?”

지금 이혼수속 밟고 있으니까, 그것만 끝나면 되요. 당신은 이 집에서 살아요, 최소한 1년은 넉넉히 살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아이는 당신이 못 키울 것 같으니까 제가 데려가죠. 1년 안에, 당신이 일자리 구하거든 데리고 오셔서 키워도 되구요.”

아니, 그냥 당신이 키워. 난 아무래도 애 키우는데 소질이 없을 거 같애

아니, 애 키우는 것도 소질이 있어야 하나요?”

아내는 또 따지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의례히 그러듯,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데 열중한다. 피곤한 건, 딱 질색이다.

당신은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내가 던진 이 질문에 나는 문득 내가 왜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나도 잘 모르겠어. 한번 생각해볼게.”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왔다.

아내가 던진 그 말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내가 왜 살지? 처음에, 아내는 나를 먹여 살렸고, 나는 꼭두각시처럼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술집을 차렸고, 나를 그 술집의 사장으로 앉혔다. 아내는 절대로 그녀 스스로 물건을 사는 법이 없었다. 정작, 돈을 내는 건 그녀이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사야 할 때면, 나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곤 한다. 나는 황당해하면서도 그러마고 했다. 그러면,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 눈앞에선 모두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나 역시, 사람들의 눈에 비취진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때론 우연이란 것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무작정 거리를 걷던 중,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지나갔다. 나는 어디선가 보았겠지 하면서 지나가는데, 그 여자가 내게 말을 건넨다.

오빠, 저 선미예요! 기억하죠?”

문득,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모자이크 되어 흘러갔다.

선미?”

오빠, 이게 얼마만이에요, 결혼은 하셨어요?”

잠시, 나는 망설였다.

아니, 아직……

그러나 나는 봤다. 선미의 두 손이 뒷짐을 지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을.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미도 알 것이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어디 가서 얘기 좀 하다 갈까? 바쁘지 않지?”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반지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선미 역시 결혼했을 테고, 이혼을 하려 하는 중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미 역시 거기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선미는 얼른 나의 팔에 팔짱을 끼었고, 해후는 이렇게 나를 다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공원에선, 기타를 치는 사람들, 벤치에 누워서 잠을 자는 사람들, 잔디밭을 뒹구는 사람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거리의 광인에 대해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미, 이 사회에선 무관심의 미덕이 존재한다. 그녀와 나의 관계도 무관심의 미덕으로 이룰 수 있었던 만남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있다. 집에다 전화를 하려다, 문득 선미생각이 났다. 옆에 있는 선미를 생각하니, 전화를 하는 게 우스워졌다. 선미에게 물었다.

집에다 전화 안 해? 늦었잖아?”

아직도 제가 철없는 스무 살 인 줄 아세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 오자 우리는, 공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 벤치에 앉아, 서로의 살결을 더듬으며, 밤의 싸늘한 바람을 식혔다. 공원 반대편 어디선가, 기타와 하모니키가 어우러진 연주가 우리의 밤을 무르익게 했다.

4. 현재

비록 떠가는 달처럼

미의 잔인한 종족 속에서 키워졌지만,

그녀는 한동안 걷고 잠깐은 얼굴 붉히며

또 내가 다니는 길에 서 있다

그녀의 몸이 살과 피로 된 심장을

갖고 있다고 내가 생각할 때까지

- 예이츠 첫사랑에서

동이 트자, 선미는 말했다.

저 회사 가야 해요? 또 언제 보죠?”

오늘 밤에

선미를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지옥 같은 걸음걸이가 아내를 생각나게 했다. 아내는 외박을 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 그 일을 말한다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어쩌면,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지 모른다. 아내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나를 사랑한 적도 없었으니까.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가 문을 열어주며,

아빠

하며 반갑게 맞는다.

그래, 엄마는 어디 가셨니?”

몰라요, 어디 잠깐 나갔다 온다고 집 잘 지키고 있으랬어요.”

언제 나가셨니?”

아침에요

다행히도, 아내는 집에 있지 않았다. 한숨 자고 나는 또 선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꿈을 꾸는 중이다. 아내가 불에 타고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아내를 살리려고 아내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나는 빠른 동작으로 아내의 몸에 물을 부었다. 불이 다 꺼지자, 시커멓게 탄 아내가 눈동자를 깜박이고 있다. 그 눈, 잊지 못할 눈이다. 그토록 맑은 아내의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보조개를 띠며 살짝 웃었다. 그토록 자연스러운 아내의 웃음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무심결에 여보……하고 중얼거렸다.

여보, 여보!”

아내였다. 그녀가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몸에서 왜 이렇게 열이 나죠?”

지금 몇 시지?”

다섯 시요.”

나는 몸을 일으키고 외출준비를 했다.

여보, 이 몸을 해가지고 어딜 가요?”

남이야, 가든 말든, 이혼 수속은 다 되가나?”

아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집을 나왔다.

우스운 일이다. 아내가 내 걱정을 다 하다니. 아내는 한 번도 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아내는 자기 할 일만 하고, 그녀의 허영만 채우면 그걸로 만족했다. 파티에 초대되면, 나는 그녀의 꼭두각시가 된다. 내가 추기 싫어도 그녀가 원하면, 나는 춤을 추어야 했고, 노래도 불러야 했다. 그러면, 파티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우리를 부러워했다.

아직, 거리엔 어둠이 깔리지 않았다.

선미를 만나려면, 어둠이 필요하다. 누군가 우리를 아는 사람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까 겁이 난다. 철저한 어둠에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야만 한다. 선미의 회사가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공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직 20대의 젊은 연인들이 많이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선미의 남편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의 약속을 깨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오늘은 선미에게 청혼을 해보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다 보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걸 발견했다. 내 앞에 선미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 저기……

뭔데요?”

선미야, 우리 결혼할래?”

순간적으로, 선미의 맑은 눈이 흐려졌다. 그 표정은 금세 거두어지고, 침착한 목소리로 선미는 말했다.

글쎄요……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선미의 손을 붙잡아, 선미를 끌어 당겼다.

어디 가요?”

, 네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나니?”

마지막으로 한 말?”

그래, 네가 그랬었지. 오빠! 오빠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 오빠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섹스, 섹스! 그때 비디오방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오빠는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몰라? 실망했어!”

선미에게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녀는 내 걸음을 따르지 못해, 종종걸음을 칠 뿐이었다.

오늘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여줄게. 더 이상 실망하지 않을 때까지.”

그날 밤, 선미와의 결합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선미는 힘들어했다. 나는 힘들어하는 선미를 보고서도, 그녀가 했던 그 말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선미의 출근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선미를 괴롭혔다.

내가 그녀를 놓아주자, 선미는 참고 참았다는 듯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회사 안 가?”

절더러 이 꼴을 해서 가라구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는 체도 안했을 거예요.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죠? 절 사랑하기는 하는 건가요? 정말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나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정말 사랑하니까 이러지.”

선미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니까, 다시금 재미있어진다. 드디어 나는 기회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지?”

선미는 이번엔 다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편이라뇨?”

, 결혼 했잖아?”

선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빠! 그럴 수가! 정말 그럴 줄 몰랐어요. , 여태껏 오빠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구요. 제가 오빠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기나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제가 그렇게 떠났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가 있죠? 순간적인 것이었어요. 그때의 기분은 그저 순간적인 것이었다구요.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오빠만은 믿었는데……

선미의 말에 머리가 망치에 얻어맞은 듯 아파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선미의 흐느낌은 이제, 구슬픈 곡조로 바뀌어 있었다. 선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선미가 그렇게 우는 것을 보니, 내게서도 눈물이 흘렀다. 나에게도 감정이란 게, 슬퍼할 줄 아는 감정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나온 세월이 억울해졌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창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다.

5. 미래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때, 결국 사람들은 한 쪽 길만을 택하게 되어 있다. 몸이 한 개인 이상, 두 가지의 길을 모두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을 인용하곤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이미 독충으로 변한 그레고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죽음을 향해가는 일방통행로였다. 때로 사람들은, 일방통행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갈림길보단 일방통행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은 걸어가기엔 훨씬 쉽기 때문이다.

선미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어디갔다 와요?”

생각해보니, 외박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알아서 뭐하게?”

여자 생겼죠?”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이혼수속은 언제 되나?”

이혼은 안할 거예요.”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믿었던 선미와의 결혼이 난관에 부딪히는 말이었다.

?”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상한 말이었다. 아내가 처음 이혼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었다. 지금의 아내는 오히려 당당한 말투다. 더 알 수 없는 건, 아내는 지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내는 절대로 사랑이란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아내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껏 나를 사랑해 온 건가? 아니면, 이혼을 하기 싫은 것에 불과할까?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잡한 문제는 싫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다시, 선미 생각이 났다. 그럼, 선미는 어떻게 하지?

일방통행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 삶은 동전의 선택이 사라진 때부터 일방통행로였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선미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의 모든 걸 아내가 결정해 주었듯이, 지금 나는 또, 아내가 결정 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선미는 지금 밤을 지새운 그 여관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내게 대한 그 태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선미에게, 나는 말할 것이다. 널 사랑한다고. 그렇지만, 나는 이혼할 수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선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선미는 그곳에 없었다. 선미가 다닌다는 회사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근무한 적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선미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선미를 찾기 위해 허우적대는 나를 발견하고, 아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허우적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아내의 눈빛은 그 옛날, 내가 그녀를 증오하던 때, 그녀에게 상처 입혔던 마지막 말을 생각나게 했다.

-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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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다의 글쓰기 방법 (1) 특별하게 쓴다는

 

이 연재는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거라, 중구난방입니다. 아마추어인 신다의 입장에서 쓰는 글이므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대하지 마시고요!

제가 글쓰는 첫번째 방법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인데, 글을 쓸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시고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첫번째 글쓰기 방법입니다.

그 느낌을 좋게 하려고 애씁니다. 저 같은 경우 글을 쓸 때 저의 느낌과 다른 사람이 받을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특히, 내 글을 볼 때 다른 사람이 어떤 느낌을 받을가를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이 글도 누군가 볼 때의 느낌이 평범하면 안 되니까, 자꾸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기를 기대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문을 볼 때의 느낌을 얘기할 때도, 문장이 내게나 시가 올 때는 등을 얘기할 때도, 생각이 아니라 기존의 느낌과 다른 느낌을 갖으려면 어떻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느낌이 제게 전해져 오면, 그걸 글로 옮기게 됩니다. , 신다의 글쓰기 방법은 특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다의 글쓰기 방법은 조금은 특별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신다의 글은 아주아주 특별하다는...그래서 신다의 글 중에 특별한 날이 있다는 뭐, 대충 그런 결론이....

이상입니다. 신다의 글을 좋아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마추어지만, 한번 올려 봤습니다.

 

댓글과 좋아요는 힘이 되는데, 요즘 제가 통 활동을 못하는군요! 그럼, 여러분의 인생에 희망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신다의 글쓰기 방법 (2)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신다가 글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제 글을 보는 분들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상처 입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글쓰기 방법의 하나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배추를 장사하시는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 배추를 장사하시는 분에 대한 어떤 무시하거나 비하적인 발언을 한다면, 그 발언이나 글은 배추를 장사하시는 분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강연이나 글을 쓰시는 모든 분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제 글을 보시는 분은 어떤 분이 될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제 글을 보고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는데 항상 주의하게 됩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입히게 되지는 않을까를 늘 생각하고 주의하면서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혹시라도, 내 글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경우를 발견한다면, 그 글은 반드시 수정하려고 노력도 하고요. 그래서 글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저는 글 쓸 때, 되도록이면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거나 조금 격한 표현들을 자제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100프로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가급적이면 삼가려고 하지요.

오늘 신다의 글쓰기 방법은 여기까지입니다. 매일 쓰게 될지 며칠에 한 번씩 쓰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아마추어인 신다의 글쓰기 방법이긴 하지만,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좋아하실 거라 생각하며 제가 글쓰는 방법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신다의 글을 좋아하시는 여러분과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있는 인생이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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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그 락


1. 

여기가 어디일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앞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는 굉장히 요란했다. 기어를 넣기 위해 한참을 애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일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시로 바뀌고 있는 신호등과 꼼짝 않고 빵빵거리는 차들의 행렬. 분명 여기는 사거리 한복판인 듯한데, 나는 왜 여기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려 애 써 보지만, 좀처럼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어는 들어가지 않았다. 손에 너무 힘을 주었나.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역시,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시동이 꺼졌다. 차키를 돌리고 다시 기어를 넣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마찬가지로 기어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기어를 넣던 손을 멈췄다. 

“이것 보쇼? 좀 나와 보소! 내가 차 빼 놓을 테니, 견인차라도 부르쇼! 이거 원, 차 막히는 거 안 보이쇼? 초보면 옆에 선생님이라도 모시구 다닐 것이지,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거유? 초보딱지는 왜 안 달구 다녀!” 

참다 못한 아저씨가 쏘아붙인다. 내가 초보였던가? 내가 알기로, 나는 분명 10년 이상 차를 몰고 다녔다. 나는 할 수 없이 옆자리로 비켜섰다. 아저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시동을 켜더니, 이내 도로 건너편 보도 옆에 차를 갔다 세운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쇼!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우리는 시간이 생명인 사람들이야. 이런 식으로 시간낭비해서는 아니 되지 않겠소? 그리 생각 안 하쇼?”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그런데…… 제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죠?”

“허, 이 사람이? 정신 나갔네? 차 뺄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생각만 했나 보지? 사

람들 말에 따르면 한 시간도 넘게 그러고 있었다더군. 사람들도 그렇지, 사람이 차를 못 빼고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 직접 차를 빼 주든지 할 것이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으니, 그 모양들 아닌가. 댁이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가만있지 말고 도와달라고 말 좀 하쇼. 괜히 바쁜 사람들 타이어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빨리 가자고 내게 난리를 치네. 이보쇼. 댁처럼 욕먹기 전에 난 가 봐야겠수다. 알아서 처리하쇼.”

“저, 아저씨!”

“왜 그러쇼?”

“아저씨는 누구신지요?”

“누구긴? 지나가는 행인이올시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그 아저씨는 그러더니, 휭하니 가버렸다. 한 시간이나 내가 이러고 있었던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보자. 나는 개천을 걷고 있었다. 개천의 끝자락에서, 차가 다니는 굴다리를 통과할 때면 하루살이 떼들이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아니, 그들이 달려들었다는 것은 내 착각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서 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걸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길을 위해 그들의 영역을 지나치는 것이다.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지나고 나면, 다시 햇볕이 들고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숨 쉬는 곳에서 계속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 생각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렇게 자신의 상황만 보는 거냐고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왜 그렇게 이기적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러면서 말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시켜 종합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도 가져야 한다고. 이것 역시 정확히 말하면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답답하냐고. 왜 이렇게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냐고.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잘 먹고 잘 살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진심이야?”

“아니, 정말이야. 나는 진심 따위 몰라. 안녕!”

그 생각의 어디쯤에서, 문득, 개울물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개천은 이미 지나쳤으며, 굴다리의 끝에는 더 이상 개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의 바람소리만이 내 귓가를 휙휙 스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소리, 듣기 싫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는 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의 헤어짐 따위 아무렇지 않았고, 개천이 사라진 것 따위 별거 아니었다. 나는 차들이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술을 마셨던가? 손에 입김을 불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술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차는 내 차가 아니던가?: 

나는 차번호를 확인했다. 분명히, 내 차의 번호였다. 10년 동안 끌던 내 차. 어떻게 된 것일까? 다시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어 본다. 이번엔 재대로 걸렸다. 난 여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었단 말인가?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곧 사라지고 어둠이 나를 맞이했다. 너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두려운 어둠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이 새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간다. 터널이었다. 차들은 여전히 쌩쌩 달리고 있었고, 나는 그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저기를 건너야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희미한 형광불이 줄지 어 서 있는 터널을 들어서는 순간, 차들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이상하다. 모든 차들이 내게 위협을 하듯, 내가 걷는 그 보도를 향해 돌진해오다가 슬쩍 비켜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 안에 들어선 내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만 했다. 나는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내가 헤어짐을 통보하기 전에는 먼저 그 사람이 헤어지잔 말을 했고, 나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그 사람에게 매달렸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그 사람의 이 말이 내게 비수를 꽂았다. 맞는 말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냈다.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해봐!”

그리고 그 사람과 그날 첫 키스를 했다. 나는 첫 키스를 하듯, 그 터널을 뚫었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무슨 구호 같은 외침을 반복했다. 처음엔 입으로만 했다. 그 구호에 점점 마취되었다. 그러다가 손을 대각선으로 흔들면서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그 구호를 외쳤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저쪽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곳에서 눈부신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연의 빛이다. 드디어, 터널의 끝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방금 낮이었던 거 같은데, 어느 덧 다음날 아침이 된 것일까? 나는 그 빛을 본다. 그리고 빛을 향해 돌진한다. 돌진하는 나의 얼굴에 기쁨이 감돈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된다고 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빛 속에 그 사람이 서 있다. 


2. 

“이보쇼. 정신 좀 차려보쇼! 차는 어디가고 이러고 있수? 강도 당했구만. 쯔쯔쯔. 어째 걱정된다 해서 와 봤더니.”

눈을 떴다. 아까 전에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 아저씨의 어깨 너머 비치는 저 동그란 물건을 달이 아니던가? 머리가 욱신거렸다. 나는 머리를 움켜쥔다. “한대 얻어 맞으셨구만? 그래도 다행이구랴. 심하게 맞지는 않았으니. 댁이 어디

쇼? 내 바래다 줘야겠는 걸.”

“아저씨, 그것보다 여기는 어디죠? “아하, 길을 잃으셨구만! 여기는 지도에 없는 마을이라서 여기 와서 길을 잃는 사람이 많수다. 이런 곳에 올 때는 택시를 타는 것이 좋을 거요. 괜히 참상 당하고 나서 울고불고 하지 말고. 그나저나 집이 어디유? 맘 바뀌기 전에 내 차 타고 가쇼. 강도당했으면 땡전 한 푼 없을 텐데, 집에는 어찌 갈려고 그러고 있소?”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담배, 라이타, 심지어 껌종이까지.

“하하, 아직도 정신이 나가 있구만. 얼른 타쇼, 타서 얘기합시다. 나도 강도당할까 걱정이요.”

그 아저씨는 그 마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특히, 밤에 그 마을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귀신들려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쉬우니, 항상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절대 지도에 실리지 않으며 한번 온 사람들은 그 마을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 마을을 아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이 아닌 한, 그 마을에서 사고를 당했다거나 혹은 그 마을을 밤에 걸어 다녔던 사람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마을을 지나칠 수 있는 택시기사도 그 마을사람인 경우가 많으며, 다른 지역의 택시기가들은 좀처럼 그 마을 가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나도 거기에서 사고를 당했으니, 항상 조심하라며 충고의 말 역시 잊지 않았다. 어느 덧 내 그리운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이 사람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보구랴. 걱정마쇼. 또 볼 테니까! 하지만, 다음에는 댁이 나를 구해야 할 거요! 명심하쇼. 그곳은 귀신이 사는 마을이라는 거!”

그 아저씨는 낮에 그랬던 것처럼, 또 휭하니 사라졌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내 차가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로 갔다. 

“아저씨, 제 차 도난신고 좀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저희 집 비상열쇠 좀 주시구요!”

“도난신고라니? 그쪽 차는 그대로 있던 것 같은데? 아침에는 다른 차 타고 나간 거 같던데, 차를 빌렸었나 보네? 쯔쯔쯔. 빌린 차를 도난당하면 어떡한다지? 암튼, 비상열쇠는 여기 있네. 그리고 지갑까지 통째로 도난당한 것 같은데, 카드분실 신고는 되도록 빨리하게. 잃고 나면 찾기 어렵다지, 아마?”

나는 주차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내 차는 10년간 매일 놓아두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잠시, 정신이 멍했다. 방금 전에 보이지 않던 차가 왜 갑자기 보이지? 

그리고, 내가 탔던 그 차는 뭐였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 귀신이 나오는 마을에 간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 순간, 그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네, 아저씨,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잃어버린 것들, 얼른 찾아야겠어요.”



3.

현관문의 열쇠를 딴다. 딸그락. 내겐 이 경쾌한 음이 마음에 든다. 마음의 열쇠를 따듯이 내 집의 문이 내게 어서 들어오라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한 발을 내딛으면 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자동감지 형광불빛이 고개를 쑥 내밀면서 인사를 한다. 깜빡깜빡. 신발을 벗어 놓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 거실의 형광등을 켠다. 시커먼 어둠을 밝혀주는 저 형광등불의 흰 빛은 너무나 화려하다. 전화기의 리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전화는 자주 오지 않는다. 가끔, 회사나 집에서 급한 용무가 있거나 안부를 묻기 위해 걸리는 전화가 전부다. 매일 확인하는 전화이긴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처럼 하루라도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빠진 듯하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했던가? 이 전화기는 그 아저씨가 내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 “내가 전화했을 때 네가 없는 거 싫어. 네 목소리 녹음해 놔, 알았지?”

그리고 그 전화기에는 매일 그 아저씨의 목소리가 녹음되었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좋아서 들었었지만. 오늘도 역시 그 텅 빈 세상은 나의 습관을 말리지 못하고, 공허한 잡음소리만을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눈을 감는다.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다. 베란다 창문, 거실 창, 그리고 방바닥의 창문들을 모두 닫고 나면 내게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나만의 숨소리뿐. 명상에 잠기는 순간은 감미롭다. 그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숨결은 너무나 곱다. 그 사람은 눈을 감고 나의 애무에 몸을 맡긴다. 좀 더 감각적인 키스와 감각을 지닌 육체로의 여행. 그러나 나의 무딘 감각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게 말했다. 

“그렇게 했는데, 흥분도 안 돼?”

그 사람은 내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섹스를? 애무를? 감각을? 사랑을? 나는 그 사람이 단지 한 사내의 육체를 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참는 거지.”

눈을 뜬다. 무엇을 참았다는 말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육체적 본능.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씨x놈! “여보세요!”

“예, 여기 경찰선데요. 내일 좀 경찰서로 나와 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누구 아는 사람 있나 와서 확인 좀 해 주십시오. 자세한 건 나오시면 아실 겁니다.”

그러더니, 전화는 툭 끊어졌다. 왜 이렇게 일방적인 사람이 많지, 하는 생각에 잠겨버린 나는 그 이상한 마을이 자꾸 떠올라 가슴에는 시퍼렇게 서늘한 마음이 차갑게 물들어갔다.


4.

씩씩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누구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렷한 목소리로, 자 이번 곡은 G.O.D.의 “거짓말”입니다, 하는 아침DJ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라디오를 언제 켰지? 탁자 위에 널려진 담배꽁초와 빈 맥주병들. 내가 술을 마셨었나?

예전에는 술을 마셨을 때마다 항상 그 사람에게 습관처럼 전화를 걸곤 했었다. “너 어제 나한테 한 말 기억해?”

“아니, 내가 뭐라고 했는데.?”

“너, 나한테 막 화낸 거 알아?”

나는 술 먹고 한 일이라 기억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정말 기억 못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는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경찰서에서는 용의자를 가려내듯, 사람들을 일렬로 쫘악 늘어놓고 내게 저 중에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아는 사람만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저기 저쪽 끝에 어제 나를 도와준 그 아저씨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이상하다. 저 아저씨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나는 어이없게도 아저씨를 보니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 반응이 없다. 손을 흔드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경찰관이 중얼거렸다. ‘속았군……’그 경찰관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엇에 속았다는 거지? 경찰관은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물어본다.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저 아저씨가 강도당한 절 집에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 아저씨가 왜 저기 있죠? 친절한 분이신데.”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 선생님의 차가 도난당했는데, 모르셨습니까?”

“제 차요? 멀쩡히 세워져 있던데요? 저도 제 차가 도난당한 줄 알았는데, 멀쩡히 세워져 있더라구요.”

“아 그러셨습니까? 아무튼, 저 분이 선생님을 집까지 데려다 주신 분이 분명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아, 죄송합니다. 사건이 명확해지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꼭 알려드리겠고 약속드립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지요.”

“예, 어쩔 수 없지요.”

퇴근하는 길은 그지없어 아름다웠다. 며칠 전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았다. 버스로, 지하철로 가는 길이 그렇게 복잡한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나름대로 견딜 만은 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간보다는 덜 피로해서 오히려 더 좋았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들 틈새로 끼일라치면 내 입장은 더욱더 난처해지곤 했다. 괜히 치한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양손은 최대한 손잡이로 향해 있었고 여자들을 피하기 위해 온갖 자세를 다 갖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의 자세에 별 신경 안 쓰지만, 간혹 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키 작은 사람이나 아이들은 키득대기도 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다는 것에 차츰 놀라고 있었다. 그렇게 키득대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웃기도 했다. 그러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주위 사람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나를 보고 키득대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가 있는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음이 그칠 때까지 내 주위의 <우리>가 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그치고 나서야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집이 아니라 대학로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을 참석하기 위해서다. 대학로는 살아 숨 쉬는 거리다.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가기 시작하는 새벽녘 이곳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돈 50원으로 줄다리기 하는 사람들, 간혹 가다 행위예술이 번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압구정동이 오렌지족, 일명 부자들의 거리라 한다면 이곳은 나 같은 가난뱅이들이 잘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모임장소에 가니, 수하가 먼저 나와 있었다. 나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괜찮아?”

만나자마자 묻는 말이 다짜고짜, 괜찮아? 라니?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소리야? 괜찮냐니?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는 거야?”

“오빠, 기억 안나? 지난 번에……”

“지난번에? 언제? 지난 번 모였을 적에? 그때 내가 술 먹고 실수라도 했나?”

그녀는 눈을 치켜뜨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오빠, 지난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 나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 안 나?”

숨이 턱 막혀왔다. “뭐라고? 전화? 내가 너한테?”

“아니야, 됐어. 잊어버려. 모르는 게 좋아. 그냥 나한테 전화했었다는 것만 알아둬.”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수하의 단호한 결심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 고마워.”

나는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수하는 더 이상 대답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또 무슨 말을 지껄였을까. 혹시 그 사람에게 했던 말들을 수하에게 주절거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모임시간 내내 수하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아는 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을 겪었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사람.

수하를 알게 된 건 벌써 10년이다. 처음 내가 이 모임에 들어갔을 때 수하는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수하는 어색해하는 내게 참 잘해 주었고, 그것이 힘이 되어 나는 지금 그 모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수하는 알면 알수록 숨겨진 매력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겪었던 전쟁을 수하와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네가 그렇게 화내는 것 싫어. 나 공주라고 했잖아.”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

내가 그렇게 순진했었나? 그 사람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사과하고 매달리고 있있던 내가 보인다. 몇 번이나 그렇게 붙잡았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은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처럼 했었고, 나는 그때마다 매번 매달려야 했다. 맹목적으로.


5.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이상하다. 왜 똑같은 세상이 되풀이되는 걸까. 탁자 위에 널려져 있는 담배꽁초. 늘어진 빈 맥주병들. 지난번과 다른 것은 아침DJ의 목소리 대신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보세요?”

“오빠, 뭐야? 아무리 봐주려 해도 봐줄 수가 없어.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진짜!”

다짜고짜 화를 내는 수하의 목소리.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길래. 

“수하야, 정말 미안한데, 화부터 내지 말고 제발 말 좀 해줘. 내가 어떻게 했길래?”

“정말… 기억 안 나?”

평상시의 목소리를 되찾은 수하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맑고 쾌청했다. “제발 말 좀 해줘라. 나도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다.

“그래, 그럼 만나서 얘기해. 전화론 너무 길어질 것 같네. 술은 마시지 말구.”

“그래, 고마워”

요즘 들어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 ‘딩동,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손님까지? 오늘이 무슨 날이지? 아, 연휴의 첫날이었군. 

“계십니까?”

“예, 나갑니다.”

문을 열자, 경찰복 차림의 한 중년의 사내가 등장한다. “저, 기억하십니까?”

“아, 예. 사건은 해결되었나요?”

“예,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사실, 그 사건에 대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 전화를 주시죠. 그럼 제가 나갈 텐데요. 굳이 여기까지 이렇게. 이왕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 드시지요.”

“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침식사 안하셨죠? 같이 식사라도 하시는데. 저도 아침 전인데… 제가 식사 대접이나 해 드리려 합니다만.”

경찰관의 식사 대접이라……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문득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졌다.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도. 

“아, 정 그러시다면. 굳이 사양할 것도 없지요.”

나가려던 참에 거실의 탁자 위를 한번 쓱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담배와 라이터, 빈 맥주 깡통. 그 망할 것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나오니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그 경찰관을 따라 들어간 곳의 아침 해장국은 묵은 속을 녹여주기에 훌륭한 먹거리였다. 

“오늘, 비번이십니까?”

“아, 예. 맞습니다. 비번. 알아보시는군요, 비번인 거.”

“예. 저랑 이렇게 아침식사를 하실 여유가 있으신 걸 보니, 비번이란 짐작이 가네요. 그런데, 비번인데도 그렇게 유니폼을 착용해야 합니까?”

“아, 참 그게. 선생님께서 혹시나 저를 기억 못하시면 어쩌나 해서 일부러 입은 것입니다.”

“일부러요?”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오는 70대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해장국을 시켜놓고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요?”

“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어서라고 다시 정정해야겠군요. 자, 식기 전에 우선 드십시오. 먹고 나서 천천히 얘기해 드리죠”

내가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이렇게 속이 든든해지는 해장국은 처음이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 경찰관은 식사 중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식사에 열중하는데 딱히 물어볼 수도 없어서 대화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담뱃재가 내 호흡과 함께 타들어갔다. 그 경찰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은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분 나빠 하실지도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제 기억력 따윈 믿지 않으니까요.”

“하하하, 그러셨군요. 사실, 지난 번 선생님께서 서에 오셔서 지명하셨던 그 아저씨는 옷만 똑같이 입었을 뿐, 선생님께서 얘기하셨던 그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경찰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나는 그 아저씨의 눈을 봤을 뿐인데.

“선생님의 차에서 이상한 점 발견 못하셨습니까?”

“전 그날 이후로 차를 놔두고 다녀서,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차 팔아버릴까 고민 중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날 강도를 당하신 건 분명하지요?”

“사건 다 끝난 게 아니었던가요?”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 있어서.”

“아, 그 버릇. 버릇이란 거 함부로 못 고치지요. 제가 강도당하는 것도 버릇 중의 하나지요. 그런 일 자주 일어납니다. 신경도 안 쓰여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이죠.”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 제가 보험금이라도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하하, 머리회전이 지나치게 빠르시군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일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경찰관은 나를 지금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취조를 하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 일을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텅 빈 내 머리를 그는 이상한 얘기로 꽉꽉 채워 넣기 시작했다.


6.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의 바람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휙휙 스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소리, 듣기 싫다. 그러나 그는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걷더니 그는 다시 개울가로 내려갔다. 물소리가 맑았다. 그는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너무 멀리 왔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초롱초롱하게 빛났지만, 어딘가 텅 빈 듯 했다. 무엇인가가 그를 압박하는 듯 했다. 그는 그렇게 계속 걷고 있었다. 아파트가 보인다. <드디어 왔군> 그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여기가 내 집이군군> 그는 흰 차를 가리켰다. <그래, 이게 내 차야. 드디어 자유다!> 그가 차에 시동

을 걸었다. <출발이다, 자유를 향해!> 그는 아주 오래되고 울퉁불퉁한 길만을 골라서 차를 몰고 다녔다. 덜커덩 덜커덩.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본능적인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능숙하게 기어를 바꿨으며 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겨우 손가락 하나 닿을 만한 너비의 차이로 사고를 피해 가기도 했다.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백미러도 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운전할 뿐이었다. 그의 온몸을 감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길에 이어진 들판의 도로를 지나 산을 넘었다. 다시 울퉁불퉁한 비포장의 길이 나올 때까지 그는 차를 몰았고 그 중간쯤에 차를 멈춰섰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불안해 보였고, 급한 표정으로 기어를 넣기 위해 애썼다. 그때까지 그렇게 귀신이 곡할 정도로 운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의 얼굴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 그는 갑자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리를 갑자기 조수석으로 옮긴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는 그렇게 조금 앉아 있더니, 아무도 없는 옆자리에 대고 한마디 한다. “저, 그런데… 제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죠?”

그는 조금 있다가 차 번호판을 확인하더니,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와 같은 놀라운 솜씨로 다시 그의 차를 되돌려놓고 있었다.


7.

나는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선생님은 차를 집에 갔다 놓더니, 다시 그 길을 따라 선생님이 가셨던 그곳까지 걸어서 가셨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제가 정말 그랬다구요?”

“네 그러셨습니다. 그날 목격자의 증언도 나왔고, CCTV에 찍힌 선생님의 얼굴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행적을 쫓느라 우리 모두 애먹었습니다.”

“왜 저의 행적을?”

“저희들도 이 사건이 이상한 사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있는데, 범죄한 흔적은 없고. 강도는 당했는데, 막상 잃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 그래서 정말 이상한 사건이다 싶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럼 나를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그 아저씨는 뭔가? 나는 정말 귀신이 들렸었던 것일까? 점점 더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제가 지명한 그 아저씨와 저를 집까지 태워준 그 아저씨는 뭡니까? 제가 환각을 본 것입니까?”

“선생님,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드린 그 아저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혼자서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무도 선생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신 병력이 있으신 것도 아닌데, 그 점이 의아했습니다. 저희가 내린 결론은, 꼭 선생님께서 정신과진료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때 제가 지명했던 그 아저씨는요?”

“선생님. 그 분이 선생님을 보았다고 증언하신 목격자이십니다. 선생님께서 차를 위험하게 몰고 계시길래 선생님을 쫓아다녔다고 하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쫓아다니셔서 선생님은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고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희도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선생님께서 사고를 내실까봐, 걱정하면서 바짝 뒤를 쫓아가셨다고 합니다. 선생님, 과속을 하지 않으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과속으로 찍히셨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위험운전으로 구속수사까지 당할 뻔 하셨습니다. 저희는 길고 긴 상의 끝에 선생님께서 병원 진료를 받으시는 조건 하에 위협운전을 한 건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무례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의 무례함이라도 보인다면, 화라도 내면서 몰아 부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기분 나쁘게 정중한 인간이었다. “변명 한 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선생님께 말씀을 못 드린 것은 사건을 명확하게 파악하고자 함이었으니, 부디 양해바랍니다.”

햇볕이 너무 눈부시게 따가워, 손으로 눈에 그림자를 만들어 걸어야만 했다. 수하의 얘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게 두려웠다. 나는 또 그녀에게 어떤 말들을 퍼부었을까. 이상한 욕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내 비밀이라도 털어놓았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는지도 모른다. 수하는 먼저 와서, 졸린 듯 눈꺼풀을 비비고 있었다. “아웅,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잤네.”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수하는 평상시처럼 날 맞이해 주었다. “어, 나 때문에 잠도 못잔 거야?”

“알면 됐어!”

수하의 퉁명스런 말투에 편안해짐을 느낀다. 반면에, 두려움도 함께 느낀다. “내가 대체 뭐라 그랬는데? “급하기도 하셔라… 뭐 마실래?”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내 생각대로라면 수하는 내게 화내며 막 따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찌어찌했으니, 앞으론 그러지 마라, 이런 식의 말을 퍼부어야 정상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당하는 기분이다. 나는 수하의 맑은 눈을 빤히 바라본다. 

“오빠,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돼? 그냥 이거 마시면서, 그냥 마음껏 우리의 데이트를 즐기는 거야!”

갑자기 신이 난 수하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수하와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수하는 내게 다음에는 연극을 보러 가자며, 내게 티켓을 구해 오라고 시켰다. 막무가내인 수하의 모습에 나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8.

병원에서 받은 검사결과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나의 이상적 징후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날 수도 있는 현상이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다. 나는 진단서를 떼고서 한편으로는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갔던 그 마을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찾을 수 있을까. 문득, 나의 차가 생각났다. 어쩌면, 네비게이션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까. 아니면, 블랙박스에라도 찍히지 않았을까. 그 마을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내 차의 어디에서도 그 마을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주행거리조차 의심이 갔다. 분명, 먼 거리였을 텐데? 그 사건 이전에 내가 기억하는 주행거리와 그 이후의 주행거리가 별 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분명, 멀리까지 간 것이 분명한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분명, 어딘가에 그 마을이 있을 것만 같았다. 보릿고개를 넘어가듯 나는 꾸역꾸역 길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가는 길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 그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오를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의 얼굴도 어렴풋하게 떠오를까 말까 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환각을 본 게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마을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나아가기 시작하니, 길은 내게 진짜 그 마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개천을 걷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일까. 어디선가 본 듯한데. 여기가? 그렇다. 지난번에 왔었던 그 굴다리다. 나는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아, 또 나는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순간,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내 사라져버린 그 사람의 얼굴 대신, 그 아저씨가 내 앞에서 또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말을 걸고 있었다. “또 헛것을 보는 모양이로군. 여기 함부로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오셨수?”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요?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요?”: “인생이 별로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로구만. 여기를 또 온 걸 보니.”

“제가 보는 게 모두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수다. 여기는 진짜 존재하는 마을이고, 댁은 그냥 그 존재하는 마을의 일부를 보고 있을 뿐이오. 행복한 사람들은 여기를 찾아오지 않수다. 인생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를 오곤 하지.”

“이곳에 뭐가 있는데요?”

“그대의 환상, 그대가 원하는 마음이 보이는 곳이오. 그대 마음을 들여다 보시구랴.”

“제 마음……”


9.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뭔가, 또 아침인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18시. 저녁 여섯시? 핸드폰에 새겨진 날짜를 본다. 오늘은 설날이다. 전화기의 벨소리는 계속 울려댔다. 왜 핸드폰이 아닌, 전화기로 계속 전화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투덜대면서 전화를 받자, 수하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새해 복 많이 드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랑 떡국 먹으러 가자!”

“지금?”

“그래, 지금!”

“근데, 너 나랑 사귀냐?”

갑작스런 나의 물음에 수하가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하하. 오빠 말 대게 웃기다. 그래, 오늘부터 사귀는 걸로 하지 뭐!”

“내가 너랑 왜 사귀어야 하는데?”

“오빠 정말 기억 안나”

“뭘?”

“오빠가 나 좋아한다고 전화로 몇 번이나 떠들었는데.”

“내가?”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하네.”

“나 그런 기억 없어.”

“안 속네!”

“응?”

“오빠! 사실은 말이지. 오빠, 나한테 전화해서 엄청 욕했어.”

“헉! 진짜?”

“그래, 진짜!”

“미안해”

“옛말에 그런 말이 있거든.‘내가 받지 않았으므로 그 욕은 여전히 그대의 것이오.’어떤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나도 기억은 안 나네. 오빠처럼. 그러니까, 오빠가 나한테 아무리 욕해도 그 욕은 여전히 오빠 거야! 그러니까, 떡국은 오빠가 사는 거야!”

오늘도 수하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날이라고 음식을 파는 가계가 없네. 어떡하지?”

“넌 설날 때 부모님 안 보러 가냐?”

“그러는 오빠는? 오빠도 안 보러 가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

“오빠, 왜 나한테 욕했어?:”

“나 기억 안 나! 그런 적 없다고!”

“흐음… 정신과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왜 이런 날에 수하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에 수하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오빠, 우리 오늘부터 1일 할 거야 말거야?”

“나도 모르겠다.”

“무슨 대답이?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 알았다. 내가 좋아하면서 기다리지 뭐.”

“응?”

갑작스런 수하의 반응에 나는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때였을 것이다. 수하의 눈에 그 아저씨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은 그때부터가 또 시작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그 아저씨의 눈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네 마음을 봐라… 네 마음의 저울추가 움직이는 곳에 네 마음을 맡겨 봐라.”

어쩌면, 이 순간이 내가 아주 오래도록 바라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이제 떠나고 없다.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내게 이유 없는 이별통보를 했고, 나는 그 사람에게 한동안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그 집착이 오히려 그 사람을 질리게 했고, 결국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다달았다. 급기야 그 사람은 나를 스토커로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매달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단순히 스토커일 뿐,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그 후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인생에 목표 따윈 없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았다. 이제 그 사람을 놓아야 하는데!

그 아저씨의 눈은 내게 또다시 말했다.

“수하가 너의 삶이길 바라지는 말아. 만약, 수하가 네 삶의 전부가 된다면 너는 그때처럼 또다시 절망하게 될 거야. 온전하게 너 자신의 마음을 봐라!”

그 아저씨의 눈이 사라지고, 다시 수하의 맑고 상쾌한 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수하의 눈이 몹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무슨 생각 중이야! 또 욕하려고 그러지!”

“아니, 아니야. 수하야, 오늘부터 1일 하자 그랬지?”

“응, 할래?”

“1일 말고 첫날 하자.”

“뭔 소리야?”

“너와 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첫날.”

“그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그러니까 그게……”

“또 망설이는 것 봐! 됐어, 나 첫날 안해. 그런 깊이 있는 것 난 몰라. 그냥, 가볍게 사귀다가 좋으면 첫날 밤 하는 걸로!”

“결혼도 안 하고”

“고지식하긴!”

“그래도 결혼은 하는 게…”

“오빠, 1일 하자마자 청혼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결혼, 까짓 거 해주지 뭐.”

나의 당황스러움에 수하는 깔깔 웃음을 웃더니, 당장 웨딩드레스를 알아보러 가자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빠, 밥 먹으러 가자. 우리 집으로. 배고프다. 당장, 밥 사 먹을 때도 없고.”

“집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마, 오빠,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려야지.”

그러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갖고 싶은 선물을 받은 걸 마냥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나의 마음이 기우는 저울추는, 누군가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흐뭇해지는 경험을 하는 쪽에 기울고 있다는 것을. 그 저울추는 언젠가 제자리를 찾아 삶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어 내 삶을 안전하게, 그리고 적당한 무게를 놓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수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옆에 섰다. 내 옆에 선 수하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 부모님한테도 그렇게 욕하면 안 돼. 난 네가 좆같이 좋다는 말.”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옆으로 수하의 웃음소리가 허공 멀리 멀리로 산의 메아리가 울리듯 퍼졌다. 거리의 비둘기들이 나름대로 먹이를 쪼아대면서 그들의 머무름을 방해하는 우리들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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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살 금 지 구 역

자 가세, 너와 나,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모양

저녁이 하늘을 뒤로 하고 널부러져 있을 때;

- 엘리엇의 황무지중에서 -

동해안, 겨울

예술가의 등이 몹시 싸늘하다. 그는 팔을 얼굴에 기대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꾸만 바보같은 웃음이 튀어나온다. 아니, 자고 있나보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온몸을 비튼다. 몹시도 추운가보다.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저벅. <이놈 누구야?> 몹시도 껄렁껄렁한 옷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그 뒤로 험상궂게 생긴 몇 명의 남자가 보인다. 예술가가 놀라 일어선다. 그러자, 가차없는 발길질이 시작된다. 예술가는 허둥지둥 자기 짐을 챙겨 도망친다. <저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너 다신 오지 마!> 예술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난데없는 발길질을 피해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저 놈 또 오면 죽여!> 여자는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다음날 밤.

예술가의 몸이 몹시 싸늘하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머리에 기대고 있다. 귀신이 들렸나 보다. 어쩌면, 공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가 보이는지, 자꾸만 헛소리를 해댄다.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저벅. <이놈 뭐야?> 어제 봤던 옷차림의 여자가 앞에 서 있다. 그 뒤로 험상궂게 생긴 몇 명의 남자가 보인다. 예술가가 놀라 일어선다. 그러자, 가차없는 발길질이 시작된다. 예술가는 허둥지둥 자기 짐을 챙겨 도망친다. <저 놈! 오지 말랬더니 또 와? 진짜 저 놈 말 안 듣네!> 예술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난데없는 발길질을 피해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저 놈 또 오면 죽여!> 여자는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다음날 밤.

예술가의 온몸이 싸늘하다. 그는 두려운 듯 하다. <그 여자 또 오면 어쩌지> 예술가가 중얼거린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가 보이는지, 자꾸만 헛소리를 해댄다. <너 누구야? 너 누구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저벅. <저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또 와?> 어제 봤던 옷차림의 여자가 앞에 서 있다. 그 뒤로 험상궂게 생긴 몇 명의 남자가 보인다. 예술가가 놀라 일어선다. 그러자, 가차없는 발길질이 시작된다. 예술가는 허둥지둥 자기 짐을 챙겨 도망친다. 저 놈! 예술가가 우뚝 멈춰선다.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죠?> 여자가 놀란 눈으로 예술가를 쳐다본다. <저놈 뭐야? 미친놈아? 여기가 어딘지도 몰라? 저놈 또오면 잡아와! 어딘지 가르쳐 줄테니까. 여기는 여기야. 저 미친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만> 여자는 화가 나 있는 듯 하다. 보고만 있던 남자들이 예술가를 잡으러 달려든다. 예술가는 재빠르게 도망친다. 그는 도망치는데 익숙해 있는 듯하다. 아무도 그를 쫓아갈 생각을 못한다.

다음날 밤.

예술가는 사진을 찍고 있다. <저 놈 잡아!!!> 여자의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예술가는 재빠르게 도망친다. <저 놈 때문에 미치겠어. 저 놈 뭔데 여긴 자꾸 와?> 그 뒤의 남자들이 말을 한다. <저 놈 잡아올까요?> <그냥 나둬. 저 놈 미친 것 같은데. 저 놈은 집도 없나?>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볼 필요 없어. 그냥 가자.>

다음날 밤.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 놈이 진짜!!! 야 너 거기 서!!! 거기 안 서!!! 저놈이!!! 저걸 그냥, 잡을 수도 없고.> 예술가가 우뚝 멈춰선다. <그런데,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깡패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울컥 화가 치밀었는지 갑자기 소리친다 저 놈이!!! 너 이리로 안 와> 예술가는 도망친다. <저 놈 어디까지 도망치나 보자> 예술가가 도망친다. <너 거기 안 서! 너 거기 서! 너 거기 서! 서란 말이야!!! 이 놈야!!!> 여자가 지친다. <내일 또 오기만 해봐!!!>

다음날 밤. 예술가가 글을 쓰고 있다. 여자도 지쳤나보다. 소리없이 예술가의 곁으로 다가간다. <이놈 잡았어> 여자는 예술가의 팔을 붙들고 있다. 예술가는 꼼짝 못한다. <이놈 너 뭐야? 너 뭔데 자꾸 와?> 예술가는 여자를 그냥 바라보고 있다가 바보처럼 웃다가 말한다. <, 너 이쁜데?> <이 놈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네? 너 죽고 싶어? 여기 오지 말랬잖아? 여기 오지 말래니까 왜 자꾸 와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 너 다신 여기 오지마!!! 놈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네. 너 다시 오면 진짜로 죽을 줄 알아. 모르는 것 같아서 내버려 뒀더니, 진짜로 말 안 듣네. 근데 너 뭐하는 놈이야?> <저 그냥 귀신인데요> <이놈이 진짜!! 너 죽을래, 살래?> <저 살고 있는데요> <이놈 미친 놈 아냐?> <저 미친 놈 아닌데요> <어휴, 열받어. 이 놈이이놈을 어떻게 하지. 그렇게 맞고도 또 오네. 이놈 잡아가!!!> 그러자, 숨어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여자는 붙들고 있던 팔을 놓는다. 예술가는 재빠르게 도망친다.

다음날 밤, 예술가의 짐들이 바닷가에 널려 있다. 사진, 그림 도구, 그리고 소설이 써져 있는 글, 여자는 그 도구들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이놈, 오늘은 왜 안보이지?> <도망쳤나 봅니다> <이놈 눈치챘나? 내가 지 때문에 어떻게 했는데, 도망을 쳐?>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이놈이 날 싫어하나보네? 미친 척 하게> <저놈 애인 삼으려고 했는데. 도망을 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두목이 허락했어. 오늘 그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 알아봐. 잡지는 마. 어디 있는지만 알아봐> 뒤에 있던 남자들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 놈들이, 내 말 안들려? 어디 있는지만 알아봐> <> 남자들의 대답이 쭈삣하다.

두목도 쟤 때문에 미치겠대. 좋은 사람 다 놔두고, 왜 하필 저런 미친 놈을 좋아하냐고> <그놈 잡아서 반만 죽여 놓자> <이놈을 어디 가서 잡아> <, 다른 기지에 연락해> <저 놈 어떻게 생겼지?> <머리는 길고 지저분한데다가, 빵모자 썼었나?> <그놈 예술가야?> <거지같은 옷차림. 알아보기 쉽지? 보는 데로 연락해. 그리고 계속 감시하고 있어. 우리가 갈 때까지>

서해안

두목님, 발견됐습니다. 서천에 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계속 감시하고 있어. 깡패한테 물어봐야겠다. 깡패 불러와> 두목과 깡패가 속삭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남자들은 모른다. <저놈 잡으러 가자. 잡히기만 해봐라. 죽었어> 두목이 직접 나서서 잡겠단다. <여기 잘 지켜> 남자들이 한시름 놓는다. <가자, 깡패>

서해안, 예술가가 자고 있다. <저 놈이야?> 예술가는 자꾸만 몸을 뒤척인다. <저놈 잡으려면 바다로만 가면 되겠네. 저 놈 도망친거야?> <도망친 거 아니야. 내가 점찍었는데, 저 놈 나 싫어하나봐> <넌 여기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두목이 예술가의 옆으로 간다. 그리고, 말없이 예술가의 곁에 눕는다. 예술가가 슬며시 눈을 뜨고 그를 궁금한 듯 바라본다. 두목이 그에게 말을 건다. <참 많이도 맞으셨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시군요> <, 그래요. 죄송합니다> 깡패가 중얼거린다. <저놈 나한테는 미친 척 하더니, 오빠한테는 말 잘하네? 저 놈이. 내가 정말 싫은가보네? 저놈 죽었어> 깡패는 몹시도 화가 난 듯하다. 두목이 깡패를 쳐다본다. 깡패가 눈치챘는지, 입을 다문다. 두목이 다시 말을 건다. <여행 중이신가 보군요?> <아닙니다. 그냥, 떠돌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 집이 없으신가 보군요?> <아닙니다. 그냥, 집을 나왔지요> <집은 왜 나오셨습니까?> <글쎄요, 사람사는 세상이 지겨워졌겠지요> <그래서, 바다만 찾아 다니시는 겁니까?> 두목의 말투가 몹시도 정중하다. <아닙니다.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지요.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무언가에 갇혀 있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요. 바다는 그나마 저를 가두지는 않더군요. 저는 수영을 못하거든요> <하하하> <그래도, 돌아다니다 보니, 배고픔에 갇히게 되는군요. 배고프면 못 먹는 게 없어지죠. 아참, 당신은 누구십니까?> <, 저는 여행 중인 사람입니다> <여행 중이면 좋은 데서 주무시지 왜 아무데나 주무십니까?> <,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지나던 길에 혼자 계시는 것 같아 말동무나 삼을까 하고요> <, 그러십니까. 편히 쉬시다 가십시오> <그런데, 떠돌아 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바다를 그리고, 바다를 찍고, 바다를 쓰고 있지요> <바다에 집착하고 있군요> <아니죠, 바다를 사랑한다고 해야죠> <그럼, 바다만 보다 돌아가실 작정이시군요> <하하하. 그렇게 되는 셈이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십니까?> <세상이요? 저는 관심 없습니다> 두목이 예술가를 바라본다. <그런데, 집은 왜 나오셨습니까?> <글쎄요, 사람사는 세상이 지겨워졌겠지요> <그 이유 말고는 없습니까?> <글쎄요, 무언가를 찾으러 나왔다고 해야겠죠?> <무엇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글쎼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실연이라도?> <하하하. 저는 여자를 전혀 모릅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요> 두목이 놀란다. <여자를 본 적이 없으시다구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하하.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두목이 예술가의 눈을 쳐다본다. 뭔가 이상하다. <가던 길 계속 가시지요. 저는 그만 잠을 청해야겠습니다> <, 그러십시오. 나중에 또 뵙지요> 두목이 일어선다.

<오빠, 쟤 뭐하는 애야?> <나도 모르겠다. 인내심이 필요한 친구야> <네가 가서 말해봐> <나 혼자 가?> <얘가 갑자기 왜이래? 뭐가 두려워서? 재 착한 애야> <정말 괜찮아?>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가서 보고만 와> 깡패는 예술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기만 하다, 다시 두목에게로 간다. <애들한테 감시하라고 시켰으니까, 우린 가자.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깡패와 두목은 강릉으로 돌아간다. <너 재 정말 좋아?> 깡패가 대답한다. <나도 모르겠어> 두목이 전화를 건다. <저 놈 몰래 뒷조사 해봐. 그리고 저 놈 몰래 비디오 찍어,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면 찍어. 저 놈 뭐하는 새낀지 보자. 그리고, 깡패 보여줘. 그래도 좋아하나 보자> <오빠 왜 그래?> <네가 너무 한심해 보여서 그런다.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저 놈 여우야. 믿을 수 없어. 저 놈! 내 동생을 뭘로 보고>

남해안

<두목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 어떤 놈이던가?> <과거가 없는 놈입니다> <과거가 없는 놈이라니?> <수소문해봤지만, 도무지 그놈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집도 못 찾았나?> <. 어디서 굴러온 놈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정보를 입수했다는 건가?> <지금 남해안에 있답니다> <그것도 정보인가?> <그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시겠습니까?> <아니, 볼 필요없어. 말로 해> <그놈 알고보니 바람둥이더군요. 이여자 저여자 아무나 막 건드리려고 하더군요> <여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물론, 무덤덤하죠. 그놈은 아무 여자나 쫓아다니다 그냥 가버립니다> <그럼, 진짜 바람둥이는 아니군> <그리고 또 무엇을 하던가?> <아무거나 막 먹어치우더군요. 사람까지 먹어치울 기세더군요> <그렇게 무서운 놈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런 말을 왜 하나?> <몹시 배고픈 놈입니다. 못 먹는 게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말 조심하게. 아프리카 어딘가에는 사람을 먹는 종족이 아직도 있다더군> <,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그놈은 목욕도 안 합니다. 바다만 찾아 다니는 놈이 바다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꽤나 더럽겠군. 계속해서 감시하고, 그 비디오 깡패 보여줘. 그래도 좋아하나 보자>

 

깡패는 비디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뒤에서 두목이 깡패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깡패는 비디오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두목이 깡패에게 말을 시켜본다. <, 너 재 좋아?> <아니, 싫어> <싫은데 왜 자꾸 봐?> <재밌잖아> 두목이 깡패를 다시 바라본다. <너 알아서 해라. , 계속 볼 거냐?> <계속 봐야지. 그래야 저놈 마음을 이해하지> 두목이 깡패를 다시 쳐다본다. <너도 참 할 수 없는 년이야> <오빠, 어디가?> <일하러 가야지. 네가 알아서 해. 저놈, 오빠는 진짜 싫다> <알았어> 두목이 나간다. 깡패는 비디오를 유심히 바라본다. 여기저기 술병들과 담배꽁초가 널려 있는 깡패의 방은 비디오 액정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과 TV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컬러색의 조명이 조화를 이루어 그 흔한 뒷골목 사내들의 아지트를 연상시키고 있다.

1년 후, 동해안

예술가가 누워 있다. 깡패는 예술가의 옆으로 소리없이 다가선다. 예술가가 말을 건다. <어디선가 뵌 적이 있으신 분이군요?> 깡패가 말을 한다. <글쎄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기억이요, 저는 기억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그저 느끼는 거죠> 깡패가 예술가의 손을 잡는다. <분명히 뵌 적이 있으시군요> 예술가가 깡패의 몸을 더듬는다. <왜그러시죠?> <죄송합니다.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예술가가 깡패의 발을 만져본다. <, 그분이시군요. 발길질을 해대던> 깡패가 놀라 예술가를 쳐다본다. 예술가는 눈을 감고 유유히 말을 한다. <당신의 몸을 보고 싶습니다> 예술가의 손이 무척 차다. 깡패는 예술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마지막 소원입니다. 당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깡패가 눈치챈다. 깡패는 옷을 벗어내린다. 예술가는 눈을 뜨지 않는다. <제 몸을 보고 싶으시다면서요?> 예술가가 말한다. <눈을 떠도 마찬가지입니다> 깡패는 예술가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예술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깡패가 예술가의 몸을 덮는다. 예술가가 말한다. <무척 따듯하군요. 저는 한번도 이렇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본 적이 없습니다> 깡패의 등이 싸늘하다. 깡패가 말한다. <저도 이렇게 차가운 요를 깔아본 적이 없어요> 깡패의 온몸이 싸늘하다. 깡패가 눈을 감는다. 예술가가 눈치챈다. <이러다 얼어죽겠습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깡패가 꼼짝을 하지 않는다. <당신은 눈이 멀으셨나요?> 예술가는 꿈쩍을 할 수가 없다. 예술가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쩌다가 눈이 멀게 되셨지요?> 예술가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당신은 눈만 먼 것이 아니었군요? 당신은 몸도 마음도 다 멀었었군요> 깡패가 꿈쩍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움직일 수가 없다. 깡패의 몸이 식어간다. 예술가의 몸도 잠시 타올랐다 차츰 시들어간다.

예술가의 눈에 바다가 들어온다. , 이게 바다로구나. 바다. 바다. 바다. 혼자서는 한번도 가지 못했던 바다. 그들이 바다에 휩쓸린다.

다음 날, 두목이 깡패를 찾고 있었다. <저희들이 찾아보겠습니다.> <이 놈들아, 잘 감시하랬더니, 어떻게 된거야?> <글쎄, 어떻게 된 것인지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그 거지같은 놈는?> <같이 있었습니다.> <같이?> <, 둘만 있겠다고 하길래그냥> <내가 허락을 했던가?> <아닙니다> <그럼, 지켜봤었어야지> <무슨 일 생겼기만 해 봐. 너희들 다 죽어!!!>

두목과 남자들은 깡패를 찾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두목이 말을 한다. 바다를 찾아봐! 땅만 찾지 말고, 바다를 찾아보라고! 바다를 찾아야 그 놈들을 찾지. 그 놈들 같이 도망쳤잖아. 바다로 가, 바다로 가라고.

바람소리가 거칠다. 파도도 몹시 세차게 몰아친다.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어 떨어진다. 두목이 소리친다.

우리도 바다로 도망치자. 저놈들 때문에 미치겠어. 우리까지 도망치게 만들어. 우리 다 바다로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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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1

 

 

 

 

재판장 : 당신의 생년월일은?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내가 태어난 그 당신 생년월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소.

재판장 : 당신은 어떻게 태어났소?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나는 자연에 의해 잉태되고, 바람에 의해 길러졌소.

재판장 : 당신은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소?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사람은 누구나 다 정신병자요. 모두 미친 년놈들 뿐이오.

재판장 : 당신은 인생을 부정하시는군요?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할 뿐이요.

재판장 : 당신이 행하는 그 수많은 거짓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알기나 하오?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물론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소.

재판장 : 증거가 이렇게 많고,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증인인데, 없다고?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그건 그들이 생각할 때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오. 사람들은 언제나 순간순간 말하기를 주저하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당신은 저렇게 받아들이면 그건 거짓말이 되지. 그럴 경우는 아주 흔하오. 그런 상호관계가 지속될 때, 결국 서로에게 신뢰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오직, 거짓말만 존재할 뿐이오.

재판장 : 이유를 모르겠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우리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군. 묵비권을 행사하겠소.

 

재판장 :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심문을 중지하겠소.

재판장의 망치 : 땅땅땅

 

(풍경묘사)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2

 

말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법보다

말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말은 인간적이다.

 

- 오규원 4개의 노트에서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재판장에게 다가가 반문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방금 영구불변의 시간이라고 했소?

재판장 : 그렇소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영구불변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오?

재판장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소.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건 변화하고 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구불면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군?

재판장 : 당신은 지금 나를 포함한 법정 전체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 아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물론, 잘 알고 있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난 그걸 즐기고 있소. 당신이 흥분하면 할수록,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이오. 내 말이 틀렸소? 그리고 난, 당신이 흥분하는 것을 즐기고 있소. 당신이 자꾸 흥분하면 할수록 난 자꾸 당신을 괴롭히고만 싶소. 당신이 그럴수록, 날 자꾸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 아시오?

재판장 : 그만 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계시는군? 하지만, 당신이 날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도 내가 바뀌진 않소. 당신은 당신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오. 내 말이 틀렸소?

 

(배경설명) 서기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다가왔다.

 

서기 : 틀렸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틀렸다고? 이유를 대 보시오.

서기 : 이유를 왜 대야 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 말이 틀렸다고 했잖소?

서기 : 난 서기일 뿐이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서기 : 내가 당신의 말을 기록하는 데 왜 이유가 있어야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슨 소리요?

서기 : 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말했을 뿐이오. 당신, 왜 살아?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내게 아주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변명하려 할 거요. 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오. 그렇듯이 나 역시 당신 생가기 틀렸다는 걸 말하는 것 뿐이오. 됐소?

 

(상황설명)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은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두들겼다. 서기는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지는 해 저편으로 사라졌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다시 혼자 남은 영혼 속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재판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무죄 추정의 죄수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말을 걸어오려 한다.

 그 동안, 내리던 폭우가 가라앉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영구불면의 시간 동안,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무죄 추정의 죄수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 I'll be back~ (3편으로 다시 돌아올께~)

3

 

 

시작에서 중요한 건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끝을 보고 시작한다면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낸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일단 시작하고 보자라는 사고방식

무작정 저질러놓고 보는 일

이것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 보자하고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 할 거 아닌가

 

 

무죄추정의 죄수는 한참동안 말을 걸려 했으나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천둥번개가 멈춘 짜증나는 날씨를 바라보면서 무죄추정의 죄수를 등지고 서 있었다. 합리적의 의심의 죄수 역시 무죄추정의 죄수가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 중요한 건

답을 맞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를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

삶에서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 나는 지금

<인생>이란 문제를

열심히 푸는 중이다.

여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현명과 지혜의 바보"란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재판장이 물어보기 전에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먼저 그에게 질문을 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떻게 된 거요? 재판장이 바뀌다니?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는 땅 밑으로 기어들어갔소. 내가 못 마땅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비웃을 상대가 없어 섭섭할 뿐이오.

현명과 지혜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나는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당신은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큰 존재요. 당신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소.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상대는 당신같이 넓고 큰 마음을 지닌 존경하고픈 사람이 아니라, 내가 비웃을 수 있는 상대요. 그런 사람은 적어도, 내게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거든. 당신의 마음은 넓고 크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당신을 비웃는다 해도 당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거요. 그 이유가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요. 됐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그렇다면, 오늘도 여전히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하겠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야, 물론이지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에겐 콤플렉스가 많은 듯 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거요.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소. 그리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은 비웃고 당신보다 잘난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았소.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많지 않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오? 어떻소? 당신의 콤플렉스가 어떤 건지 말해 보지 않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미쳤소? 내가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할 것 같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틀렸소. 난 사람이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럼, 무엇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뭏든 난 사람은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자기비하가 강하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할 뿐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것이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소? 지금까지 당신은 내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아시오? 그러면서 당신은 나하곤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이제,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군. 변호사를 선임하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나를 대신해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지금부터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심리설명) 영구불변의 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가많이 앉아, 증인들이 증언하기를 기다렸다.

5.

 

말이란

하고 나면

속은 시원하지만

괴롭기는

더욱 괴로운 것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그런 시간들이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만남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첫 번째 증인, 등장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녀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도저히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또 그녀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를 어떻게 아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증인의 이름은?

이름없는 여인 : "이름없는 여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은 왜 이름이 없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제 이름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의 이름일 왜 지웠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죠.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왜 지워지지가 않았죠?

이름없는 여인 : 저 사람 때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제게 이름일 지어주셨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께 이름을요? 놀랄 만한 사실이군요.

이름없는 여인 : ,저 사람은 제게 "이름없는 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증인, 증인은 지금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이름없는 여인""이름없는 여자"란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름없는 여인 : "여인""여자"란 말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 좋습니다. 그럼, 저 사람을 만나고 난 이후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없는 여인 : 더 이상 없습니다. 저 사람은 단지 저를 지워버렸을 뿐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어떻게 지웠죠?

이름없는 여인 : 저의 이름을 지워버렸죠.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로선 이해하기가 힘든데, 좀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름없는 여인 : 자세하게요? 어떤 게 자세한 거죠? 이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판사님은 제게 무얼 기대하세요? 제가 저 사람에 대해 무얼 말하길 바라시죠? 저 사람을 욕해줘야 하나요? 아니면, 저 사람과의 그날 밤 일에 대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저 사람은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를 텐데요? 저 역시 아는 거라곤, 제 이름을 지워버렷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단지, 그게 다라구요. 판사님., 판시님도 원하세요? 자세하게 알려드릴까요? 자세하고 알고 싶으시면, 오늘 밤 제게로 오시죠? 어때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려요? 그래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리죠. 판사님은 자세하게 알 권리가 있을 테니까요. 결국은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죠. 판사님 역시 가면을 쓴 천사에 불과해요. 모두들 날보고 손가락질을 하죠. 하지만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 대부분은 날 알아요. 내가 자세하게 모든 걸 가르쳐 드리니까요. 난 그들에게 이러죠. 제발 욕해 달라고요. 왜인지 아세요? 안 그러면 그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명예가 실추되면 곧, 내게서 멀어질 테고, 그러면 제 밥줄도 끊기고 말 테니까요. 오늘 밤 또 제 이름을 지워주시지 않겠어요?

 

(상황셜명)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위엄있고 현명하다고 판명 나 있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을 보니,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기분도 유쾌해졌다. 결국, 저 판사도 이 가련하고 노련한 여인네 앞에선 꼼짝을 못하는구나.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만하시오. 다음 증인을 불러오시오.

이름없는 여인 : 판사님, 기억하세요. "이름없는 여인"의 방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독백) 나는 상상한다. 주위의 시선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판사의 모습. 그리고 몰래 찾아갈 "이름없는 여인"의 방. 그 방에는 매일 자기의 이름을 지우는 여인이 또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판사를 기다리며, 꽃단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날 판사의 얼굴표정 - 겉으론 위엄있지만 온갖 이물질들이 잔뜩 끼어이는 속내 -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역겨운 일이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

 

'이름없는 여인은 아름다웠습니다

6

 

- 인생은 어쨌든 정당한 것

내 마음은 하늘처럼 열려 있다

 

<카마수트라>

 

 

두번쨰 증인이 채택되기 전에, 12일 동안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하였다. 그가왜 12일이란 시간을 주었는지 말하진 않지만, 모두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무죄추정의 죄수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 앞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 꺼렸던 무죄추정의 죄수의 태도는 너무도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죄추정의 죄수 : 당신은 왜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 거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잠시 뜨금했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 감추는 거 없소.

무죄추정의 죄수 : 감추는 게 없다구요? 당신은 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려고 하죠? 사람이란 동물은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불합리한 것이 합리적이기도 하죠. 당신은, 당신의 문제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꺼리는 거죠? 사실, 한가지 문제의 무게가 큰 것이라면,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마음 놓고 괴로워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괴로움이 가시고 나면 안정을 되찾기가 쉬워지지만, 사소한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죠.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고민을 하냐고. 그리고 이런 경우가 한두번으로 끝나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쌓이게 되면 병이 되죠. 사실, 가장 위험한 정신상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그것들을 쌓아두었을 때입니다. 당신의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쌓아놓은 점수들을 한꺼번에 잃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죠. 그렇듯, 당신은 한꺼번에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쌓아놓은 것들을 단 한번에 풀려 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러므로써 당신은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추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린 거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어째서 죄수가 되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바로 방금과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사람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할 때가 있죠.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게 정확하게 꿰뚫면 많은 걸 잃게 되요. 그것이 저의 죄목이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흥미있는 죄목이군.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의 죄목은 뭐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바로 당신과 반대되는 죄목이오. 당신은 당신 죄를 너무 잘 알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나의 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소. 이 나라는 정말 우습기만 하오.   죄없는 사람을 이리 가두어 두려만 하는지, 정말 난 이해를 못 하겠소. 혹시, 죄가 있다면 말하지 않은 죄? 그것도 죄가 될 수 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결과에 따라선 될 수 있쬬.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과?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었느냐보다는 결과로 판단한다는 것이죠. 모두들 결과만 보려 해요. 당신이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당신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당신을 감추려 하느냐고 물어본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감추려 하지 말고 털어놔요.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 쏟아내 버려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뭐가 두렵죠?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요? 이 나라의 형벌에는 석방 아니면 사형밖에는 없습니다. 극단적이죠. 석방되면그야말로 다인은 저주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말을 할 때 절대로 흥분을 해서는 안돼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에 맞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젭니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도 하세요.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요. 물론, 당신이 영원토록 저주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난 이제 그만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저의 재판은 쉬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판사가 너무 서둘러요. 판결이나 제대로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합리적의심의 죄수 독백) 나는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그의 말대로 말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정말,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지른 것일까?

7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의 얼굴에선 근엄한 표저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엔 묘한 웃음이 번졌다. 왠지 그 웃음은 비굴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그는 어젯밤 "이름없는 여인"의 이름을 완전히 지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지금쯤 곤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상처뿐인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재판장, 어떻소? 나랑 내기하지 않으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하시겠소? 안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 이 양반, 웃기는 양반이구만.

합리적의 의심의 죄수 : 하시겠다면 말씀드리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하겠소. 당신이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코 터무니없는 내기는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먼저, 내기의 조건부터 걸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어떤 걸 원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만약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긴다면 나를 풀어주는 조건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터무니 없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나에겐 무엇이 돌아오는 것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이기면 "이름없는 여인"을 선물하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지금 농담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농담이 아니오. 첫 번째 증인의 "이름없는 여인"은 시작에 불과하오. 앞으로 수도 없이 "이름없는 여인"은 등장할 것이오. 물론, 언제 등장할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나의 재판 과정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한데, 그 여인을을 모두 선물하겠소. 한가지 충고하자면, 그 여인들은 첫번째 "이름없는 여인"같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오. 내가 그 여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어떻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이 이기면?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이기면 나를 풀어주길 바라오. 그리고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요,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런데 무엇으로 내기를 하자는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사랑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무슨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소. 하지만 난 그녀 아닌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소. 그녀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이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오. 그것이 내기의 조건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곘군.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난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오. 비록, 지금은 당신을 경멸하지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난 다인의 존경을 바란 적은 없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잘 들어보시오.. 당신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오? 그러고도 존경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군. 다인이 진정 존경을 받는 재판장이 되려거든, 우선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오. 당신같이 이중적인 사람도 아니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말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게 궁금하거든, 직접 노력해 보시오.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당신에겐 흥미거리 중 하나가 될 텐데?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듣고 보니 흥미롭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떻소?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재미있군. 내가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절대로 할 수 없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내기하겠소. 당신은 나의 자존심을 자주 건드리는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것도 내 취미 중 하나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악취미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겐 좋은 취미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아뭏든, 재판은 이후로 미루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장담하지만, 앞으로 재판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건 두고 봐야 알지.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경멸의 눈빛으로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역시, 합리적 의심의 죄수를 경멸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확신했다. 저 녀석은 결코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 그녀는 경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눈빛은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그 눈빛이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다시 어두운 지하 동굴로 들어갔다.

8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재판은 어떻게 되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글쎄요.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힌은 스스로 죄를 지었따고 생각하오?

무죄 추정의 죄수 : 전 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론, 죄가 되지 않는 것도 죄가 될 수 있고, 죄가 될 수 없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죠. 문제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재판장과 배심원의 마음을 어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군요. 재판장도 만만치 않게 저를 잘 파악해요. 서로 대등하다 보니, 꽤나 힘겨운 싸움입니다. 댁은 어떠십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마 곧 풀려나게 딜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럴 듯한 사기를 치셨나 보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한텐, 궂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니 무척 편하군.

무죄 추정의 죄수 :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사기는 믿을 만한 게 못돼요. 너무 자신감이 지나치면, 화를 자초할 수도 있어요. 항상,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놔야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 방법이 잘못된다는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에 항상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 재판이 또 시작되는군요. 제대로 얘기할 시간조차 없으니, 무척 섭섭하군요. 또 뵙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의 말을 다시 되뇌어봤다. 항상, 철저하게 대비한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9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굴뚝의 정신의 닿으려면!

- 고진하 굴뚝의 정신에서

 

재판장이 바뀌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들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또 누구요? 판사는 어디갔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판사요? 못 들으셨어요? 사기죄로 구속되었어요. 재판장이 재판을 받는 드문 경우가 발생한 거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사기죄라니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당신이 내기를 하셨더군요. 그 여자분을 상대로 사기를 치셨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국, 그녀의 사랑을 얻었다는 말이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사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제분을 잉태하셨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번엔 내가 충격을 받을 차례군.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도 될까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엇을 묻고 싶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그 여자분, 정말 사랑하셨나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미안하오. 그건 사기였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원인은 당신한테 있었군요. 판사는 마치 자신이 당신인 양 행동했어요. 당신이 지상에 계셨을 때는 참 따뜻한 눈빛을 지녔더군요. 당신이 그 여자분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 여자분이 당신을 사랑한 거였죠? 판사는 당신의 사기를 알고 있었어요. 한번 크게 상처받은 사람은 좀처럼 쉽게 다른 사람에게 가지 못해요. 판사는 아주 쉽게 그녀를 얻었죠. 하지만 그 판사는 한 가지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어요. 아무리 속이려 해도 때론 속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던 거지요. 당신을 사랑한 그 여자분은 당신을 너무도 그리워해 잠시 그 재판장이 당신인 것처럼 착각했지만, 곧 당신이 아니란 걸 알아챘어요.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신고를 해 온 거죠.

이렇게 되면, 게임은 누가 이긴 게 되나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모르겠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여전히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꺠우치지 못하는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 잘못했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재판이 끝나면 알게 될 거예요. 변호사 선임은 여전히 안 하실 건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소. 난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좋아요. 그럼, 재판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0

 

문득

살아가면서

난 진정

진실로서의 사랑을 해보았을까?

라는 물음을 던져보건대

"난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무죄 추정의 죄수 : 쉽지 않으신가 보군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요.

힙리적 의심의 죄수 : 판사가 또 바뀌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자만은 담배나 술보다 더 좋은 기호품이죠. 하지만, 그것은 마약 같은 거지요. 한번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기 힘듭니다. 당신은 이미 그 자만이란 것에 익숙해지셨더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잘 봤군.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아니라면, 당신하고는 상대할 필요가 없는 걸로 아는데.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과 내가 틀린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하게 그 자만심을 드러내지만, 나의 경우는 그 자만을 철저하게 겸손아란 덕목으로 위장하죠. 그것은 곧, 당신은 철저하게 솔직한 사람이고 나의 경우는 위선자라는 얘기가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럼 그것도 알겠군. 난 당신같은 사람을 경멸한다는 것.무죄 추정의 죄수 : 물론, 알지요. 당신과 나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서로를 경멸한다는 것도. 하지만, 결국에 이기는 것은 당신처럼 솔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 거죠. 당신께 그걸 깨우쳐 주고 싶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헛수고 하신 것 같은데.

무죄 추정의 죄수 : 결코 그렇지 않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난 내가 무죄로 석방됨으로서 저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당신께 증명하려 하는 것 뿐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요?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이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지요. 그리고 난 내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알리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참 우스운 소신을 가지고 있군. 당신은 당신이 하고싶은 일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나 보군.

무죄추정의 죄수 : 떄론 목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죠. 이번이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 이런 비리를 알리고 싶어도 내가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오.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이 제대로 되어 간다는 증거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왜 불가능하지?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은 도무지 현실판단 능력이 없군요. 현실을 똑바로 주시하세요. 아직도 몽상 속에서 헤메이십니까? 그래서는 안돼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세요. 당신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재판의 유죄선고는 사형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소한 사람은 당신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셨고, 당신 편이 되어 줄 증인조차 확보하지 못 했어요. 재판에 승산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당신 혼자 아무리 증언하고 당신 혼자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다른 모든 증인들이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겁니다. 재판이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재판은 당신의 유죄를 얼마나 명확하게 판단하느냐를 가려줄 뿐입니다. 당힌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우긴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또 당신을 도와줄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결코 진실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심리독백)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지금까지 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몰고 온 듯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11

 

- 비로소

- 재판이

-   

- 되었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두번째 증인 나와주세요

 

꽤나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두번째 증인이란 말에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좀 당황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질문이 하나 있는데?

최후의 판사 : 하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증인은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이 재판은 언제 끝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재판이 지루하신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소.

최후의 판사 : 당신은 참을성을 배워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런 건 필요없소. 어서 빨리 이 재판이 끝나길 바랄 뿐이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최후의 판사 : 무엇이든 쉽게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진짜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당신은 가짜이며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죠.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가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발전이란 흔히, 문명 속에 갇힌 기계적인 것들만을 말하죠. 그것들은 치열한 머리싸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이 재판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미 죄인이라느 전게 있습니다. 지금 판단하는 것은 죄질의 크고 작음이지 유죄냐 무죄냐가 아닙니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이제 그걸 당신께 깨우쳐 드리려 합니다. 제 이전의 판사는 모두 당신을 재판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제자이기도 하지요. 모두들 당신의 독설에 넘어가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면 몰라도 판사처럼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성별을 지닌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나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테니 걱정 없을 거구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왜 그렇게 확신하오?

최후의 판사 : 당신은 당신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여자들을 유혹하지 않아요. 과연,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어차피 당신은 유죄인 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승산없는 싸움이군. 그런데 왜 그리 질질 끌지? 어서 빨리 나를 사형대에 보내주시오.

최후의 판사 : 당신을 빨리 보낼 수는 없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분명한데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당신이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석방될 수가 있으니까요. 다만, 판결에 관계없이 당신은 유죄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 뿐이에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당신을 유혹할 필요가 있겠군.

최후의 판사 :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판결은 제가 내리지 않아요. 당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 저는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재판을 진행할 뿐이지요. 그것이 판사가 하는 역할입니다. 판사의 권리를 남발해서는 안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군.

최후의 판사 : 아직은 아니군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는 일이 당연한 일인 듯 넘어가는 세상입니다사실, 누구에게든 존경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충고해 드리죠. 당신은 지금 당신 변호사 역할까지 하신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묵비권 행사를 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또 없기도 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와 피고인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모두 다 받아주기도 하며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재판은 더 오래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변호사 선임권을 박탈당합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최후의 판사 : 좋습니다. 잠시 휴정합니다.

 

증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들어갔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우스웠다. 이 모든 게. 모두 가짜라고? 자기도 가짜? 어떤 면에서? 그리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변호사를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엔 진짜도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속으로 외치면서.

12

 

- 이것들은 무시로 깜빡거리며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

그 짧은 순간들을 참을 수 없는

(저 등뒤에서, 푸욱, 찔려지는 칼날)

깜박거리는 표지들은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위험하다. 깜빡거리며

-이문재 저 깜빡이는 것들 - 산책 5에서

 

최후의 판사 : 세번째 증인, 나와 주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잠깐, 두번째 증인은 어떻게 된거요?

최후의 판사 : 한번 나온 증인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유가 뭐요?

최후의 판사 : 모든 사람은 한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우습군.

최후의 판사 :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 하지 않겠소.

최후의 판사 : 꿋꿋하시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차피 내가 나를 살려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려줄 수는 없소.

최후의 판사 :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을 살려내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켜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조금 더 산다고 해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거 같소? 나는 이제 저물어 가는 사람일 뿐이오. 죽음 아니면 영원을 택하겠소.

최후의 판사 :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걸 이룩할 수는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같이 능력있는 사람은 그렇겠지.

최후의 판사 : 아닙니다. 당신같은 분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결코 알 수 없겠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권력에 무릎꿇지 않았으며 당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도대체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난 변호사 선임을 할 생각은 없소.

최후의 판사 : 좋습니다. 세번째 증인,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피고에게 어떤 피해를 당하셨습니까?

세번째 증인 : 저 자는 내 약혼녀를 뺏었습니다.

최후의 판사 : 어떻게 뺏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세번째 증인 : 그녀는 저와 약혼을 하고 난 후, 저 자를 보게 됐는데, 그 후 저 자에게 푸욱 빠져 저와의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최후의 판사 : 증인, 그러면 그 후 증인의 약혼녀는 어찌되었습니까?

세번째 증인 : 혼자서 저 자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자의 애기도 낳았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잠시 멍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잠깐, 판사님, 내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오.

최후의 판사 : 피고는 변호사의 역할도 겸한다는 걸 명시하십시오. 발언은 잠시 후 해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번째 증인 : , 틀림없이 저 자와 결혼하여 애기까지 낳았고 저 자는 바로 죽었습니다.

최후의 판사 : , 알겠습니다. 증인, 수고하셨습니다.

 

최후의 판사 : 이제 당신이 어떠 죄를 저질렀는지 아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슨 말이오? 난 그녀와 결혼한 적도 없고 더군다나 애를 가질 만한 일을 한 적은 더더욱 없소. 뭔가 잘못되었소.

최후의 판사 : 아닙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보이는 것들만 보려 하기에 당신의 죄를 모르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결혼한 적도, 애를 낳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판사와 내기를 거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죄가 됩니다. 당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칭한 누군가가 또 그녀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이름없는 여인"을 지우는 것처럼 당신은 당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제 재판을 마칠 때가 된 것 같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럼 난 유죄가 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당신을 판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께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 판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당신을 석방할 수도 사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판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땅.

13.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독백) 내 방에 있던 무죄 추정의 죄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형되었는지, 또는 석방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그 죄수에 비해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죄수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나는 그에게 내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판결이 내리길 기다려야만 했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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