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유죄>, 김수정, 한겨레출판사













늘 생각했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다고. 그래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것은 없겠지만 모두 함께 부당한 일을 겪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다.

사실 불공평한 일이 나에게 직접 닥친 적은 별로 없다.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체감이 될만큼 크게 닥친 적은 없다 (혹은 실재했으나 내가 몰랐거나). 그러나 내가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는 미디어를 통해 본, 사람들의 언어습관으로 본, 역사로 본, 주변 사람들을 통해 본 세상이 불공평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최소한 수백 년 동안, 그 이상동안 이어진 뿌리깊은 일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사회라는, 관습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저항할 수 없는 한 개인이 된다. 한사람의 몸부림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흐름.

그렇지만 여기, 법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운 변호사가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지금껏 취해왔던 태도와는 아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성들의 싸움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놔도 내일 또 다시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같은 싸움은 없다.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저자가 20여년 간 여러 종류의 여성들과 함께 싸워온 역사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적혀있지 않아도 옹골차게 적힌 내용을 읽다 보면 사람들과 상담을 진행하고 재판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은 조사와 공부를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어느 정도는 들어봤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 주제들이었으나 구체적인 정황과 통계가 함께 다루어지자 나는 절망스런 현실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싸워주기를, 나도 나의 방식으로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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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문가일수록 중립이라는 이름 뒤로 숨는 편이 훨씬 더 크게 이득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게 '여성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이것만으로도 큰 용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추천사 중에서.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1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왜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나.>

최 교수는 '자연에서는 몇 세대만 지나면 부계는 확인할 수 없고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모계 조상만을 확인할 수 있따. 오히려 부계혈통 위주의 호주제도는 자연의 질서에 반한다'고 증언했다.

-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 <호주제 폐지 후 정말 '큰일'이 났는가.>

먼저, 호주제 폐지 후 아무런 큰일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재천 교수님을 증인으로 요청했고, 교수님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못한 나이 많은 남자들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과 결혼하게 하는 것으로 손쉽게 해결하려고 했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 <감히 한국 남자와 만나고 헤어진 죄>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나이 많은 남자들이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일을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나이많은 남자와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의 결혼> 이라는 표현을 보고 탄식이 나오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윤리의식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한 두 부부 정도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는 너무나도 많은 부부가 있고, 지자체에서 도움을 주는 일까지도 있었으니 발뺌할 수 없다. 이 고장난 윤리의식을 인지하고 고쳐나가야 할텐데 첫단추가 잘못 맞춰진 일이 고쳐지는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잘 모르겠다. 새로운 규제나 제도를 도입하면야 고쳐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시민들의 인식이나 위정자들의 인식이 변화해서 새로운 제도나 규칙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릴 것이고, 그 이후에도 인식의 변화는 아주 천천히 따라올 것이다.

덧붙여, 이 장을 읽으면서 최근에 추위로 숨진 이주노동자 여성을 떠올렸다.[1] 운이 좋아 '더 잘 사는 나라'에 태어난 것뿐인 사람들이, 본인의 인생을 개척하려 자신의 터전을 떠나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뿐이었을까.

한국 땅에서 미혼모들은 낙태를 해도, 아이를 낳아도, 입양을 보내도, 스스로 양육을 해도 손가락질 받기 일쑤이고, 그 중에서 가장 허락되지 않는 것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 그가 미훈모 생활시설에서 만난 임신부들은 아이를 낳기도 전부터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한 상태로 사실상 양육과 입양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난자 정도는 언제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여성 연구원들의 처지였던가.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어떤 미혼 여성은 심한 생리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출산'을 처방받고 대리모 지원을 한 경우도 있었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정부와 국회는 위 권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주장하고 요구하고 있듯이, 이번에는 여성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고 행사될 수 있는 '권리보장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과 재생산에 관한 권리보장법은 여성의 임신, 출산 능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경외의 첫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우리는 '인구절벽'이 아니라 '인구 절멸'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국가의 성병 관리는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깨끗한 몸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었을 뿐, 결코 검진당하고 주사를 맞는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생존자 '박 언니', 증언자가 되다>

그런데 묻고 싶다. 대한민국 국군은 과연 여성을 징집할 능력이 되는가.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대한민국은 여성을 징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성은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저숙련 노동이 많으며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 항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요즘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이 정규직 숙련 노동을 수행한다 해도 남성과 동등한 고용안정을 누리기는 어렵다. 누군가 정리되어야한다면 여성이 먼저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회사는 순환명령 휴직 제도 시행 대상자로 고비용 저효율 인력, 신의성실 근무에 문제가 있는 직원, 경제적 사회적 충격이 덜 심한 직원을 꼽았다.

문제는 누가 '경제적 사회적 충격이 덜 심한 직원'인지였는데, 회사는 '부부직원'을 그 대상으로 선정했다. 사실 '부부직원'이 대상이라는 것은 명목이었을 뿐 실제로는 아내 직원들에 대한 사직 강요였다. ... 더욱 주목할 것은 결국 퇴직한 여성 근로자 중 총 63.9%가 그대로 계약직으로 전환해, 기존 업무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 영리하게도 아내 직원을 노골적으로 휴직시키거나 퇴직시키는 방법의 위험성을 알고, 우회적으로 남편 직원에 대한 고용불안 위협으로 아내 직원을 압박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마트의 계산원들처럼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조용히 치워지는 사람들, 그리고 '집단 감염'이라는 공포심에 포획된 채 누군가 치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어린 여공들이 폐병에 걸려가며 만들어내던 물건들을 팔아, 기지촌 여성들이 '양공주', '양색시' 소리 들어가며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 삼아 이룩한 번영인데, 그것을 누리면서 돌려주는 것은 조롱과 멸시였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여성으로 살고, 죽고, 싸우다>

과거 많은 여성이 집안 남자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종종 그들의 헌신은 행실과 품행의 문제로 손가락질 받는 삶으로 이어졌고, 잊히고 버려졌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여성으로 살고, 죽고, 싸우다>



[1] 이 글의 작성 시기는 2021년 1월 중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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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숲>, 김산하, 사이언스북스 













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촌놈이라 작은 벌레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

같은 연구자 계열이지만, 김산하박사와 나의 연구 분야는 근본부터 다르다. 김박사의 일은 존재하는 것을 최대한 간섭, 방해하지 않고 관찰, 기록하여 분석하는 것이 일이고, 나는 극도로 통제된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실험 시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 일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분석하여 인류의 지식을 늘려나간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일이지만, 지식을 늘려나가는 데에 있어서 철학적인 근본은 다른 셈이다. 한 쪽은 통제를 극도로 지양하고 다른 쪽은 극도로 지향한다.

과학기술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연구자지만 긍정할 수 없다. 특히, "육류 생산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 는 통계를 보고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드는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미국적인 자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과학기술로서 극복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학기술은 또다른 문제를 낳았다. 어떤 잣대로는 인간문명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발전해왔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잃은 것들도 많다. 지구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제 과학기술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라는 얕은 믿음보다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공생하기를 지향해야할 것이다.

내 인생에 고양이 친구들이 생기고나서부터, 어떤 동물을 보면 내 고양이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 눈빛이 비슷하다. 어느날엔가는, 이렇게 모든 동물들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는 채식주의자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밀림에서 칼로 식물의 잎사귀나 줄기를 베며 긴팔 원숭이를 뒤좇아 전진하는 김산하 박사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에서는 우리도 그저 먹이사슬의 한 구성원일 뿐인 것을.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살아간다면 그 소의 눈망울에서, 돼지의 얼굴에서, 닭의 날갯짓에서 느끼던 연민은 아마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질테다 (자연에서는 동물성 식량을 키우는 종은 거의 없을 테지만).

밀림에서 동물을 보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지난 주 산에서 본 방울뱀이 생각났다. 등산로가 소 방목지를 관통해서 길에 배설물이 널려있었다. 그래서 땅을 보고 걸어가던 중에 길 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던 방울뱀과 두 눈이 마주쳤다. 방울뱀은 특별히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고, 내가 두 세걸음 물러나자 고개를 천천히 돌린 후 그 늘씬한 몸을 뻗어 근처 땅굴로 들어갔다. 일리노이에서 기껏해야 손가락만한 굵기의 가든스네이크 두세마리정도 본 게 다였는데, 이 방울뱀은 내 팔뚝만큼 두꺼운 녀석이었다. 길이는 아마도 내 키보다 길겠지(?). 똬리를 풀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석의 꼬리 끝에는 -방울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봐도 바로 알수있을만큼- 선명한 방울이 있었다. 위협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방울을 흔들지도 않았고), 포식자답게 눈빛이 강렬해서 한동안 그 두 눈이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도시계획이나 건축같은 것은 모르지만,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물들이 좀더 잘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나면 좋겠다. 내가 사는 곳과 걷는 곳이 한 때는 흙과 각종 식물, 동물들이 자라나고 오가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 되겠지.

책을 다 읽고나서 김산하 박사와 최재천 교수(김산하 박사의 지도교수이다)가 쓴 영장류 논문을 찾아봤다. 책에서 읽었던 긴팔원숭이들의 이름이 나오고, 연구를 보조해주던 인도네시아인 청년들에 대한 감사인사도 잊지 않았다. 한 가지 연구를 두 방향에서 엿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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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두어 가지 다른 경로로 알게 되었다.[1] 그렇지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달에 조금은 충동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 만큼이나 지리한 법률공방과 그보다 훨씬 더 괴로웠을 개인의 정신적 고통에 관한 기록이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의 글에서 이 사람이 느꼈을 절망감과 슬픔, 배신감, 괴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나도 기록함으로써 기억하고 싸울 수 있다, 는 점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놓기 위해서는 무한의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



​무분별한 선동에 맞서서, 매번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을 내놓는 피를 토하는 노력을 거듭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도 수백개의 정리된 문장이다. 나는 계속 국외에 있어서 전체적인 사정을 간간히 뉴스로 전해들었다. 안희정이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내 주변의 많은 젊은 이들도 그를 지지했다), 안희정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나왔으며, 결국 감옥에 갔으나, 그의 모친상에는 수없이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인사를 왔다더라.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 안희정에게 큰 기대를 걸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모두를 실망시켰고 실제로 구형도 받았으므로, 당시에는 그 정치인 인생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상 장례식과 관련한 기사들, 담론들은 정치인으로서의 안희정이 아직도 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사회의 모습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재기에 성공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타 다른 한국사회의 성인 남성들처럼 한참 후에 돌아와 <어이구. 그 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껄껄.> 하면서 낯두껍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봄에는 내내 친구와 무해한 위력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유해한 위력자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폭력은 성적 욕구의 비뚤어진 분출이기도 하지만, 물리적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권력욕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은 너무 크고 달콤해서, 사람들이 그렇게나 권력에 집착하는 거겠지.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약한 사람들에게 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은 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지도 모르니까. 


이런 의미에서 권력자가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줄 몰랐다. 괴로운 줄 몰랐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우습다. 그렇게 변명하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안다. 그러니까 본인의 힘이 미치는 집단 내의 사람들에게만 그러는 것이다. 


나는 김지은씨가 이제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친구들과 교류도 하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일기와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우리 집에 불러서 밥을 같이 먹고 우리 집에 머물다가 가라고 하고 싶었다. 우리 집 주변이라면 한국 사람들도 많지 않고, 한국사람들이 있어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고, 그래서 이곳에서만은 편히 쉬다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나와 함께 지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냥 마음고생하는게 안쓰러웠고, 어떻게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김지은씨가 어렵게 용기를 내고 기록을 공유해준 만큼, 약자들끼리 더 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성범죄와 위력에 의한 피해들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사회지만, 서로 연대하여 돕는다면 조금씩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간에 범죄자들이 낯두껍게 재기를 반복하는 것부터 어떻게든 막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인용구 모음[2]


피해를 당한 이후 죽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살고도 싶었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된 단어이지만,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그저 내가 떠안고 살아야 하는 폭탄, 입을 떼는 동시에 나도 함께 폭발해 죽는 뇌관이 내 온몸에 감싸여 있었다. 


이전의 8개월간 굴복적으로 반복되어온 삶의 압축이 바로 2월 25일, 마지막 피해일이었다. 


급하게 일 때문에 찾는다고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혹시라도 다시 내게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덜컥 겁도 났다. 하지만 어떤 업무인지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일단 오라고 지시하는 일은 평소에도 많았고 그 장소에 간 뒤에야 업무 지시를 받곤 했기에 우선은 가야만 했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함께한 시간이 일찍 끝나서인지 서운해했지만, 급히 일하러 가야 한다는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 


안희정이 그 밤에 급히 불러 처리해야만 했던 아주 중요한 일은 내게서 '미투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듣는 일이었고, 그 입막음의 방법으로 성폭행은 다시 일어났다. 내게 범죄한 그다음 주 안희정은 미투를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피해자를 향한 사과는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 수직 관계의 약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 뿐만이 아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참고 들어야하는 것, 회식 자리에서 술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 모두가 일반적인 노동자 다수가 겪는 위력의 문제다. 


가해자가 사과했다는 이유로 나는 다시 가해자와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했다. 모두 그게 순리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미 자신들의 논리대로 해결된 문제에 내가 더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용납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해자였지만 더 이상 피해자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종용받았다. 미칠 것 같은 혼란이 내 안에 들어와 소용돌이 쳤다. 더 하고 싶은 말들은 가슴 깊이 삼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란다고 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직장에 다니는 내가,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생계까지 내던져가며 끝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범죄 피해와 사과로 이어지는 이 사슬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1] 이 독후감을 쓴 시점은 2020년 말.

[2] 전자책으로 봤기 때문에 페이지수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넣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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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도 사실 학부때 재미로 했던 토맛저녁모임에서 다룬 도서 중 하나였다. 그 때 처음 읽어보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2018년에 문득 생각나서 전자책을 사서 다시 읽었다. 덕분에 최소한 세 번은 읽었다. 2010년에, 2018년에, 2020년에.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이 얇은 책 한권을 요약정리하면 <이것은 내 새로운 감옥 설계안이고, 나를 간수로 임명해 주십시오> 인 것이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이 번역서는 영국인인 벤담이 영어로 장황하게 서술해둔 것의 축약본인 프랑스어 판본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벤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축약되어있어서 더 혼란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2018년에는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으며 다시 내용을 곱씹어보게 되었으므로, 감옥시설, 병원시설, 학교시설의 감시자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고민을 해 보았다. 최근 다시 읽으면서는 건축 설계 측면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고찰,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려 하는 노력과 체제의 설계,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당대 사회의 인식 등을 생각해보았다. 당연하게도,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책을 읽다보니 <파놉티콘>이 왜 고전 도서의 목록에 자주 등장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어갈 때 즈음에는, 이 책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문대학의 텀페이퍼 작성 과제 정도 의 지식과 노력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더 깊이 논문을 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전공자도 아니지만 벤담이 서술한 것과 책 뒤에 붙어던 해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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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에 서술된 것처럼, 이 짧고도 강박증적인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인식이 지난 200여년 동안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가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감금 자체가 처벌인 오늘날과 달리 근대 이전의 감옥은 재판과 형벌을 받기 위한 대기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본격화되는 전환기 속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변화된 사회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들은 기존의 사회 정의나 처벌 체계를 흔들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질서 체계가 필요하도록 했다. 

("해제 - 파놉티콘과 근대 유토피아") 


현대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과거가 어땠는지 잘 알기가 힘들다. 특히, 18세기 후반의 유럽사회나 미국사회는 나로서는 미지의 세상이다. 학생들은 역사를 파편적으로 배우지만 실제로 역사는 모든 측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데다가 어떤 사건이 수면위로 올라올 때에는 그 전에 그 사건을 유발시킨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이유들이 산재해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유럽 사회에서 "형사처벌"에 관한 시각은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고, 왜 그렇게 변화해야만 했을까? 


근대 이전의 감옥, 특히 앙시엥 레짐 (Ancien Re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 시기) 시기에 감옥은 처벌을 하기 위한 수감 시설이 아니었다. 단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거나 형벌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주로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감금시설에 수용하는 처벌이 생겨났다.


새로 등장한 감옥은 과거의 감옥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구호 시설과 관계된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수감되었던 장 발장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처럼 산업사회에서는 먹을 것을 훔치는 등의 경범죄는 예전과 달리 묵인되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정신적 문제를 지닌 사람, 즉 올바른 정신을 갖도록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방랑자나 거지 등을 수감했던 구호 시설은 점차 그들에게 자본주의의 질서를 교육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곳에서 그들이 근대적 삶을 익히는 것, 특히 노동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당시 사회가 바라던 것이었다.


나의 (부족한) 경험을 곱씹어 보면 서양의 고대/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등에서 어떤 죄인도 감금형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유배는 특이한 방식의 감금형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서양에서도 귀족들은 감금형을 받았을 지 모르지만). 어쨌든,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며, 서양 사회에서는 공리주의, 박애주의 등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때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익혀야 했고, 그 와중에 범죄자들은 그 중에서도 익힐 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 인식된 듯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도소는 <교화>가 일어나는 가장 극단적인 현장이었고,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공리주의와 박애주의를 기초로 한 이론과 가정들을 실험해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벤담은 범죄자들을 교화하는 방식, 수감자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노동과 신체적 건강 유지를 위한 육체활동,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논한다. 그 와중에, <범죄 자체는 부끄러움에 노출되어야 하지만, 수감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라든가, <죄 없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조건보다 더 좋은 상황을 죄인에게 제공한다면 불행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수감 처벌이 오히려 유혹이 될 것이며, 적어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야 하는 처벌의 특징을 잃게 된다> 라는 식으로 근본적인 원칙에 대한 세심한 논의도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최소한의 건강 유지를 위한 식단이나 신체활동 등도 언급되는데, 이것은 "감금은 감금으로써 처벌이기 때문에, 수감자가 감옥 밖에서 살았을 경우의 기대수명이 감옥 내에서의 수명보다 (의도적으로) 짧게 만드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중세/르네상스 시대와 합리성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현대 사회의 체계를 잇는 공리주의 (와 박애주의)의 영향으로 보인다.


특히, <다수의 죄인들은 과거에는 그다지 큰 범죄로 취급되지 않던 행위를 저질렀으나 새로운 처벌 제도에서 처벌 대상이 된 사람들이었기에, 이 설계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교화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고, 그것은 박애주의와 연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화>라는 개념을 수감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전 시대에서부터 이어진 종교적인 죄를 저지른 죄인과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을 개념적으로 분리하게 된다. 또한, 경범죄자들을 <교화>하는 것으로부터 <아직 사회 체계에 익숙지 않은 어린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확장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감옥의 관리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아마도 "감금"이 "처벌"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한 명의 수감자가 감옥에 머무르는 평균 시간이 길어졌을 것이고, 이에 따라 관리 주체 (정부)의 지출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교화"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노동"을 경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고, 한 명의 간수가 여러 명의 수감자를 감시하는 효율적인 감시 방법을 찾았던 것처럼 그 "꼭 필요한 경험과 교육으로서의 노동"을 효율적인 관리 방식을 통해 이루어내려고 했다. 궁극적으로 이는 경제적 이윤을 얻어내어 호혜적이고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귀결된다. 벤담이 제안하는 방식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단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근거들은 대부분 상당히 합리적이다.


수감자들이 석방된 후에 어떤 선택지를 줄 것인지에 관한 논의도 인상적이었다. 석방된 수감자가 사회에 다시금 적응하게 도울 수 있는 방식들을 제안하고, 그 모든 것이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불행에 빠지게 하거나 범죄에 노출시키는 것>을 피하고, <법이 정한 기간을 넘어서 처벌 기간을 연장시키는 것>도 피하기 위해서 규제의 정도가 완화되고 일정량의 자유가 보장되는 또하나의 보조적인 파놉티콘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이 보조 파놉티콘 자체에는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보조 파놉티콘을 제안하는 데에 언급된 근거들에는 동의한다.


벤담은 수십년 간 이 설계를 위해 애썼고, 나중에는 사비를 털어 실제 시설을 지으려고 애쓰기 까지 했으나, 이 설계가 실제 건물에 적용된 적은 없다고 한다. 당대 현실 (한 시설에 수용해야하는 수감자의 수가 너무 많았다)에 비했을 때 효율적인 디자인이 나오기 힘들었고, 결국엔 여러 가지 다른 건축설계안이 합쳐진 것이 실제로 적용되었던 것 같다.


나도 10년 전에는 성공적이지도 않았던 감옥 디자인에 왜 이렇게까지 방점이 크게 찍히는 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설계"는 건축사에 끼친 영향이 큰 것도 사실인 것 같으나 (관련 전공자가 설명해주면 좋겠다!), 건축과 관련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 설계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과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나아가, 격변하는 사회상에서 벤담이 평생을 던져 고찰해낸 논문은, 18세기 벤담의 파놉티콘과 20세기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에 대한 고찰 등, 변화하는 시대에 끊임없이 담론을 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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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지음, 심수미 옮김 / 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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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골차게 잘 쓰여진 르포묶음이다.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경험에서 우러난 글이라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런 책을 쓰려면 얼마나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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