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유죄>, 김수정, 한겨레출판사
늘 생각했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다고. 그래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것은 없겠지만 모두 함께 부당한 일을 겪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다.
사실 불공평한 일이 나에게 직접 닥친 적은 별로 없다.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체감이 될만큼 크게 닥친 적은 없다 (혹은 실재했으나 내가 몰랐거나). 그러나 내가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는 미디어를 통해 본, 사람들의 언어습관으로 본, 역사로 본, 주변 사람들을 통해 본 세상이 불공평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최소한 수백 년 동안, 그 이상동안 이어진 뿌리깊은 일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사회라는, 관습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저항할 수 없는 한 개인이 된다. 한사람의 몸부림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흐름.
그렇지만 여기, 법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운 변호사가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지금껏 취해왔던 태도와는 아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성들의 싸움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놔도 내일 또 다시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같은 싸움은 없다.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저자가 20여년 간 여러 종류의 여성들과 함께 싸워온 역사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적혀있지 않아도 옹골차게 적힌 내용을 읽다 보면 사람들과 상담을 진행하고 재판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은 조사와 공부를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어느 정도는 들어봤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 주제들이었으나 구체적인 정황과 통계가 함께 다루어지자 나는 절망스런 현실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싸워주기를, 나도 나의 방식으로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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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문가일수록 중립이라는 이름 뒤로 숨는 편이 훨씬 더 크게 이득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게 '여성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이것만으로도 큰 용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추천사 중에서.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1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왜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나.>
최 교수는 '자연에서는 몇 세대만 지나면 부계는 확인할 수 없고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모계 조상만을 확인할 수 있따. 오히려 부계혈통 위주의 호주제도는 자연의 질서에 반한다'고 증언했다.
-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 <호주제 폐지 후 정말 '큰일'이 났는가.>
먼저, 호주제 폐지 후 아무런 큰일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재천 교수님을 증인으로 요청했고, 교수님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못한 나이 많은 남자들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과 결혼하게 하는 것으로 손쉽게 해결하려고 했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 <감히 한국 남자와 만나고 헤어진 죄>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나이 많은 남자들이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일을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나이많은 남자와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의 결혼> 이라는 표현을 보고 탄식이 나오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윤리의식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한 두 부부 정도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는 너무나도 많은 부부가 있고, 지자체에서 도움을 주는 일까지도 있었으니 발뺌할 수 없다. 이 고장난 윤리의식을 인지하고 고쳐나가야 할텐데 첫단추가 잘못 맞춰진 일이 고쳐지는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잘 모르겠다. 새로운 규제나 제도를 도입하면야 고쳐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시민들의 인식이나 위정자들의 인식이 변화해서 새로운 제도나 규칙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릴 것이고, 그 이후에도 인식의 변화는 아주 천천히 따라올 것이다.
덧붙여, 이 장을 읽으면서 최근에 추위로 숨진 이주노동자 여성을 떠올렸다.[1] 운이 좋아 '더 잘 사는 나라'에 태어난 것뿐인 사람들이, 본인의 인생을 개척하려 자신의 터전을 떠나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뿐이었을까.
한국 땅에서 미혼모들은 낙태를 해도, 아이를 낳아도, 입양을 보내도, 스스로 양육을 해도 손가락질 받기 일쑤이고, 그 중에서 가장 허락되지 않는 것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 그가 미훈모 생활시설에서 만난 임신부들은 아이를 낳기도 전부터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한 상태로 사실상 양육과 입양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난자 정도는 언제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여성 연구원들의 처지였던가.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어떤 미혼 여성은 심한 생리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출산'을 처방받고 대리모 지원을 한 경우도 있었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정부와 국회는 위 권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주장하고 요구하고 있듯이, 이번에는 여성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고 행사될 수 있는 '권리보장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과 재생산에 관한 권리보장법은 여성의 임신, 출산 능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경외의 첫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우리는 '인구절벽'이 아니라 '인구 절멸'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국가의 성병 관리는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깨끗한 몸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었을 뿐, 결코 검진당하고 주사를 맞는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생존자 '박 언니', 증언자가 되다>
그런데 묻고 싶다. 대한민국 국군은 과연 여성을 징집할 능력이 되는가.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대한민국은 여성을 징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성은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저숙련 노동이 많으며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 항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요즘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이 정규직 숙련 노동을 수행한다 해도 남성과 동등한 고용안정을 누리기는 어렵다. 누군가 정리되어야한다면 여성이 먼저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회사는 순환명령 휴직 제도 시행 대상자로 고비용 저효율 인력, 신의성실 근무에 문제가 있는 직원, 경제적 사회적 충격이 덜 심한 직원을 꼽았다.
문제는 누가 '경제적 사회적 충격이 덜 심한 직원'인지였는데, 회사는 '부부직원'을 그 대상으로 선정했다. 사실 '부부직원'이 대상이라는 것은 명목이었을 뿐 실제로는 아내 직원들에 대한 사직 강요였다. ... 더욱 주목할 것은 결국 퇴직한 여성 근로자 중 총 63.9%가 그대로 계약직으로 전환해, 기존 업무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 영리하게도 아내 직원을 노골적으로 휴직시키거나 퇴직시키는 방법의 위험성을 알고, 우회적으로 남편 직원에 대한 고용불안 위협으로 아내 직원을 압박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마트의 계산원들처럼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조용히 치워지는 사람들, 그리고 '집단 감염'이라는 공포심에 포획된 채 누군가 치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어린 여공들이 폐병에 걸려가며 만들어내던 물건들을 팔아, 기지촌 여성들이 '양공주', '양색시' 소리 들어가며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 삼아 이룩한 번영인데, 그것을 누리면서 돌려주는 것은 조롱과 멸시였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여성으로 살고, 죽고, 싸우다>
과거 많은 여성이 집안 남자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종종 그들의 헌신은 행실과 품행의 문제로 손가락질 받는 삶으로 이어졌고, 잊히고 버려졌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여성으로 살고, 죽고, 싸우다>
[1] 이 글의 작성 시기는 2021년 1월 중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