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숲>, 김산하, 사이언스북스 













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촌놈이라 작은 벌레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

같은 연구자 계열이지만, 김산하박사와 나의 연구 분야는 근본부터 다르다. 김박사의 일은 존재하는 것을 최대한 간섭, 방해하지 않고 관찰, 기록하여 분석하는 것이 일이고, 나는 극도로 통제된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실험 시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 일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분석하여 인류의 지식을 늘려나간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일이지만, 지식을 늘려나가는 데에 있어서 철학적인 근본은 다른 셈이다. 한 쪽은 통제를 극도로 지양하고 다른 쪽은 극도로 지향한다.

과학기술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연구자지만 긍정할 수 없다. 특히, "육류 생산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 는 통계를 보고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드는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미국적인 자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과학기술로서 극복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학기술은 또다른 문제를 낳았다. 어떤 잣대로는 인간문명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발전해왔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잃은 것들도 많다. 지구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제 과학기술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라는 얕은 믿음보다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공생하기를 지향해야할 것이다.

내 인생에 고양이 친구들이 생기고나서부터, 어떤 동물을 보면 내 고양이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 눈빛이 비슷하다. 어느날엔가는, 이렇게 모든 동물들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는 채식주의자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밀림에서 칼로 식물의 잎사귀나 줄기를 베며 긴팔 원숭이를 뒤좇아 전진하는 김산하 박사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에서는 우리도 그저 먹이사슬의 한 구성원일 뿐인 것을.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살아간다면 그 소의 눈망울에서, 돼지의 얼굴에서, 닭의 날갯짓에서 느끼던 연민은 아마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질테다 (자연에서는 동물성 식량을 키우는 종은 거의 없을 테지만).

밀림에서 동물을 보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지난 주 산에서 본 방울뱀이 생각났다. 등산로가 소 방목지를 관통해서 길에 배설물이 널려있었다. 그래서 땅을 보고 걸어가던 중에 길 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던 방울뱀과 두 눈이 마주쳤다. 방울뱀은 특별히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고, 내가 두 세걸음 물러나자 고개를 천천히 돌린 후 그 늘씬한 몸을 뻗어 근처 땅굴로 들어갔다. 일리노이에서 기껏해야 손가락만한 굵기의 가든스네이크 두세마리정도 본 게 다였는데, 이 방울뱀은 내 팔뚝만큼 두꺼운 녀석이었다. 길이는 아마도 내 키보다 길겠지(?). 똬리를 풀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석의 꼬리 끝에는 -방울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봐도 바로 알수있을만큼- 선명한 방울이 있었다. 위협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방울을 흔들지도 않았고), 포식자답게 눈빛이 강렬해서 한동안 그 두 눈이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도시계획이나 건축같은 것은 모르지만,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물들이 좀더 잘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나면 좋겠다. 내가 사는 곳과 걷는 곳이 한 때는 흙과 각종 식물, 동물들이 자라나고 오가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 되겠지.

책을 다 읽고나서 김산하 박사와 최재천 교수(김산하 박사의 지도교수이다)가 쓴 영장류 논문을 찾아봤다. 책에서 읽었던 긴팔원숭이들의 이름이 나오고, 연구를 보조해주던 인도네시아인 청년들에 대한 감사인사도 잊지 않았다. 한 가지 연구를 두 방향에서 엿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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