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두어 가지 다른 경로로 알게 되었다.[1] 그렇지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달에 조금은 충동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 만큼이나 지리한 법률공방과 그보다 훨씬 더 괴로웠을 개인의 정신적 고통에 관한 기록이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의 글에서 이 사람이 느꼈을 절망감과 슬픔, 배신감, 괴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나도 기록함으로써 기억하고 싸울 수 있다, 는 점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놓기 위해서는 무한의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



​무분별한 선동에 맞서서, 매번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을 내놓는 피를 토하는 노력을 거듭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도 수백개의 정리된 문장이다. 나는 계속 국외에 있어서 전체적인 사정을 간간히 뉴스로 전해들었다. 안희정이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내 주변의 많은 젊은 이들도 그를 지지했다), 안희정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나왔으며, 결국 감옥에 갔으나, 그의 모친상에는 수없이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인사를 왔다더라.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 안희정에게 큰 기대를 걸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모두를 실망시켰고 실제로 구형도 받았으므로, 당시에는 그 정치인 인생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상 장례식과 관련한 기사들, 담론들은 정치인으로서의 안희정이 아직도 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사회의 모습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재기에 성공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타 다른 한국사회의 성인 남성들처럼 한참 후에 돌아와 <어이구. 그 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껄껄.> 하면서 낯두껍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봄에는 내내 친구와 무해한 위력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유해한 위력자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폭력은 성적 욕구의 비뚤어진 분출이기도 하지만, 물리적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권력욕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은 너무 크고 달콤해서, 사람들이 그렇게나 권력에 집착하는 거겠지.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약한 사람들에게 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은 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지도 모르니까. 


이런 의미에서 권력자가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줄 몰랐다. 괴로운 줄 몰랐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우습다. 그렇게 변명하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안다. 그러니까 본인의 힘이 미치는 집단 내의 사람들에게만 그러는 것이다. 


나는 김지은씨가 이제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친구들과 교류도 하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일기와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우리 집에 불러서 밥을 같이 먹고 우리 집에 머물다가 가라고 하고 싶었다. 우리 집 주변이라면 한국 사람들도 많지 않고, 한국사람들이 있어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고, 그래서 이곳에서만은 편히 쉬다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나와 함께 지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냥 마음고생하는게 안쓰러웠고, 어떻게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김지은씨가 어렵게 용기를 내고 기록을 공유해준 만큼, 약자들끼리 더 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성범죄와 위력에 의한 피해들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사회지만, 서로 연대하여 돕는다면 조금씩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간에 범죄자들이 낯두껍게 재기를 반복하는 것부터 어떻게든 막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인용구 모음[2]


피해를 당한 이후 죽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살고도 싶었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된 단어이지만,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그저 내가 떠안고 살아야 하는 폭탄, 입을 떼는 동시에 나도 함께 폭발해 죽는 뇌관이 내 온몸에 감싸여 있었다. 


이전의 8개월간 굴복적으로 반복되어온 삶의 압축이 바로 2월 25일, 마지막 피해일이었다. 


급하게 일 때문에 찾는다고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혹시라도 다시 내게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덜컥 겁도 났다. 하지만 어떤 업무인지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일단 오라고 지시하는 일은 평소에도 많았고 그 장소에 간 뒤에야 업무 지시를 받곤 했기에 우선은 가야만 했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함께한 시간이 일찍 끝나서인지 서운해했지만, 급히 일하러 가야 한다는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 


안희정이 그 밤에 급히 불러 처리해야만 했던 아주 중요한 일은 내게서 '미투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듣는 일이었고, 그 입막음의 방법으로 성폭행은 다시 일어났다. 내게 범죄한 그다음 주 안희정은 미투를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피해자를 향한 사과는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 수직 관계의 약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 뿐만이 아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참고 들어야하는 것, 회식 자리에서 술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 모두가 일반적인 노동자 다수가 겪는 위력의 문제다. 


가해자가 사과했다는 이유로 나는 다시 가해자와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했다. 모두 그게 순리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미 자신들의 논리대로 해결된 문제에 내가 더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용납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해자였지만 더 이상 피해자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종용받았다. 미칠 것 같은 혼란이 내 안에 들어와 소용돌이 쳤다. 더 하고 싶은 말들은 가슴 깊이 삼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란다고 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직장에 다니는 내가,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생계까지 내던져가며 끝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범죄 피해와 사과로 이어지는 이 사슬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1] 이 독후감을 쓴 시점은 2020년 말.

[2] 전자책으로 봤기 때문에 페이지수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넣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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