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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구판절판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30쪽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 사람의 부재를 말하는 남자에게는 여두 여성적인 것이 있음을 표명하는 결과가 된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31쪽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하나의 (고전적인)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 즉 갈망하다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32쪽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 부재는 능동적인 실천, '분망함'(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이 된다. -34쪽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그런데 욕망이 욕구에 짓눌린다. 바로 거기서 사랑의 감정의 집요한 사실이 있다. -35쪽

그 사람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속에 붙들고 있다. 점차 나는 숨이 막혀가고, 공기는 희박해진다. 이 숨막힘에 의해 나는 내 '진실'을 재구성하고, 사랑의 다루기 힘든 것을 준비한다. -36~37쪽

사랑의 고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 내가 매혹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치러졌던 한 장례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그를 (그녀을)잃어버렸는걸요"라고-54쪽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정말로 단념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 나를 사로잡는 격렬한 장례는 바로 상상계의 장례이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구조였으며,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56쪽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62쪽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기를 바랄 의무가 있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상처받을 수 밖에 없고. 함정이다. 나는 성인이 되거나 괴물이 되도록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성인이 될 수 없고, 괴물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나는 내 정염을 조금만 보여준다. -71쪽

최고선을 믿는 것은 최고악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충족된 연인은 글을 쓸 필요도,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다. -89쪽

실상 그 외침은 여전히 사랑의 외침이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 바로 이것이 당신의 외침이 의미하는 것이다. -95쪽

나는 양자택일의 두 가지 사이로 끼여들려 한다네. 다시말해 "난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또는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96쪽

나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며, 천국으로부터 추방하려 한다. -121쪽

내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전화가 또 다른 예속의 계기를 가져올 것이기에....나는 예속되는데 얼이 빠져 있으며, 하지만 더 묘한 점은 이런 얼빠진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영역에서의 하찮은 것은 "나약함"도 "우스꽝스런 것"도 아닌, 하나의 강력한 기호이다. -124~125쪽

사랑/정념은 힘이다 ("이 격렬한, 이 끈질긴, 제어할 수 없는 정념")-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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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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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에 충실하며, 성서란 글자 하나하나가 신의 은혜와 섭리로 이루어져 있어 고칠 수 없다고 믿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책

이미 절차탁마대기만성이란 책에서 성서에 대한 그리 짧지 않은 논문으로 성서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해소시켜준 도올에게 이 책으로 더 많은 진실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 거듭 고맙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도올이 주장하는 신앙은 복음 즉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기존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을 변혁하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니 기독교 신앙의 배교는 아니라 생각되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 뭐라 할지 눈에 선하다. 도올도 그 점이 걱정 되었는지 거듭거듭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변명하는 말들이 삽입되어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계가 보수적이긴 보수적인 모양이다

도올의 책은 사실 서방세계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얘기다. 다만 이 땅 한반도의 문제 많고 욕심많은 교회들이 이 사실을 이단시 하고 죄악시 할 뿐이다. 이제라도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여겨져야 하는건지

이책의 결론은 결국 성경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류문화의 집적물이며, 이를 잘 알고 이해해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우리 신앙의 기본 바탕이 된다고 할 것이다

성경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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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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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고도의 추상과 논리로 무장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투덜거린다

"인문학의 위기다" 다른 한편으로 TV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바보상자라며 매스미디어에 대한 불신이

어느때보다 팽배한 이 시대에 인문학과 매스미디어가 잘 결합하면 사람들의 인식과 감성에 이렇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책을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공 하나로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축구의 세계의 유일한 기구인 축구공의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피와 땀이 서려 있고, 그들의 피와 땀이 제대로 보상 받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리들의 일상은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차 있는 것인지....

뉴스외에 TV를 잘 보지도 않고, 그저 TV에 대해서는 독설만 날렸건만 ( 머 주류 방송에서 스페셜로

하는 일부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세상 참 좋아졌다 자식들 민주화 공간이 넓어 지니까 이젠 저런것

도 방송하는구나' 하는 썩소도 날렸다) 지식채널을 접하니, 감성을 울리는 매스미디어의 기능을 어떻

게 사용하느냐의 문제 의식없이 무차별적으로 무시하기만 하던 내 자세도 함 반성하게 된다.

지식채널이 많이 방영되었는데.... 난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 책을 보면서 단순하게 청소년을 위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접

속하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실천 지침이 될 것 같다.

소통하고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그리고 방송분만큼 계속 출간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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