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때문에 아침 생활 흐름이 흐트러지고 몸도 기운이 가라앉아서 거의 2주일 동안 운동다운 운동을 못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모처럼만에 아침 달리기를 했다. 일어난 때는 7시다. 아침에 이것저것 하다가 스트레칭을 시작한 것은 8시. 10분동안 워밍업 스트레칭을 했다. 이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시간이 늦어져서 운동장에서 뛰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오늘은 울산대공원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걸어서 대공원 동문까지 가면은 15분 정도 걸린다.

걸어서 10분 정도를 가다가 천천히 달리기를 했다. 달릴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설레임도 잠시였다. 5분쯤 달리니까 벌써 오른쪽 정강이 근육이 굳어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혹시 며칠 전에 오른쪽 발목관절이 시큰한 느낌이 좀 오래갔는데 그것이 까닭인가 싶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곧 풀리겠지 하면서 달려나갔는데 10분쯤 되니까 통증이 계속 와서 달리기가 싫어졌다. 그냥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뛰다가를 되풀이했다. 3분에서 5분 정도를 뛰다가 잠시 걷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달리다가 걷다가 한 시간이 40분쯤 된다. 시계에 타이머를 걸어놓고 20분까지 달리고 나서 끝난 지점에서 다시 돌아서 20분을 달렸다. 그렇게 해서 집에 오니 9시 10분이었다. 집에 와서 쿨링다운 스트레칭을 했다. 이상하게도 걸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 뛰기를 조금만 하면 그렇게 통증이 온다. 아마 발목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걱정이기도 하다.

오늘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달리기에 관한 책 세권을 빌렸다. <달리기와 부상의 비밀, 발>이라는 책은 오래전부터 빌려보려고 했던 책이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과 <이것이 진짜 마라톤이다>는 그쪽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중에 괜찮은 것을 고른 것이다. <달리기와 부상의 비밀, 발>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도 앞부분에 나와있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달리기는 충돌의 연속이다. 몸 전체가 땅에서 솟구치고 다시 땅과 충돌한다. 몸무게 70kg인 사람이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이 받는 충격은 350kg이다. 42.195km를 뛰면 그 펀치로 28,125번 두드려 맏는 셈이다. 과연 인간은 어떻게 죽지 않고 뛸 수 있는 것일까?"

뛸 때 충격이 몸무게의 다섯배라는 이야기인데,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좀 다르지만(3배 정도라고 들었다.)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는 말이다. 나는 지난해에 배드민턴을 초보자 시절에 재미를 붙여서 좀 무리하게 치다가 오른쪽 어깨관절에 오십견에 비견될 정도의 병증을 얻었다. 올해 봄,여름은 사실상 거의 어깨관절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운동하다가 얻는 부상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다. 달리기나 마라톤도 좋지만 어떤 만족감 때문에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천천히 달려라'는 주문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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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시 40분쯤 일어났다. 어제밤에는 몸이 으슬으슬 춥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었는데 뜻밖에 몸이 산뜻했다. 녹차 마시면서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다시 한번 뒤적거렸다. 어제 소설은 다 읽었고, 오늘 아침에는 뒷부분에 있는 이남호 교수의 해설부분을 읽었다. 해석이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칭찬일변도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너무 칭찬만 하면 신뢰가 100% 가지 않는 것이 요즘 내 심사다.

운동장에 나가려고 7시부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운동장에서 달리는 것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운동화를 챙겨서 비닐봉투에 넣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에 도착한 시간은 7시 20분쯤이었다. 스트레칭 없이 바로 트레드밀에서 걷기부터 했다. 걷기는 10분간 했다. 속도는 5km. 이어서 40분간 달렸다. 속도는 시속 7km. 평소보다 좀 빠른 속도였다. 평소에는 트레드밀에서 6.5km 정도로 달린다. 시속 7킬로미터면 마라톤 완주를 한다면 6시간 정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트레드밀에서 달리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틀어놓고 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Mnet을 틀어서 보았는데, 모두 다 뮤직비디오다. 우리나라 가수들이 부른 것을 반 정도 들었고, 나머지는 외국가수들 노래화면을 보았다. 역시나 내용은 천편일률. 젊은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하긴 사랑이야기를 빼면 재미있는 게 뭐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이른바 뮤직의 주소비층이 그 세대라는 생각을 하니까 이해되기도 하다. 그래도 대부분이 그런 것 일색으로 나가는 것은 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정도 달리니 목이 좀 말랐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침에 녹차를 700미리 정도나 마셨기 때문에 그렇게 갈증이 나지는 않았다. 지난 주 일요일에 달릴 때는 30분 정도 하니까 목이 많이 말랐었다. 오늘은 특별히 아픈 데가 없었다. 종아리나 정강이 근육도 괜찮았고 무릎이나 발목도 별 신호를 보내 오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의 해석은 스트레칭과 걷기를 10분씩 충분히 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지난 번에는 걷기를 5분 하고 바로 달리기를 했는데, 달리는 도중 장딴지와 정강이 근육이 몽쳐서 초반에 좀 힘들었다. 나는 황영조의 <마라톤 스쿨>을 달리기 지침서로 이용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4단계 달리기에서 초반 걷기를 5분으로 한정하고 있다. 아마 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도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나는 내 나름대로 10분으로 늘리기로 했다. 걷기는 오랜 시간만 아니라면 달리는 근육과 관절을 부드럽게 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리라고 믿는다.

40분 달리기 한 뒤에 5분 걷고 10분간 스트레칭 했다. 스트레칭은 한 동작을 10초 정도 유지하는 식으로 바꾸었다. 예전에 나는 스트레칭의 지속시간을 5초 정도로 한정했는데, 그 보다는 10초 정도의 긴 시간으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늘은 땀을 많이 흘린 편이다. 마치고 나서 바로 헬스장 아래층에 있는 사우나에서 목욕을 했다. 사우나실에서 3분.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면서 2분씩 목욕을 했다. 냉2-온2-냉2-온2-냉2분씩으로 마무리했다. 아랫도리가 시원해지고 피돌기가 잘 되는 느낌이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76.5킬로그램이다. 평이한 수준이다. 마치고 집에 들어온 시간은 9시 15분. 마침 아내와 둘째녀석도 집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다녀오다가 마주쳤다. 큰 녀석은 아직도 집에서 자고 있단다. 일요일이 좋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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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사보았던 기억이 있다. 몇 부분 뒤적이다가 말았는데 어느새 책이 책꽂이에서 사라져버렸었다. 느낌표에서 이 책을 추천할 때도 한번 읽어보아야지 하는 생각은 했더랬는데 그 때는 웬지 마음이 나지 않았다. 막상 책을 서점에서 산 것은 1주 전이다. 술먹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던 서점에 들러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 책을 샀다. 술먹고 고르는 책인데도 여러권의 책을 물망에 올라놓고 골랐던 기억이 난다. 초판본과 맺은 인연으로 치면 15년 정도 되는 셈이다. 내가 산 책은 2006년 2월 118쇄본이다. 많이도 팔렸다. 소설이 100쇄를 넘긴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람들 가정에 대부분 한 권 정도는 있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책을 한번 손에 잡으니 세시간 정도는 그냥 간다. 마치 재미있는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다. 아니면 말 잘하는 친구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듯이 그냥 술술 훌러간다. 어제 오늘 이틀 만에 다보았다. 재미있는 소설의 특징이 그렇듯이, 다음이 궁금해서 책을 덮어놓고 다른 일을 하기가 싫었다. 결국 오전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무언가 가슴이 뿌듯하고 아련해오는 게 있다. 이런 게 감동이 아닐까 싶다. 문학에서 우리가 얻기를 바라는 위안 같은 것을 나는 받은 느낌이다.

박완서는 막 쉰살을 넘긴 나이에 이 소설을 썼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소설과 자서전의 성격이 골고루 들어있다고 느꼈다. 50살 정도가 되면 보통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픈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60살이 되기에는 아직 10년을 남겨둔 나이지만 이 때쯤이면 자식들을 대부분 다 키워서 대학에 보내고 난 뒤의 나이다.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지위에 도달해 있을 즈음이다.  박완서는 개성 시골에서 자란 유년시절의 기억과 서울로 이사와서 겪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한국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고 있다. 삶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소설가의 어린시절도 즐거움과 괴로움이 골고루 섞여있다. 세살무렵에 아버지를 갑작스런 병으로 잃어버리고 난 뒤의 여자아이는 할아버지와 숙부들의 그늘에서 아버지없는 설움을 특별히 겪지 않고 자라난다. 그러나 서울로 가서 성공하고픈 욕망이 강했던 어머니의 결단에 의해서 서울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초등학교와 여고(중고등학교가 통합된 6년과정)시절을 겪는다. 그 기간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시기와 8.15해방, 한국전쟁 전의 혼란기였다. 그 시절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어린시절, 청소년시절은 똑같이 겪게된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할 것 없이 인생은 겪을 것을 다 겪어야 성숙하는 법이다. 단지 1950년의 그 격동기는 스무살의 처녀가 겪어내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것이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한편의 풍경화나 풍속화처럼 느껴진다. 일제하에 면서기로 지역민들을 수탈했던 큰숙부와 얼음장사와 밀매로 장사를 해나가는 작은 숙부, 젊은 혈기로 좌익운동에 빠져드는 오빠와 그것을 말리는 어머니, 그 밖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당대의 그림을 형상화하는데 꼭 필요한 인물들이다. 나는 언뜻 리영희의 <역정>을 떠올렸는데, 그 와는 또다른 맛이 있다. 워낙 모든 이들의 삶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보니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전형적이다.

박완서 문학의 원체험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안 읽을 수가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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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펠릭스 호프만이 그린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염소>의 리뷰를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펠릭스 호프만이 그림을 그린 비룡소판 <그림동화집>이 세권짜리로 나온 게 있다. 가격으로 치면 4만원 돈이 넘는데 너무 사고 싶었다.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보관함으로 옮기고 말았는데,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심정이었다. 오늘도 벌써 세권이나 되는 책을 주문해놓았는데 또 책을 산다는 것은 과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것도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결국 책꽂이에 꽃혀서 나를 조롱하는 괴물 밖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전에 사 온 책도 아직 소화를 못 시키고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우리 집에는 몇 년 전에 산 한길사판 <안데르센 동화>가 여섯권짜리나 있다. 그것도 드문드문 보았을 뿐이다. 살 때는 바로 읽어야지 하다가도 일 주일 안에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나머지 세월은 책을 볼 때 마다 후회와 빚독촉을 당하는 사람의 심정이 될 뿐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다 못 읽고 가져다주면 그만이지만, 돈주고 산 책은 읽지 않고 소장만 하고 있을 때의 심정은 괴롭다못해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내 스스로 방화벽 하나를 설치하기로 했다. <안데르센동화>를 다 읽고나면 <그림동화>세권짜리를 돈 주고 사는 것도 허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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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염소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1
그림 형제 글, 펠릭스 호프만 그림, 김재혁 옮김 / 비룡소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책 뒤 소개글을 보니 그림형제는 형인 야고프가 1785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고, 동생인 빌헬름은 1786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다고 나와있다. 이네들이 활약한 시대는 19세기 전반기인 셈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함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유럽을 혁명의 시대로 몰아가던 그런 시절에 활동한 것이다. 그림형제는 당대의 약소국인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한 것은 독일민족의 부활과 통합이었다. 그들이 독일의 민담과 전설을 수집해서 책으로 펴낸 것은 그런 일을 통해서 독일민족의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따지자면 그들은 독일민족주의자인 셈이다. 그들이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은 200년 가까운 세월을 흐르면서 세계 어린이들이 읽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림동화는 안데르센 동화나 이솝우화와 함께 어린 시절의 필독서처럼 여겨진다. 내용을 알고보면 그림동화는 무섭고 황당한 내용이 많다. 이런 황당함은 안데르센이나 이솝우화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많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의 교육상 필요하지 않은 장면은 없애버리고 순화된 형태로 동화를 들려주려는 부모들도 많고, 거기에 부합하여 그런 종류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도 많다.

펠릭스 호프만은 그림형제의 동화에 충실하게 그림을 그려냈다. 그는 스위스에서 출생했고 교육은 독일에서 받았다. 스위스가 사실상 독일문화권이라고 본다면 그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그림으로 그릴 충분한 문화적인 자격을 부여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11년에 태어나서 1975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1957년 판이라고 나와있다. 그림책으로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아서 한국어로도 옮겨졌다고 한다면 그림에 생명력이 있는 것일 거다. 그림책 안내서들에서도 호프만의 그림책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들이 나와있기도 하다. 그런 유명세에 의존하지 않고도 우리는 이 그림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어보면 금방 그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아이들은 이 그림책의 원작인 늑대와 아기염소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나라 동화에서도 '해와달이 된 오누이'는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인가.

언뜻보면 이 그림책의 그림은 거칠어보인다. 빛깔도 어둡고 칙칙한 편이다. 만약 이 책을 이렇게 양장으로 잘 제본하지 않고, 비룡소출판사에서 내지 않았다면 그 가치가 좀 떨어졌을 것 같다. 막상 책을 처음 받아보았을 때는 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익숙한 그림을 찾는 사람의 태도가 여기서도 나온다. 그렇지만 책꽂이에 두고 여러번 책을 읽어보았더니 곧 그림에 익숙해지고, 이 그림의 독특한 맛도 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중에 나와있는 수없는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 염소>나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양>들에 비해서 보면 이 책의 그림은 독특하다. 정말 염소 같은 느낌이 든다. 늑대도 너무 흉측하거나 너무 귀엽지 않고 실감이 나서 좋다. 석판화로 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 염소는 숲 속에서 혼자 산다. 아기들이 일곱이나 있지만 밖에 일하러 나갈 때는 좀 봐달라고 부탁할 이웃조차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한다. 늑대는 변장을 잘하니까 조심하라고. 엄마가 아니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아기염소들은 "엄마, 우리 모두 조심할게요. 걱정 하지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하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아기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쇠로 잠긴 대문뿐이다. 짐을 담을 바구니를 메고 집을 나서는 엄마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져있다. 우리전래동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이렇게 일하다가 오는 엄마를 호랑이는 잡아먹고 만다. 호랑이와 늑대의 차이인가? 엄마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의 목적은 하나다. 아기염소들을 모두 잡아먹어서 자기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 아기들은 잘 속지 않는다. 늑대는 목소리를 변조시키기 위해서 잡화상에서 분필을 하사 사서 삼킨다. 그랬더니 목소리가 예뻐졌다고 한다. 털이 북실북실난 시커먼 발을 감추기 위해서는 밀가루 반죽과 밀가루를 이용한다. 빵집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방앗간에 밀가루를 얻으러 가는 늑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방앗간 집 문 아래에는 고양이가 드나들고 있고, 밀가루 포대 주위에는 참새들이 서성대고 있다.

늑대는 아기염소들을 완벽하게 속이고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아기염소 일곱마리는 제각각 집안 구석구석에 숨는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엄마로 변장하고 들어온 호랑이는 오누이에게 밥을 해주겠다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림동화에서는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데 우리전래동화에서는 왜 그랬을까? 오누이는 감나무 위로 올라가서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도끼로 감나무를 찍고 올라오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찰나에 오누이가 의지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하느님, 하느님. 저희를 살리시려거든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거든 썩은 밧줄을 내려주세요." 이런 기도로 오누이는 산다. 호랑이도 똑같은 기도를 한다. 호랑이의 기도에도 하늘은 응답한다. 호랑이가 탄 밧줄은 감나무 위에서 끊어지지 않고 하늘 중간에서 끊어지고, 호랑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천벌을 받은 셈이다. 그림형제의 동화에서는 일곱째 염소가 살아남는다. 잘 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늑대는 아기염소들을 씹어먹지 않고 꿀꺽 통째로 삼킨다. 그래놓고 늑대는 나무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호프만이 그린 늑대의 잠자는 모습은 해학적이다.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 자고 있다. 엄마염소가 풀밭에서 늑대를 발견했을 때 모습이나, 가위로 배를 잘라냈을 때 모습, 돌멩이를 넣고 배를 다시 꿰맬 때 모습이 똑같다. 그만큼 늑대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어쩌면 엄마염소가 정말 조심해서 그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수술로 치자면 완벽한 수술을 한 셈이다. 낮잠자고 일어나서 배가 무거웠던 늑대는 비틀거리며 우물을 향해 간다. 배에 바느질 자국이 있는 불룩한 모습으로 독자를 향해 있는 늑대의 모습과 그 꼴을 창문으로 쳐다보고 있는 염소가족의 모습이 재미있다. 늑대는 마치 밤새 술이라도 마신 주정뱅이 같은 모습이다.

늑대가 우물에 빠져죽자 염소가족은 "늑대가 죽었다! 늑대가 죽었다!"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압제자의 압박을 이겨내고 그들의 지혜와 용기로 늑대를 없애버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아기염소 일곱마리가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엄마 염소는 그 평화로운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창문너머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떠있다. 이제 염소가족은 편하게 쉴 수 있다. 이 안식은 오로지 그들 가족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염소 가족은 앞으로 닥치는 어떤 난관도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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