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옥 | 시민발전 대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최근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발전노조 파업, 한국노총과 경총의 복수노조-전임자 임금문제 5년 유예 담합에 뒤이은 노사정 3년 유예 합의와 로드맵 타결,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 타결이 그것이다. 지난 9월 4일 한전 산하 중부, 남동, 동서, 남부, 서부 등 5개 발전회사로 구성된 발전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대응과 직권중재, 40% 이하로 떨어진 파업참여율로 15시간 만에 파업을 철회하고 말았다. 쟁점사항에 대해 회사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게다가 발전노조가 부각시키려던 발전 5사 통합이나 민영화 반대 등 이른바 사회공공성 투쟁의 관점에서도 의미있는 의제화를 달성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실상 철저하게 패배한 파업이었다.

파업은 노동자의 유일하고도 유력한 무기임을, 때문에 맨 마지막에 꺼내드는 최후의 무기임을 모르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은 없다. 그리고 오늘날 파업에 대해 언론이 유리하게 보도하는 경우 또한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노동조합도 없을 것이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파업은 시민사회의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그 자체 사회책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조합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지옥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일정하게 공감대가 있었던 1980년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특히 대기업 공공부문의 파업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들의 배부른 투정이라는 즉자적 반감이 널리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조합원의 강철같은 단결만으로 승리하는 파업전술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전노조는 과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파업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발전노조의 파업 찬반투표 찬성률은 59%였다고 한다. 100%에 가까운 절대 찬성이라고 해도 파업에 들어가기까지에는 너무나 위험한 복병이 많은데, 이 정도의 찬성률은 미흡하기 짝이 없으며 쫓기듯이 파업선언을 하고 금방 철회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준비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협상의 마지막 핵심 쟁점이던 해고자 복직, 4조 3교대에서 5조 3교대로 확대, 핵심인력인 4직급의 조합가입 의무화 등의 사안이 과연 파업까지 할 만큼 중차대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미 2002년 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38일 동안 파업을 벌였던 발전노조의 학습효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결국 발전노조의 이번 파업은 노동조합 내부정치의 결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내년에 실시될 예정이던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는 결국 막판에 한국노총과 경총이 맞바꾸기식으로 5년 유예에 전격 손을 잡으면서 연기되고 말았다. 이어 노동부가 이를 받아들여 3년 유예로 노사정이 합의하면서 그동안 지루하게 손때만 묻히던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도 타결되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이같은 결정은 그럴듯한 명분과 까닭이 없다는 점에서 노동조합 내부정치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날과 달리 경총이 오히려 산별체제로 가야 자신의 존재의의를 더 얻게 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번 3년 유예 결정의 배후로 무노조의 삼성(최근 삼성전자와 삼성중공업이 경총에 가입했다)이 지목되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참여정부의 로드맵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결국 노사관계 로드맵 또한 차기정권으로 떠넘기며 무책임 무능력의 '노(盧)의 맵'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극도의 실망감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한국노총은 해서는 안될 검은 거래를 하고 말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노조 금지는 그동안 단결권 제약의 주범이자 산별체제로의 전환에 핵심 걸림돌이었다. 때문에 내년도 실시를 앞두고 지난 6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등 금속연맹 산하의 수많은 노조에서 산별전환 투표가 가결되고 다양한 업종에서 이제 새로운 산별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차원이 전혀 다른 전임자 임금문제와 연계해 시행을 몇년 뒤로 미루자고 사측과 합의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기득권자의 소탐대실이다. 얻은 것은 몇년 연장된 불안한 의자일 뿐이지만 잃은 것은 도덕과 명분과 정체성이다. 노동조합의 현실과 내부 고민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한국노총의 운동이념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드는 사건이다. 한국노총의 선언과 강령에서 밝히고 있는 노동자의 기본권 확보와 노동조합의 자주성 확립, 단결과 조직의 통일 등에 모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8월 25일 충분한 준비와 경험을 바탕으로 총파업 하루 만에 직권중재 없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산별협약서를 체결한 보건의료노조의 성과는 단연 돋보인다. 게다가 의료노사정위원회 설치, 병원식당에 우리 농산물 사용, 국내외 재난지역에 노사공동 긴급 의료지원 등 의료공공성 강화의 내용까지 합의한 것은 앞으로의 산별노동운동에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성과와 더불어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고난과 악조건을 견디며 우애와 협동의 정신을 믿고 아래서부터 조직화에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노조들이 풀뿌리 노동운동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눈을 돌려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이 도대체 어떤 운동이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아니 운동이념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이제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은 사라지고 노동조합의 내부 권력정치와 투쟁과 협상만 즐겁지 못한 소음으로 남을 것인가. 오늘날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어서며 갈수록 양극화가 확대되는 상황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이념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하는 피크오일은 한국경제에 지진해일을 몰고 올 것이며, 식량재앙 또한 조만간 밀어닥칠 현실이다.

이런 재앙의 상황은 가장 먼저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삶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이런 위기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좁아터진 내부정치에 골몰하는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새로운 이념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삶과 자연에 뿌리를 둔 이념은 녹색을 띤다. 한국 노동운동의 이런 풀뿌리 녹색이념은 어디서 씨앗을 틔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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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은사의 퇴임식에서 들었던 한마디가 문득 떠오른다. 정현종 선생의 퇴임사는 시인의 마지막 인사답게 담박하고 여운이 있었다. 선생은 십여분 정도 말씀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자, 그만 합시다. 실은 세상의 모든 말은 하다가 마는 겁니다"라고 끝을 맺으셨다. 그 말에 깃들어 있는 침묵의 기운이 오히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하다 만 말, 피우다 만 꽃, 타오르다 만 사랑, 듣다가 만 음악……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 채워지지 못한 존재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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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줍은 사람이다. 그는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파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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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교실

 

다시 사는 환희에 들떠
넘쳐나는 개선가.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눈먼 몇십 대의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우리의 감격을 풀지 못하는 나약한 꽃밭.

여기는 또 조용한 갈림길, 우리는 깨끗이 직각으로 서로 꺾여져 가자. 다시 돌아다볼 비굴한 미련은 팽개쳐 버리자.

갑자기 너는 무엇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 오래 부끄러운 눈길을 피하던, 영원한 향수가 젖어있는 어머니의 젖가슴, 너는 다시 우리를 낳아준 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면, 우리는 고운 매듭을 이어주는 숨소리를 음미할 때다. 살아있는 보람이 물결 일어 넘쳐나는 개선가를 불러준다.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온기를 감사하는 서정의 꽃밭.

 

 

해부학 교실 2

참, 저애 좀 봐라.
꼬옥 눈감고 웃고 있는
흰꽃으로 가슴 싼 저애 좀 봐라.

여기가 무덤이 아닐 바에야
우리는 소리 없이 울지도 못하는데

한세상 가자고 하다
끝내는 모두 지쳐버린 곳

네 살결이 표백되어
천장의 흰 바탕 보아라.

너를 얼리던 소년은
하나씩 외로운 척 흩어져가고
수줍어 눈 못뜨는 소녀야, 말해봐라.

전에는 종일 산을 싸돌고
꽃 따먹고, 색깔 있는 침을 뱉어

저 냄새, 내리는 햇살 냄새에
너는 웃기만 했지.

우리는 두 손
숨을 멈춘다.

참, 저애 좀 봐라.
그래도 볼우물 웃고
우리들 차가운 손바닥 위에
헤어지는 아늑함을 가르쳐주는
저애, 꽃순 숨소리 들어보아라.

 

 

조용한 기도

1

우리의 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일 때
그 끝에 보이는 황홀함과 따뜻함이여.

한 손에 해골을 들고
내 얼굴의 향긋한 내음을 맡는다.

막막함도 잊고 웃고 있는 어제,
웃고 있는 내 얼굴, 친구들 얼굴
너무나도 섬세한 백토의 조각품.

근육을 한 개씩 분리할 때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의 바닷물 소리,
기억에 남아 있는 고운 목소리.

지금 소년는 얼마나 시원할까,
흩어져 누워 있는 때 묻은 소녀의 옷을
나는 힘들여 찢고 있다.

2

나 지금 정들어 입고 있는 옷도
천천히 모르게 헌 옷이 되게 하소서.

때가 되면 주저없이 새 옷을 마련하고
8가볍게 활개쳐 날게 하소서.

먼 거리를 나래치며 오르는
비상의 신비한 기쁨 누리게 하소서.

해부대 앞에서 눈감은 소녀같이
나를 부리소서, 시작하게 하소서.

 

정신과 병동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은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도
지겹지 않고,ㅡ
가운 입은 피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연가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임종

서향의 한 병실에 불이 꺼지고
어두운 겨울 그림자
낮은 산을 넘어서면

부검실은 차운 벽돌,
뼈를 톱질하는 소리로 울려도
이것은 피날레가 아니다.

나는 처음 해부학에서
자연스런 생명을 배웠다.
거기에 추위가 왔다.

막막한 청춘의 잠자리에서
나는 자주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은 시간의 화려한 현기증.

들리니, 포기한 키 큰 사내의
쓸쓸한 임종.
들리니, 이것은 피날레가 아니다.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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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changbi.com
밥상의 언어와 문학의 위엄
정홍수|문학평론가

평생 형형한 호랑이 눈을 부릅뜬 채 한시도 몸과 머리를 쉬지 않고 살아온 여든 어름의 늙은 아버지가 있다. 일찍 아비를 여의고 눈앞이 캄캄한 세월을 죽을 각오로 살아냈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으면서도 농사만 짓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야무지게 스무 마지기 논농사와 3천평 밭농사를 일궜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깜깜한 논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가혹한 운명을 무릎 꿇리며 한세상을 살아왔다.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자 선을 긋고 단호하게 눈을 거두어버리고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이 옆에서는 지아비와 자식밖에 모르는 한없이 순종적인 어머니가 그림자처럼 평생을 함께했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아들은 노모로부터 아버지가 자꾸 정신을 놓는 것 같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소설 화자인 아들은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을 하루 앞두고 직장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월차를 낸 뒤 시골집으로 향한다. 정지아(鄭智我)의 단편 〈봄빛〉(《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이야기다.

간략히 소설의 밑그림을 옮겨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소설 유형 아닌가. 감동의 발생 지점도 어느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런 소박한 곡조에 어떤 새로움이 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다. 이 소설이 주는 투명하고 묵직한 감동은 그런 쉬운 짐작을 무색케 하면서 인간 진실의 처연한 봄빛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딱히 언어론적 전회(轉回)를 비롯한 다양한 담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언어의 재현적 역할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궁핍화와 함께 본래의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부분적인 소설적 기술로 그 위상이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논의는 내려놓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보여주는 일이 좋은 소설의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라는 점을 정지아의 〈봄빛〉은 새삼스럽게 웅변한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을 맞아 노모가 차려낸 저녁밥상의 풍경이 단연 그러하다. "그가 온다고 아침부터 종종걸음치며 준비했을 밥상은 '한가꾸'를 넣은 된장국과 취나물과 머위대와 두릅, 그리고 묵은 김장김치가 전부였다." 아들은 지난가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반찬 가짓수에서 불과 두 철 사이에 또다시 세월이 앗아가버린 노모의 쇠약해진 기력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짠한 밥상이 들려주는 정말 비감한 이야기는 늙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의 몫이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대화 사이 소설 화자인 아들의 반응은 생략한다).

"내동 일렀는디 또 뚜부가 없그마이!"
"아이고, 점심에 뚜부를 그렇게 묵고 또 먼 뚜부를 찾소? 저녁은 그냥 잡수씨요. (…)"
"나가 원제 점심에 뚜부를 묵어!"
"환장하겄네.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그마이. 인자 점심에 멀 묵었능가도 모리겄소?"
"그걸 왜 몰라! 점심에 청국장 묵었제. 나가 그것도 모르깨미 이 사램이 꺼떡하먼 노망 들었다고 엄한 사램을 잡고 야단이여, 야단이!"
"청국장에 뚜부가 들었습디여? 안 들었습디여?"
"그까짓 것이 월매나 된다고!" (…)
"미치고 환장하겄네. 그 징헌 놈의 뚜부, 된장찌개에 넣고 청국장에 넣고, 동태찌개에 넣고, 끼니마동 빠진 적이 없그마는 먼 놈의 뚜부를 또 지지라요?" (…)
"아 긍게 누가 이것저것 하랬냐고! 그냥 뚜부 듬성듬성 썰어넣고 멜치나 멫마리 너먼 될 것을 그거시 멋이 어렵다고 한끼를 안해줘! 한끼를!"

전에 없던 아버지의 반찬 타령도 그러하지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어머니의 변화 또한 아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그런데 《미메시스》의 저자가 펼친 논의에 기댄다면 스타일 분리를 엄격히 고수하던 고전주의 문학의 세계에서는 희극 장르에나 어울릴 법한 이 범속하고 격조없는 대화의 언어가 인간 이해의 장에 던져주는, 착잡하지만 풍요로운 실감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도 억양에 실린 이 '뚜부'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문학적 표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비는 '종'일 수도 있고, '남로당'일 수도 있고, '개흘레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피임약을 사러 죽어라 뛰고,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계속 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비든 생로병사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다. '뚜부'는 그 불가항력의 시간 앞에 도착한 모든 아비들의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생의 의지이며 사위어가는 마지막 위엄일 것이다.

마침내 근대 리얼리즘이 일상의 범속한 현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현실의 묘사 혹은 재현의 중심에 섰던 소설은 그 자신이 비추어낸 역사나 인간이 생각 이상으로 초라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짐짓 놀라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장식적인 세련을 거부하고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그들의 감각적 진실을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소설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봄꽃〉의 '뚜부'는 그같은 근대소설의 근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밥상을 둘러싼 언어들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 앞에 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퍅한 일생을 요약하는 강렬한 문학적 위엄에 어찌 닿을 수 있었으랴. 이것은 닥치는 대로의 현실에서 수집한 소박한 언어가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치매선고를 받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새벽부터의 긴 실랑이 끝에 지쳐 잠든 늙은 부모를 후면경으로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과 눈물에 독자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 눈앞이 캄캄했다. 근디 이상하지야. 눈앞이 캄캄헝게 무선 것이 없드라. 아홉살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상하게 그 역시 무섭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로는 혹 싱거운 사족은 아닐 것인가. 그러나 정지아의 명편 〈행복〉의 여로를 여기에 겹쳐 떠올리는 독자라면, 이 담담한 수락이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어떤 느꺼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 계간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계간평 중에서


필자 소개 정홍수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2006.08.15 16:07 l ⓒ 정홍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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