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장정일의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소개 페이퍼를 올리면서 인터뷰기사 한 꼭지를 옮겨놓았었는데, 내친 김에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 또한 옮겨놓는다. 대충 읽어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장정일만큼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나도 책에 대해 아는 체를 많이 하다보니 간혹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평소에 나는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자책하며 사는 편이다(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정하는 게 사실은 더 많지만). 마일리지도 쌓인 김에 이번에 <장정일의 공부>와 함께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는데(책은 이미 학교로 배달되었지만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분량상 <공부>를 제외하면 내가 빨리 완독할 수 있을 책은 <언어학과 정치>(역락, 2006) 정도이겠다.

 

 

 

 

거기에 현재 읽고 있거나 대출해놓은 책들이 10여권. 강의준비나 필요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또 두서없이 그만큼이다. 지난 주말부터 가방에 들어가 있는 책은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고, 집에 와서 잠시 펼쳐본  책이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 그리고 엊그제부터 행방을 찾고 있는 책이 비릴리오의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다(나는 국역본과 함께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영역본도 구했다).

 

 

 

 

전업작가라면 나름대로 책읽기에 질서를 부여해서 '로쟈의 공부'라도 내놓을 준비는 돼 있지만 장정일만큼 쌓아놓은 공덕이 없기에(내가 읽은 '장정일' 가운데 베스트 네 권이다. 나는 그의 <삼국지> 등을 읽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니 울적하다.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죠." 더불어 아무리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도 이젠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막막하다.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하건대, "저, 독서광 아닙니다!"

북데일리(06. 11. 20)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 2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소설가 장정일(45)이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학교 측은 “교육부 학력 규정상 장 씨를 전임교수로 임용할 수 없어 초빙교수로 채용했지만, 임기를 마치면 발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물 비시에 휩싸여 구속되기도 했던 ‘화제의 작가’ 장정일. “나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라고 스물한 살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그는 시인도 됐고, 소설가도 됐고 교수까지 됐다. 모두 ‘책’ 덕분이다. 밤낮으로 읽은 책 이야기. 그가 쓴 6권의 <독서일기>는 독서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전설적인’ 책이다. 책 전문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로 발탁 되었을 때 그의 어눌한 말솜씨에 불만을 갖던 사람들도 “그럴 만하다”며 독서력만큼은 인정했다.

학교에 ‘덜’ 다닌 대신 ‘더 많이’ 읽은 장정일. 그가 <장정일의 공부>(이하 '공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라는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읽은 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뾰족한 일침까지 던졌다. 관심분야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책에 미쳐있는 그를 간곡한 설득 끝에 ‘어렵게’ 만났다. 정면의 시선을 던지지 못하는 그의 수줍음 사이로 마흔 다섯 해의 기나긴 책의 역사가 사라졌다 피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 시인, 소설가로 살다가 직장인이 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백수로 있는 것만 못 하죠. 작가는 24시간 365일이 자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학생들을 위해 내 삶을 쪼개야 하니까 작가가 낫지요”

- 그 좋은 자유를 포기한 것이나 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서울 살이를 시작한 것이나 자신에게는 큰 변화일 텐데요. 대구와 서울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서울은 재입성이에요. 90년도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사 왔다가 96년도에 다시 대구로 내려갔죠. 그리고 10년 만에 올라 온 거에요. 대구와 서울을 굳이 비교하자면 도시와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은거’ 에 비할 수 있는 지방생활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인터넷, 신문. 아무것도 없는 ‘은거’가 불가능한 시대죠. 저는 젊은 작가들을 만나면 꼭 서울살이를 해보라고 해요.

사실, 대구에 가도 서울 생활하고 비슷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대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보는 게 경험상 낫다는 거죠. 젊은 작가라면 특히, 대도시 생활을 겪어 봐야 해요. 촌으로 가겠다는 젊은 작가들한테는 나이 50, 60되서 가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대도시에서 생활해 보라고 말해요. 대도시 문명과 호흡하면서 글감과 문젯거리 같은 것들을 만나봐야 해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외국 생활도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누구든 문명에 노출 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은거의 장점도 살리지 못할 바에야 중소도시 보다는 대도시에서 살아 보는 게 경험상 좋다는 거죠”

“지금은 민주주의 아닌, 과두제”

- <독서일기>와 <공부>의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책’입니다. 책읽기라는 것은 마흔 다섯이 된 지금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독서일기>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공부>는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책과 사이사이에 난 길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실, 책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해요. 만약 길이 있다면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이겠죠. 길은 스스로 만드는 거에요. 텍스트를 가지고 콘텍스트 속에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겁니다. <독서일기>는 책이 먼저 독후감이 뒤에 있는 책이지만 <공부>는 반대로 관심 있는 테마를 정한 후 관련된 책을 읽은 것 입니다. 책이 먼저가 아니라 뒤에 선택 된 거죠.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책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저는 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시민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공부’하면 지긋지긋하다고 하는데 너무 입시위주의 공부를 해서 그런 거고, 공부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좋은 친구입니다. <공부>는 나이 마흔 다섯 된 제가 공부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책이에요”

- '책 읽기를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말씀에서 ‘길’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텍스트로 옮겨 가는 길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같습니다. '비행기의 1등석에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3등석 밖에 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국경의 벽은 높다'며 현 사회를 ‘과두제’에 빗대는 등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도 쏟아 내셨는데요.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과두제에 들어갔죠. 미국도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과두제란 특권층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죠. 프랑스 혁명 이후 세금 내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잖아요. 지금이야 형식적으로 1인1표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거비용을 많이 낸 사람이 당선확률이 높고, 돈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들이 법을 만듭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속게 되죠. 정치권력, 자본주의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 만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단돈 몇 천원만 사기 당해도 속았다고 분해하면서 책을 안 읽는 다는 건 문제죠. 엠마뉘엘 토드, 촘스키 모두 ‘책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했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보다 철저히 기업과 정치를 감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소수종파의 문제 아니다”

-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을 믿고 있는지요. 본문에 보면 '학력이 중학교 졸업밖에 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당시에 치러지던 고등학교의 군사훈련(교련)을 피하고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만 명의 신도를 감옥에 보내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해온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유일하다'고 밝히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이비로 지탄 받아온 것. 대체복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혜시비라고 지적한 개신교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18세에 신앙을 버렸어요.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양심적 병역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느 종교든 간에 살생, 살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나라 종교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이는 한국 종교의 현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나는 양심에 의해 살인은 못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양심적 병역대체를 하게 해다오’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게 당연 한 건데. 우리나라 종교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소수종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 겁니다. 또 불합리 한 건 종교 안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대나 살인문제에 대해 평신도가 고민을 하면 감옥에 가고 성직자는 면죄가 된다는 거에요. 성직자라면 평신도를 위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고민에서 벗어나 있어요. 성직자라고 면죄 되어서는 안 되죠”

- 40년간 문학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향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동문 오에겐자부로에 대한 열등감을 표출한 것은 아닌지’라는 반문을 던지셨습니다.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인문, 교양 분야의 책들로 포진되어 있는 <공부>를 보면 스스로도 문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문학작품을 안 읽었다고 합니다. 다카시는 21세기 교양의 총체는 자연과학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은 늘 사회 현실과 조우했지만 어느 날 그게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일본 문학이 언젠가부터 자아나 내면도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문학을 안 읽는다고 해요. <문학의 종언>에서 하는 얘기가 그런 겁니다. 작가들이 점점 사회와 괴리 될 때 문학도 독자와, 사회와 끊어진다는 거죠.

문학이 살아나려면 내면에서 벗어나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옛날 시인, 소설가들에게 사회는 “여기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말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아요. 그건 작가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도 한국사회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죠. 이렇게 사회에서는 멀어지고 내면 도피나 자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니까 ‘미래파’라는 시가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도 내면 도피에서 벗어나서 사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종종, 작가들은 ‘야반도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야반도주’는 내면 도피 문학을 말합니다. 작가는 사회에 빚이 많습니다. 그러니, 빚지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책은 반드시 도서관에서 읽은 후 구입”

-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빌려 읽는다 해도 워낙 오래 된 책탐이니 모은 분량이 엄청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 읽습니다. 책은 꼭 도서관에서 읽어보고 사요. 신간은 도서관에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3달 정도 늦게 사게 되지만 그래도 읽어 보고 삽니다. 이런 구매법을 권해주고 싶습니다. 도서관, 출판계 모두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소장권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5년 전에 중학교 때부터 모았던 책을 헌책방에 모두 내다 버렸거든요. ‘나는 왜 이렇게 살까’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건 아마 모든 수집광, 마니아들이 한번쯤 겪는 관문일 거예요. 다 내다 버리고 ‘재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전에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한 선배가 라면 사라고 돈 3만원을 줬어요. 그런 선배를 참 좋아 하는데 “지금 무슨 글 써?”라고 묻는 선배보다 “너 요새 먹고는 사나? 돈은 있나?”라고 묻는 선배가 정말 좋은 선배에요. 글이야 다 알아서 쓰니까. 아무튼 그 선배가 준 돈 3만원으로 쌀을 안사고 교보문고 가서 책을 사버렸죠. 그러면서 자책했어요. “나 정말 왜 이러고 살까” 결혼기념일에 아내 선물 사줄 돈으로 책 사버리고. 그러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귀한 책도 많았고 도서관이 안 부러울 만큼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싫어서 다 갖다 버렸어요. 결국 재생의 길을 걷지 못한 거죠. 지금 다시 사 모으고 있으니까“

- 아직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저는 아직 그 수준이 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책 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특별한 버릇 같은 것이 있나요. 접는다거나 줄을 친다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거나....

“그런 시기가 마니아들에게는 꼭 한 번씩 온다니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웃음) 시기야 다 다르겠죠. 책은 사면 커버부터 버려요. 책 읽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책은 이방 저 방에 두고 오가며 읽어요. 한 가지 테마를 정해 놓고 10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 편입니다. 그래야 시너지가 생기거든요. 관심 있는 싶은 주제는 그렇게 접근해요. 접거나 줄치지는 않아요. 읽으면서 파악하려고 노력해야지 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면 거기에 묶이죠. 두 번, 세 번 다시 읽더라도 그건 좋은 독서법이 아니에요”

- 독서광들이 정말 어려워하는 질문이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질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책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그 답을 뽑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카프카에요. 젊은 시절 무척 좋아했죠.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을 권해주고 싶고....또....아! KBS 박성래 기자가 쓴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제가 한겨레21에 그 책 서평을 쓰면서 “이 책을 읽거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아는 것은 독도를 얻는 것과 똑 같다”고 했어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합니다. 그가 쓴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 소설 집필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바탕으로 2003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다루는 이야기를 쓸 예정입니다”

- 시인으로 데뷔해 교수의 자리에 오기까지 글쟁이로, 독서광으로 20년을 보내셨습니다. 꿈을 이룬 지난 시간 동안 행복했나요.

저는 독서광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무 안 읽으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뿐이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달에 10권 읽는 건 기본 아닌가요. 저는 조금 더 읽었을 뿐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읽었다면 제가 독서광이 될 이유가 없었겠죠. 행복요? 음....행복했죠. 지금도 행복하고. 정규교육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했어요. 명문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땄다면 세상을 뀄다는 자신감에 아마 책을 안 읽었을 거예요. 조금 배웠기에 많이 읽어야 했고, 덕분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했습니다”(김민영 기자)

06. 11. 20.

P.S. 결론은 이렇다. "기본을 갖추자!"

P.S.2. 생각이 난 김에 장정일의 시 '삼중당문고'도 다시 읽어보록 한다. '정규교육'을 못 받은 그에게 삼중당문고는 그의 '학교'였고 '교사'였으며 또한 '친구'였으리라.

삼중당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왔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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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신영복 교수 〈프레시안〉창간 5주년 기념 특별 강연
  2006-09-26 오전 11:24:28
  "진지한 소통은 사라지고,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대립만 남아 있는 곳." 한국 사회에 대한 이런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은 많다. 그렇다면 해법은?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한데 모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지혜를 구하여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은 언론의 대표적인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프레시안〉 역시 이런 반성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애써 온 〈프레시안〉은 창간 5주년을 맞아 지난 21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강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신 교수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당장의 밥벌이와 무관한 인문학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신 교수는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온 근대화의 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볼 것을 주문했다.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단일화시킨 상품 사회가 근대화의 토대가 됐다고 지적한 신 교수는 목표의 달성만을 강조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는 '길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존재론'의 패러다임이라며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관계론'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관계론의 철학이란 개인을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론의 철학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면면히 살아 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시각이다.
  
  신 교수는 또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우직한 실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태도는 일견 어리석어 보이지만 세상은 이런 우직한 이들의 발걸음에 의해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이 이런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취할 때 언론은 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직한 이들,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세상을 가장 깊고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신 교수는 우리 사회가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루려면 강물의 움직임에서 배움을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 결국 바다에 닿는 강물처럼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하방연대'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방연대'의 길에 언론이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이날 강연은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지난 21일 한국일보 본관 12층 강당에서 진행된 신 교수의 강연 내용 전문이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프레시안

  강연 요약문 보기
  
  〈프레시안〉창간 5주년을 축하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해서 5년 동안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소개할 수 있는 매체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창간 5주년을 맞는 〈프레시안〉에 대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신뢰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프레시안〉이 앞으로도 이런 역할을 계속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나이든 사회, 그래서 고집이 세다
  
  사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듯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은 굉장히 답답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해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다룬 쟁점들을 되짚어 볼까요. 소위 전시 작전통제권, 한미 FTA 문제부터 심지어 헌재 소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서로 합의해내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저도 참 답답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속 시원한 방도가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나이 드신 분들은 굉장히 고집이 세다. 그리고 그 고집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결론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역사의 결론이라는 것이죠.
  
  한국 사회를 가리켜 흔히 젊은 사회라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예요.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 온 사회거든요. 켜켜히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 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등 우리 사회에서 아주 열띤 담론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는 앞으로의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내용에 국한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조금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해관계만 놓고 대립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설 곳이 없다
  
  제가 나눠 드린 유인물을 볼까요.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인문학과 소통의 장(場)'이죠. 며칠 전 고려대 교수 70여 명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어제(9월 20일)는 민교협에서도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좋은가?" "인문학이 이토록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지속가능할까?"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지요. 앞서 이야기한 교수들의 성명은 이런 공감대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사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저 비싼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대접을 잘 한 것이라는 생각, 일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오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물질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사회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회를 뛰어넘게 해 주는 게 인문학의 역할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인문학은 사치? 천만에!
  
▲ ⓒ프레시안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꼭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저희 학교(성공회 대학교)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것인데요. 클레멘트 인문학 강좌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얼 쇼리스라는 분이 처음 시작한 것이지요.
  
  이 분이 뉴욕 형무소의 재소자들을 오랫동안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마약, 폭력 사범을 대상으로 진행한 일종의 워크숍 같은 행사에서였지요.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이 분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20살이 채 안 된 여성 재소자와의 인터뷰에서였어요. 그 재소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왜 우리들은 연극이나 음악회, 오페라와 같은 예술적 경험을 할 기회가 없는 거죠"라고요.
  
  흔히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인문학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사치라고 여기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장 돈이 되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협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얼 쇼리스는 빈민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강좌는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당장 돈이 되는 내용이 전혀 아님에도 말이지요.
  
  인문학이라는 게 물론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소통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이해관계만을 놓고 다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앞서 이야기한 클레멘트 강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인문학, 사회적 소통의 전제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학교 공부는 보통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에 둔 것이었습니다. 당장의 경제적인 쓸모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역사, 철학이 보다 완전한 인간을 기르기 위한 이상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게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대신 돈이 되는 공부, 잘 팔리는 학문이 대학을 차지하게 됐죠.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대립, 갈등, 소통의 단절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좀 생소한 말일지 모르지만 인문주의자를 영어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휴머니스트가 없는 사회. 참 삭막한 사회지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회를 흔히 인문학의 본고장이라고 합니다. 아테네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은 필로소퍼 킹(Philosopher King), 즉 철인 군주를 갖지는 못 했죠. 하지만 필로소퍼 시티(Philosopher City), 즉 철인 도시를 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피어난 것이지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통이 가능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인문학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知), 즉 안다는 게 무엇이냐?"라고요. 그랬더니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인(知人), 즉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요. 요컨대 앎이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애완견에 대해, 또 어떤 친구들은 주식이나 아파트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알 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이 정작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이고요.
  
  빌딩과 다리가 아닌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그린 서울의 얼굴
  
  제 경험 하나를 이야기할 게요. 제가 교도소에 참 오래 있었잖아요.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강에 제2한강교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지하철도 뚫리고, 63빌딩도 세워지고, 제3한강교도 놓였지요. '제3한강교'라는 노래도 제가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나왔어요. 그 시절에는 감방에 신입이 들어오면 감옥에 와 있는 사이 변한 서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한 일과였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은 방에 있던 젊은 친구 하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서울의 발전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꼭 핀잔을 주곤 했어요. 서울에 새로 생긴 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얼마나 높은지 아냐"라고 말하면 "임마 그게 네 거냐. 쳐다보면 고개만 아프지"라고 대꾸하는 식이지요.
  
  그 젊은 친구는 서울역에서 13살 먹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동생을 10년 뒤에 만났어요. 어디에서냐 하면 서울의 어느 사창가에서요. 처음에는 이 친구가 동생을 못 알아 봤대요. 그런데 동생이 먼저 오빠를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쫒아갔지만 결국 동생을 놓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서울을 증오해요. 서울은 그에게 순진한 13살 소녀를 창녀로 만든 곳이었던 것이지요. 그 친구에게 만약 '서울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과연 어떤 모습을 그릴까요. 순진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낯선 창녀의 모습이 아닐까요.
  
  개인적 비극 때문에 너무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대한 그 친구의 생각이 매우 인문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에 대해 빌딩의 높이나 교량의 숫자로 판단하는 이들과 달리 그 사회의 오갈 데 없는 한 소녀가 10년 뒤 어떻게 성장했느냐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인문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화폐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가치입니다.
  
  화폐 가치가 전면화되면 인간의 정체성도 사라져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화폐 가치의 전면화"입니다. 상품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를 잃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지요.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단 하나의 가치, 즉 화폐 가치로 단일화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쌀 한 가마가 구두 한 켤레와 같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왜냐고요? 당연하지요. 밥을 짓는 쌀과 발에 신는 구두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상품이 되면 달라집니다.
  
  쌀이 상품이 되는 경우, 그냥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파는 상품이 됩니다. 그런데 시장에 팔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치 형태로 표현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등가물이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두라는 등가물, 즉 가치가 같은 물건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쌀은 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쌀이 구두로서 표현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구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시장에 나오는 순간 쌀은 밥과 관계없고, 구두는 발과 관계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품의 가치표현 형식입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 한 명이 구두 한 켤레와 가치가 같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요. 그런데 만약 구두 한 켤레가 아니고 연봉 1억의 가치가 있다고 하면 대개는 기분 나빠하지 않겠지요.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요. 사람 역시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의 등가물이 무엇인지를 판가름하는 가치가 화폐 단위로 환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순간 화폐단위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또 사람을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예는 어떻습니까. 남편이 아주 뛰어난 변호사인데 그 부인은 매우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반응들이 나와요. "아 부인의 친정이 잘 사나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천박해졌을까요.
  
  모든 노동에 대해 "얼마짜리"인지 묻는 사회
  
▲ 신영복 교수.ⓒ프레시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됩니다. '출산'을 예로 들어봅시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이게 과연 상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람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출산' 행위를 상품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산모는 '환자'로 규정되어 산부인과 병원에 보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사의 손을 거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됩니다. 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사회는 어느새 노인을 '환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노인은 오랜 경륜을 갖고 삶을 마무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종 서비스 상품의 소비자가 돼 버립니다.
  
  얼마 전에 앨빈 토플러가 새 책을 냈습니다. 거기서 '프로슈머'라는 개념을 제시했지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 인상적인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비(非)시장적 영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시장은 비시장적인 부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서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병원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는데요. 병원에서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꼭 그런 게 아니지요. 의사에게 처방을 받는 것만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장 외부의 노력, 그러니까 약을 잘 챙겨 먹는 것부터 주위 사람들의 배려와 치료를 위한 자신의 의지가 병을 낫게 하는 데에 70~80%의 역할을 차지하지요. 그런데 시장 중심의 사회는 이런 영역을 무시합니다.
  
  토플러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2002년 한해 동안 미국의 현금 지급기에서 입출금한 횟수가 120억 번이라고 합니다. 한번에 2분씩 걸린다고 치면 280억 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죠. 미국인들이 총 280억 분의 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은 시장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현급 지급기를 통해 작동하는 시장은 굴러가지 않았겠지요. 결국 시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도 시장 바깥의 영역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 바깥에 있는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화폐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지식이나 기술, 노동은 가치가 없는 게 돼 버립니다. 이렇게 모든 게 화폐 가치로만 환산돼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습니다. "이게 얼마짜리냐"라는 기준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 그리고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많은 것들은 대개 이렇게 "얼마 짜리"라는 기준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애정', '우정' 이런 것들을 어떻게 화폐 단위의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고 팔수 없는 것들,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은 어느새 주변으로 밀려나버리곤 합니다.
  
  계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치만이 존중받고, 그 외의 것들은 도무지 배려받지 못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은 상당 부분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경영학과에 다니다 경제학과로 전과한 분이 있습니다. 왜 전과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경영학 수업 첫 시간에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을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니 '아니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뒀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요.
  
  저는 경제학과를 나왔는데 제 경우에는 경제학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게 경제학의 원칙이다"라는 말이 두고두고 고민을 안겨 줬습니다. 그것도 꼭 도둑놈 심보 같았거든요. 남들 보다 일은 덜 하고 더 많이 챙기겠다는 것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런 생각이 일반화되면 사회가 굉장히 천박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존재가 위협을 받기도 하고요. 상품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 자체가 부정돼 버리거든요.
  
  실업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상품을 만들지 못 하거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 못 받는 사회. 이런 사회는 결코 인간적인 곳이 아니지요.
  
  
▲ ⓒ프레시안

  '도로의 논리'와 '길의 철학'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어쩌면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라는 오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정서처럼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을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보면 그런 것들이 진정한 소통을 위한 바탕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들은 화폐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만이 목표가 된 사회, 혹은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도 좋다는 사회에서는 종종 외면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주제는 목표와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부릅니다. 또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의 달성으로 모든 수단이 합리화되는 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사라집니다. 그런 게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옛날 시골에서는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돈 벌이'라는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는 곳이거든요. 얼마나 빨리 목표에 다가가느냐, 즉 속도와 효율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든 목표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 즉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논리를 '도로의 논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길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도로의 논리'에 의해 빚어졌습니다.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길의 철학'이 필요한 때가 됐습니다.
  
  '도로의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쿠테타를 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이상한 논리를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 기득권 집단의 논리이기도 했지요. 어떤 방법으로건 기득권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는 것이죠.
  
  일단 이기고 보자는 '도로의 논리' 속에서 소통은 요원해져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사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장난도 많이 쳐서 선생님께 벌을 참 많이 섰어요. 지금도 초등학교 가서 보니까 복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띄더라고요. 거기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섰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의자를 들고 벌을 서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게 우리 사회를 아주 전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의자를 만들 때는 그것을 깔고 앉기 위해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위에 앉아야 할 것을 오히려 머리 위에 들고 있어요. 아주 거꾸로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다 합의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요.
  
  "일단 성장하고 나중에 분배하면 되지 않느냐." "과정이 비합리적이더라도 좀 참자. 그래서 나중에 분배해 주면 될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어요.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일단 이기고 보자는 논리. 이런 논리가 판을 치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은 아주 요원한 이야기가 되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 아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꾸 괴롭힘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괴롭힘 당하던 친구를 계속 격려해서 괴롭히는 친구와 한판 싸우기로 했어요. 저와 괴롭힘 당하던 친구가 한편이 되고 괴롭히던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다른 편이 돼서 방과 후에 학교 뒤편에 있는 강가에 가서 대판 치고 받고 싸웠어요. 하지만 저와 제 친구의 코피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졌지요. 이긴 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갔고요. 정말 괘씸하더라고요. 그때 강가에 앉아 코피를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놈이 이기는 경우도 있구나." 30년 뒤 감옥에 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구나. 한 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매사를 '도로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도로는 고속도로가 좋은 것이지요. 또 짧을수록 좋습니다. 최대한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소통을 배제하는 근대성, 이제 반성할 때
  
  하지만 '길의 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삶이거든요. 우리 삶을 무시하면서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삶을 희생하여 추구하는 목적이란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정한 목적과 수단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겠지요. 마치 사람이 깔고 앉기 위해 만든 의자를 머리 위에 들고 있는 모습처럼요.
  
  도로의 논리. 그러니까 과정은 무시한 채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논리.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다름 아닙니다. 자본은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습니다. 또 자본은 그 속성상 적게 투자해서 많이 벌어 들이는 것, 즉 높은 효율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자본의 논리가 내면화 되면서 우리는 속도, 효율에 대해 거의 광신적으로 몰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바로 근대 사회의 속성이자 구성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근대라는 게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이니까요.
  
  결국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 과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길의 철학'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네 번째 주제는 '근대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근대 사회는 자본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증식을 거듭해야 하는 자본의 원리는 속도와 효율의 논리를 사회화한 것이거든요.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정말 진보된 사회다" 혹은 "사회의 근대화는 진보의 과정이었다"라는 이야기는 이제 다시 검토해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59학번입니다. 저희 세대는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세대였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 학생들은 하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4.19를 겪었습니다. 3학년 때 5ㆍ16을 겪었지요. 당시는 1960년대 초였는데, 우리 것을 완벽히 버리고 미국과 유럽의 것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적 분위기였습니다. 그것을 근대화라고 여겼고, 이런 근대 기획이 국정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물론 이런 근대 기획은 일제 식민지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근대 기획에 대해 이제 반성할 때가 됐습니다. 앞서 인문학의 위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사실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의 결과물입니다.
  
  근대화는 우리 현대사의 국가적 기획이었으며 당연히 근대성의 존재론 논리가 대화와 소통의 문화를 배제해 왔습니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이 진정한 소통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는 관계론 원리를 기조로 하는 인문학적이고 공동체적인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입니다.
  
  근대가 어떤 역사였는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면 근대사의 핵심 내용에 대해 알게 됩니다. 강자가 계속 자신을 키워 온 소위 '강철의 철학'이지요. 그것을 제 논리 체계에서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강화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것이지요.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건 자기 존재를 강화하고 키워내려는 욕구가 근대성의 핵심 원리로 작동해 왔습니다.
  
  거울에 비친 시대, 사람에 비친 시대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이런 패러다임이 근거하고 있는 패권적 질서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을 모아서 <강의>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에서 묵자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묵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서로를 계속 흡수 합병하여 덩치를 키워가던 시대입니다. 주나라 말기 수많은 나라로 갈라졌던 중국은 춘추시대를 거치며 12개의 나라로 줄어들고, 다시 전국시대에는 7개로 줄어든 뒤 결국 진나라 하나로 통일됩니다. 한 국가의 패권으로 정리가 된 셈이지요.
  
  지금과 닮았습니다. 지금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지향이었던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고 사활적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패권으로 귀결되고 있고요.
  
  진나라의 패권으로 끝난 춘추전국 시대의 치열한 경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자는 이런 경쟁을 통해 국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묵자는 그런 이들의 주장을 "만 명에게 약을 썼는데 서너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어버린 것"에 비유합니다. 이런 약을 결코 좋은 약이라 부를 수 없겠지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치열한 경쟁은 소수의 국가, 결국은 한 개의 국가만 승리자로 남기고 모두를 몰락시켰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승전국에 주목할 게 아니라 다수의 패전국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수의 승전국마저도 종국에는 패망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상을 지켜본 묵자는 "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거울이 없어서 맑은 물을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았던 시절입니다. 결국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묵자는 이어서 "경어인(鏡於人)"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이지요.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전쟁을 일삼는 패권적 질서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거울(물)이 아닌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 비춰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전쟁 승리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압도적으로 많을 테니까요. 아마도 사람에 비추어본다면 전쟁의 그늘에서 피폐해진 삶이 드러날 것입니다.
  
  묵자의 말은 부국강병의 화려한 면모가 아닌,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 시대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거울에 비친 화려한 모습이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힘을 과시하며 약소국을 계속 병탄해 가던 국가가 결국 약소국의 연합전선에 부딪혀 무너지는 것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지요.
  
  묵자의 "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 말은 훗날 유학자들에 의해 "무감어수(無鑑於水)" 등처럼 개인 윤리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 대신 사람들의 삶에서 드러난 모습을 통해 시대를 파악하라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가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지 않았는지
  
  산업자본주의는 어쨋거나 가치를 창출하기는 합니다.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요. 비록 그 과정에 투입된 노동력과 자연에 대해 제대로 갚아주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는 가치 창출과는 아예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춘추전국 시대와 마찬가지로요.
  
  패권적으로 쌓아올린 부와 영광,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공적에 대해서는 이제 보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가 한 말 중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주의해야 할 점"이라는 게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쪽 문화권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지칭하는 '히말라야 래빗'이라는 표현이 있나 봅니다.
  
  우리가 혹시 이런 '히말라야 래빗'을 닮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이가 정말 그 아래에 있는 이들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여기고 있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반성을 통해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또 이렇게 겸손해지면 존재론적 패러다임 속에서 자기 것을 무턱대고 끝까지 추구하는 무식함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속에서 서로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죠.
  
  하지만 근대 사회는 우리가 계속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아가도록 추동합니다. 심지어 자녀를 교육할 때조차 우리는 경쟁력을 강조합니다. 남보다 더 강한 존재로 크기만을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소통의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름이 뭐냐?"…우리 문화의 관계론적 전통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것과 달리 굉장히 아름답고 인간적인 문화가 많이 있습니다. 관계론적 원리에 따른 인문학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전통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제 감옥살이 경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한 30명 정도가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대법원까지 올라갔다가 파기 환송되고, 다시 재판 받느라 좀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소했습니다. 그랬더니 누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고암 이응노 선생님을 만날 뻔 했는데…"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이 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분을 찾았습니다. 한 젊은 친구가 감방에서 함께 지냈더군요. 그 친구에게 이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괴팍한 노인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왜냐? 자꾸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쪽 팔리게 말이죠. 교도소에서는 이름을 잘 안 부르거든요. 수번으로 불러요. 저도 제일 잊어 버리지 않는 숫자가 교도소 수번이거든요.
  
  그런데 이응노 선생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이 뭐냐고 묻고 다닌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켜서 어떻게 번호로 부르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 친구가 자기는 응일이라고 대답했더니 "아 뉘집 큰 아들이 징역 들어왔구만" 그러시더래요. 자기가 맏아들이 맞다더군요. 그 친구는 이 선생님에게서 이런 대답을 듣고 밤새 한잠도 못 잤다고 하더군요.
  
  이 선생님 세대의 분들은 사람을 결코 따로 떨어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 봅니다. 누구의 자식인가. 누구의 형제, 누구의 친구인가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관점이 아주 삭막하기만 한 근대의 존재론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관계론적 원리라 할 수 있지요.
  
  조화와 균형의 예술, 붓글씨에서 관계론적 원리를 찾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제가 붓글씨를 잘 쓰는 편입니다. '처음처럼' 소주도 있잖아요. (웃음) 그 외에도 제가 붓글씨 써서 크게 걸어놓은 게 제법 많습니다. 한문도 잘 쓰고요. 그런데요. 붓글씨, 즉 서도라는 것은 서양에는 없는 예술 장르예요. 제가 서도의 관계론에 관한 책도 쓴 적이 있는데요. 서도는 동양의 관계론적 원리가 아주 잘 녹아 있는 장르입니다.
  
  붓글씨를 쓸 때는 처음에 쓴 획의 각도가 비뚤어졌다고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쓰지 못 합니다. 그 다음 획을 통해 결함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안 되면 다음 획으로, 또 안 되면 다시 다음 획으로…. 또 글자가 틀리면 역시 다음 글자로 고쳐야 하죠. 한 행의 잘못은 그 다음 행으로 보완하고요. 이런 식으로 고쳐가면서 쓰다 보면 글씨를 쓰는 내내 굉장히 여러 곳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그래서 붓글씨를 쓸 때는 굉장히 긴장해야 합니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전체를 동시에 봐야 하거든요.
  
  그리고 붓글씨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굉장히 큰 종이에 조그만 글씨를 쓰면 안 되죠. 조화가 안 되니까요. 저 정도의 수준이 되면 붓글씨 쓸 때 까만 건 안 봅니다. 하얀 게 어디에 얼마나 남았나를 봅니다. 디자인 전공하는 분들이 제가 붓글씨 쓰는 것을 보더니 "선생님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만 보시는군요"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까만 것과 하얀 것만으로 붓글씨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요. 전체적으로 하나의 글씨가 완성되면 빨간 낙관도 들어가고 정서도 들어가서 최종적인 균형을 이룹니다.
  
  이런 하나 하나가 모여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이 동양 미학의 절정이라고 하는 서도의 미학입니다. 글자 한 자, 획 하나 잘 쓴다고 좋은 글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글씨를 가져오길래 저는 "서구 시민적 질서는 잘 잡혀 있구만"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웃음)
  
  서도는 관계론의 예술인데, 그것은 어떤 배타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란 없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 공유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절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지극히 기계적인 곳이 돼 버립니다.
  
  면벽 명상으로 건진 기억…"왜 1월1일을 특별하게 여기나요?"
  
▲ ⓒ프레시안

  또 징역살이 이야기를 할 게요. 제가 징역살이를 20년 정도 했는데, 그중 독방에 있었던 기간을 다 합치니 5년 정도 되더군요. 그 5년 동안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명상, 면벽 명상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오늘의 주제도 소통인데, 그렇게 면벽 명상을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소통된다는 것이에요. 우주의 정보진리체계와 통한다는 것 아닙니까.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솔깃한지 모릅니다. 단전호흡하면서 아주 열심히 해 봤는데, 절대로 소통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명상의 방법을 바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하나씩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까지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죠. 단지 기억만 떠올리는 게 아닙니다. 당시의 경험을 추체험하면서 나이 든 상태에서 다시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감옥에서 다시 겪어 보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제가 4살 때부터 기억이 나더군요.
  
  또 굉장히 저와 가깝고 함께 오래 지냈지만 제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잠깐 만나고 말았지만 제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학교에서 1월 1일에 학생들을 소집했습니다. 신년식을 한다는 것이죠. 당시에는 학교에서 그런 행사를 하곤 했어요.
  
  신년식을 마친 뒤 선생님께서 신년을 맞이하는 각오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뻔한 이야기를 했지요. 저도 심부름 잘 하고, 숙제 잘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순서가 중간쯤 가니까 한 친구가 독특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친구는 공부도 못 하고, 집도 가난해서 별로 주목받지도 못 하고 학교에서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일어서더니 자기는 시간은 원래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굳이 1월 1일이라고 특별하게 여기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 교실이 조용해졌어요. 저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요. 물론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죠. "내가 저런 이야기를 할 걸." (웃음)
  
  만약 제게 조금이나마 사색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신년식에서 들었던 강물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합니다.
  
  5년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면벽 명상을 한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란 뭐냐? 결론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들,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 이 모두가 나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내가 살았던 사회, 우리 시대의 파란만장한 사건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나의 고유한 배타적인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신을 살고 있는 시대를 삶 속에 가장 깊숙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가 오랫 동안 진행해 온 근대기획의 결론으로 내면화된 존재론적 문화, 존재론적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자신이 겪은 것이 유일하다고 믿는 데서, 또 자신의 존재성을 강화하려는 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여지가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물론 존재론적 문화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우직한 이의 세상 보는 법 배워야…"머리에서 가슴으로 향하는 여행"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섯 번째 주제는 "2개의 가장 먼 여행"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에 태어나서 학습과 포섭에 의하여 기존의 문화와 의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을 키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문화, 즉 근대성과 자본의 원리, 존재론적인 원리에 던져져서 세상의 기존 질서를 부지런히 배우기만 한다면 사회의 변화, 발전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반대로 사회를 자신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만 있다면 그래서 누구나 사회에 자신을 발빠르게 맞춰가기만 한다면 사회가 변화할 계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우직한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회를 지금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바꿀 수 없을까 하면서 노력하는 가운데 사회는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기존의 사회 의식이 얼마나 편견에 치우친 것인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어떤 특정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깃든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인식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지혜로운 이들이 아닌 어리석고 우직한 이들에게 생겨납니다. 세상에 너무 쉽게 적응하는 이들에게 이런 능력은 필요없는 것이니까요.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법,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은 원래 언론의 몫입니다. 언론의 역할은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언론의 바른 역할은 이런 우직한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면서 자신을 완성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을 "2개의 먼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여행입니다. 첫 번째 여행은 프럼 헤드 투 하트(From head to heart), 즉 자신의 우직한 독법으로 깨우친 주체적 인식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간적인 애정과 결합시켜가는 과정이지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제가 실토할 게 있습니다. 몇몇 친구들에게 좀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징역을 살아 놓고도 사람에 대해 이렇게 모르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을 예술품으로 빚어내는 사회…"가슴에서 발로 향하는 여행"
  
  또 하나의 먼 여행은 가슴에서부터 발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발에 도달한다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의 인성 고양뿐 아니라 동 시대의 가장 많은 이들이 고뇌하는 현장에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슴이 나무라면 발이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회는 한 인간이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이르는 여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제일 좋은 사회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처럼 그 속의 사람들을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훈도해주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편달은 어떤 사람을 걸어가게 하고, 그 라인에서 일탈하면 그것을 채찍질해서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훈도는 큰 가마에 집어넣고 따뜻하게 구워낸다는 뜻입니다. 편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지요.
  
  이런 훈도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문화가 성숙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를 누가 만들까요. 인문학적 가치도 소멸되고 그 자리에 화폐 가치라는 계량적 가치가 들어서 있는데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집단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한 곳이지요.
  
  언론이 신뢰집단이 될 수 있으려면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일곱 번째 주제는 이런 신뢰집단과 언론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신뢰집단의 역할을 해야 할 곳이 바로 언론입니다. 언론은 진실과 비판을 본령으로 합니다. 진실은 사실의 창조적 구성이며 이런 창조는 당대 사회의 과제를 중심에 둔 비판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비판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우직한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기관이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 충실해야 사회 일반의 신뢰를 받는 신뢰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뢰 집단은 소통의 중심이며 이항대립의 극단적 갈등을 지양하는 주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뢰는 사회성의 핵심이며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은 희망이고 희망은 신뢰에서 나옵니다.
  
  최근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프로슈머의 개념이 언론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언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뉘어 있는 구도 속에서 언론권력이 자신들이 조직한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프레시안〉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처럼 독자들은 더 이상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프로슈머, 즉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존재가 돼 가고 있습니다. 이들과 언론의 쌍방향 소통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새로운 사회 문화를 어떻게 키워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프레시안〉을 포함한 언론의 숙제가 될 것입니다.
  
  앞서 언론의 본령이라고 이야기한 진실과 비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단순한 사실은 작은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그릇으로 뜨면 그 그릇에 담긴 것이 바닷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다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못 합니다. 언론이 객관적인 사실을 얘기한다고요. 그것은 거짓말이지요. 어떤 사실을 헤드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수용자에게 관여할 수 있습니다. 사상은 선택입니다. 수많은 사상 중 어느 것을 선택해 그 선택된 사실이 어떤 발언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언론 권력이 해 온 역할이었습니다.
  
  언론은 사실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사실을 진실로 창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캐물어야 합니다. 사회를 우직하게 읽고 그래서 조금씩 바꿔내는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사실을 새롭게 선택하고 구성하고 조직하여 진실을 창조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 모인 지혜의 힘
  
  언론의 역할에 대해 시사점을 주는 사례로 프란시스 골튼이라는 통계학자이자 유전학자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분이 어느 날 시골 장터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황소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 놓고 그 소의 몸무게를 맞추는 퀴즈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얼마씩 낸 뒤, 각자 소의 몸무게를 종이에 적어 통에 넣고 제일 가깝게 맞춘 사람이 각자가 낸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골튼이 지켜보던 날은 800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소의 몸무게를 얼마나 맞출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아마 아무도 못 맞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통을 열어 확인해보니 정말 맞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조사해보니 13명은 무엇을 적었는지 판독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걸 빼면 787장이 남는데,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다 더해서 다시 787로 나눴더니 1197파운드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의 몸무게가 얼마였는지 아세요. 1198파운드였습니다.
  
  어쩌면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였는지도 모르지요. 저울이 틀렸을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프란시스 골튼은 크게 뉘우쳤습니다. 단 한 사람도 맞추지 못 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죠.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쌍방향 소통이 발달한 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요.
  
  제가 감옥에서 나와서 붓글씨로 처음 쓴 내용이 "여럿이 함께"였습니다. 다들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한글 액자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잘 아는 후배 교수 한 사람이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어요. "여럿이 함께"라는 말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럿이 함께 어디로 가자는 거냐. 그건 방법이지 목표가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가 글씨 아래에 방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라고요. 여럿이 함께 가야 할 목표는 이렇게 생겨난 길 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목표는 길 위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특히 언론은 이런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대중은 잘 알아요. 아무리 강조하고 크게 활자를 뽑아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그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인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때 대중에게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언론은 비로소 신뢰받는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아래로 손내미는 연대…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최근 바다이야기 사태에는 끼어들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이항대립만 남아 있는 사회가 됩니다. "가위와 바위만 있는 가위바위보"가 됩니다. 보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낳기 마련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 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소모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인간이 사회 속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언론이 담당해주길 바랍니다. 이런 역할이 제대로 이뤄질 때 진정한 사회통합도 가능해지겠지요.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덟 번째 주제는 사회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사회 통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자리에 설 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강물을 닮아야 합니다. 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은 항상 아래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바다가 됩니다. 가장 큰 물, 가장 낮은 물. 그것이 바다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니까 이름이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래로 손을 내미는 연대를 하방연대라고 부릅니다. 한 사회의 역량은 내부 소모를 줄이고 통합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통합은 낮은 곳, 약한 자와 연대해 나가는 하방연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 이처럼 아래를 향하지 않는 연대나 통합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불안에 바탕한 연대는 자칫 자신들보다 약한 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오만한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하는 통합과 연대는 추종이나 야합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찰의 힘에서 비롯된 당당한 자부심
  
  오늘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주제는 '성찰과 양심,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론 매체를 대할 때 그냥 한 번 보고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언론은 사회의 빠른 변화를 쫒아가며 표면의 출렁거림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론의 역할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진실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사실 보도를 넘어서 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문화를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역사 상 대표적인 성찰론자를 꼽으라면 장자를 들 수 있습니다. 장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개구리와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메뚜기와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개구리는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고, 메뚜기는 한 철밖에 살지 못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찰은 바다와 얼음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한계에 갇혀 바다와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개구리나 메뚜기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 시야에 바탕한 성찰을 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또 양심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적으로 조금 더 잘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인간적인 자부심, 자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오늘 강연을 마칠까 합니다.
  
  또 감옥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우리 방에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가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주는 수의만 입고, 알루미늄 식기 2개와 숟가락만 갖고 들어온 거예요. 심지어 런닝 셔츠도 입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참 딱해서. 치약도 좀 나눠주고 런닝 셔츠도 하나 벗어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면서 바로 거절하는 거예요. 표정도 어둡고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이상한 놈이라고 했어요.
  
  이튿날 세수할 때 제가 다시 치약을 좀 나눠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니까요"라고 하면서 세탁비누를 집어서 그걸로 양치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 보는 데서 나눠주려던 제 행동이 좀 부족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새 치약을 하나 따로 사서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줬어요.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 다 듣게 큰 소리로 "필요없다고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한 달 후에 제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치약 하나 사줄 수 있어요? 선생님한테는 받아도 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안 그래도 좁은 잠자리를 제가 또 양보해야 하잖아요"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친구는 사람이 역경 속에서 살아갈 때 약간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는 게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떳떳하게 자부심과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게 어려움을 견디는 데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 친구는 저처럼 개념어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지요.
  
  자부심을 키우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언론이 앞장서야
  
  이런 자부심과 주체성을 키워주고 존중해주는 사회, 다양성과 인간적 가치가 존중받는 문화는 이런 사회적 토양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토양을 만들어 가는 데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더구나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 매체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일방적으로 주장을 전달하기만 하는 매체가 아닌 까닭에 이런 역할을 담당하기에 더욱 제 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현석,여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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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20> 한자 단상(고종석)

2006. 7. 19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1817372785150.htm

[말들의 풍경] <20> 한자 단상
인류 최고의 시각 기호… 인터넷시대 아이콘 잠재력
한글전용 승리는 이론 아닌 시장의 논리
한자어가 우리말 절반 넘어 '분리' 불가
동아시아 밖 확산 전망… 조기 교육 필요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며 이 네모난 글자의 궁극적 퇴출을 전망하고 모색했지만, 한자는 약점이 많은 만큼이나 매력적인 문자체계다. 그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시각 기호다.

한국어 텍스트에서 한자를 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극소수 학술 서적을 빼면, 한국어는 오로지 한글로만 적히고 있다. 1945년 해방 뒤 오래도록 국어학계를 갈라놓았던 한글 전용론과 한자 혼용론 사이의 드잡이에서 한글 전용론이 결국 이긴 것이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이론이나 논리의 승리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한국어를 한글로만 적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 못지않게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도 튼실하다. 더 나아가, 같은 수준의 논리적 타당성으로 한국어를 로마 문자로만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내세우자면 내세울 수 있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또 법규범의 승리도 아니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법률 제 6호로 공포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은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이미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마 동안 필요한 때’가 한없이 늘어지면서 이 법률은 죽은 거나 진배없이 돼 버렸다.

이 법의 폐지와 함께 지난해 제정된 국어기본법이 그 14조 1항에서 “공공 기관의 공문서는 어문 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문자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한글 전용론의 승리를 뒤늦게 확인한 것일 뿐 거기 어떤 운동량을 준 것은 아니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승리이자 어찌 보면 시장의 승리다. 다시 말해 한국어 텍스트의 소비자인 한국 민중이 한글 전용을 바랐기 때문에 한글 전용이 이긴 것이다. 한자 혼용론의 실천적 성채였던 일간 신문이 하나 둘 한글 전용으로 돌아선 것도 새 세대 독자들의 문자 감수성을 마냥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가장 어기차게 한자 혼용을 고집했던 법학 교과서조차, 이제 한글만을 쓰되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괄호 안에 가두어 덧대는 식으로 표기 체계를 바꾸고 있다. 한글 전용의 확산은 가로쓰기의 확산과 궤를 같이 했다. 한 세대 이전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세로쓰기 조판에 한자 투성이 한국어 텍스트를 요즘 젊은 세대는 쉽사리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한 자연 언어를 한 문자 체계로만 적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텍스트나 한 문장 안에 이질적 문자 체계를 뒤섞는 관습은 일본어나 한국어 바깥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제1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키릴 문자로도 적고 로마 문자로도 적지만, 이 언어의 경우에도 한 텍스트 전체를 키릴 문자로 쓰거나 로마 문자로 쓸 뿐 한 텍스트 안에, 심지어 한 문장 안에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섞어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국어 형태 음운론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한글 한 가지로 한국어를 적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더라도, 한국어 화자가 한자에서 온전히 독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 이래 지난 세기 말까지 한국인이 쌓아온 문화 자산이 대부분 고전 중국어, 곧 한문 안에 담겨 있다는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중국어(19세기 말 이래 한국어로 쏟아져 들어온 일본제 한자어를 포함한)는 지난 2,000년 이상 주로 문자 통로를 거쳐 한국어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이제 중국계 한국어 곧 한자어는 한국어 어휘의 반을 훨씬 넘게 되었다. 이 한자어들의 적잖은 수는 한자에 대한 지식 없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글로만 쓴 한국어 문장을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한자 지식이 어슴푸레하게나마 그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설령 한자어를 이해하는 데 한자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어 문장을 한글로만 적는 관습을 확립하는 것과 나란히, 초중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한자 교육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은 한자 교육 얘기만 나오면 “그 수만에 이르는 글자를?”이라며 과장하지만, 한국어 감각을 키우고 유지하는 덴 2,000 자 안팎이면 넉넉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심지어 중국어에서도 출판물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950자에 지나지 않고, 99%는 2,400자로 채워진다.

루쉰(魯迅)이나 궈모뤄(郭沫若) 같은 20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漢字不亡, 中國必亡)며 이 네모난 글자(方塊字: 한글도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쓴다는 점에서 ‘방괴자’의 일종이다)의 궁극적 퇴출을 전망하고 모색했지만, 결국 한자도 중국도 망하지 않았다.

사실, 익히기 어렵다는 점을 잠시 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피면, 한자만큼 매력적인 문자 체계도 없다. 한자는 지금 살아있는 문자 가운데 가장 긴 역사를 지닌 체계다. 갑골 문자가 사용되던 기원전 1300년께부터 3천 수백년 동안 바탕을 흩뜨리지 않으며 이어진 그 문자사의 연면성은, 거기 담긴 중국 문화의 찬란함과 더불어, 인류 전체의 자부심을 큰 부분 떠받치고 있다.

상(商) 왕실의 점복(占卜) 기록인 갑골문에서 시작해 주대(周代)의 금문(金文), 춘추전국시대의 대전(大篆)과 고문(古文), 진(秦)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대(漢代) 이후의 예서(隸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에 이르는 그 필체의 변전도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한자는 ‘글’쓰기가 아닌 ‘글자’쓰기를 하나의 버젓한 예술 갈래로 만든 거의 유일한 문자 체계다. 이른바 인쇄체와 구별되는 필기체를 고안해낸 문자 체계들도 글자 쓰기를 깊이 있는 예술로 만들어내진 못했다.

게다가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의 네 조자법(造字法)과 전주(轉注) 가차(假借)의 두 용자법(用字法) 등 이른바 육서(六書)를 통한 기호와 현실의 율동적인 짝짓기도 눈 호사를 베풀기에 넉넉할 만큼 현란하다. 다른 모든 문자 체계처럼 한자 역시 음성언어의 그림자일 뿐이지만, 한자의 이 별난 진화과정은 한자 하나하나가 실물이라는 환상을 때로 불러일으킨다.

형태가 소리만이 아니라 뜻에 대응하는, 그래서 한 음절로 발음하는 한 글자가 그대로 한 형태소가 되는 표의성(表意性)은, 육서를 통한 그 독특한 발달 자취와 함께, 한자 물신주의을 부추긴다. 그것은 위험한 유혹이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한자는 그 하나 하나가 의미 단위다.

다시 말해 형태소다. 또 한자는 그 하나 하나가 음절단위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는 소리 글자이기도 하다. 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형성자는 ‘소리 글자로서의 한자’라는 만화경 속에서 아름답고 진기하게 펼쳐지는 의미의 풍경들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런저런 속자(俗字)들, 국민당 정권의 간체자(簡體字)와 공산당 정권의 간화자(簡化字), 일본식 약자(略字) 등 수많은 이체자(異體字)의 존재도 호사가들의 눈길을 끈다. 이런 이체자들은 로마 문자 I와 J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거나 V와 U가 본디 한 글자였다는 것과는 급이 다른 문자의 화사한 곡예다. 이런 매력들 대부분은 자주 한자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세월 한 문자 체계가 겪은 모험과 장정의 위대한 흔적이다.

이 한자의 모험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인’이라 부르는 대륙 사람들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한 때의) 베트남 지식인들도 그 모험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베트남어 표기에서는 가뭇없이 사라졌고 한국어 표기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한자는 동아시아 공통 문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니시가키 도루(西垣通)도 지적했듯, 한자란 무릇 중국어의 음성 표기라기보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음성 언어를 연결하는 일종의 ‘번역’으로 기능해 왔다.

니시가키는 한 논문에서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문자(시각 기호)’라는 가능성을 새롭게 연 미디어라는 점을 지적한 뒤, 기본적으로 ‘시각 언어’인 한자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새 생태 환경의 적자(適者)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추상 개념을 표현하는 아이콘으로 한자보다 더 나아간 시각 기호는 없기 때문이다(‘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미우라 노부타카 외 엮음, 이연숙 외 옮김, 2005, 돌베개).

니시가키의 전망이 들어맞든 그렇지 않든, 한자 지식은 지금보다 훨씬 빨리 동아시아 바깥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그리고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 한국 한자음의 특성
고유어와 다른 음운체계 '쾌' 왜엔 'ㅋ' 발음 全無
지식인 규범어… 방언 없어

한국 한자음은 한국어 음운 체계의 변화에 한편으로 순응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항하며 제 나름의 체계를 이뤘다. 그래서 한자음 체계는 고유어 소리 체계와 꽤 다르다. 중세 후기와 근대를 거치며 고유어 음운 체계에서 반치음과 아래아가 사라지는 것과 나란히 한자음도 반치음과 아래아를 구축해 버린 것은 순응의 예다. 그러나 한자음은 그 시기 고유어에 매우 흔하게 된 /ㅋ/ 소리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ㅋ/을 포함하는 한자음은 ‘쾌’ 음절 하나밖에 없다. 또 내과(內科), 불소(弗素), 활달(豁達), 격정(激情)의 둘째 음절에서처럼 한자음이 환경에 따라 된소리로 실현될 수는 있지만, 낱낱의 한자음에선 고유어에서와 달리 된소리가 체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드물게, 끽(喫), 쌍(雙), 씨(氏) 따위가 있을 따름이다.

한자음은 /ㄷ/ /ㅅ/ /ㅈ/ /ㅊ/ /ㅋ/ /ㅌ/ /ㅍ/ /ㅎ/ 따위를 마지막 음소로, 다시 말해 받침으로 취하지 않는다. 고유어에서라면 ‘믿다’, ‘웃다’, ‘멎다’, ‘낯’, ‘부엌’, ‘밭’, ‘뒤엎다’, ‘좋다’에서처럼 이런 음소들이 한 음절의 종성으로도 가능하다. 또 고유어에는 ‘넓다’, ‘굵다’에서처럼 겹받침이 존재하지만 한자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유어에서 볼 수 있는 /ㅂ/ 소리와 /w/ 소리의 역사적 음운 교체 현상(예컨대 ‘덥다’ ‘춥다’ 따위가 ‘더운, 더워서’ ‘추운, 추워서’ 따위로 활용하는 것) 따위가 한자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자음에는 지역적 변이체 다시 말해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유어는 여러 방언으로 분화돼 있고 그 방언에 따라 제 나름의 음운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자음은 통일된 규범에 따라 오직 하나의 체계로 존재할 뿐 방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예컨대 /ㅡ/ 소리와 /ㅓ/ 소리를 구별하지 않는 일부 영남 방언에서 금(今)과 검(檢)이 중화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한자음에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지식인들의 보편적 규범어로 기능했다는 사정과 관련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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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21> 한글-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고종석)

2006. 7. 26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2518254085150.htm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 <21> 한글-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한글은 음운론의 결정판이지만 한자의 영향으로 음절문자 한계
소리에 맞춰 글자꼴 갖춘 음소문자 "견줄 데없는 문자학적 호사" 평가


한 서양학자의 찬탄대로 한글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다. 거기엔 15세기까지 인류가 축적한 음성학 음운론 지식이 찬란하게 망라돼 있다.

한국인이 제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값어치있는 것 하나만을 골라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꼽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을 국보 1호로 새롭게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한글에 대한 이런 자부심에는 넉넉한 근거가 있다. 한글은 인류가 만들어낸 문자체계 가운데 가장 진화한 것이니 말이다.

문자체계의 진화는 대체로 그림글자(상형문자)에서 시작해 그것의 추상적 변형인 뜻글자(표의문자)를 거쳐 음절문자, 음소문자로 나아가는 경로를 밟아왔다. 음절문자와 음소문자를 아울러 소리글자(표음문자)라 이른다. 고대 이집트 문자나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는 그 추상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림문자로 뭉뚱그릴 수 있고, 갑골문자에 바탕을 둔 한자는 전형적인 뜻글자이며, 한자의 초서체에서 나온 일본의 히라가나와 이를 모난 꼴로 다듬은 가타카나는 음절문자다. 그리고 현대에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체계인 로마문자(라틴문자)와 키릴문자, 그리고 그것의 어버이격인 그리스문자는 음소문자다. 한글은 로마문자나 키릴문자 같은 음소문자에 속한다.

글자 하나를 음소 하나에 대응시키는 음소문자가 고안됐다는 것은 사람들이 음절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가/ 소리를 /ㄱ/ 소리와 /ㅏ/ 소리로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음절문자인 가나문자를 만든 사람들은 그런 분석을 할 수 없었거나, 설령 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자체계에 반영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로마문자나 한글 같은 음소문자에서와 달리, 가나문자 체계에서는 /가/ 소리가 낱글자로 표현된다.

그런데 한글이 음소문자라는 사실만으로 한글에 대한 저 큰 자부심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그리스문자 로마문자 키릴문자 따위를 거론하기도 했거니와, 음소문자 체계는 인류사회에 드물지 않다. 게다가 그리스문자는 기원전 10세기께 이미 틀이 잡혔고, 로마문자는 기원 전 7세기께 확립됐으며, 늦둥이라 할 키릴문자가 고안된 것도 9세기다. 그에 비해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다. 대표적 음소문자들과 한글의 탄생에는 길게 보아 2,500년, 짧게 보아도 6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이 음소문자라는 사실만으로 으스대는 것은 한국인들이 서양사람들보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나 늦깎이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것과 다름없을 테다.

그런데 한글은 그 제자(製字)원리에서 다른 음소문자 체계와는 격이 다르다. 현존하는 주류 음소문자의 기원이 고대 이집트 그림문자에 있는 만큼, 이 문자들에는 별다른 제자원리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앞선 시대의 문자 꼴을 조금씩 바꾼 것이 전부다. 반면에, 훈민정음에는 고도의 음성학 음운론 지식이 응축돼 있다. 훈민정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인 동아시아학자 게리 레드야드는 제 학위 논문에 이렇게 썼다. “글자 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오래고 다양한 문자사에서 그 같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 꼴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 꼴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 기관을 본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다.”

레드야드가 지적했듯, 한글 닿소리 글자들은 조음 기관을 본떴다. 예컨대 ‘ㄱ’과 ‘ㄴ’은 이 글자들이 나타내는 소리를 낼 때 혀가 놓이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ㅁ’은 입 모양을 본뜬 것이고, ‘ㅅ’은 이 모양을 본뜬 것이며, ‘ㅇ’은 목구멍을 본뜬 것이다. 조음기관의 생김새를 본떠 글자를 만든다는 착상 자체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 꼴을 체계화”했다는 레드야드의 말은 무슨 뜻인가?

조음 기관을 본뜬 기본 글자 다섯(ㄱ, ㄴ, ㅁ, ㅅ, ㅇ)에다 획을 더함으로써, 소리나는 곳은 같되 자질(소리바탕)이 다른 새 글자들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예컨대 연구개음(어금닛소리) 글자인 ‘ㄱ’에 획을 더해 같은 연구개음이되 유기음(거센소리) 글자인 ‘ㅋ’을 만들고, 양순음(입술소리) 글자인 ‘ㅁ’에 획을 차례로 더해 같은 양순음이되 새로운 자질이 더해진 ‘ㅂ’과 ‘ㅍ’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홀소리글자의 경우에도, 이를테면 ‘ㅗ’와 ‘ㅜ’는 이것들이 둘 다 원순모음이면서도 한 쪽은 밝음이라는 (상징적) 자질을 지닌 데 비해 다른 쪽은 어두움이라는 자질을 지녔다는 점을, 덧댄 획의 위아래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로마문자와 견줘보면 한글에 녹아든 음성학 음운론 지식이 얼마나 깊고 정교한지 이내 드러난다. 예컨대 이나 잇몸에 혀를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들을 로마문자로는 N, D, T로 표현하지만, 이 글자들 사이에는 그 모양의 닮음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이와 비슷한 소리들을 내는 글자들을 ‘ᄂ’, ‘ᄃ’, ‘ᄐ’처럼 형태적으로 비슷하게 계열화함으로써, 이 소리들이 비록 자질은 다르지만 나는 곳이 같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준다. 즉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음절을 음소로 분석하는 데서 더 나아가, 현대 언어학자들처럼 음소를 다시 자질로 분석할 줄 알았다. 그래서 영국인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을 로마문자 같은 음소문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질문자’라 불렀다.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라는 레드야드의 찬탄은 과장이 아니다. 훈민정음은 그 때까지 인류가 축적한 음운론 음성학 지식을 집대성해놓았던 것이다.

이런 제자 원리를 떠나서라도, 소리를 섬세하게 나타내는 기능에서 한글에 앞설 만한 문자체계는 찾기 어렵다. 근년에 이르러 한글 꼴을 다양하게 손질한 기호로 국제음성문자(I.P.A.)를 갈음하려는 한국인 학자들의 시도도 있었거니와, 이런 시도는 기실 훈민정음이 창제된 15세기부터 일찍이 이뤄진 바 있다. 훈민정음은 공들여 만들어진 뒤에도 한자의 위세에 눌려 문자왕국의 변두리에서 오래도록 숨죽이고 있어야 했지만, 그 기간에도 그 꼴이 조금씩 바뀌어 중국어나 만주어, 몽고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의 소리를 표기하는 발음기호로 사용돼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한글은 소리를 드러내는 데 체계적이고 섬세하다. 그렇다면 한글은 보탤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문자체계인가? 그렇지는 않다.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한글을 순수하게 ‘미적으로’ 견줘보자.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보는 이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 쪽을 편드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아직 한글 자체(字體)가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탓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한글이,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달리, 음절 단위로 모아쓰게 돼 있다는 데 있는 듯하다. 이렇게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는 이상, 아무리 자체를 다양화해 봐야 미적 세련의 정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일껏 고생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도록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테다. 뜻글자인 한자 역시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네모난 형상 속에 한 음절씩을 담아놓고 있는 음절문자 성격을 겸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첫 음절 ‘훈’을 굳이 네모나게 모아쓸 게 아니라 소리의 선조성에 따라 ‘ㅎㅜㄴ’처럼 한 줄로 벌여놓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한자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으리라. 아무튼 한글은 본질적으로 음소문자이고 그 제자원리를 보면 거기서 더 나아간 자질문자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그 실제 운용에서는 음소문자에 못 미치는 음절문자에 머물러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주시경 이래 한글을 풀어쓰려는 시도가 더러 있었다. 예컨대 ‘한국’을 ‘하ㄴㄱㅜㄱ’처럼 쓰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쓰게 되면 자체에 변화를 주며 미적 치장을 할 여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진다. 북한은 정권 초기에 주시경의 제자 김두봉의 제창으로 한글 풀어쓰기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과격한 문자혁명이 남북한 사이의 문자 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이를 통일 뒤로 미룬 바 있다. 한글을 지금처럼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것과 로마문자처럼 음소 단위로 풀어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읽기 편한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또 오랜 관습을 한꺼번에 허무는 문자혁명은 적잖은 부작용을 낳을 테다. 그러나 이런 모아쓰기가 한글 속에 남아있는 한자체계의 화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글 글자 수는 몇 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가 많아 이를 안쓰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들었다"는 세종의 말처럼, 훈민정음은 보통 스물여덟자로 치는 것이 상례다. 그 가운데 넉 자가 없어져, 지금은 보통 한글 글자 수를 스물넷으로 친다. 그런데 한국어엔 이 스물넉 자로 적을 수 없는 소리도 많다. 그럴 땐 두 개 이상의 자모를 어울러서 적는다. 그런 겹글자는 닿소리글자 다섯(ㄲ, ㄸ, ㅃ, ㅆ, ㅉ)에 홀소리글자 열하나(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를 더해 열여섯이다. 흔히 '한글 스물넉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겹글자들을 독립적 글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겹글자들도 독립적 글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북한의 '조선어 자모' 수는 마흔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북한 쪽 체제가 더 합리적이다. 특히 남쪽에서처럼 'ㅐ'나 'ㅔ' 같은 단모음 글자를 독립된 글자로 여기지 않고 'ㅏ'와 'ㅣ', 'ㅓ'와 'ㅣ'의 병렬로 치는 것은 언어 직관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다. 겹글자들을 독립된 글자로 취급하는 북한에서는 사전에 말을 올리는 순서를 정할 때 홑글자로 시작하는 말들을 모두 배열한 뒤에야 겹글자로 시작하는 말들을 배열한다. 그래서 이를테면 'ㄲ'으로 시작하는 말은 'ㅎ'으로 시작하는 말보다 뒤에 나온다.

또 모음으로 시작하는 말들(소리값 없는 'ㅇ'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남한 사전에서처럼 'ㅅ' 항목 다음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음으로 시작하는 낱말들이 모두 끝난 뒤에, 즉 사전의 맨 뒤에 올린다. 모음 겹글자의 순서도 남쪽과 사뭇 다르다. 이 순서를 익혀야 북쪽 사전을 찾아보는 데 어려움이 덜하다. 그 순서는 'ㅐ, ㅒ, ㅔ, ㅖ, ㅚ, ㅟ, ㅢ, ㅘ, ㅝ, ㅙ, 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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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옥 | 시민발전 대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최근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발전노조 파업, 한국노총과 경총의 복수노조-전임자 임금문제 5년 유예 담합에 뒤이은 노사정 3년 유예 합의와 로드맵 타결,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 타결이 그것이다. 지난 9월 4일 한전 산하 중부, 남동, 동서, 남부, 서부 등 5개 발전회사로 구성된 발전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대응과 직권중재, 40% 이하로 떨어진 파업참여율로 15시간 만에 파업을 철회하고 말았다. 쟁점사항에 대해 회사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게다가 발전노조가 부각시키려던 발전 5사 통합이나 민영화 반대 등 이른바 사회공공성 투쟁의 관점에서도 의미있는 의제화를 달성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실상 철저하게 패배한 파업이었다.

파업은 노동자의 유일하고도 유력한 무기임을, 때문에 맨 마지막에 꺼내드는 최후의 무기임을 모르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은 없다. 그리고 오늘날 파업에 대해 언론이 유리하게 보도하는 경우 또한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노동조합도 없을 것이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파업은 시민사회의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그 자체 사회책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조합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지옥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일정하게 공감대가 있었던 1980년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특히 대기업 공공부문의 파업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들의 배부른 투정이라는 즉자적 반감이 널리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조합원의 강철같은 단결만으로 승리하는 파업전술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전노조는 과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파업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발전노조의 파업 찬반투표 찬성률은 59%였다고 한다. 100%에 가까운 절대 찬성이라고 해도 파업에 들어가기까지에는 너무나 위험한 복병이 많은데, 이 정도의 찬성률은 미흡하기 짝이 없으며 쫓기듯이 파업선언을 하고 금방 철회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준비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협상의 마지막 핵심 쟁점이던 해고자 복직, 4조 3교대에서 5조 3교대로 확대, 핵심인력인 4직급의 조합가입 의무화 등의 사안이 과연 파업까지 할 만큼 중차대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미 2002년 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38일 동안 파업을 벌였던 발전노조의 학습효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결국 발전노조의 이번 파업은 노동조합 내부정치의 결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내년에 실시될 예정이던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는 결국 막판에 한국노총과 경총이 맞바꾸기식으로 5년 유예에 전격 손을 잡으면서 연기되고 말았다. 이어 노동부가 이를 받아들여 3년 유예로 노사정이 합의하면서 그동안 지루하게 손때만 묻히던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도 타결되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이같은 결정은 그럴듯한 명분과 까닭이 없다는 점에서 노동조합 내부정치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날과 달리 경총이 오히려 산별체제로 가야 자신의 존재의의를 더 얻게 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번 3년 유예 결정의 배후로 무노조의 삼성(최근 삼성전자와 삼성중공업이 경총에 가입했다)이 지목되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참여정부의 로드맵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결국 노사관계 로드맵 또한 차기정권으로 떠넘기며 무책임 무능력의 '노(盧)의 맵'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극도의 실망감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한국노총은 해서는 안될 검은 거래를 하고 말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노조 금지는 그동안 단결권 제약의 주범이자 산별체제로의 전환에 핵심 걸림돌이었다. 때문에 내년도 실시를 앞두고 지난 6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등 금속연맹 산하의 수많은 노조에서 산별전환 투표가 가결되고 다양한 업종에서 이제 새로운 산별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차원이 전혀 다른 전임자 임금문제와 연계해 시행을 몇년 뒤로 미루자고 사측과 합의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기득권자의 소탐대실이다. 얻은 것은 몇년 연장된 불안한 의자일 뿐이지만 잃은 것은 도덕과 명분과 정체성이다. 노동조합의 현실과 내부 고민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한국노총의 운동이념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드는 사건이다. 한국노총의 선언과 강령에서 밝히고 있는 노동자의 기본권 확보와 노동조합의 자주성 확립, 단결과 조직의 통일 등에 모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8월 25일 충분한 준비와 경험을 바탕으로 총파업 하루 만에 직권중재 없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산별협약서를 체결한 보건의료노조의 성과는 단연 돋보인다. 게다가 의료노사정위원회 설치, 병원식당에 우리 농산물 사용, 국내외 재난지역에 노사공동 긴급 의료지원 등 의료공공성 강화의 내용까지 합의한 것은 앞으로의 산별노동운동에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성과와 더불어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고난과 악조건을 견디며 우애와 협동의 정신을 믿고 아래서부터 조직화에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노조들이 풀뿌리 노동운동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눈을 돌려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이 도대체 어떤 운동이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아니 운동이념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이제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은 사라지고 노동조합의 내부 권력정치와 투쟁과 협상만 즐겁지 못한 소음으로 남을 것인가. 오늘날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어서며 갈수록 양극화가 확대되는 상황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이념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하는 피크오일은 한국경제에 지진해일을 몰고 올 것이며, 식량재앙 또한 조만간 밀어닥칠 현실이다.

이런 재앙의 상황은 가장 먼저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삶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이런 위기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좁아터진 내부정치에 골몰하는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새로운 이념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삶과 자연에 뿌리를 둔 이념은 녹색을 띤다. 한국 노동운동의 이런 풀뿌리 녹색이념은 어디서 씨앗을 틔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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