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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언어와 문학의 위엄
정홍수|문학평론가

평생 형형한 호랑이 눈을 부릅뜬 채 한시도 몸과 머리를 쉬지 않고 살아온 여든 어름의 늙은 아버지가 있다. 일찍 아비를 여의고 눈앞이 캄캄한 세월을 죽을 각오로 살아냈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으면서도 농사만 짓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야무지게 스무 마지기 논농사와 3천평 밭농사를 일궜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깜깜한 논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가혹한 운명을 무릎 꿇리며 한세상을 살아왔다.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자 선을 긋고 단호하게 눈을 거두어버리고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이 옆에서는 지아비와 자식밖에 모르는 한없이 순종적인 어머니가 그림자처럼 평생을 함께했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아들은 노모로부터 아버지가 자꾸 정신을 놓는 것 같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소설 화자인 아들은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을 하루 앞두고 직장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월차를 낸 뒤 시골집으로 향한다. 정지아(鄭智我)의 단편 〈봄빛〉(《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이야기다.

간략히 소설의 밑그림을 옮겨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소설 유형 아닌가. 감동의 발생 지점도 어느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런 소박한 곡조에 어떤 새로움이 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다. 이 소설이 주는 투명하고 묵직한 감동은 그런 쉬운 짐작을 무색케 하면서 인간 진실의 처연한 봄빛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딱히 언어론적 전회(轉回)를 비롯한 다양한 담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언어의 재현적 역할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궁핍화와 함께 본래의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부분적인 소설적 기술로 그 위상이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논의는 내려놓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보여주는 일이 좋은 소설의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라는 점을 정지아의 〈봄빛〉은 새삼스럽게 웅변한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을 맞아 노모가 차려낸 저녁밥상의 풍경이 단연 그러하다. "그가 온다고 아침부터 종종걸음치며 준비했을 밥상은 '한가꾸'를 넣은 된장국과 취나물과 머위대와 두릅, 그리고 묵은 김장김치가 전부였다." 아들은 지난가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반찬 가짓수에서 불과 두 철 사이에 또다시 세월이 앗아가버린 노모의 쇠약해진 기력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짠한 밥상이 들려주는 정말 비감한 이야기는 늙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의 몫이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대화 사이 소설 화자인 아들의 반응은 생략한다).

"내동 일렀는디 또 뚜부가 없그마이!"
"아이고, 점심에 뚜부를 그렇게 묵고 또 먼 뚜부를 찾소? 저녁은 그냥 잡수씨요. (…)"
"나가 원제 점심에 뚜부를 묵어!"
"환장하겄네.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그마이. 인자 점심에 멀 묵었능가도 모리겄소?"
"그걸 왜 몰라! 점심에 청국장 묵었제. 나가 그것도 모르깨미 이 사램이 꺼떡하먼 노망 들었다고 엄한 사램을 잡고 야단이여, 야단이!"
"청국장에 뚜부가 들었습디여? 안 들었습디여?"
"그까짓 것이 월매나 된다고!" (…)
"미치고 환장하겄네. 그 징헌 놈의 뚜부, 된장찌개에 넣고 청국장에 넣고, 동태찌개에 넣고, 끼니마동 빠진 적이 없그마는 먼 놈의 뚜부를 또 지지라요?" (…)
"아 긍게 누가 이것저것 하랬냐고! 그냥 뚜부 듬성듬성 썰어넣고 멜치나 멫마리 너먼 될 것을 그거시 멋이 어렵다고 한끼를 안해줘! 한끼를!"

전에 없던 아버지의 반찬 타령도 그러하지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어머니의 변화 또한 아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그런데 《미메시스》의 저자가 펼친 논의에 기댄다면 스타일 분리를 엄격히 고수하던 고전주의 문학의 세계에서는 희극 장르에나 어울릴 법한 이 범속하고 격조없는 대화의 언어가 인간 이해의 장에 던져주는, 착잡하지만 풍요로운 실감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도 억양에 실린 이 '뚜부'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문학적 표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비는 '종'일 수도 있고, '남로당'일 수도 있고, '개흘레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피임약을 사러 죽어라 뛰고,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계속 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비든 생로병사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다. '뚜부'는 그 불가항력의 시간 앞에 도착한 모든 아비들의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생의 의지이며 사위어가는 마지막 위엄일 것이다.

마침내 근대 리얼리즘이 일상의 범속한 현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현실의 묘사 혹은 재현의 중심에 섰던 소설은 그 자신이 비추어낸 역사나 인간이 생각 이상으로 초라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짐짓 놀라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장식적인 세련을 거부하고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그들의 감각적 진실을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소설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봄꽃〉의 '뚜부'는 그같은 근대소설의 근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밥상을 둘러싼 언어들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 앞에 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퍅한 일생을 요약하는 강렬한 문학적 위엄에 어찌 닿을 수 있었으랴. 이것은 닥치는 대로의 현실에서 수집한 소박한 언어가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치매선고를 받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새벽부터의 긴 실랑이 끝에 지쳐 잠든 늙은 부모를 후면경으로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과 눈물에 독자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 눈앞이 캄캄했다. 근디 이상하지야. 눈앞이 캄캄헝게 무선 것이 없드라. 아홉살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상하게 그 역시 무섭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로는 혹 싱거운 사족은 아닐 것인가. 그러나 정지아의 명편 〈행복〉의 여로를 여기에 겹쳐 떠올리는 독자라면, 이 담담한 수락이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어떤 느꺼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 계간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계간평 중에서


필자 소개 정홍수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2006.08.15 16:07 l ⓒ 정홍수 2006
2006창비신인문학상 공모
20세기한국소설 전50권 완간..
백낙청 강연_한반도식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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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고종석)

2006. 7. 12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1117464985150.htm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가시내… 서리서리… 내 영혼 적시는 울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은 세대와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서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김수영 시인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그 심판관의 편견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먼저 깊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라서 외국어로 배운 언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문화적 허영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기 쉽다. 프랑스 바깥에서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제 몸뚱어리에도 이물감을 주는 프랑스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는 것 따위가 그 예다. 마흔일곱 해 동안 한국어를 써온 한 남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를 벌여놓는다.

하나, 가시내.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가시내’에는 붉은 밑금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이 낱말이 규범 한국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그것이 표준어 ‘계집애’의 서남 방언이기 때문이다. ‘가시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입힌 이로 서남 출신의 시인 서정주가 있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입마춤’)이나, “눈물이 나서 눈물이 나서/ 머리깜어 느리여도 능금만 먹?杵底? 어쩌나… 하늬바람 울타리한 달밤에/ 한 집웅 박아지꽃 허이여케 피었네”(‘가시내’) 같은 시행에서, 가시내는 순애와 애욕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다. 사랑과 관련된 정서적 소구력의 크기에서, 표준어 ‘계집애’는 도저히 ‘가시내’에 다다를 수 없다.

둘, 서리서리. 부사 ‘서리서리’는 동사 ‘서리다’에서 나왔다. 서린다는 것은 (국수나 새끼 따위를)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 감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리서리’는 포개어 감기는 모양과 관련 있는 부사다. 국수 뭉치를 세는 단위 ‘사리’가 ‘서리서리’와 동원어(同源語)임은 물론이다. ‘서리서리’는 사랑의 부사다. 이 낱말을 사랑의 부사로 만든 사람은 황진이라는 여자다. 이 여자의 유명한 시조 한 수는 이렇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애인과 떨어져 있는 황진이에게 겨울 밤은 한없이 길다. 그런데 그 밤은 애인과 함께라면 너무나 빨리 새버릴 밤이다. 시간의 빠르기는 각자의 심리 상태에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시인은 이 밤을 여투어두기로 한다. 그녀는 밤을 한 토막 잘라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놓기로 한다. 애인이 온 날 밤에 굽이굽이 펴기 위해서. 황진이의 놀라운 상상력은 시간을 공간으로, 물질로 바꿔놓고 있다.

셋, 그리움.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적 효과다. 프랑스어 화자들은 “나는 네가 그리워”를 “너는 내게 결핍돼 있어”(Tu me manques)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랑의 시는 그리움의 시다. 사랑은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서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나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서정주의 ‘아지랑이’)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사사로운 감정이지만,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이성부의 ‘벼’)이나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정치적 사랑과 이어져 있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둘 다 빈 데를 채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좀더 객관적으로는 ‘기다림’이라 부른다.

넷, 저절로. ‘저절로’는 인텔리전트빌딩이나 하이테크파크의 작동 원리다. 그것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또는 노동에서 배제하는 새로운 사회의 부사다. 다시 말해 ‘저절로’의 공간은 ‘인간이 거세된 인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자연의 공간이기도 하다.

16세기 문신 김인후(金麟厚)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 노래한 바 있다. ‘저절로’는 애씀이나 집착을 넘어선, 마음과 몸의 가장 높은 단계이기도 하다. 인위와 자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 ‘저절로’의 매력 또는 마력이다.

다섯, 설레다. 설렘은 마음의 나풀거림이다. 그것은 정서적 정신적 미숙의 증상일 수도 있다. 부동심(不動心)은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이 다다르려 애쓴 이상적 마음상태였다. 그러나 설렘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소풍 전날의,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찻집에서의, 설날 해돋이 직전의 설렘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생의 정당한 사치다. 그것은 생의 밋밋함을 눅이는 와사비다.

여섯, 짠하다. 내가 늘 펼치는 한국어 사전에는 ‘짠하다’가 “지난 일이 뉘우쳐져 못내 마음이 언짢고 아프다”로 풀이돼 있다. 내가 굳이 사전을 펼쳐본 것은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짠하다’에 붉은 밑금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밑금이 그어지리라 지레짐작했다. 이 말을 서남 방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의 설명이 표준어 ‘짠하다’의 올바른 정의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짠하다’는 사전의 정의와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그 뉘앙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어 화자 가운데서도 서남 지방 사람들일 것이다. 서남 사람들이 잘 쓰는 ‘짠하다’는 표준어 ‘안쓰럽다’와 뜻이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는 것 같다. ‘짠하다’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있다. ‘짠하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형용사다.

일곱, 아내. ‘아내’라는 말이 내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테다. 요즘엔 젊은 세대고 나이든 세대고 할 것 없이 ‘아내’ 대신 ‘와이프’라는 말을 즐겨 쓰는 듯하다. 힘센 언어에서 차용된 외래어는 그 비릿한 사용 맥락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들리게 마련이지만, 이 ‘와이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어 속에 끼여든 ‘와이프’는 그 본적지에서와 달리 천박하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여덟, 가을. 지방에 따라 ‘가을’이라는 말이 ‘가을걷이’ 곧 ‘추수’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 걸 보면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을은 또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미국 사람들의 ‘가을’(fall)에는 그 조락의 상상력이 또렷하다. 성함의 끝과 쇠함의 시작이 맞닿아 있는 때가 가을이다.

아홉, 넋. 넋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공식 통계와 상관없이 인류의 종교적 심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뜻일 테다. 넋이 과학의 까탈스러운 눈 앞에 제 모습을 번듯하게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넋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얼마나 납작할 것인가.

열,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술은 뇌세포에 상처를 낼 정도로, 또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각이 흐릿해져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거나, 과장된, 또는 가장된 애상의 몸짓이 펄럭일 정도로 마실 일이 아니다. 이 말을 해 놓고 보니 쑥스럽긴 하다. 나 자신 ‘음주인’의 직업윤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시인 김수영이 꼽은 말은?
마수걸이·에누리·은근짜·총채… 상인집안 내력에 장사 용어 많아

시인 김수영(金洙暎ㆍ1921~1968)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은 바 있다. 시인 자신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에 들은 말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상인이라 나는 어려서 서울 아래대의 장사꾼 말들을 자연히 많이 배웠다”고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 말들 가운데는 ‘시장 언어’가 꽤 있다. 장사꾼의 공간이라는 ‘아래대’란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 맞은편의 서울 서북 지역은 ‘우대’라 불렀다.

젊은 독자들 귀에 설지도 모를 말들을 설명하자면 ‘마수걸이’는 하루나 한 해 중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뜻하고, ‘은근짜’는 몸을 파는 여자를 뜻하며, ‘서산대’는 옛날 글방에서 학동들이 책의 글자를 짚는 데 사용하던 막대기다. 먼지떨이라는 뜻의 ‘총채’도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듯하다.

김수영이 꼽은 이 말들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 세대(와 출신지역과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젊은 세대라면, 설령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포착해야 할 뉘앙스를 도무지 잡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의 뉘앙스)이 변하는 것은, 그래서 아름다운 말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수영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다며 “‘얄밉다’ ‘야속하다’ ‘섭섭하다’ ‘방정맞다’ 정도의 낱말이 퇴색한 말로 생각되고 선뜻 쓰여지지 않는 반면에, ‘쉼표’ ‘숨표’ ‘마침표’ ‘다슬기’ ‘망초’ ‘메꽃’ 같은 말들을 실감 있게 쓸 수 없는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가 우리의 세대”라고 푸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수영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는 언어의 생태학 속에서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일 수밖에 없다. KBS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의 ‘세대 공감 OLD & NEW’라는 코너는 한 세대의 말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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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선재동자 > 퓨전 스타일의 글쓰기 방식을 제대로 맛보다!
대학생 글쓰기 특강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요즈음 범람하고 있는 논술 관련 서적들을 보면 우선 그 양에 질식할 것 같다. 독서와 논술이 이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으로 사용되고부터 엄청난 양의 논술 관련 서적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양에 비해 그 질적 가치를 따지다 보면 이내 허망해지기 일쑤이다.


대개는 논술이 마치 언어의 형식적인 면만을 야무지게 다루어 내면 되는 줄 아는 냥 언어의 형식면을 주로 다루거나 혹은 내용의 피상적인 면만을 건드리는 경우가 가장 다반사다. 물론 그 내용 또한 대부분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동서양 고전의 문구나 문장을 일부분 인용해서 제시해서 논술을 유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생 글쓰기 특강, 강준만 저, 인물과 사상사>는 하지만 기존의 논술 관련 서적과는 그 거리를 두고 있다. 글쓰기의 방법을 다루되 단순히 언어의 형식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가치와 사상의 문제에 역점을 두면서 글쓰기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편향과 편견의 논술의 넘어서!


우선 그의 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소제목이 ‘세상엔 공짜는 없다’였다. 이미 방대한 양의 대중서적을 낸 저자이기에 그 말이 담고 있는 고충과 아픔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실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과 사상’을 비롯해서 ‘한국 현대사 산책’에 이르기까지 몇 십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는 이 시대의 다양한 부분을 감싸고 때론 찌르면서 애독되고 있다.


저자 강준만은 우선 언론학과 교수답게 신문사설에서 논술 공부의 졸가리를 잡아라고 강조한다.


“매일 신문 사설 10편 내외를 꼼꼼히 읽는 버릇을 몇 개월간만 지속하면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내 경험담으로 보증한다. 속는 셈 치고 일단 한 번 시작해보기 바란다”(p17에서)


하지만 신문 사설이 가지고 있는 이념 편향성을 넘기 위해 적어도 세 개 정도의 신문을 보수파․진보파․중간파로 분류해서 각각의 논조를 비교․평가해 나가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비교적 자유로운 글쓰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신문 칼럼 읽기로 넘어가라고 강조한다.


논술이라 함은 곧 자신의 주장을 적절한 논거에 맞게 전개시켜 나가는 글이다. 이런 글의 가장 큰 함정은 다름 아닌 편향과 편견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두 가지 이상의 신문 사설을 비교해 가면서 보라고 강조하는 점은 논술 공부의 가장 핵심적인 비법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논술의 형식과 내용을 가로지르고 넘어서기


<대학생 글쓰기 특강>은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주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논술 특강이다. 하지만 내용을 훑어 보면 단순히 대학생들의 취업관련 논술만을 다룬 서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우선 논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형식과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입시와 관련한 논술 공부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이 책이 단순히 글쓰기의 피상적인 면, 즉 언어의 형식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주요한 문제를 골고루 전면에 제시하면서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에서 비롯해, 이건희, 이문열, 김용옥 등 이 시대의 화두가 될 만한 무수한 이들의 생각과 주장의 파편들을 논술의 주 재료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논술 서적이 동서양 고전의 딱딱하고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죽은 지식의 쪼가리를 다루는 반면에 저자는 지금 이 시대를 감싸고 꼬집어면서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실감나는 논술 참고 서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말 없이 글 없다’, ‘주어에 책임지자’, ‘접속사 사용을 자제하자’, ‘어정쩡한 대안을 경계하자’, ‘스타일이 내용을 압도한다’, ‘화합적 글쓰기를 지향하자’ 등에서 보듯이 다분히 논술의 형식적인 면도 놓치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퓨전 스타일의 글쓰기 방식


이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 전략의 하나로 책읽기와 글쓰기가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무수한 글읽기의 재료라 할 수 있는 책들을 무수하게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그 글들을 읽고 소화해 내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글쓰기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시중의 수많은 논술 서적들이 이런 것을 역설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강준만의 <대학생 글쓰기 특강>은 단순한 논술방식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다양한 사회과학 지식을 쉬운 예들을 통해 제시하고, 또 나아가 이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연결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도 인문사회과학적 이론․개념과 글쓰기 방법을 결합시킨 형식이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퓨전’스타일인 셈이다.”<머리말에서>


저자가 머리말에서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단순한 논술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넘어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사회, 문화, 정치 분야의 문제를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식으로 글쓰기 방식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나아가 저자 특유의 쉬우면서도 명확한 전개 방식이 더해져 큰 품이 들이지 않고 쉽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점이 이 책이 가지는 또 하나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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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작가 성석제의 독서에 관한 이야기

출처 : 미스터북맨


20대가 될 때까지 나는 식물성 위주로만 먹는 편식을 했다. 반면에 내가 읽었던 책들은 축산전서에서 성경 · 무협지 · 추리소설 · 아동문학 전집 · 교과서까지 아주 잡다했다. 20대 에 군대를 가게 되면서 나는 잡식성으로 식성을 바꾸었다. 군대라는 환경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측면이 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고기맛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군대 시절 이후의 독서 범위는 문학과 인문학, 역사 등으로 상대적으로 순수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안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라면 그 중에서도 내가 흥미있어 하는 것이 순진무구, 천진난만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잡다했다. 30대에 들어서는 음식도 별로 가리지 않게 되었고 분야도 그다지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키는대로, 얻어걸리는대로 감사하며 먹고 읽었다.

 나라는 인간은 잡하다. 내가 하는 일, 소설을 쓰는 일은 문학 안에서도 불순, 잡스러운 것에 속한다. 불순하다, 잡스럽다, 잡다하다, 잡종이다라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이 ‘잡, 잡, 잡’에서 힘을 느낀다. 나는 이종 간의 충돌, 혼합, 교잡이 새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믿고 순수하고 가녀린 화원의 꽃보다 더 생명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은 이런 내 생각을 굳건히 지지해 준다. 

 나는 반드시 건전하고 고전적인 책을 읽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권하지도 않는다. 책의 하위문화에는 그에 걸맞는 매력적인 새로움과 강한 생명력이 있을 것이고 상위문화에는 기품과 깊이, 시간의 단련을 견뎌온 단단함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이 각자의 영역에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문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며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고 복제하는 가운데 진짜 문화가 된다. 진짜 문화가 되어야 좋은 문화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20대에 내가 읽고 가슴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책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외상죽음]    *가브리엘 바르가스 요사 [빤딸레온과 그의 위안부들]
크누트 함순
[굶주림]

군대에 다녀와서 장편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홍명희 : [임꺽정]               *박지원 [열하일기] 외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로버트 버튼 편 [천일야화]   *허먼 멜빌 [백경]         *귄터 그라스 [양철북]
장 폴 싸르트르 []

재미있게 읽은 시도 물론 있다. 시집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시인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정현종 이하 *고트프리트 벤파블로 네루다 *파울 첼란 *자크 프레베르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쉽게도 희곡은 마음에 맞는 작품을 많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가에 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페트 한트케 [관객 모독]  
으젠느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오태석 [초분]

그리고 워낙 재미있어서 한 번 집어들면 손에서 뗄 수 없던 명작들이 있었으니.
고우영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서유기] [일지매] [임꺽정] [십팔사략]

그리고 역시 한 번 손에 들면 놓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유쾌한 작가가 두 사람 있다.
에프라임 키숀 [가족] [돼지는 돼지다]    *로얼드 달 [] [세계 챔피언]

흥미롭고 짧으며 시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재미는 기본이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어가 사람이라고?] *프란츠 카프카 [변신]

근래에 읽은 인문학 관련 책에서 인상적인 필자는 빌 브라이슨이다. 대책없이 잡다한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참고로 지금 내 책상 위의 작은 서가에 꽂혀 있는 ‘잡스러운 책’의 제목을 쓰면 이런 식이다.
[띄어쓰기·맞춤법 용례] [음식 상식 백 가지] [미식 소식이 오래 산다] [제주도 관광 정보 매거진] [내 몸의 신비] [벌거벗은 여자] [세상의 나무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음식에 관한 47가지 진실]... 책상 위에는 [먹지마, 위험해!]와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이 펼쳐져 있고 오른편에 있는 에어컨 박스 위 임시 서가 앞줄에는 [빠블로 네루다]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문학동네] [게으른 산행] [한국식품문화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하루만에 정복하는 부동산 재테크]가 꽂혀 있다. 뒷줄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학의 윤리] [역주 매천야록] [오늘의 SF걸작선] [하늘에서 본 지구] [우리말의 뿌리] [조선역사]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 사람의 어깨 너머로 엿보이는 책의 제목을 통해 그 사람의 직업과 기질, 나이와 성향을 가늠하곤 했다. 누가 지금 이 목록을 읽는다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잡스러운 인간? 그렇다면 만족이다. 소설은 바로 잡의 장화니까. 어, 장화 아니고 정화(精華)다. 생각해 보니 장화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설은 잡의 정화의 장화라고 하자.

  





 

 

 

성석제 /소설가.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며 소설을 쓰기 시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등의 창작집과 [재미나는 인생] 등의 짧은 소설, [인간의 힘] 등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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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운/연 포럼 06-1)








2006년 1월 <민/운/연 포럼>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 한국사회 위기 진단과 희망 찾기

발표: 최장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정치학)

발표: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장, 사회학)




☆ 일시 : 2006년 1월 12일(목) 오후 2시 30분부터

☆ 장소 : 성공회대 새천년관 4층 교수회의실

★ 사회 :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

★ 토론 :

  권진관 (성공회대, 신학)

  조돈문 (가톨릭대, 사회학)

  조현옥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대표, 정치학)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학)



* 주관 : 성공회대 사문연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 공동 주최 : 성공회대 NGO대학원/아시아NGO정보센타/민주자료관/신학연구원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목차>

1.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 있나?

2. 민주주의와 민주정부의 변형(變形)

3. 민주화 이후 민주화세력의 변형과 분화

4.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사이에서

5. 다시 민주주의인가? 다시 운동인가?



1.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 있나?


1) 성공회대의 신년포럼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라는 물음은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훼손되었기에 그래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희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정치체제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최근년에 이르러 이른바 정치에 대한 실망(desencanto)이 얼마나 깊숙이 진행되었는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늘 토론의 장에 진보진영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보수진영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이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이 크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갖기 쉬운 것이며, 더더욱이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민주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보다 중심적 역할이 기대되는 사회세력으로부터 그 체제에 대한 강도 높은 불신의 소리가 터져나온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사태라고 볼 수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이 전사회적으로 팽만하고 있는 가운데, 진보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커다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외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민주화세력 내부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해졌는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민주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사회적 동력이었고, 민주정부들은 그들이 주도해오지 않았던가? 민주파들이 정부를 주도해왔다는 사실은 현재의 노무현정부만큼 그것이 사실인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패배를 실토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 이후 선출된 정부들은, 김영삼정부로부터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각기의 리더십과 정당의 구성 및 성격에 있어 민주적 성격을 더 강하게 포함하고 보다 민주적 역량을 강하게 갖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두루 알다시피 최초의 민간민선정부인 김영삼정부는 군부권위주의시기 집권세력인 민정당을 포함하는 3당 합당에 의해서만 집권이 가능했고, 또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의회의 다수를 확보할 수 없는 제약 하에 있었다. 김대중정부는 비록 보수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거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민주적 중심세력이 강력한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을 아우르면서 그 민주적 지지기반을 보다 확대하였다. 다만 의회의 대표에 있어서는 여소야대에 의한 분할정부적 상황을 면하기 어려운 커다란 제도적 제약을 가졌다. 이후 현재의 노무현정부만이 그것이 비록 대통령탄핵소추소동을 거치기는 했지만 행정부권력과 의회다수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국가권력 모두를 제도적 제약없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조건은, 본 발표자도 여러 기회에 말해왔듯이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특징될 만큼 헤게모니적 지배담론을 어떤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능동적이고도 매우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민주정부를 창출하게 되었다.


3)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란 구래의 박정희식 생산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접합한 새로운 한국적 성장중심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가져온 결과는 노동의 참여없는 생산체제이며 그에 기초한 노동없는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그것이 빈부격차의 증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고용의 불안정과 실업의 증대, 비정규직노동자의 대량창출, 이러한 경제적 조건들이 가져오는 사회해체 등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수반하는 문제에 대해 상세히 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사태를 통하여 커다란 민주화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정치적 참여의 평등을 제도화하는 통치체제로서 이를 통해 보통사람들 스스로가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는 체제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민주정부들은, 그것이 더 민주적인 성격을 갖는 정부일수록,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권익보다는 사회최상층의 권익을 보다 더 잘 실현하는 이념이자 가치이며, 정책독트린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 더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노무현정부에 이르러 더욱 극대화된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매우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은,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그 정책에 의한 수혜층과 불이익을 받는 그룹을 창출하기 때문에 정책결정과정에서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특정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회의 지지세력 내지는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정부하에서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이라고나 할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연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선출된 노무현정부―국가의 관료기구(특히 이 경우 경제행정관료기구)―수퍼 재벌기업 삼성이 그것이다. 이를 중핵으로 하여 지배적 담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헤게모니의 생산-소비구조가 형성된다. 2005년 후반 노무현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현실로부터 나온 문제해결의 대안이 아닌 다소 허황된 전술적 발상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정당수준에서 정치연합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 사회적으로는 구체적 기반을 갖는 것이었다. 과거 본 발표자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한 특징으로서 “변형주의”(trasformismo)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처음 이 문제를 논의할 때의 3당통합은, 민간민선정부는 탄생하였으나 집권세력을 구성하는 민주화세력은 여전히 양분되어 있었고, 구권위주의적 세력은 그 중심에 포괄되어 있었다. 변형주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다수에 의해 비판되었으나, 사태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이해될 여지는 적었다. 특히 이 시기 변형주의는 제도권 내에서의 다수형성의 요구가 수반했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정부의 변형은 정치적 상식을 뒤엎는 사례로 이해된다. 노무현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부를 창출했을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기 때문에 첫 번째의 드라마였다면, 그의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능동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추구하고 그와 병행하여 형성된 보수대연합은 그 두 번째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의 드라마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유해하다.



2. 민주주의와 민주정부의 변형(變形)


1) 노무현정부의 변형을 예기치 않은 드라마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민 다수가, 적어도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시민들 다수가 생각하는 정치적 가치와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과의 커다란 배치 내지는 괴리를 의미한다. 노무현대통령은 어떻게 정부를 창출했나?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제도권 밖 운동의 대대적인 동원을 통한 투입(input)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 대통령의 출현이 운동의 투입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한국정당체제의 실패의 결과이고, 앞선 정부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노무현대통령은 김대중정부 시기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부터 왔다. 이를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당의 중심으로부터의 인사는 그가 당내의 다수지지를 획득할지는 몰라도 개혁중심으로서 퇴색한 당의 이미지로 인하여 보다 많은 민주개혁을 바라는 사회전체의 투표자들의 다수를 획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기존 당제도의 보수성이 부여하는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점과 아울러, 개혁에 대한 커다란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반면 그것은 민주주의제도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를 애매하게 하는 문제를 갖는다. 만약 그가 투표자 다수의 요구를 위임받아 개혁의 중심추진자가 되고자 했을 때, 그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책임(accountability)의 연계로부터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일 때 그리고 그의 움직임이 개혁의 추진자이기보다 사회의 현상유지를 더욱 강화하는 헤게모니의 추진자가 될 때 누가 그를 민주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오늘날 노무현 정부를 통하여 보게 되는 상황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 하겠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여러 수준에서 포착될 수 있지만, 한국정당체제의 저발전 내지는 취약함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여기에서 잠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의제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민중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출한 대표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를 선출한 시민들은 공적영역에서 통치자의 행위가 책임성을 갖도록 구속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민주적 통제하에 둘 수 있다. 그러므로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 고리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선출된 통치자가 어떻게 하면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도록 하는가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체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해결해야할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선거를 경쟁적으로 만들고, 정치적 자유와 참여를 확대시키고, 사회경제적 정치의제의 범위를 확대하고, 민주적 통제의 범위를 실질적 참여를 통해 실제로 확대시킨다면, 우리는 이러한 정부를 대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고, 민주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어떤 객관적 정의를 통해 외부로부터 또는 경험외적인 것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코자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이 중단되거나 거부될 때 민주주의는 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다시 오늘의 우리현실로 돌아와 볼 때, 한국 민주주의는 앞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실천과는 커다란 거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의 변형주의적 실천은 커다란 부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그것은 투표자와 선출된 정부간 대표-책임의 고리가 해체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표-책임의 고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적 통제와 구속을 의미하는 부정적 효과를 갖지만, 반대로 그것은 그에게 위임된 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표자의 지지를 통한 힘의 실현에 있어서는 긍정적 효과를 갖는다. 특정정부, 특정 지도자를 일컬어 국민적 또는 사회적 지지기반이 넓다고 하는 말은 이를 일컫는 말이다. 사회와 역사(와 미래)에 대한 기득세력의 비전과 현상의 유지를 재생산하는 헤게모니와 민주정부와의 관계라는 면에서 볼 때, 민주정부가 투표를 통하여 위임받은 민중의 요구는 헤게모니와 상충하기 쉽고 그것과 더 많은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헤게모니를 수용하는 정도가 클 때, 현실정치의 제도권 내에서의 권력의 안정은 쉽게 획득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노무현정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헤게모니와의 갈등은 너무나 힘겨운 것이고, 그것과의 안락한 관계는 매우 쉬운 선택일 것임에 분명하다. 정당/투표에 대한 대표적 이론의 하나는, 이른바 중위수투표자모델이다. 이는 좌우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에 단선적으로 배열된 선택의 구조에서 경쟁하는 정당들은 양극을 배제하고 중간을 확보하는 것이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다른 맥락에서 정당들이 대립적 이념성을 탈각하고 포괄정당화하는 경향을 말하는 이론과도 내용은 유사하다. 그러나 한국의 통치자들이 문제를 이런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커다란 오해이다. 왜냐하면 민주화이후 한국은 제도화된 정치의 공간에 있어 이들 이론이 딛고 있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 발표자가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이 가져오는 정당체제의 낙후성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최대의 장애요인이다. 성장을 유일 가치로 하는 시장중심 생산체제하에서 사회저변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정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민노당같이 있다하더라도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제약은 크고 정치적 경험이 일천하여 그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치적 중간이라든가, 포괄정당의 개념은 기존의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에서 헤게모니와의 동거는 기존질서를 그대로 수용하고, 현상유지를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입각한 스펙트럼위에서의 중간이 아니라, 제도화된 기득질서에 기반한 정당경쟁의 틀내에서의 중간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가공의 중간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요구들이 타협될 수 있는 중간과 보수정당의 경쟁틀 내에서의 중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이것은 한국정치의 이중구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정치를 피상적으로 관찰할 때, 그것은 “즉응적 정치”(instantaneous politics)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 수준에서는 정당간 경쟁의 치열함이 거의 생사투쟁을 벌이는 듯하고 이데올로기적 극한투쟁으로 치닫기 일쑤이고, 그런가 하면 정당간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합집산이 다반사이고,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 마다 정당이 재편성되는 등 예측불허의 변화와 아울러 파노라마의 정치를 연출하는 극심한 정치 불안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한 수준에서는 이러한 북새통에서 먼지가 가라앉고 난 이후 정치에서 변화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즉 사회 기득이익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재생산하는 보수적 정당체제는 여전히 온존하고 있다. 민주화이후 한국정치가 열망-실망, 동원-탈동원의 싸이클의 반복을 드러내는 까닭도, 열망과 동원과정에서 참여의 확대, 사회적 이슈의 확대에 대한 요구들의 분출이 다시 평정을 되찾으면서 보수적 정당체제 내에서의 정치게임으로 복원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에 따른 동요와 체제의 복원을 반복하는 구조를 반영한다. 본 발표자가 한국 민주주의를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완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란 사회내에 존재하는 갈등들을 억압하거나 범죄화하는 대신, 적대적인 이익들을 공식적인 대표의 체계내에 포함하여 갈등을 제도화하는 정치적 과정을 가능케 하는 것, 그 갈등을 제도화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해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이유들을 고려할 때, 노무현정부는 왜 약한 정부이고, 그의 리더십은 왜 약할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선출된 정부가 보수적인 기득이익의 헤게모니를 수용하는 경우에서조차 그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될 수 없는 까닭은, 한 수준에서는 그것이 개혁의 위임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정치의 대표체계를 개혁하지 못함으로써, 선거시 다수를 형성했던 지지기반이 해체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 수준에서는 보수적 야당이 기존의 정부가 설사 그들과 커다란 차이를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대연정론 제기의 배경이 되는 가정이기도 했던 상황이지만, 그들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공격과 비판의 강도는 그것이 약해짐에 따라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선출된 정부가 선택하는 방법은 하락하는 지지도를 보전하고자하는 대안정책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경제정책과 노동-사회복지정책은 민주주의 하에서 하나의 정부가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영역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생산레짐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관료의 수중으로 넘겨진지 오래다. 노동-사회복지정책은 전자의 잔여범주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전자가 강력한 만큼이나, 이를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은 협소해졌다. 동북아허브 건설, 지역균형 발전, 행정수도 이전, 기업도시 건설과 같은 정책영역은 한 논자가 “토건국가”라고 명명하는 것에 유사한 국가재정의 큰 규모만큼 국가의 행정기구를 가동시키고, 정부는 그에 때로는 개혁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무언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민주정부의 중심행위는 거대한 레토릭을 동반하면서 “지방이권배분정치”(pork-barrel)로 전환된다. 국가자원의 거대한 공간적 재배분이 엄청난 사회적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면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를 둘러싼 새로운 갈등을 창출한다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민중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는 별다른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역행한다. 이러한 정책영역의 창출이 무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위험성을 수반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 노무현정부의 과학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퇴행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잘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정부가 무언가 업적을 만들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이 정부가 한국을 세계 생명공학의 중심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과학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의 업적을 매개로한 민족주의/애국주의의 동원은, 민주정부의 정책지원과 운동의 열정이 결합하면서 진실과 비판이 억압되는 일종의 “총화단결”(Gleichschaltung)을 실현하는 듯한 유사파시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상황을 통하여 우리는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과거 민주화운동세력의 일부와 극우적 세력간의 연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앞에서 변형주의를 언급했지만, 처음의 사례가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다수획득전략의 일환으로 제도권 내에서의 요구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면, 최근의 사례는 그보다 훨씬 범위가 큰 전사회적 영역에서의 변형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과 운동세력이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긍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반성적으로 되짚어 보도록 한다.



3. 민주화 이후 민주화세력의 변형과 분화


1) 본 강연자는, 한국의 민주화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특징지은 바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곧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의 문제와 상당정도 관련이 있다. 운동이 민주화를 주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와 정치의 구조와 특성을 이미 상당정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상당정도 한국사회구조의 결과물이다. 해방이후 형성되고 발전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의 동원과 체제도전이 가라앉으면서 생기는 탈동원은 이러한 한국의 정치구조로부터 발생하였고, 체제는 이들 도전적인 운동세력을 체제내로 포섭,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엘리트층을 수혈받았다. 이를 통하여 구질서, 구제도권은 일정한 쇄신과 변화에 대한 적응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상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이러한 방식의 엘리트충원은, 민주적 계기에 있어 보다 폭넓은 변화와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를 해체하고 제도권을 전사회적인 차원에서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민주적 개혁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갖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80년대 민주화이후 사태에 있어 책임이 있다면, 세대라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운동들―예컨대, 4.19, 6.3, 3선개헌 반대, 민청학련, 80년대 6월항쟁세대―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점에 있어 한국사회에서 세대로 호칭되는 운동세력이란 운동이 탈동원화된 이후 기존질서내로 통합되어, 곧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는 동시대적 경험을 갖는 집단적 단위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앞선 세대들이 보여준 패턴을 반복할 것 이냐, 그렇지 않고 어떤 새로운 변화를 보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앞선 세대들의 통합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이다.


2) 80년대 민주화운동세대는, 70년대 유신시기로부터 90년대 초에 이르는 앞선 운동보다 장기간에 걸쳐, 그리고 대규모적으로 동원된 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들 운동세대는 한국사회에 커다란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이들 세대 역시 앞선 운동의 탈동원-체제내로의 흡수통합 과정과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가? 이것은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문제는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그 변화를 보도록 한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을 민중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민중주의는 두 개의 구성요소를 갖는다. 첫째는 그것의 이념과 가치에 있어 민중성을 갖는데, 그 성격에 있어 급진적, 변혁적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사회저변, 소외된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문제를 발견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노학연대”라는 말이 표현하듯, 대학생들은 소외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과 연대했다. 그것은 “현장으로 간다”는 일종의 한국판 브나로드운동이었다. 민중주의의 두 구성요소, 즉 민족해방과 민중민주(NL-PD)는 해방이후 형성된 한국사회의 기존질서와 이를 정당화하는 지배적인 이념에 대항하여 혁명적 열정을 이론화하고 슬로건화하면서 그 안티테제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와 역사에 대해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변혁적,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급진적 이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문제를 부분적, 국지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비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상황에서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 급진적, 도식적, 추상적, 관념적, 비현실적인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낭만적, 추상적 이념은 무언가 한국사회의 커다란 진실을 포괄하고 이를 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민족문제와 노동과 복지라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었던, 즉 기존의 체제가 해결하지 못했던 두 핵심적 이슈를 집약하는 것이었다. NL이 48년체제에 맞닿아있고, 기존의 냉전반공주의가 제시하는 한미관계와 북한문제의 인식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PD는 61년체제,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에 의한 지배적 생산체제의 성격과 맞닿아있다.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당시의 혁명적 열정과 몇 개의 도식으로 정리되었던 것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민주화운동의 궤적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그 드라마틱한 분출이 특징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드라마틱한 퇴조는 더욱 큰 특징이 아닐 수 없다. 민중주의의 소멸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질서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시도나 관심도, 소외된 노동, 민중적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끌어내고자하는 민중적 관심이나 그에 대한 참여도 함께 사라졌다. 운동의 폭발적 분출과 빠른 소멸은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운동이 갖는 성격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시 성찰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이 현상은 분명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생산자집단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대학생, 지식인과 같은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이 중심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저변층의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민중문제는 이들 지식인 중심세력 스스로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이 탈동원화, 탈급진화되면서, 운동으로부터 민중성이 탈각했다. 그 탈동원화과정에서 여러형태의 다양한 시민운동들의 분화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헤게모니에 의해 표상되는 새로운 현실을 맞게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때이른 민중주의적 성격의 소멸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운동이란 빠르든 늦든 탈동원화의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있고, 일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시민사회로부터 운동의 투입을 필요로 하지만 항구적인 운동의 동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정당을 매개로 한 현실정치세력으로의 발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운동세력은 현실의 요구에 따라 분화되고 그에 흡수되는 경로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3)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민중주의 운동의 중요한 약점은, 또한 그것이 운동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그 이념이 민주주의이론을 함축하지 못했고 이를 추동했던 세력들로 하여금 대의제민주주의의 제도적 작동이 창출하는 다이나믹스를 시의적절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를 핵심적 구성요소로 한다. 이는 권위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강력한 집단적 열정과 에너지를 창출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가치이면서 동시에 제도적 실천이다. 그리고 그 제도 작동의 중심 메카니즘은 선거와 정당이다. 그것은 헤게모니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헤게모니의 제약이라는 조건하에서 민주적 제도를 운용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제는 비상한 지적, 정치적 리더십을 요구한다. 권위주의를 붕괴시키는 능력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질적으로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특성이며, 또한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전환에서 핵심적 연결고리는 좋은 정당의 창출이며, 이를 통한 정당체제 전체의 변화이다. 이는 정치학자이며 대표적인 정당이론가이기도 한 샤츠쉬나이더의 논리로 표현하면, 정치의 갈등축을 새로이 규정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체제를 형성하는 일이며, 반대로 그 逆도 성립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87년 체제”를 언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본 발표자는 이를 사실적 서술개념이 아닌 사태의 평가를 위한 가치함축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것은 민주화로의 전환점에서 어떤 제도화의 응결이 이 사태를 규정하는 틀로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구조주의적인 설명으로 이후 민주화의 잘못된 경로는 80년대 민주화이후 제도화의 효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본다는 문제 때문이다. 구태여 이를 구조적으로 본다면, 민주화이후에 형성된 정치적 경쟁의 틀, 즉 정당체제가 협애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 내에 갖혀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50년대에 형성된 전후 냉전질서의 그것과 높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다만 80년대 지역정당구조로의 경쟁축의 변화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시기 IMF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성장과 노동문제를 정의하는 방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공간이 열려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4) 운동의 변형과 관련하여 노무현정부의 상황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노무현정부에 들어와 386세대라는 저널리스틱한 유행어가 생긴 것도 최근년에 발생한 새로운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민주정부의 수행능력, 그럼으로써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이들 386세대에게 매우 부당하게도 역사적 책임이 부과되었다. 세대를 말한다면 그것은 386세대가 아니라 민주화세대라는 호명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386세대라는 말은 민주화를 극히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의 보수파들이 민주주의를 공격할 때, 그 표적으로 설정하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가상적 집단에 대한 호칭이 됨으로써 80년대 민주화운동세대들은 부당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확하든 부정확하든 이 386세대라는 호칭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무엇이 새로운 현상인가? 위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정부의 출현은 앞선 그 어떤 민주정부보다 민주화이후 운동이 쇠퇴한 시점에서 운동의 재점화에 의한 동원의 싸이클에 힘입은 바 크다. 첫째의 주요 변화는 운동세대의 집권세력화이다. 80년대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세대들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정치와 사회 각 부문에 대거 참여하는 연령층, 이른바 386세대로 성장했다. 이 시점에서 사법부, 대학, 기업, 언론 등 사회의 중요부문에 진입한 것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들 세대가 노무현정부의 출현을 계기로 청와대, 행정부, 2004년 4월 총선을 통해 17대 국회에 대거 진입했다. 사실상 노무현정부의 구성자체가 거의 운동권으로 이루어졌고, 이점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거의 민주화운동세대 이전의 세대들로 구성된 앞선 민주정부들과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현정부의 상층지도부가 70년대의 운동 그룹이라면, 그 아래층은 곧바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그룹들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정부는 앞선 정부들에 비해 확실한 차이를 보여줄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노무현정부가 커다란 문제를 갖는다면, 이들 운동세력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둘째의 변화는 시민사회역시 이들 운동세대들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민운동과 공론의 장에서 이들은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결과 선출된 정부와 여러 사회 부문과 수준, 여러 정책영역, 여러 운동영역을 포함하는 시민사회사이의 밀접한 네트워크가 발전했고, 그에 따라 국가-시민사회의 융합현상이 발생했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해 갖는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국가를 민주화하는 수원이 됨으로써 그 활성화와 성장을 강조해왔다. 이럴 경우, 국가와 시민사회 두 영역 모두에서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사회적 민주화도 강화하는 힘의 증강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세력의 뚜렷한 하나의 분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노무현정부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간의 분화이다. 운동세력의 분화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87년 민주화이후 운동세력의 정치참여를 놓고, 지역적 균열라인을 따라 후보단일화, 비판적지지, 독자후보라는 세 방향으로의 정치적 분화에 뒤이은, 두 번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현 정부에 참여한 개혁파와 참여하지 않고 시민사회에 머물러있으면서 전자를 비판하는 진보파들 사이의 괴리와 갈등관계는 최근에 들어와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장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대연합적 상황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2003년 말 대통령선거과정에서 스스로를 “노사모”라고 호칭하는 운동의 후원회화 현상에서 그 징후적 변화는 발견된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이념과 가치, 대의와 원칙을 준봉하는 민중주의운동의 중심적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특정의 인물을 지지하는 현상은 지역균열라인을 따라 분기된 YS냐, DJ파냐 하는 분기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점에서 최근의 노사모현상은 그 최종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가치와 대의가 아닌, 특정의 리더를 추수하는 운동은 그 리더의 행적에 따라 운동의 성격과 궤적이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적 이념과 가치와 얼마나 부합하든, 하나의 결과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민주화운동의 탈동원화와 그 이후는 이들 운동세력들의 해체와 기존질서내로의 분자적 흡수를 촉진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변형주의의 효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가 아무리 엄청난 파괴력과 에너지를 수반하는 대규모적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적 민주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회의 소외집단과 저변을 구성하는 사회집단의 정치참여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선 운동의 경우들과 같이 엘리트참여의 내용과 폭을 부분적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최근 운동권의 분화와 갈등은, 현 정부의 지지를 둘러싼 것이다. 현 정부의 정책성격과 리더십, 그리고 그 수행능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때, 정부 밖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로부터 일탈하는 현 정부에 대해 대표-책임의 연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면서 비판의 강도를 높인다. 반대로 현 정부의 지지그룹은, 그 비판의 성격이 어떠한 방향에 근거하든―친부르조아적 비판이든, 친노동적 비판이든―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강력한 기득이익세력에 포위되어 개혁에 저항하는 반개혁세력을 이롭게 하고, 민주정부를 약화시키는, 그럼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고 그에 대응한다. 그러나 이 양자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최근년에 발생한 황우석 사태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운동의 퇴영적 전개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현 정부의 중심세력이 된 참여적 운동의 분파는, 중심적 생산자집단인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적대하는 동안, 민족주의/애국주의의 동원을 매개로 그 이념적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스펙트럼에 있어 정반대에 입지하는 사회세력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현정부하에서 국가-시민사회네트워크의 확대가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아도 운동의 탈동원화로 쇠퇴한 운동의 자원을 크게 고갈시키고 시민사회의 진보적 운동부문의 성격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세미나의 주제인 “민주주의는 여전히 희망인가”라는 물음은, 현 정부에 참여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운동의 진보파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다. 운동에 가장 크게 빚지고 있는 현 정부가 운동의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것은 현 정부의 실패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실패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그 대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 민중운동의 활성화, 즉 민중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올바른 문제제기인가?



4.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사이에서


1) 한국사회/한국정치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한국사회의 억압과 소외의 구조, 그리고 그 정도의 크기를 반영한다. 바꿔 말하면, 현상유지를 재생산하는 지배적 질서가 여전히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지며,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갈등이 제대로 폭넓게 표출되지 못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회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해방이후 분단체제하에서 냉전반공주의를 통하여 구축되고, 권위주의산업화를 통하여 그 물질적 기반을 공고히 한 사회의 지배적 구조가 갖는 정당성의 불완전함 내지는 결핍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유발하면서 현실을 인지,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불러들여 문제를 제기하는 측과, 역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그에 대응하는 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기득이익을 유지하고자 하는 측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에 일차적 원인을 보수적 기득세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사학개혁법안을 둘러싼 갈등에서 보듯, 그것은 우리당의 제안으로 국회를 통과했고, 한나라당은 이에 반대하는 거리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 반대운동의 한 한나라당 책임자는 “청와대와 국회 등에 침투한 친북, 좌경 핵심세력”이 이 법안을 주도하여 “전교조출신이나 친북좌경세력을 개방형이사로 침투시켜”, “학교를 접수해 정치사상과 혁명투쟁집단으로 만들어 사학을 무기화하려는 음모”라고 말했다(한겨레, 2005년 12월 19일자). 무엇보다 이 주장은 소수의 극우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다수의 이성적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학개혁문제는 오늘의 민주주의 하에서 개혁사안으로서 찬반이 있을 수 있고, 민주주의적으로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냉전반공주의의 극한적 갈등을 불러들이는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문제를 전치시키고 이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의 불러들임이 개혁이라는 도전을 억압하고 좌절시키고자 하는 시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극단적인 사례라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의 정치, 이슈의 이데올로기화는 우리사회의 도처에, 모든 갈등적 사안에 미만되어 있다. 모두 그렇지는 않다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연원은 우리의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개념틀이나 믿음의 체계를 발전시키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내생적인 현상으로서 보다는,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냉전반공주의나 신자유주의적 경제독트린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해방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냉전반공주의는 한국사회와 정치의 제도화를 주형한 이데올로기적 하부기반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특정의 갈등은 그 표출과 대표가 허용되는 동안, 특정의 것은 허용하지 않는 힘을 통하여 갈등의 표출과 그 제도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상의 유지를 가져오는 보수의 스펙트럼에서만이 정당의 조직과 경쟁이 허용되는 정당체제의 제도화는 그 직접적인 결과이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사회민주주의와 같이 서구에서 보편적인 이익대표의 체계는 한국사회에서는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자본주의생산체제, 시장경쟁체제가 창출하는 노동문제, 사회보장문제, 분배의 가치, 사회적 양극화와 계급화가 발생시키는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할 정치의 대표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한국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가 창출하는 가장 부정적 효과는 그것이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는데 있다. 헤게모니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능력 내지는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학법의 사례에서 보듯, 냉전반공주의는 탈냉전과 더불어 그 효능이 크게 약화되는 헤게모니의 약화를 볼 수 있다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임에 분명하다. 한국의 민주화가 폭넓은 민주개혁과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제약하는 여러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민중주의적, 진보적 요소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풍토, 노동을 천시하고 불온시하면서 제도권에 통합하지 못하는 조건, 분배의 형평과 사회복지를 희생하고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추동력이 강력한 헤게모니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 이를 믿도록 하는 역사적 경험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의 정조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 가지 역사적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피지배로 이어진 근대화의 실패의 경험, 전쟁과 분단을 통하여 내면화된 미국에 대한 의존성, 스스로 만들어낸 희귀한 성공사례로서 인식되는 박정희신화가 그것이다. 이들 경험은 한국사회에서 전체주의적 속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부추기고, 그럼으로써 비판과 경쟁적 대안의 조직화를 어렵게 하고, 가치의 다원주의화를 가로막는 효과를 갖는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든지 경제발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어떻게 하든지 미국에 밉보이면 안 된다는 두려움은 그러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80년대 운동과정에서 운동세력들이 담지했던 민중주의적 이념은, 이들 중심적인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와 한국민의 심성 깊숙이 내면화되어있는 두려움의 의식에 반기를 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민중주의운동의 소멸과 더불어 그 참여자들은 이러한 헤게모니와 대면하고, 그에 흡인되는 입지에 섰다.


2)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해 갖는 효과는, 국가의 역할과 정치를 이해하는 특정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통하여 부정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국가의 실패-시장의 효능이라는 말로 집약되듯이, 그것은 만약 경기순환, 성장, 자본의 이윤, 노동시장, 고용, 실업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어떠한 문제에 봉착할 때, 시장개입을 중심역할로 삼는 국가는 만병의 근원이고, 사적영역에서의 시장의 자율적 작동은 만능의 해결책이라는 국가부정의 시장근본주의를 핵심 독트린으로 한다. 일종의 국가없는 시장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는 괴물이고 이 “괴물을 죽이는 것”(kill the beast)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행위하지 못하도록 국가의 재정자원을 최소화해야 한다. 세금감축, 균형예산, 국가로부터의 시장자율성 확보는 그 중심내용이 된다. 국가를 운영하고, 시장을 규율하고, 분배의 형평과 사회복지를 도모하는 것이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의 역할이고, 이를 민주주의의 정치적 역할이라고 할 때, 신자유주의는 곧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이 무역자유화, 민영화, 시장효율성, 조세감축 등을 통하여 경제에 미치는 효과보다도,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사익의 실현과 사정영역의 극대화를 강조하고, 공적영역을 부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을 해체하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장 역시 사회조직의 한 형태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국가의 규제정책과 국가의 역할을 통하여 조직되고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효율성이 자율적으로 창출된다는 주장이 시장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논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독트린이 강조하는 것처럼 국가의 역할, 국가의 경제행위가 축소되고 있다는 주장자체가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제이콥 핵커와 폴 피어슨이 미국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세금의 감축은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부유층에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효과는 사회복지정책과 공공정책을 위한 재정 감축으로 인해 일반국민과 저소득층에 해악적 효과를 갖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역할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방비 지출과 아울러 정부 재정지출의 불균형이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균형예산원리를 말처럼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와 시장효율성의 가치가 정치에 대해 갖는 부정적 효과는, 민주화이후 민주정부들의 성립시기와 타이밍을 같이한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의 민주주의가 소수의 기득이익을 실현하기보다 다수민중의 이익실현을 가능케 하는 민중권력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든 되지 않든, 보수파들이 그들의 언론매체들을 통하여 시장효율성, 정치의 다운사이징을 강조하고, 민중적 요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색칠하기를 통하여 정치폄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켜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효과가 두 가지 내용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시장과 국가, 정치,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면서, 전자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데 대한 강조이다. 이는 외적 영역의 크기에 있어 서로 다른 사회구성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의 크기의 우선순위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구성의 내부적 작동원리에 있어 가치의 우선순위를 말한다. 첫 번째의 경우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은 각각 뚜렷한 자율성과 작동원리를 가지며, 양자의 경계를 인지하기가 쉽다는 점에서 시장의 효과는 상당정도 제한된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에서는, 시장의 가치와 원리를 사회의 모든 하위구성단위와 수준과 영역에 일반적으로 적용, 즉 사회전체에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갖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전면적이다. 이는 전 사회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시장제국주의의 관철이다. 그동안 민주주의 하에서 신자유주의의 정치영역에 대한 효과는 첫 번째 경우로부터 두 번째 경우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왔다. 청와대와 정부조직의 구성, 그리고 그 운영원리 자체를 시장효율성의 원리를 따라 개혁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정책과 그 결정과정을 시장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치와 정당에 대한 이해에 있어 시장효율성의 원리와 가치를 실현코자 한다는 점에서 노무현정부 만큼 그 영향력의 확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없다. 정부안팎의 운동권출신인사들이나 개혁적 인사들 가운데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공적영역과 민주정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국가의 민주적 역할을 통하여 시장의 폭주가 견제되고, 사회양극화가 해소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가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 정치제도의 작동, 정치개혁의 전제적 가치내로 은밀하게 구체적으로 삼투되는 영향들을 포착해 내기란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헤게모니를 말할 때, 그것은 특정의 효과 때문에 그로부터 혜택을 보는 이데올로기담지가가 지니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의미하기보다,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담지하는 경우에 적용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은 합리적이 아닌 헤게모니의 결과이다.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을 추동했던 원리와 전제들에 있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개혁의 전제적 가치들의 많은 부분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선거와 정치과정은 통제되고 제한될수록 좋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민주화이후 최초의 정치개혁은 국회의 규모를 줄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고, 선거자금과 선거기간축소, 중앙당/인원축소, 지구당폐지와 같은 개혁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저효율-고비용정치를 척결하겠다는 슬로건은 이를 잘 집약한다. 그것은 정치의 다운사이징, 후보자-투표자대중사이의 접촉과 연계를 제한하고, 중앙당과 지구당조직을 축소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원리들은, 반부패와 정책경쟁을 모토로 한 당의 전문성화에 대한 지향들과 결합하였다 하더라도 그 근저의 가장 중요한 헤게모니적 위력을 갖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방향에서의 이런 종류의 개혁들이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대체로 사회기층의 대중적 삶의 현실로부터 나오는 요구들이 어떻게 폭넓게 참여/대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운동권출신이나 개혁적, 진보적 인사, 그리고 시민운동들이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의 의제형성과 심의과정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또한 헤게모니의 담지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3) 경제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가치가 지배할 때, 그리고 경제성장이 그 넘쳐흐르는 효과를 통하여 부의 재분배, 경기회복, 고용증대를 실현한다고 믿을 때,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경향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이러한 성장이데올로기와 접맥되면서 더 큰 효과를 만들어왔다. 또한 성장과 시장효율성의 원리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나 전문기술주의 가치의 강화를 수반하게 될 것임도 분명하다. 성장-시장-기술관료적 경영주의가 박정희정부시기 권위주의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인식은 우리사회에 널리 팽만해있고, 많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에서 수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성장-효율성-전문성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권위주의와 더 친화성을 갖는 등식인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가 더 우월한 가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장-기술경영주의의 등식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구현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이를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이 등식은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가치는 반민중적 가치이며, 민중주의와는 분명히 배치된다. 정치개혁의 의제를 지배하는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대중의 정치참여에 대한 불신과 아울러 이를 대신하여 전문적 지식이라는 덕목을 갖는 엘리트들의 역할과 참여를 확대하는 전제나 지향을 배면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의 내용들은, 그리고 그 개혁이 가져오는 효과들은 민중참여를 제약하고 엘리트지향성을 강하게 갖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한 의원선출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교체율을 시현하면서 초선국회의원 비율이 60%에 이르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물갈이를 했다. 미국의 정치학자들은 선거시 의원교체율이 떨어지는 상황, 즉 선거경쟁이 적어지는 상황을 미국정치에 있어 경쟁의 소멸이라는 위기로 이해한다. 이점에서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는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당체제는 여전히 보수독점의 구조를 탈각하지 못하고, 사회경제적 이익과 갈등을 대변하지 못하고, 정책경쟁과는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쟁투를 계속하고 있다. 무엇이 현상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높은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하는가? 민주정부하의 정책결정과정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다.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정책결정부서의 정책형성과 심의과정에서 사회적 투입은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부의 최고정책결정자들과 중간층 인사들의 다수는 과거 운동권출신이며, 개혁적 인사들이고, 이들과 시민사회의 소통 채널들은 전에 없이 확대되어 정책결정과정에 있어 시민사회 운동단체들의 참여와 그로 인한 투입 또한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하에서의 정책의 내용과 결정의 스타일은 실제 사회현실과 사회갈등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문제로부터 크게 괴리되어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참여가 확대되고, 역할이 비약적으로 커진 집단은, 제도권내의, 대학의 지식인들과 전문가들, 국가영역과 민간영역에 있는 연구기관에서 활동하는 많은 전문가집단들이다. 최근년에 이르러 광범하게 확대되고 설립된 각종 정부위원회나 자문위원회, 그리고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이들 전문가 지식인집단의 참여는 민주화와 더불어 변화된 정책결정과정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로 나타났다. 지난 어떤 민주정부보다 노무현정부는 정부의 효율적 운영과 생산적 정책결정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연구소 프로젝트형 기술관료적 결정스타일로 발전시키는데 열성적이었다. 이것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전문적 지식인의 참여와 투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의제의 설정, 정책의 형성과 결정은 사회현실로부터 발생하는 삶의 문제와 민중적 요구가 중심적 동력이 되어야하며,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적 참여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정부의 정책과 그 결정과정은, 이러한 사회적 현실이나 정치경제적 문제와는 매우 거리가 먼 기술관료적 이슈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기술관료적 정책 산출 중심의 사고와 정향으로 특징되는 것으로 전문가 엘리트의 비전에 의해 창출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이를 성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책내용과 스타일은 특히 노무현정부에 들어와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운영과 정책결정의 이러한 기술관료적 스타일은 정치를 효율적 정책을 산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비생산적인 이전투구의 장이며, 정치집단들의 난투장으로 이해하는 듯한 대통령의 정치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 도덕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또 다른 가치이며 요소이다. 정치개혁을 추동하는 담론은 이 도덕주의를 중요한 구성요소로 한다. 김영삼정부로부터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개혁을 주도한 가치와 수사들, 깨끗한 정치, 청정정치라는 모토가 표현하듯이, 모두 정치부패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구호와 반부패담론은 이 도덕주의의 파생논리이고 파생언어이다. 일찍이 도덕주의의 가치와 담론은, 그것이 비록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슬로건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1960년대초 군부엘리트들에 의해 제시된바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기성정치인과 이들이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을 군인들이 청산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깨끗하고 능력있는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겠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를 도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정치를 통하여 도덕, 사회윤리를 확립하고 최근의 사회적 언어로서 “신뢰”를 창출하는 것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는 도덕주의의 가치를 통하여서는 도덕적 가치도 신뢰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와 도덕은 다른 수준,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정치에서 도덕주의적 가치가 강한 이유에 대해, 혹자는 도덕과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조 유교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정치문화적 요소를 강조할는지 모른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표출이 억압되어 그것이 갈등의 제도화로 귀결되지 않은, 즉 갈등이 팽만한 사회에서 갈등을 정치적이고 제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 따른 사회심리적 보상작용의 결과물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강조와 현실에서 도덕의 실현은 분명 반비례관계에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만큼 도덕주의적 담론이 풍성하고, 위력적인 사회는 없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팽만한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풀어 말하면, 도덕주의는 민주적 과정의 실패의 산물로서, 민주정치의 과정 내에서, 정치 안에서 제도화의 방법을 통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제도의 효능을 경험하지 않고, 그에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문제를 혁명적 방법으로 분명하게 일거에 해소하고자 하는 일종의 청산주의적 심리, 그것이 수반하는 성급함의 심성에 그 연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 있어서 정치의 도덕주의는 정치와 정치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고, 엘리티즘과 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민주주의의 과정 및 절차와 갈등관계를 갖는다.


민주화 이후 도덕주의의 정치 가치는 진보파와 보수파 양방향으로부터 추동되어왔다. 먼저 민주화운동권에 있어 민중주의와 도덕주의는 운동을 추동했던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었다. 변혁적 이념과 도덕적 열정은, 민주주의의 두 요소, 즉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적 실천가운데서 규범과 대의를 강조하는 前者에 대한 일방적인 헌신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도덕적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혁명적 공화주의를 현실에서 실현코자하는 대의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동안 이를 민주주의 제도에 담으려는 관심과 노력이 없었던 프랑스혁명시의 자코뱅 공화주의와 도덕적 열정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운동권은, 기존의 보수적 기득이익과 정치세력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집단으로 거부하였고, 스스로를 변혁의 수행을 위한 도덕의 담지자로서 그 실천을 위한 행위자로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화운동시기에서나 민주화이후 사회에서 운동권에 있어 도덕적 가치와 민주적 가치는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보수파들은, 도덕적 덕목과 담론을 통하여 이웃사랑이라든가, 인정이라든가, 전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덕목들을 사회화한다. 예컨대 노약자, 사회적 빈곤층, 결손가정의 아이들은 언제나 온정주의를 통하여 사회적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도덕적 담론을 일상화한다. 이 측면에서 도덕주의는, 기존의 권위구조나 위계구조,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을 떠받치는 여러 형태의 덕목들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주의는 보수파든, 진보파든 서로 다른 정향과 맥락, 서로 다른 의미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와 담론에 있어 서로 합치된다. 그러나 도덕주의에 대한 운동권의 의미내용은 훨씬 더 치열하다. 운동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자는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하고, 逆으로 도덕적 인간이 진정한 운동가라고 인식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인간이 또한 민주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도와 매개된 정치적 실천으로 보기보다 가치와 규범으로 수용하는 태도이자 자세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가치와 이상, 그에 헌신하는 도덕적 열정없이는 진전될 수 없고, 이럴 경우 그것은 생명력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현실 제도의 메카니즘을 통하여 실천되고 작동되지 않으면 안 되고, 갈등과 권력이 충돌하는 정치과정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할 때만이 운동이 지향하는 민중적 가치와 대의를 실현할 수 있다. 즉 현실의 갈등 속으로 뛰어들고 권력을 창출하여 대의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도덕주의가 가져오는 민주적 과정에 대한 부정적 효과는, 그것이 현실을 현실자체로서 접근하기보다 규범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이슈에 무감하게 되고, 갈등과 권력에 대해, 그럼으로써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갈등의 표출과 정당을 매개로한 권력 창출을 핵심요소로 하며, 이 과정에서 민중적 참여의 확대와 민중적 요구의 확대를 통해 기존의 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개혁을 압박하면서 민중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을 체제의 중심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민중적 요소의 투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상당정도의 갈등과 부패, 무질서와 소란스러움에 대해, 본 발표자가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말했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화이후시기 운동권 또는 개혁적 인사들은 반부패라든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강조와 같은 모토를 통하여 민주주의와 도덕주의적 이상을 일치시키면서 정치개혁을 이러한 방향으로 주도하는데 앞장섰다. 운동권이나 개혁파들의 도덕주의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정치과정, 그럼으로써 이를 통해 민중적 투입과 정치가 오히려 축소되는 그들이 결코 의도했다고 볼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기여했다. 갈등과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지배담론이 갖는 효과와 쉽게 접맥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권력이 충돌하는 정치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한 정치영역내부에서보다는 정치영역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 해결을 정치가 아닌 그 외부의, 또는 그에 초월하여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전문가라든가, 사법부라든가, 시민사회의 운동이라든가 하는 어떤 제3의 해결자를 불러들이는 방법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주주의의 현실정치가 진전되면서 민중운동의 중심영역이라 할 노동운동부문에서 만큼 운동권의 도덕주의가 만들어내는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곳은 없다. 운동이 도덕성의 구현과 실천을 통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정당화를 위하여 운동은 지속적으로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중심에는 사적, 경제적, 물질적 이익과 그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이익갈등이 위치한다. 민주화운동시기 노동운동을 추동했던 도덕주의는 국가와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들에 대한 권위주의적 억압과 배제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광범한 단결을 가능케 했고, 이를 정당화했던 정신적 지주였다. IMF금융위기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와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가 초래한 노동시장의 분화는 모든 노동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의 이익기반을 해체했다. 이러한 변화는 재벌대기업과 중소기업, 이들 사업장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피용된 노동자와 실업자들간의 이익갈등을 첨예한 대립관계로 몰아넣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공동의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도덕주의적 방법으로 접근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전혀 아니다. 노동운동은 지금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의 대의를 저버리고 사적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학에 있어 “집합행위의 이론”은,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이익집단적 성격을 갖는 조직들은,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킬 수 있는 비정치적 “배타적 유인”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그것이 정치적 성격을 갖는 공공재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무임승차현상으로 인하여 조직동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의 한국노동운동도 이 집합행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독립운동, 혁명적 변화, 민주화운동과 같은 사회적 변혁기, 즉 동원의 시기에서 이 집합행위의 문제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원이 평상시로 되돌아가는 탈동원의 시기, 광범위한 연대를 가능케 하는 도덕주의는 물질적 이익추구 앞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있어 “노동운동은 이익집단운동으로 전락했다”라든가, “초심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도덕적 가치를 불러들이면서 이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개탄하고, 민주화운동당시의 대의와 연대를 강조한다고해서 이들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이들 운동이 더 이상 과거의 도덕성을 견지할 수 없는 것은, 거시적으로는 민주주의로의 정치적 조건의 변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경제발전에 의한 노동시장조건의 변화가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미시적으로는 운동에 헌신하는 개인이 자기이익에 반해 그리고 인간의 행복감의 내용변화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도덕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도덕주의적 운동은 네메시스의 제물이 되는 처지에 놓인다. 운동의 도덕성화와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간의 괴리가 커지면서 운동의 도덕성의 위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도덕성의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이 도덕주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노동운동이 노동자를 이롭게 하는 무언가의 수행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반노동적인 보수파들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로부터 가혹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도덕주의를 다시 불러들이는 방법을 통하여서는 노동운동은 아무런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도덕주의의 딜레마는 노동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화운동 전반에 해당된다. 도덕성의 정당성화는 그것이 실현하고 만들어내는 행위의 성과, 또는 결과물과 직결된다. 도덕성을 민주화투쟁을 통해 실제로 구현했던 운동의 시기가 지난, 민주화이후 정치에 있어 운동권인사나 개혁적 인사들이 현실 정부와 정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를 창출하지 못했을 때, 그들도 그들이 비판했던 기득이익의 패턴과 다른 면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개혁, 진보, 민주화는 아무런 도덕적 위력을 갖지 못하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부도덕한 사회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일과 시민이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하고, 운동이 도덕성을 가져야한다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5. 다시 민주주의인가? 다시 운동인가?


1) 이제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의, 성격,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과 같이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렵게 하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요구되었던 운동의 논리와 이론들이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제도인 선거경쟁의 장에서 집권을 위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과 투표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유능하고 좋은 정부를 창출하는 것은 또한 다른 종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그 제도적 실천사이의 괴리가 그리고 이 兩者사이의 다이나믹스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사뭇 포착하기 어렵게 하고, 실천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경험은,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전환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의 여지없이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성공사례를 제시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실천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고 보편적인 시민권을 증진하는 데는 많은 트러블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세력이 민주정부를 창출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민주정부가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삶을 향상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가져온 중심세력들이 담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는 운동의 열정을 통하여 분출된바 있었지만, 제도를 만들고 제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엄청나게 미숙함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기존의 강력한 권위주의적 변화라는 목표를 가지며, 기존의 국가기구에 대한 공격을 위한 엄청난 대중적 동원에 의한 집합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 상황에서는 국면적 힘의 변화를 끌어낼 운동은 극히 효과적이다. 또한 최대한의 대중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민주화라는 목표와 대의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문제는 체제전환에서 요구되는 논리와는 상이하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참여의 평등을 부여와 이를 통한 대중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한 민중권력의 창출이라는 그 어느 체제보다 민중적 요소를 부여하는 체제이지만, 이 참여하는 민중이 또한 자각되고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를 갖지 않을 때 그리고 이 참여를 통한 그들의 힘의 창출이 제도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실천을 통해 습득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체제에 내재된 민중적 요소는 다른 종류의 엘리트지배적 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참여하는 민중은 각기의 상이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며, 그들이 실현하고자하는 목표역시 매우 다양하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실천은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그럼으로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적 실천사이의 괴리는 한국사회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 서구의 구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의 모순적 성격이기도 하다.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실현은, 민주주의에 내재된 모순적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가운데 운동의 효능을 과대평가하는 인식을 키운다. 현재의 실패는 자주 과거의 성공사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고,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불러들이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한다. 보수파들이 오늘의 민주정부의 “실패”를 지난날 권위주의적 박정희신화를 다시 불러드리는 것을 통하여 대체하려고 하듯, 개혁파들은 오늘의 민주정부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지난날 운동의 신화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람시의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기동전“에서는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운동이란 방법을 복원함으로써 ”진지전“이 필요한 상황 자체를 회피하는 접근은 자칫 역효과를 가질 수 있다.


2)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나? 그것은 세단계로 구성된다. ① 민주주의의 시민사회적 기반이 강화되고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 ② 정치의 중심조직으로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사회에 폭넓게 기반을 두고, 선출된 정부가 대표-책임의 연계에 의해 구속되는 것 ③ 선출된 정부의 정책의 효과가 경제적 부와 자원의 분배구조를 향상시켜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여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는데 제약적 조건을 최소화 하는 것. 위의 세 단계를 좀 더 풀어 말하면 이렇다. 첫째, 시민사회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접합되는 場이다. 삶의 현실이 조성되는 사적영역의 문제들이 얼마나 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민중적으로 표출되고, 대표되고, 독해되느냐 하는 것이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이며, 그 건강성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는 공론의 장도 이 사적-공적영역이 접합하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정당의 조직과 정당체제의 형성은 바로 이 사적이익갈등-공적영역의 접점에 위치한다. 이 수준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당의 제도화, 잘 발달된 정당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샤츠쉬나이더의 주장과 같이 사회적 갈등과 요구를 폭넓게 대표하고, 경쟁되는 갈등축이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선출된 정부, 선출된 통치자가 대표-책임성을 실현토록 하는 것이다. 정당을 떠나서는 대의제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 없이는 선출된 민주정부가 그 자체가 대표적이 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출된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국가관료기구를 얼마나 민주화하고, 민주적으로 잘 통괄하느냐하는 능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정치적 평등의 원리를 실현하고 하나의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데 있어서,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와 더불어 민주적 시민들이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평등의 실현이 요구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만들어 내야 할 좋은 정책의 단기적, 장기적 효과이다. 민주주의는 이 세 단계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할 때 운동의 효과가 실제로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은 그 첫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첫 번째 단계에서조차 민주화이후 한국현실에서 운동이 기여한 것은 크지 않다.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와 제도, 그리고 국가의 구조와 작용원리를 이해하고 습득하여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만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풍부하게 살리는 길일 것이다. 운동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3)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은, 사전에 마련된 어떤 이념이나 합리적 설계, 또는 이상적 제도개혁을 통한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의 집적을,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적 지속성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외국의 어떤 사례를 모델로 삼는다 하더라도 한국적 토양에서 원래의 효과를 결과하지 못하기 일쑤이고, 효과가 있다하더라도 부분적일 것일 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 민주주의는 총체적 비전을 담는 이념이나 어떤 통일적인 도식 내지는 규범과는 본질적으로 병존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와 결정은 가능한 많은 참여자들이 논의의 결과로서 획득되고,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것이 작동되는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이 과정 내부로부터 문제를 끌어내고 결정하는 이 실천적 경험이 가져다주는 민중들의 자각적 성장을 가능케 하는 체제이다. 운동은 위기나 특정의 국면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상시 장기간 병행하기 어렵다.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오늘의 토론주제이기도 하지만, 운동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진보파들은 과거 그러했듯이 지금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 민주주의를 재활성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민주화운동시기 운동의 자원들은 거의 고갈되었다. 그러할 때 운동을 재활성화하는 것이 오늘의 변화된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지도 회의적이거니와,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현재의 트러블에 이르기까지 퇴행의 사이클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축구경기를 예를 들어 보자. 사회경제적 개혁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축구경기에서 꼴을 넣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 개혁을 원치 않는 보수파, 기득이익들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수비에 전념하고, 개혁자들은 공격수를 앞세워 공격을 강화한다고 하자. 이 경기에서 헤게모니라는 기득이익을 이롭게 하는 조건이 가세함으로 수비를 증강하는 효과를 갖는다. 홈그라운드, 심판, 경기규칙, 운동장조건, 기후조건 등이 헤게모니일 수 있고 그러한 요소들은 수비측에 커다란 이점을 부여한다. 개혁자팀의 공격수들의 공격은 상대방 수비수들에 의해 저지되고 차단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수비의 방어가 강하다고 해서 공격수들이 공을 후방으로 패스하기를 되풀이하면, 꼴을 넣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상대의 페널티지역에 접근도 못하고, 슛할 기회를 갖지도 못할 것이다. 어려운 방어망을 뚫기 위해 어떻게 하든지 전진패스를 해서 골문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골을 넣을 기회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골 결정력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논리는, 결국 백패스만을 일삼게 되는 공격수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민주화로부터 시작된 사이클에 지금 보다  더 빨리 봉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정부나 제도권에 진출했던 하지 않았던 운동권인사들, 지난날 운동의 경험을 갖는 진보파, 또는 개혁파, 또는 개혁적인 지식인전문가들은 헤게모니에 대응하여 어떤 정치적 힘의 중심을 건설하는 문제에 실패했고, 제도권내 세력들과 구분되는 어떤 비전이나, 프로그람을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운동, 개혁, 진보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민중참여의 정치적 실천은 자각된 대중의 전위부대가 운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자극을 불어넣는 방법으로서 보다는, 민중들 스스로가 일상적 정치과정 내부에서 이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자극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힘들을 조직하여 새로운 힘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 권력의 작동과 민주주의의 제도와 작동원리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개인적으로 또 집합적으로 요구된다.


4) 오늘의 현실에서 운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운동에 헌신하고 참여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과거 민주화시기보다 더 큰 운동가 개인의 자기희생과 실존적 문제가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운동은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지금 운동은, 과거 민주화운동 시기에서와 같이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조건, 삶의 환경을 부정의하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인 정치와 전 사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할 때 운동가는 그에 대응하는 이념과 가치, 규범과 신념을 스스로 다짐하고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운동은 피할 수 없이 사회에 대해 갈등적이 되고, 이념적이 되며, 또 이러한 운동가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는 사회를 향하여 어떤 효과를 갖기 이전에 자신 스스로에 대해 엄청난 압력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보만이 말하듯이, 민주주의는 개인생활의 삶의 조건과 공적 과업을 일상성속에서 결합하는 것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하고, 그러한 태도와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의 일상적 조건에서 운동가는 사적 생활과 공적 대의를 위한 행위간의 커다란 괴리와 양자 간의 긴장으로 고통받게 된다. 이것은 그의 행위가 사회를 개선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그 자신의 삶, 개인적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다.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를 스스로 강하게 설정할수록, 강한 이념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고, 이념과 가치로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개혁된 사회의 모습과 비전은 더 이상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본 발표자는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의 다이나믹스를 열망-실망의 사이클로 특징지었다. 많은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가능했던 운동이 전망하는 개혁이후 사회에 대한 열망은 클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의 현실은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도록 하고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일반법칙과 같은 것이다. 운동을 통한 사회에 대한 이상주의적  비전은 먼저 운동가를 스스로에 대해 소외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반대로 행위의 결과가 만들어낸 실망에 대한 자기환멸을 만들 것임이 또한 분명하다. 이것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그 자신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많은 대중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거리감을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기소외는 그의 사고와 행위가 지향하는 이상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의 모습과 비전은 실제의 사회에서 현존하는 공적생활과 가치와도 충돌하면서 공적으로도 소외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곧 허무주의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정치권과 운동권, 그리고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있는 허무주의는 우리사회의 병리적 정신상황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원인들은 여러 연원을 갖겠지만,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그것이 가져온 실망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사회심리적 현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시대・포스트-민주화시대의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들 : 글로벌(지구촌) 민주주의 서론


                                                    조희연(성공회대. 정치사회학)

chohy@paran.com

http://dnsm.skhu.ac.kr


<목차>

1. 머리말

2. 민주주의의 3가지 갈등지점

3. 지구화와 민주화의 이중적 진행

   :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지구화의 새로운 도전

4. 글로벌(지구촌)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의 재구축

1) 지구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재구축

2) 국민국가적 차원에서의 한국 민주주의의 재구축

5. 요약과 맺음말―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선도국’이 되기 위하여



1. 머리말


이 글은 지구화라고 하는 거시적 맥락 속에서 지구적 차원과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대안적으로 발전되어야 하는 가를 탐색하는 시도이다. 이는 동시에 지구화의 도전을 받으면서 87년 이후 격렬한 민주화의 도정에 처해 있는 한국―나아가 제3세계 많은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대안적으로 발전되어야 하는가를 탐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근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자기 발전하는 과정에서 겪고 있는 긴장과 갈등지점들에 대한 분석, 지구화가 국민국가 민주주의에 제기하는 도전, 현 시기 지구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구화(globalization)는 ‘자본’의 지구화를 지배적인 측면으로 하고 있고, 구체적으로는 국제적 금융자본을 필두로 하는 초국적 기업의 자유화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확대되는 가운데, 지구화를 경제 개방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다수 국민경제들에 있어서 지구화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화의 혜택과 위험은 각 국민 경제에 대단히 불균등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 혜택은 지구화를 주도하는 소수의 국가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더 나아가 많은 경우에 지구화는 새로운 성장주의를 강화함으로써 국민국가 내부에서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제반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키게 되고 그 결과 민주주의에 중대한 도전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또한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어떻게 재조정되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전지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 단계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민주주의의 발전전망이 무엇인가 하는 새삼스런 물음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 내부에 시선을 옮기면, 87년 이후의 민주화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일종의 ‘포스트-민주화’ 시기를 경과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을―권위주의 체제와의 연속성을 갖는―과도기적 시기와 반독재 민주세력의 집권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면, 반독재민주세력의 집권 하에서 민주개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지금,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과정에 놓여 있으며 그 대안적 발전전망을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적 전망을 탐색하는 한 연구로서의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세계체제적 조건 하에서, 민주주의이행기를 거쳐 이른바 ‘포스트-민주화’ 시기를 경과하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떤 민주주의적 발전전망을 가질 것이며 그것은 어떤 대안적인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여기서 나는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보다도, 대안적인 제도적 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의 원리적 지향을 탐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가 지구화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고 그것에 의해 규정되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인 제도적 전망은 지구화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기서 지구촌(지구적) 민주주의(global democracy)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주장을 하고자 하며, 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 실현과 더 나아가 지구화의 맥락에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여러 가지의 과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현 단계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1). 그러나 현 단계 한국사회, 한국 민주주의, 한국정치, 한국 사회운동의 위기는 복합적이라고 생각되고, 이것은 이 글에서 제시하려고 하는 지구적 차원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극복을 위해서도, 우리는 지구화라고 하는 객관적 흐름 속에서, ‘민주주의의 지구적 확장이냐 민주주의의 지구적 허구화냐’라는 양자선택의 과제를 인식해야 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민주주의의 개념적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민주주의의 근대적인 제도적 형태인 국민국가의 대의민주주의가 내포하는 3가지 한계지점이자 갈등지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점들은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심화가 일어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아가 근대 이후의 정치사회 변동과정에서 이러한 한계지점들을 둘러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내용적 구성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를 분석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내적 구성이 지구화와 민주화의 진행 속에서 어떤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가를 분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들에 기초하여, 지구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들을, 지구적 차원과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의 3가지 갈등지점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민의 자기통치(self-rule of people)’라고 하는 정신 위에 존립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주어진 정체(polity)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동등한 지위에서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정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규칙과 자원이 배분되고 생산되고 제정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는 이 정치가 바로 정치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는 민중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2). 이 근대민주주의는 국민국가라는 공간적 범위를 정체의 범위로 하여 진행된다는 점에서 물론 국민국가적 민주주의(national democracy)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는 근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이른바 대의(代議)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적 성격은, 제도적으로는 선거를 통해서 국민들이 자신을 대행해서 결정을 내리는 정치적 대의자를 뽑는 절차와 전제조건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을 포함하는 시민적 자유의 보장, 시민권과 피선거권의 평등한 보장,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주기적인 존재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민주주의는 그 전제로서의 시민적 권리, 정치적 참정권, 선거 등의 제도적 구성 속에서 작동하는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민의 자기통치’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모든 구성원들이 시민권으로 명명되는 기본 권리를 통해서 대의자들이 선출되고 이들이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현실’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민주주의를 ‘최소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 최소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보게 되면,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시민권과 모든 국민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정치참정권에 의해 구현된다. 최소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경우에, 시민들이 형식적으로 평등한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부여받는가, 혹은 대의자를 선출하는 선거절차가 존재하는가 등의 절차가 중시되게 된다. 최소주의적 의미에서 볼 때 근대 대의민주주의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주체로서의 국민들이 정치적 대의자를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선출하는 경쟁절차가 존재하느냐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4)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는 근대이전의 인류역사를 통해서도 그러하지만 근대 이후의 권위주의적 흐름--파시즘 등--에 의해 도전을 받으면서도 인류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정치원리적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정당화 기제 혹은 ‘정치적 외피’로서의 ‘도구적’ 성격5)을 강조하던 맑스주의적 전통에서도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선 사회주의를 전망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접근이 변화하기 시작했다.6)

그런데 민주주의의 최소주의적 조건들은 그 자체가 인간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들이 자신의 요구를 정치의 장(場)에서 표출하고 실현하는 최소한의 도구적 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즉 민중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공론화하고 이를 지배집단에 대해서 강제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힘을 조직하는 최소공간을 제공한다. 근대 민주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정치공동체에 속한 성원들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부단히 변화하고 그 실질적 내용이 변화해가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근대민주주의가 비록 최소주의적인 정치제도로 출발했지만, 국가와 사회, 국가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의 출발점적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급적, 사회적 투쟁과정의 구성물로서의 민주주의

근대민주주의의 최소주의적 공간에는 두 가지 대립되는 힘이 각축해 왔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를 ‘최대주의’적인 것으로 확대하거나,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확장하고자 하는 아래로부터의 힘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퇴행적인 방향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민주주의를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체제와 대립되지 않는 형식화된 제도로서 존치하게 하려는 힘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두 가지 힘이 각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실질화와 형식화, 참여의 최대화와 최소화, 민주주의를 전사회적 차원의 원리로 확장하려는 지향과 정치적 차원으로 한정하는 지향이 각축하는 속에서 존재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의 입장에서 근대 이후의 정치변동의 과정을 보게 되면, 근대민주주의의 형식화를 넘어서서, 그것을 사회적 차원에서, 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적 차원에서 실질화하기 위한, 혹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정치절차에서,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으로, 그리고 실질적인 내용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과 갈등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민주주의를 선험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계급적 각축과정 혹은 투쟁과정의 구성물이라고 규정한다7). 이런 성격 때문에, 근대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외양을 띄고 있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사회적・계급적 관계와 투쟁에 영향을 받으면서 큰 편차를 보이며 변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현재의 민주주의는 19세기 초의 그것과 형식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실체적 내용에서는 크게 변화하여 왔다. 각 시기의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내용성과 형식적 평등성의 범위와 형태를 부단히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여 왔다. 이제 민주주의는 이미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1인1표제’ ‘대표의 선출 절차’와 같은 협소한 의미로 인식되지 않으며, 경제적 민주주의, 산업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양성평등, 사회적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등과 같이 정치적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문화 등 전생활영역에 관철되는 보편적인 원리로 변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의 민주주의는 국민국가라는 영토적 범위 내에서 시민권이나 참정권, 정기적 선거와 같은 최소주의적 조건을 기초로 하는 대의민주주의형태로 존재하면서 국민국가 내의 다양한 사회적・계급적 각축 과정에 의해서 그 실질적 내용성이 부단히 구성하는 정치제도로 파악될 수 있다.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3가지 갈등지점

이러한 각축과정으로서의 근대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긴장지점혹은 갈등지점을 갖고 있었다. 근대 이후 정치적 변동과정은 바로 이러한 3가지 지점을 중심으로 하는 갈등과 변화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3가지 갈등 지점은 서구 근대의 민주주의가 갖는 내적 괴리지점이기도 하며, 국가와 시민사회, 지배와 저항, 자본과 노동의 갈등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3가지 지점들은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초기의 상태에서부터 현재의 상태로 부단히 ‘심화(深化)’되는 지점들이기도 하다.

첫째는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대의성(代議性)’의 형식화와 실질화 간의 갈등이다. 이것을 대의민주주의와 광의의 직접민주주의(적 요구) 간의 갈등,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에 있어서의 제도적 차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9).

앞서 서술하였듯이, 근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주권재민’과 ‘민의 통치’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 근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대의자’를 뽑아서 그러한 정신을 구현하는 대리 혹은 위임 민주주의 형태로 구체화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 기본정신으로서의 민(民)의 자기통치라고 하는 것과 현실적 형태로서의 ‘대의’ 간의 괴리를 내재적으로 갖게 된다.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근대 대의민주주의는 부단히 대의기관과 대표들‘의’ 민주주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일상적 과정이다. 일종의 민 혹은 민의 참여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주의(democracy without a Demos)’의 딜레마가 일상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근대 국민국가의 대의민주주의는 민중들의 권리의식이 고양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성은, 사실 민중이 근대 초기에 획득된 민주주의에 만족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대면하지 않았다면 쟁점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주체적 결정을 하고자 하는 민의 요구는 높아져 갔고 민 스스로가 자기변화를 하게 되면서 쟁점화되었다. 어떤 점에서 근대초기의 민중들과 현재의 민중들은 다른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괴리는―정확하게는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괴리되는 형식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민중들 자신의 이러한 변화에 의해서 촉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근대민주주의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 간의 관계이다. 이는 소수자(의 권리)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관계, 민주주의의 형식적 평등성과 실질적인 사회적 차별구조 간의 관계,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 간의 괴리, 혹은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에 있어서의 사회적 차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근대민주주의는 한편에서는 ‘시민권적 동등성’ 위에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분할(分轄)요인들을 중심으로 유지되는 사회적 차별구조를 내포하면서 유지된다. 예컨대 성, 인종, 지역, 종교, 종족, 사상 등 다양한 사회적 분할선을 따라서 소수자가 존재하고10) 이러한 소수자에게 차이(差異)가 차별(差別)로 전화된 구조로 존재하는데, 민주주의는 이를 침식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차별요인과 병존하면서 작동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내적 갈등 지점이다. 민주주의연구가이자 여성정치학자인 영(I. M. Young)의 표현을 따르면 ‘외적 배제’와 구별되는 ‘내적 배제’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 이러한 분할선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점하는 집단들은 부단히 이러한 분할선을 둘러싼 차별을 민주주의에 의해 도전받는 것을 최소화하면서, 민주주의를 부단히 형식화하는 방향에서 유지하고자 하게 된다. 차별의 구조는 지배적 집단에게는 사회적 독점을 제공하는 것이고 그만큼 종속적 집단에서는 배제와 차별이―민주주의적 프레임에도 불구하고―주어지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분할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점하는 집단들이 민주주의의 대의구조 자체를 왜곡하여 대의성 자체를 독점하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모든 현존하는 민주주의는 시민권의 형태로 개인의 형식적 평등성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차원에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적 집단들이 평등성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괴리는 모든 민주주의에 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의 갈등지점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 간의 관계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계급적 불평등의 관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간의 관계, 혹은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간의 괴리에 있어서의 경제적 차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1인 1표주의’의 형태로 작동하는 근대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는 ‘1원 1표주의’로 작동하는 시장 위에서 작동하게 된다. 여기서 시민권적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장에서의 불평등한 경제적 차별구조에 의해서 부단히 허구화되고 형식화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존재하는 상태 혹은 민주주의가 그 자본주의적 토대와 결합되어 존재하는 상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이 속에서는 정치적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을 내재적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긴장관계 속에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이 3가지 갈등지점은 각각 제도적・사회적・경제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적 민주주의 혹은 근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를 부단히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이처럼 바로 국민국가의 정치적 대의민주주의가 ‘민의 자기통치’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나아가 사회적 분할과 배제구조에 의해서 부단히 형식화됨으로써, 그리고 경제적 차별구조에 의해서 부단히 허구화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괴리라고 할 수 있다12).

이러한 3가지 근대민주주의의 내적 괴리 및 갈등지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적 근거로 한 것이나 다른 차원에서 사회주의적 정치도 직면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사회주의 ‘독재’가 아니라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면―역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면서 사회주의 정치를 실질화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13).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투쟁에 의해 ‘강요된 개혁’으로 실현되었다고 하면, 사회주의체제에서는 내적 개혁의 계기가 봉쇄된 채로 이러한 여러 차원에서의 민중들의 투쟁이 반(反)사회주의적 동력으로 수렴되면서―계획경제의 내적 문제점과 경직화로 인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결국 체제붕괴로 갔을 뿐이다. 

<표 1> 근대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3가지 내적 한계 및 갈등지점

개념

성격

내용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대의성(代議性)’의 형식화와 실질화 간의 갈등

대의민주주의와 광의의 직접민주주의(적 요구) 간의 갈등.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에 있어 제도적 차원.

근대민주주의의 대의적 기제들이 형식화되면서 민중들의 정치참여요구와 괴리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적 요구가 제기됨 (직접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에서부터 맑스주의적 직접민주주의까지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음).

민주주의와 사회적 차별들 간의 갈등

소수자(의 권리)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관계, 민주주의의 형식적 평등성과 실질적인 사회적 차별구조 간의 관계,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 간의 괴리, 혹은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에 있어 사회적 차원.

다양한 사회적 차별들이 존재하는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가 그것들을 침식하지 않고 공존함. 그러나 사회적 소수자들로 인하여 사회적 차별에 대한 도전이 강화됨.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의 갈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계급적 불평등의 관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간의 관계, 혹은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간의 괴리에 있어 경제적 차원.

자본주의가 내장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부단히 ‘시민권적 평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게 됨.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긴장이 나타나게 됨.



민중주체화의 진전과 근대민주주의의 ‘강제된 개혁’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역사는 앞서 서술한 3가지의 갈등지점들을 둘러싸고 민중들이 주체화되고 이에 따라 3가지 갈등지점에서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제도적 기제들이 발전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들의 주체화에 따라 3가지 갈등지점에서 일종의 ‘강제된 개혁’이 일어나게 되면서 민주주의가 근대초기의 형태에서 실질성이 보완되는 과정이었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그 질서 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민중들이 그 약자적 지위를 쟁점화하지 않는 한 문제없이 유지된다. 사실 하나의 차별은 차별받는 약자들이 차별을 문제삼을 때(problematize) 비로소 차별이 되며 차별극복이 의제가 되게 된다. 이처럼 민중들의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차별과 억압 등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행위를 조직화하는 성찰적・저항적 존재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주체화(self-empowerd subjectification)’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민중들이 변화하는 과정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함의는, 민중들이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부단히 의식성과 성찰성, 비판성이 고양되어가는 존재로서 민중이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차별과 배제도 그것이 민중들 자신에 의해서 쟁점화되고 쟁론화(contestation)되지 않는 한, 극복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민주주의는 계급, 계층, 사상, 성, 인종, 부, 종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민의 시민권적 평등을 향유하는 체제이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차별의 실질적 존재와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형식적 평등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다양한 차별이 쟁점화되면서, 민주주의가 그 실질적 내용에서 변화되어 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최소주의적인 형식성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제도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 작용하는, 시민사회의 힘, 사회의 힘, 노동자의 힘 혹은 민중의 힘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사회적 차별들이나 경제적 차별 모두가 이러한 질서 내에서 약자가 되는 민중들 자신이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나아가 최소한 그러한 질서의 존재를 감내하지 않는 주체화된 자세를 가지지 않는 한, 그러한 질서는 특별한 도전 없이 유지된다. 국가는 부단히 민중들을 특정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호명(呼名)하고 규정하고 동원하면서 현존하는 차별들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14).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틀 내에서 민중들이 부단히 주체화되면서, 사회적 차별들과 경제적 차별들에 대항하면서 이를 교정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들이 바로 근대 정치사 혹은 민주주의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중주체화와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는 한편에서는―국가를 통해서 담보되는―사회적 차별의 제도적 형태로서의 각종 사회적 배제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적・계급적 차별의 제도적 형태로서의 자본주의와 긴장을 가지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국민국가의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민중들의 주체화가 진전됨으로써, 민주주의는 그 실질적 내용성에서 자기변화의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의 19-20세기 민주주의의 동학은 3가지 민주주의의 내적 갈등지점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민중들의 주체화에 따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성이 더욱 문제로 되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화에 도전하는 여러 가지 아래로부터의 투쟁들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성을 보완하는 여러 기제들이 제도화되게 되었다. 광의의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들이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강제되는 방식으로 도입되게 된다.

민중들이 주체화됨에 따라, 대의민주주의는 민을 대의하는 대의자들을 뽑는 과정이 아니라, 민은 정기적으로 자신들을 ‘소외’시킬 ‘지배자’를 과정으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적 인식이 확산되게 되고, 여기서 다양한 투쟁들이 전개되었다. 이는 참여민주주의운동 같은 형태로도 표출되었고, 한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도권 정치를 감시하기 위한 시민사회운동으로도 표출되었으며, 국민발의와 국민투표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으로도 표출되었다. 사실 근대초기의 민주주의는 유산자민주주의였다.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참정권을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15). 이러한 것들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됨으로써 민주주의 자체를 변화시키는, 곧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를 정정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헌법조항으로만 존재하던 제도들―국민투표제도 등―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다층적인 통로로 민의 의사를 제도권에 반영하고자 하는 위로부터의 시도도 촉발되었다. 

둘째, 다양한 사회적 차별구조 하에서의 약자들이 저항적 주체로 전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 차별들이 쟁점화되면서,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실 근대초기의 민주주의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구조 및 사회적 분할 위에서 그것들이 쟁점화되지 않으면서 존재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의 다양한 주체성들이 쟁점화되면서, 기존에 문제시되지 않았던 차별들이 쟁점화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과정은 ‘시민권적 평등성’을 넘어서서, 다양한 사회적 차별의 기제들이 정치적 쟁점으로 전화되고 그에 대한 정치적 보완조치들이 발전되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20세기 후반의 신사회운동의 출현이나 다양한 형태의 풀뿌리운동의 확산, 소수자 정체성의 등장은 쟁점화되지 않았던 사회적 차별들이 쟁점화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른바 생활세계 영역의 많은 차별구조들은 그 차별의 객체가 되는 민중들 자신이 그에 적응하여 존재하다가 점차 주체화의 진전으로 쟁점화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소수자 우대조치(affirmitive action), 소수자집단의 정치적 대의권한을 보장하는 비례대표제도 등등 다양한 보완적 장치들이 개발되어가게 된다. 나아가 성적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제도정치의 장에서 대의되는 기회가 증대된다16).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정합성과 모순성

셋째, 경제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형식성과 실질성의 괴리 역시 부단히 도전을 받고 변화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초기자본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자유방임주의 기조 하에서 운용되었고 개인의 사적 소유권은 불가침의 권리로 보호되었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초기자본가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지향하면서 유아노동, 여성노동을 포함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행하였다. 정글법칙이 작용하는 가혹한 구조 속에서, 시민권적 평등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지극히 허구적인 것으로서 전락하게 되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로서의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형식적 평등성을 무의미하게 하거나 무력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가속화되게 되었다. 

이처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투쟁이 강화되고 그것이 민주주의적 공간에서 조직화된 힘으로―예컨대 거대한 참정권 운동으로 혹은 사회주의운동으로―표출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관계에 새로운 긴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긴장에 매개되면서, 자본주의와 시장의 경제적 폭력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는 시장의 공적 규율형태, 시장논리의 가혹성을 규율하는 형태, 시장의 결과로서의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보완하는 복지제도의 확충 같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시장의 ‘폭력’이 민주주의에 의해서 규율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규율은, 계급적 차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주의라는 통로를 통해서 ‘국가의지’로 전환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적 결합’을 이야기할 수 있다17). 이러한 모순적 결합을 나는,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속성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에 모순적으로 만드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력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본래 발생계보가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이 양자 간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대립적이지는 않았다. 그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최소주의적인 형식성에서 최대주의적인 내용성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세기의 전 과정은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이 계기가 되어 민주주의의 원리가 확장되면서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해서 공적 규율이 출현・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 시대는 ‘복지의 권리화’를 포함하여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다양한 공적 규제장치가 제도화되는데 큰 변화를 보이는 시기였다. 물론 이러한 공적 규제장치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따르는 욕구 상승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는 한편에서 이전의 긴장이 해결되면서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긴장이 출현하는 관계로 존재하였다. 민중의 주체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본래의 민주주의를 확장하여 각종 사회적 차별을 교정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공적 규제를 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한다면, 자본주의의 지배적 집단은 그러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각종 사회적 차별제도가 본질적으로 침해되지 않도록 않고 재생산되도록 하는 노력을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지구화와 민주화의 이중적 진행: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지구화의 새로운 도전


그런데 이러한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변화와 발전은 지구화의 맥락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지구화는 국민국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중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지구화는 현재 자본이 주도하는 경제적 지구화를 지배적인 성격으로 하여 진행되고 있다. 이 지구화는 앞서 서술한 3가지 차원 모두에서, 지배적 집단을 강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변화과정은 민주주의적 공간을 이용한 아래로부터의 민중들의 힘이 강화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는데, 현재의 지구화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운동의 초국경화를 동력으로 하여 진행되는 만큼―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하여 진행되는 만큼―아래로부터의 민중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위로부터의 지배적 힘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현존 지구화는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관계에서,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서, 지배적 집단과 종속적 집단의 관계에서 전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지구화로 인한 새로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화가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약화요인으로 작용

그러나 지구화는 자본에게도 위기의 과정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 지구화는 지배적인 자본의 질서로서의 국민국가적 질서가 해체되고 동시에 초국민국가적 질서로 재편되어 가는 과도기적 혼란도 동반한다. 이런 점에서 지구화를 대자본가들의 ‘음모적’ 과정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초국적 자본들이 지배적 지위를 갖고 있지만, 이들도 초국경화 혹은 자본의 탈영토화가 동반하는 격렬한 경쟁 속에서 위기적 과정으로 지구화를 대면하고 있다. 이 위기에 잘 적응하면 더 큰 이윤과 축적이 물론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대자본에게는 더 큰 기회로 주어지지만, '파국‘의 위기를 내장하는 국면이라는 것이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이렇게 지구화가 위기적 성격을 자본에게도 내장하는 것은, 지구화가 자본의 공세적인 확장으로 보이지만 ‘축적의 정치적 한계’에 도달한 ‘자본의 탈영토화’18)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사회주의 붕괴에 의해서 촉진되어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를 계기로 ‘자본의 탈영토화’는 정치적 한계를 피해서 자유로운 축적을 진행하기 위한 자본운동의 국민국가 탈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축적의 정치적 한계는 앞서 서술한 민주주의의 여러 차원에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와 민중의 주체화와 조직화로 인하여 자본축적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사회적 한계가 주어진 데에 따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축적의 과도한 한계를 초국경화를 통해서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지구화는 더욱 촉진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본운동의 초국경화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차원들에서의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발전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20세기의 혁명은―패배한 것이 아니라―계급갈등의 조건을 변형시켰으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즉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을 설정하게 된다---제국의 구성은 새로운 다중의 권력의 출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라고 말한다19).

지구화는 이렇듯 자본에 의한 국민국가적 경계의 탈출에 의해 추동되지만, 이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확장에 의해서 구축된 공적 규율질서를 해체시키고 새롭게 국가의 친자본적 정책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약화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친자본적 정책에는 각종 공적 규제의 약화를 통한 자유시장의 확대, 노동시장의 유연화, 탈규제, 작은 정부 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물론 지니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근대민주주의의 3가지 괴리지점에서 민중의 주체화로 인하여 생겨나는 다양한 민주주의적 기제들이 자본운동에게는 질곡으로 작용함으로써 자본운동의 초국경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만큼, 자본운동의 초국경화는 역으로 국내의 민주주의적 흐름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지구화는 일차적으로 국민국가적 지형 내에서 발전하였던 민주주의적 힘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구화에 따른 국민국가의 ‘상대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지구화는 국민국가의 상대화(relativization)를 통해서 국민국가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 혹은 시장에서의 주변적 존재들의 요구를 표출시킬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사실 근대 이후의 질서 속에서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는 당연히 주어진(given)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국가 자체가 구성적 질서라는 점은 이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의 개념은 여타의 국민국가로부터의 배타적 존재성, 즉 분리에서 구해지나 지구화 시대에는 국가의 주권능력은 나머지 세계에 대한 연계능력이나 국제체계 내에서의 관계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 능력에서 주어지게 된다20)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국가와 민중의 관계에서 전자의 독점적 지위가 약화되기 때문에, 국민국가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는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 혹은 경제적 약자의 주체성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특히 경제적 지구화가 국민국가 틀 내에서 투쟁을 통해서 확보된 다양한 민주주의적 기제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다양한 차원에서의 민중들의 저항이 나타날 소지를 안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민주주의 발전의 동력은 국민국가적 질서를 전제로 한 진보적 동력―차별에 저항하는 소수자의 저항이건 시장의 폭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제는 국민국가적 질서 자체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아래로부터의 요구들도 분출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예컨대 멕시코 차파티스타의 반란 같은 것은 이의 상징적인 예라고 하겠다. 1994년 NAFTA가 발표되던 날 차파티스타의 반란이 공개화되었다는 것은 지구화와 소수자의 반란 간의 상호관계의 일단을 상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붕괴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이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의 붕괴는 냉전시대에서 포스트-냉전시대로의 이행을 동반하였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붕괴는 분명히 지구적 차원에서 진보적・좌익적 힘의 약화와 주변화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에서 냉전시대에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고 있었던 국민국가의 절대화가 균열되고 이로써 좌우이념의 틈바구니에서 표출되지 못하던 새로운 진보적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새로운 좌익적 힘을 표출시킬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포스트-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에 우익적 국가와 좌익적 국가에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고 있었던 미・소의 지원이 약화되게 되고 이는 냉전적 국민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었던 다양한 민중적 흐름들을 분출시킬 가능성을 내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우리는 약소국의 민족주의가 가졌던 긍정적인 측면, 즉 자결의 권리의 옹호 혹은 국민국가 구성원들의 총체적 권리 옹호의 측면들을 생각할 수 있다. 현재도 민족주의는 분명 약소국이  패권국가들에 대해서 갖는 적극적 기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상대화를 무차별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패권국가와 패권국가적 배경을 갖는 초국적 자본들의 지구화가 이미 국민국가를 상대화시켜가고 있다고 할 때, 약소국의 입장에서 혹은 약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 지구화된 질서를 변화시켜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약소국과 약소국 민중의 권리옹호 자체도 국민국가의 강화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국민국가의 쇠퇴는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인 과정이다. 국민은 문화적 형성체, 소속감, 공동유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로 사법적-경제적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가 지닌 효과가 쇠퇴한다는 것은 확실히 GATT와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 그리고 IMF와 같은 완전하게 전지구적인 사법적-경제적 기구들의 진화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초국적인 사법적 토대에 의해 지탱되는 생산과 유통의 전지구화는 일국적인 사법구조들이 지난 효과를 넘어선다”21)고 할 수 있다.


시민권이 융합의 범주에서 배제의 범주로

그런데 이러한 지구화의 이중적 효과 하에서, 국민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도전은, 지구화가 정치공동체의 구성변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초국경적인 노동이동의 증가로 인하여 민중의 구성과 경계가 변화되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적 공동체의 인종적・ 민족적・종교적・사회적 이질성을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본이 허용하는 노동이동은 합법이지만 노동이 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이동은 불법이다. 이처럼 초국경적 인구이동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초국경적 노동이동은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의 이질성을 강화시키게 되고, 내부의 분할선을 더욱 복잡하게 구성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초국경적 노동이동이 민주주의에 도전이 되는 것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노동이동이다. 단적으로 외국인노동자나 외국인 영주자들이 증대하게 되고 이들을 기존의 민족집단의 하위집단을 존재케 한다. 이들은 민주주의 틀 내에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새로운 하위집단으로 위치지워지며 정치공동체의 영토에 거주하나 대의민주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대의되지 않는―시민권의 한계 속에서―집단으로 존재하게 된다. 더구나 이들은 시장에서 2차 노동시장 혹은 3차노동시장의 형태로 하위노동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노동기본권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부여받지 못함은 물론, 보건의료, 주거 등의 여러 차원에서도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제솝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국민국가의 지배가 ‘2개의 국민 프로젝트’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하면, 이제 그 2개의 국민을 상층으로 하는 하층 국민 프로젝트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국민국가의 영토 내에 존재하나, 민족국가적 정체성에 의해서 부여되는 시민권의 외부에 있는 이러한 존재들에게는,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게 만든다. 이는 근대의 맥락에서 시민권이 국민국가적 경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권리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융합(融合)’의 범주로 작용하고 있었다면, 이제 지구화 시대에 시민권―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폐쇄적으로 규정된 바의 시민권―이 배제의 범주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기본 매트릭스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국민국가 민주주의에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동안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앞서 서술한 3가지 차원에서 ‘동일한 경계’ 내에서 부단히 심화되었다고 한다면, 지구화는 이제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장해야 하는 도전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민주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갈등지점이 현재화(懸在化)

서구의 근대사 속에서 진행된 근대민주주의의 내적 괴리는 사실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맥락에서는 최근까지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확립 혹은 회복이 이슈였지, 즉 독재냐 민주주의냐의 대립 속에서 투쟁이 전개되었지,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를 진보적으로 확장하는 과제는 별로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은 아시아와 남미, 남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민주주의적 제도가 본격화되고 독재의 민주화과정에서 위에서 서술한 민주주의의 내적 괴리가 본격적으로 쟁점화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정치변동을 보게 되면, 이것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87년 이후 한편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 자체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형식적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와 내적 갈등지점을 새롭게 쟁점화하기 위한 투쟁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해방 공간에서 헌법제정과 함께 이식된 미국식 민주주의―그 자체가 큰 내적 한계를 내장하고 있는 것인데―는 그 내적 한계지점이 쟁점화되어 극복과 확장의 계기를 갖기 보다는, 87년 이전까지의 시기에 있어서는 서구식 민주주의 자체가 전반적인 민중들의 민주주의 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그리고 이를 악용하는 지배권력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왜곡・축소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형식적인 시민권적 평등성과 권리 자체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오히려 ‘현실’에 맞추어 축소 조정되는 과정이었고, 이를 독재 국가가 촉진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존재하는 형식적 대의민주주의 제도들마저 무력화되었고, 그래서 다양한 사회적 차별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문제시되거나 하지 않았다. 또한 근대화라는 명분 하에 친자본주의적인 논리를 민주주의를 압도하였다. 이것은 형식적 민주주의 자체도 왜곡 축소되는 과정 속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지점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의 주체화가 진전되었고 민중들의 권리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귀속감이 강화되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정점에 이르는 80년대 이후, 해방공간에서 이식된 민주주의의 축소과정이 반전(反轉)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형식적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동시에 형식적 민주주의의 내적 괴리지점들―앞서 서구의 3가지 차원들―이 동시에 문제가 되는 상황을 87년 이후 한국사회가 맞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형식적 대의민주주의의 내적 괴리들을 쟁점화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시민사회, 노동자, 민중들의 주체화와 조직화된 힘이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발전은―비록 자유주의적 성격이 지배적이었지만―대의민주주의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운동들이었다22). 대의민주주의가 ‘위임'민주주의로 작동하는 것에 대항하여, 민중들이 정치의 주체로 자신을 내세우는 과정이었다. 또한 87년 이후의 민주주의이행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적 차별들은 국가의 억압을 뚫고 다양하게 쟁점화되게 되었으며, 계급적 차별구조 역시 쟁점화되게 되었다. 나아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함하여, 자본주의에 반대하거나 개혁을 요구하는 투쟁은 확산되었고 이는 천민적 자본주의와 시장을 공적으로 규율하는 각종 기제들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이처럼 민주화의 과정이 민중의 주체화의 진전을 동반함으로써, 근대민주주의의 한계지점을 성찰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동력을 창출한다고 하면, 반대로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이중적 효과를 갖는 지구화의 물결이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동력들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제를 우리가 안고 있다고 하겠다.



4. 글로벌(지구촌)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의 재구축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적 원리와 방향을 서술하여 보기로 하자. 이러한 대안적 논의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민주주의를 사회적・계급적 투쟁과 관계에 의해서 그 실질성이 변화해가는 과정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 재구축의 두 가지 차원

현단계 지구화의 과정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재구축은 지구적 차원과 국민국가적 차원 모두에서 이중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차원의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국민국가에서 확립된 민주주의의 원리를 지구적 수준으로 확장하여 지구촌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들을 마련해가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지구촌 민주주의의 실현 노력과 함께 국민국가의 한계지점들을 진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자는 지구적 차원의 과제이고 후자는 지구적 차원과 연계된 국민국가적 차원의 과제라고 할 것이다. 전자가 민주주의를 지구적 차원에서 ‘형성’하고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후자는 국민국가에서 실현된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심화’‘확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구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재구축

전자와 관련해서, 현단계 지구화는 기존 근대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 ‘타협적’으로 고정화되고 고착되었던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관계, 특별히 그 일부로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불리는 최근 지구화의 과정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전자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19세기의 근대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치적 차원으로 협애화되고 시장은 ‘자유경쟁적인’ 시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20세기의 근대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사회경제적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민주주의적으로 규율되는 시장경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화의 과정은 이러한 민주주의적으로 규율되는 시장경제가 이전 보다 훨씬 더 자유시장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힘의 우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 시장이 표방하는 경쟁력, 일자리 창출, 효율성 등이 지배적인 가치가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민주주의가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집단들―지배적 집단과 소수자적 집단들―이 상호경쟁하고 각축하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제 민주주의의 성격 자체가 국민국가를 넘어선 외부적 힘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구적 복합성을 갖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국민국가적 폐쇄공간에서 지배와 저항이 각축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로 인하여 초국경적인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속에서, 지배와 저항이 각축해야 하는 상황이 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이러한 복합적 상호작용 상황을 강자 집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를 초국민국가적 차원으로 재해석하고 확장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 민주주의가 초국적 흐름들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실제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민주주의라고 부르건, 글로벌 민주주의라고 부르건 지구촌 민주주의라고 부르건, ‘영토국가와 지구적 정치’23)의 괴리를 극복하는 초국민국가적 민주주의 질서가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구적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들

이러한 초국민국가적 민주주의 혹은 지구촌 민주주의의 필요성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서 검토되고 있다. I. M. 영은 “민주주의적 결정의 규범적 정당성은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정도 또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24) 때문에, 정체(polity)의 범위는 “정의의 의무범위(range of obligation of justice)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상호작용이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포섭적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저자가 자신의 입장을 개념화한 것이다(인용자)―의 원칙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25)고 본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정의의 의무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녀는 기존에 민족국가를 배타적인 정의의 의무범위로 보는 시각들을 국민국가에 긴박된 정의관(state-specific understanding of justice)으로 비판하면서, 이미 국경을 넘는 상호의존성과 상호영향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의 경계를 국민국가로 한정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는 관계의 범위가 지구적”26)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헬드는 일련의 저작27)을 통해서 초국민국가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주장하고 있다. 1868년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를 규정한 베스트팔렌 모델(Westphalian model)이 출현하였다고 하면 이 모델은 지구화하는 세계경제의 맥락에서 민족국가의 관할권(jurisdiction)을 벗어나는 권력중심과 네트워크가 무수히 나타남으로써 균열을 맞고 있으며, 1945년 출현한 유엔 모델(UN Charter model)역시 현단계 초국민국가적 대립과 균열을 관리하는 초국가적 가버넌스 체제로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28). 여기서 헬드는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지구적 공동체로 확장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도를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cosmopolitan democracy) 모델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는 초국가적 상호연계성과 상호영향에 의해 국민국가적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민중들의 ’자율‘이 규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초국적인 민주주의적 공적 법(democratic public law)이 성립되어 정치적 행위의 공통구조가 재확립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초국가적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29).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자율과 자유, 민의 자기결정이 실현되기 위해서 정치공동체의 모든 행위자들이 준수해야 하는 공공적 법이 필요한데, 이제 초국경적인 요인들이 국민국가를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적인 공통법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는 자율과 자유, 민의 자기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권력(자)을 공적으로 규제하는 프레임이 된다. 그의 코스모폴리탄 모델의 핵심적인 주장은, 초국민국가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적 원리를 구현하는 제도적 기제들이 만들어져야 하고, 동시에 이러한 지구적 질서의 협의적・대의적 기제에 대한 보완으로, 지역적 수준에서의 집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를 아래로는 지역수준으로, 위로는 지구적 수준으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민주적 협의(deliberation)의 유일한 장(場)으로서의 민족국가의 독점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30)

이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은 사실 초국민국가적 질서에 대한 급진적 분석인 셈이다. 그들은 지구적 민주주의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국민국가적 주권형태가 제국적 주권(imperial form of sovereignty)에 의해 대체되고 있으며 이는 전지구적 수준에서 그리고 인간 삶의 전 영역―생체적 생산―에까지 이러한 제국적 주권이 행사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체제의 붕괴와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 등의 요인에 의해 계기지워지면서, 경제적 교환들과 문화적 교환들의 지구화가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지구화로 인하여, 전지구적 시장 및 전지구적 생산회로의 등장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정치지배질서, 새로운 지배구조로서의 새로운 제국적 주권(imperial sovereignty)이 등장해 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지구적 시장질서와 전지구적 교환들, 전지구적 상호소통을 관리하는 정치적 질서, 즉 세계를 통치하는 주권권력이 등장하여 왔고, 이것이 이른바 제국이다. 이런 네그리와 하트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베스트팔렌체제의 ‘균열’을 이야기하고 있는 헬드의 논의보다도 더 나아가는 것이다. 즉 현단계 초국민국가적 질서의 존재를 더욱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오늘날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최초로 출현하고 있다―민주주의는 근대의 전시기를 통하여 모든 민족적・지역적 형태를 망라하여 불완전한 프로젝트였다. 현 시기의 지구화과정은 분명히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였다.31)”고 말한다. 네그리와 하트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히 국지적 투쟁전략, 민족주의에 기초한 투쟁전략은 퇴행적인 것이 된다. 그들은 민중들의 생존권과 민주주의적 권리투쟁이 국민국가를 둘러싼 지형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아가 네그리와 하트의 책에서 우리가 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제국에 대항하는 다중’이 무엇을 요구하는가하는 점이다. 이는 정확히 현재의 지구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하여 요구하여야 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재전유권으로 정식화된 다중의 요구들은 지구화 시대의 일반민주주의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구가 진정으로 실현된다면 현재의 국민국가적 민주주의 혹은 제국적 질서 자체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구화의 과정을 근대화의 과정과 비교하게 되면, 이러한 필요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대로의 이행과정을 보게 되면, 사실 국민경제적 통합과정, 국지적 시장권을 넘는 경제의 ‘초국경화’(trans-borderization)가 먼저 진전되고 그것을 물적 토대로 하여 정치적 통합이 진전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현재의 경제적 지구화과정, 즉 경제의 ‘초국민국가적 초국경화’가 진전됨에 따라, 현재의 국민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정치사회적 현상들이 증대하고 그 결과 경제적 토대에 상응하는 경계를 갖는 정치적 상부구조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 지구화과정의 진전은 불가피하게 현재의 국민국가적 정치적 권위체를 넘는, 초국가적 정치적 권위체의 창출 욕구를 출현시키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의 과정은 과도기적으로는―서구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186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전개되는 국민국가 질서를 전제로 하면서도 국민국가적 관할과 권한을 초국가적 질서로 이양하는 형태로 전개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구촌 민주주의와 UN 개혁

이러한 지구촌적 민주주의에 있어 현재의 UN질서의 급진적 재구축은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현재 유엔은 모순적 위치에 놓여 있다. 한편에서 유엔은 인권, 환경, 여성, 아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국민국가적 관할을 넘는 초국적인 규범을 형성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90년대 이후 유엔이 매개한 여러 가지 국제적인 회의들은 바로 이러한 영역들과 이슈들에서 초국적인 민주적 규범들―비록 한계가 있지만―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들은 실체화되지 못하고, 권고사항이나 당위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유엔 자체는 유엔 안보리의 거부권과 같은 제도들에서 상징되듯이 패권강대국들의 입장, 특히 미국의 의사에 의해서 강력하게 영향을 놓여 있다. 유엔은 한편에서는 현실 패권국들의 정치경제군사논리와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게 부상하는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규범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고 타협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32). 유엔 자체에 이러한 모순성이 내재화되고 있다고 할 때,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미래지향적 규범과 현실의 권력구조 간의 타협구조를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지구촌 민주주의의 시도는 그 하나의 의제로서 유엔의 모순성을 민중적 요구의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를 위해서는 90년대 국제회의를 통해서 지구촌 민주주의의 새로운 규범으로 합의되어온 것들이 ‘현실주의적’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국제정치의 구속력이 있는 제도로 정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33).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최근 개혁과 일본의 상임위 진출 문제도 이러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34).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은 2차대전 이후의 권력구조가 초국적 질서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의 많은 변화들은 이러한 거부권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안보리 개혁안은 현재의 안보리 구조를 개혁하는 방향이 아니라 타협적 재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타협적인 방안은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부상한 현실적인 패권국가들을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의 지위로 편입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지역 안배라고 하는 명분과 결합될 것이다. 여기서 물론 신규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가질 것인가 아닌가도 쟁점이다. 그러나 지구촌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구현하는 방향에서의 초국적 규범들이 현실적인 정치경제군사논리를 통제하는 데 있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발전의 방향은 시민권과 참정권의 논리가 시민권과 참정권 속에 담겨 있는 민의 자기통치의 정신을 위협하는 현실의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실현되는 것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안보리의 개혁안은 현실논리의 타협적 방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반(反)개혁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된다. 어떤 점에서 거부권을 초국적인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인 원리에 따라서 규제하는 것을 담지 않는 어떠한 개혁논리도 현재의 지구촌 민주주의의 구현방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데이비드 헬드는 자신의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 모델을 실현하기 위한 중단기적인 제도적 과제로서 정치적 차원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개혁, 유엔에 정부대표만이 아닌 민중을 대표하는 의회적 차원의 설치(second chamber), 유럽연합과 같은 정치적 지역화(regionalization)의 확장(유럽연합 등), 글로벌 협약을 위한 초국적인 국민투표제의 사용, 국제법정의 강제적 관할, 새로운 국제적인 인권법원의 설립, regional and global 수준에서 새로운 경제적 조정기구의 설립, 효과적인 책임성 있는 국제적인 군사력의 확립, 유엔 대 가칭 ‘경제사회안전보장이사회’의 설치 등을 들고 있다35).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권력영역에 적용되는 새로운 권리와 의무 헌장 제정을 포함하여, 지구적인 민주적 법의 확립, 다양한 지역, 국가들에 연결된 지구적 의회의 창설. 공공 이슈 전반을 다루는 국제법원 설립, 전지구적 수준에서 민중들의 의사를 묻는 지구촌 국민투표제도의 도입, 현재의 국제형사법정의 실질화를 포함하여 강제적 관할권을 갖는 지구촌 법치 질서의 확립, 지역적 수준이나 지구적 수준 등 초국민국가적 수준에서 국제적, 초국적인 경제기구들이 의회적 기구에 의한 공적 구속을 받도록 하고 이를 위한 초국가적인 경제적 조정기구의 설립, 장기적으로 국제적인 평화유지군을 대체하는, 국민국가의 군사력이 부분적으로 위양되고 초국적인 군사적 통제권을 갖는, 그래서 국민국가 간의 전쟁체계를 초월케 하는 계기가 되는 지구촌적인 군사체계의 확립 등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논의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초국적 질서의 형성과정이―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이미 진행되고 있고 단지 그것이 ‘위로부터’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러한 초국가적 질서가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형태가 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는 과정을 밟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초국가적 질서가 경제의 초국가화에 상응하여 형성되더라도 그것은 권력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민주주의의 진전과정을 보더라도, 민주주의의 확산, 경제에 대한 공적 규율 등은 사실 노동자계급의 투쟁 등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는 과정을 밟았다. 마찬가지로 지구적 차원에서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결집될 때 비로소 초국가적 질서의 사회적・ 정치적 성격이 각인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아래로부터 그리고 약자의 입장에서 지구촌 민주주의를 형성시켜 가는 것은 약자의 인권과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도 현단계 지구화시대에 회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할 것이다.


2) 국민국가적 차원에서의 한국 민주주의의 재구축

둘째, 지구화와 관련하여,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내적 한계지점들 역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지구촌 민주주의 기제의 형성적 노력과 함께,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내적 한계지점들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체의 광역화에 따른 다층적인 대의 기제를

이와 관련하여, 먼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괴리와 관련하여, 국민국가 대의의 기제를 보완하는 다층적인 직접민주주의적 기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인류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정체(polity)의 단위가 광역화되는 과정이었는데, 이러한 광역화는 주권자와 대의자의 사회적 거리를 확장하고 그 결과 대의민주주의의 형식화를 동반하게 된다. 더구나 지구화는 국민국가의 통합과정에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놓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형식화를 동반할 수 있다. 헬드는 근대정치철학―19, 20세기―이 자유민주주의적 사고의 핵심에 투표자와 대의자, 대의자의 결정과 국민 사이의 조화로운 대칭적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등한 권리를 갖는 시민들과 그들에 의해서 선출되는 대의자간의 책임성(accountability)이 실현되어야 하고, 또한 의사결정의 결과가 국민들에게 미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적 문제들이 회귀(feediback)되는 과정이 필요하다36). 지구적 차원에서도 이러한 메카니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구화에 따라 민주주의 정체의 범위를 광역화하게 되면서, 투표자와 대의자간, 투표자의 결정과 민중 간의 사회적 거리가 광역화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더욱 자신과 먼 지점에서 결정되면서도 자신들은 이러한 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질화를 위해서는 보완적 기제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더구나 정체의 광역화는 한 개인에 대해서 다층적인 구속이 주어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에서의 오랜 이상은 개인이 부당한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율을 실현하는 것을 기본목표로 한다. 그러나 지구화로 인해 이러한 제약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즉 지역적 수준에서 그리고 지구적 수준에서 더욱 많아지게 된다. 이러한 초국가적 수준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제약하는 변수에 대한 적극적 규제가 없으면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개인의 자유와 자율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지구화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참여와 협의의 기제가 다층적으로 마련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앞서 서술한 대로 대의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의 힘이 강화되어 왔고, 민중들의 다층적인 주체화가 진전되어 왔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지구화에 따라서, 국민국가를 넘는 힘에 대해서 지구촌 민주주의의 형성을 통해서 민중적 참여가 이루어져야 함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프레임 내에서도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것들의 예로서는, 현재 근대적 대의민주주의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투표와 소환제도. 발의제도 등 직접 민주주의적 통로를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소환’ 제도는 선출된 대의자를 시민사회가 일상적으로 통제하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환제도는 중앙정부적 수준과 함께 지방자치제의 수준에서도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국민투표제도도 주민투표제도와 함께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폭넓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37) 직접민주주의적 기제의 대표적인 것은 민이 자신의 대표에 대해서 다층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할 때 투표, 소환, 발의 등 외에도 직접적인 참여의 기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38). 국민국가의 민주주의에서는 투표, 소환, 발의 등의 경우에도 그것이 ‘중대한 사안’으로 한정하는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더욱 낮아져야 한다.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정당 등 권력기관 등의 권력행위, 정책시행행위에 대해서, 주민들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다양한 기제로 주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포럼(civil forum)같은 형태로 민중들이 직접 참여할 수도 있을 수 있으며, 각종 위원회(committee)같은 형태로도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39).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노력은,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제도적 위임기관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조직들을 비제도적인 위임기구로서 인정하고 활동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차별을 감시하고, 직접 민주주의의적 특성을 실현하는 것은, 선거를 통한 위임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위임기관들을 자발적으로 감시하는 여러 시민사회의 기구들의 활동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기구들의 ‘대의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물론 영(Young)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의기관이나 국가기관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40), 대의기관들이 대의의 실질화, 대의기관들이 투표자들의 의사에 일상적으로 긴박되도록 하는데 이러한 시민사회기구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른바 ‘헝가리 모델’과 같이 국민들이 세금을 낼 때, 세금의 일정 부분을 자발적으로 선택에 의해 시민사회의 권력감시기구들에 기부할 수 잇도록 하는 방안도 가능할 것이다. 국고에 의해서 ‘선거공영제’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선출한 대의기관을 일상적으로 감시할 기구에 대해서 공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나아가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제도정치의 장에서 차별화된 대표성을, 그리고 그 내부에서도 분화된 대표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는 예컨대 노동자들이 다층적인 수준에서 자주적 결정, 자율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제도들, 외국인노동자 밀집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지역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등 다양한 방식이 실험될 수 있다.


국경을 넘는 시민권

다음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관계, 혹은 민주주의와 사회적 차별과의 관계이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정치적 공동체를 구체화하여 가야 한다고 하면, 국민국가의 차원에서도 새로운 도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도전과 그에 따른 과제는 두 가지를 포함하는데, 첫째, 새로운 진입집단―인종, 종교, 종족, 역사, 문화가 진입자들―으로 인하여 국민국가의 정치공동체가 사회적으로 위계화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민국가의 민주주의의 진보의 새로운 과제는 바로 이러한 이질화되는 국민국가적 사회를 국민국가가 성취한 평등과 민주주의, 시민권의 수준에 맞추어 평등화하는 것을 핵심적으로 포함한다. 둘째, 민중의 주체화에 따라, 기존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회적 차별이 더욱 폭넓게 문제시되는 만큼, 이러한 차별과 독점의 구조를 상응한 방식으로 민주화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의 문제와 관련해서, 지구화에 따라 새로운 하위 구성집단들이 존재하게 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초국경적 확장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구화에 따라 초국경적 인구이동이 증대하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구성원들의 차이가 증대되는 것에 대하여 국민국가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국민국가들 자체가 사실 동질적인 지역공동체가 광역의 국가적 공동체로 통합하는 과정이었고 이는 이질성의 증대 혹은 이질적 공동체로의 전화과정이었다. 여기서 역으로 그 이질성―인종, 지역, 종교 등―을 가로지르는, 또한 이질적인 공동체 구성원을 동등하게 대우하는―그래서 통합하는 계기가 되는―시민권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런 점을 연장해서 보면, 지구화의 과정은 국민국가적 통합과정을 뛰어넘는 이질성의 증대과정이고 이질성 간의 충돌이 증대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포스트-냉전 시대에 더 큰 지구적 갈등―이른바 ‘문명충돌’을 포함하여―이 출현하게 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도, 정체의 광역화에 따르는 그리하여 구성원의 이질성이 증대하는 조건에 대응하는 동질화의 보편적인 기준이 설정될 필요가 있다. 이는 지구화 시대의 갈등을 축소하기 이질적인 지구적인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점은 지구화에 따라 복합적인 요소들이 집결되는 공간적 장에서는 더욱 절박한 과제가 된다.

지구화는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된다. I. M. 영이 분화된 연대성(differentiated solidarity) 혹은 차이를 전제로 한 연대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의미가 된다41). 지구화에 따른 이러한 이질화는, 국민국가 내에서 투쟁을 통해서 획득해온 사회적 차별을 위한 다양한 상쇄기제들이 민족적 동질성을 갖는 집단 내에만 한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외국인노동자는 자신이 일하는 사회의 민주주의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지구화 시대에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시민권을 공유하는 패권적 민족집단 내부의 민주주의로 전락하게 됨을 의미한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백인만의 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것은 시민권이 근대화의 맥락에서 이질적인 국민국가 구성원 모두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권리와 의무체계였던 것에 비하면, 앞서 서술하였듯이 이제 시민권이 ‘배제의 범주’로 작용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지구화의 맥락에서 어떻게 소수자의 권리들을 확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로 된다.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존 자유민주주의에서 권리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적 과정을 통하여 규범적 요구를 현실의 실제적인 논리에 관철시키거나 후자를 전자의 관점에서 변화시켜가는 과정이 현대민주주의의 협의적 성격이다”42)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단일국적주의를 넘어서―이중국적・삼중국적의 필요성

이런 점에서 지구화 시대에 국민국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을 보완하는 여러 가지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의사결정의 다층적인 수준에 새로운 사회적 외(外)집단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들이 자신들이 일하고 존재하는 국민국가의 새로운 의미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시민권을 국민국가와 배타적으로 결부시키는 시각은 이제 극복되어야 하고, 외국인노동자들, 외국인 정주자들이 자기가 위치한 공간적 영토 내에서 민주주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지구화 시대의 민주주의는 ‘차이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은 이런 점에서 ‘보편적인 인권’과 '차이의 권리(the right to be different)'를 내포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43). 이런 점에서 “다양성이 더욱 관용되고 정치적 공동체의 독립성과 차별성이 도덕적 가치로서 존중되고, 그러한 공동체 사이의 불완전하지만 평화로운 관계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권적 존재들이 순치된 세계(a world of tamed sovereigns)'44)가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국민국가가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독재(the tyranny of samenss)’45)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지구화 시대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차이의 법적 인정이 국내민주주의의 틀 내에 내재화되어야 한다.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이 국경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면, 법 앞에서 일부는 평등하고 일부는 불평등하게 된다. 이제 시민권의 개념은 특정한 국민국가의 구성원에게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협소한 개념으로부터, 개인들의 삶의 요구와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연계된 의사결정영역에서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세계질서의 대안적 원칙으로 확장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다46).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사람들이 중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정치공동체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을 결정하는데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작은 도시로부터 지구적 조직체에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의 시민권과 지구촌 시민권은 하나의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47). 이렇게 본다면 지구화의 맥락에서 근대적 시민권의 개념은 지구적 시민권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지구화 시대의 갈등과 충돌의 극복을 위해서도, 지구화 시대 공존가능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도, 국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존중되고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지구적 시민권 문제를 사고할 필요가 있게 된다. 사회운동적 측면에서도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네그리와 하트의 표현으로 하면, 세계를 분할하는 선이 민족국가적 경계를 따라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결과 국지적 저항전략 혹은 민족주의적 저항전략의 실효성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복수성과 구성적 저항성을 갖는 다중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지구적 시민권은 제국의 새로운 복수적인 저항주체로서의 다중(多衆)이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화하기 위한 과정이자 그것의 조건을 만드는 요구이며, “탈근대성의 조건 속에서, 근대의 근본적인 헌법원리―권리와 노동을 연결하고 그래서 자본을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시민권으로 보상하는 그러한 근대적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48)

이와 같이 보편적 인권과 차이의 권리를 기초로 하는 지구적 시민권으로 가는 과도기에 일차적으로 우리는 단일국적(單一國籍)주의를 넘어서서 이중정체성, 삼중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정체성의 법적 표현으로서의 ‘이중국적’ ‘삼중국적’문제도 제기될 것이다49).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 원리의 지구적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국이라는 영토에 거주하는 외국인 정주민들을 ‘권리의 주체’로―물론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무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진행된다―받아들이는 문제로 바라보아져야 한다. 그동안 국적이나 시민권이라고 할 때 일정한 공간적 거주와 혈통적 동일성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지구화의 맥락에서는 불일치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중국적은 상류층이 미국국적 등을 취득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문제로만 바라보아진다. 실제 한국사회에서는 이중국적이나 삼중국적 그 자체 보다는, 우리 사회의 상류층이 이를 악용하여 병역 회피 등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려는 ‘회피용’으로 악용하는 경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물론 이에는 적절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병역회피라는 ‘일탈적’ 부대현상에 의해서 국적의 ‘절대화’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병역회피50)의 문제에만 집중하여 국적 상의 폐쇄성을 당연시하는 인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병역이라는 것도 남북간 군사적 대결구조, 전지구적 전쟁구조의 개혁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남북간의 전면적인 군축, 개병(皆兵)제의 모병(募兵)제로의 전환,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 등의 새로운 프레임 속에서, 지구화 시대에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이것의 상징적인 쟁점이 이중국적 혹은 상징적으로 삼중국적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중국적 문제는 상류층의 문제보다도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가 혈통적 순수성에 대한 폐쇄적 자세를 넘어서서, 한국사회에 진입하려는, 혹은 한국이라는 영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이라는 영토 속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를 포함하는 외국 출신 정주민(定住民)에게 국적 혹은 준(準)국적을 허용하는 문제로 된다. 이에 대해서 우리와 동일한 혈통주의적 원칙을 채택하고 있는51)―우리가 그 폐쇄성을 비판하는―일본보다도 더욱 폐쇄적이다. 일본인들이 재일교포에게 참정권을 거부하고 여러 가지 차별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정주민에게 갖는 배타성과 거부성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이다. 이 점에서 ‘혈통적 순수성’을 부각시키는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52). 약소국 시절에 우리의 혈통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약소민족의 권리를 지키는 방어적 단결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보다 약소국에 속한 외국 출신의 정주민을 배제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의 수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중단기적으로 어느 수준에 참여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실적 검토를 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화의 맥락에서 자신이 정주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결정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참정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지구촌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방자치체 수준의 의사결정에서부터 중앙정부 수준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점차 참여가 확대되는 방향에서 정주시민권의 문제를 중단기적으로 적극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장하여 그 경계 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권리의 주체’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현재의 지구화의 맥락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의 초국경적 이동은 합법화되지만 노동의 자발적인 초국경적 이동은 불법이 된다. ‘고용허가’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은 통제된 상황에서의 합법적 이동이 되지만, 자본이 요구하지 않는 노동의 활동과 노동은 불법이 된다. 사실 이것은 이미 지구화의 맥락에서 보편적 적용성을 가지는 권리적용이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강자에 의한 악용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국민국가적 정체성―혹은 법률적으로는 국적―은 상대화될 필요가 있으며, 시민권이라는 이름으로 정식화된 권리는 초국경적 권리로 확장되어야 한다53). 사실 상층만이 ‘악용’ ‘향유’하는 권리를 하층에게도 보편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근대 이후의 권리투쟁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설령 국적문제는 현실적인 복잡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도―국적이라고 하는 법적 차원을 뛰어넘어―폐쇄적인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도 이중정체성이나 삼중정체성은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와 관련하여, 새롭게 쟁점화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들이 민주주의에 의해서 보완되는 다양한 기제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패권적인 사회적 집단이 공식적인 방식을 통해서건―국가를 통해서―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서건, 차별을 유지하고 이 차별의 구조를 통해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구조가 성찰되고 보완, 극복되는 일상적인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시민권적 평등이 보장되면서, 실질적인 차원에서, 혹은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차별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작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구화에 의해서 수반되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는 지구적 정치의 결과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동시에 열어놓고 있다54).

이런 점에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패권적인 사회적 집단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독점’이 정기적으로 검토되면서 그것이 보완되는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기구의 의제가 확대되어 이러한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별도의 국가적 위원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기득권 구조가 쟁점화되고 구속력을 가지고 정정되는 기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 독점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독점의 균열도 중요한 민주주의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사회적 독점은 경제적 독점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성, 종교, 지역, 학벌 등 다양한 사회적 분할 기준을 경계로 하여 존재하는 사회적 독점의 성찰과 극복이 경제적 독점에 대한 극복과 함께 중요한 민주주의의 의제로 간주되어야 한다55).

또한 약자 집단들이 비례대표제나 쿼터제 등을 통해서 대표성이 보완되는 기제들을 만들어야 한다. 대의성이 정치의 장에서 확보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쿼터제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집단으로서 새로운 외국인노동자 정주민 같은 경우, 시민권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장에서 이들이 대표되는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시민권의 초국경적 확장의 맥락에서 보완되어 갈 수 있다.

셋째, 지구화의 맥락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관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가 어떻게 재설정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보기로 하자. 지구화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구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는 전자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도전 속에서,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를 지구화의 맥락에서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제들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공적 규제

현재의 세계화는 과거의 국민국가체제를 전제로 한 글로벌 체제를 무력화시키면서 ‘1달라 1표주의’(one dollar-one-vote) 기초한―WTO로 대표되는―지구적 자유무역질서가 출현하고 있으며 IMF나 세계은행 같은 초국적인 경제조직들이 정치적・ 사회적 규제를 받지 않으면서―국민국가체제의 이완과 초국민국가적 체제의 과도기에―자신의 논리를 관철시켜가고 있다56).

이런 속에서, 앞서 서술하였듯이 국민국가 내부에서 경제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던 민주주의는 역으로 역진(逆進)하거나 무력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현재 지구화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공적 규제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자유시장주의’적 방향으로 국민국가의 내부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지구화는 국가정책을 시민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의 대상이 되게 만들었던 것을 해체시키고 있다. 나아가 앞서 서술한 대로, 자본운동의 ‘탈영토화’는 역으로 국민국가들 내에서 조성된 공적 규제장치를 철회하고 오히려 친자본적, 친시장적 정책을 국민국가에 강요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어떻게 지구화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인가(How can democracy be saved from globalization?)'라는 물음으로 표현한다57).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에서 발전되어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균형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심화는 바로 이러한 자본운동에 대한 초국경적 프레임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국민국가적 편제 속에서 허점이 존재하는 영역에서 자본은 여러 가지 특혜―예컨대 자본이득에 대해서 어떤 세금도 내지 않는다던가하는 식으로―를 누리고 있다. 이는 현재의 경제적 차원에서의 글로벌 가버넌스에 심대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경제적 지구화의 과정을 보게 되면, 경제적 지구화가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형태로 자유시장주의적인 경제적 흐름을 촉진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의 파괴적 결과가 주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그래서 정치적 규율이 불가피하게―경제의 존립을 위해서도―필요한 상황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글로벌 가버넌스와 관련해서, 효율성(effectiveness)만 중시되지 책임성(accountability)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운용에 있어서도 예컨대 세계무역의 가버넌스가 공적 감시를 받지 않고 있으며,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의 관심이 WTO같은 조직에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국내적 민주주의에 존재하는 약자적 참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순수히 경제적 정글의 논리로만 작동하고 있다58). 세계은행에 직접 근무했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같은 학자들도 책임성(accountability)의 관점에서 IMF와 세계은행―그중에서도 특히 IMF―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운영양식의 전환, 권한과 의제의 재조정, 가버넌스의 민주화 등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고 있다59).

이러한 자본운동에 대한 사회적 규제는, 가까이는 토빈세와 같이 초국경적 금융자본 이동에 대해서 세금을 물리는 것에서부터, 제3세계의 외채를 탕감한다거나 하는 노력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60). 국제투기자본의 이동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초국경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반세계화운동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쟁점화된 바 있다. 현존 경제적 지구화에 대한 공적 규제(public regulation)는 무역, 원조, 새로운 세수의 흐름(revenue), 금융, 다국적기업의 활동 등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대책은, 기본적으로는 지구적인 자유시장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WTO의 해체적 재편과 함께 가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조직들이 글로벌 가버넌스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유엔총회 같은 것이 더욱 강화된다면, 세계은행, IMF,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조직들의 거시적 조정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UN 경제사회이사회를 강화되어 안전보장이사회와 같이 국제경제 및 금융에 대해서 통제권을 갖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61).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기업의 책임성(Corporate Accountability)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정부들이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기회를 확대하도록 다양한 압력을 받고 있는데, 그에 상응하는 책임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국적 기업은 현존 국제법의 관할을 벗어나 아무런 의무를 이수하지 않은 채 이윤만을 향유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인권, 노동, 환경 등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담은 기업의 책임성을 규정하는 국제적인 규약 같은 것도 가능할 것이다62).


지구화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는 국내적 조치들

다음으로, 이러한 국제적 규제조치의 마련과 함께, 지구화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는 국내적 조치들이 필요하다. 기존의 국민국가적 투쟁을 통해서 확립된 경제적 평등화가 지구화에 의해서 역전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구화라고 하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국민국가 내적 투쟁에 의해서 규율되었던 시장의 ‘폭력’이 부활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장의 ‘폭력’이 적절히 규제되지 않을 때 국민국가의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가 균열될 수 있다. 헬드가 지적하는 대로, 다양한 권력의 센터, 다양한 권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불평등은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에 의해서 보장되는 평등성을 허구화하게 된다63). 여기서 민주주의적 원리가 새로운 경제적 상황에 대응하는 식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 자유와 자율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양극화 촉진적 경제구조에 대한 공적 규제가 새롭게 모색되어야 한다.

특히 노동시장의 유연화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는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장의 폭력은 조직화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조직노동자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하에서, 기존에 국민국가적 계급관계 속에서 확립된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안전망조차도 붕괴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20 대 80 사회’라는 양극화 현상이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개입전략64) 등을 통해서 국민국가에 새로운 규제책들을 강제해야 한다.

다음으로 시장의 ‘폭력’은 내집단 즉 국민국가의 노동자들에게는 규율된 형태로 적용되기도 하지만, 외집단 즉 외국인노동자에게는―비정규직 노동자보다도―훨씬 폭력적으로 관철된다. 지구화는 초국경적인 노동이동을 통하여 새롭게 착취자의 집단을 하위에 배치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의 민족국가의 구성원들 간에 국내적 경계를 중심으로 노동시장이 분절화되는 것과는 달리, 외국인노동자의 경우처럼, 민족적 경계를 중심으로 ‘분절화된 노동시장’의 하위에 민족적 하위노동시장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떤 점에서 시민권을 경계로 분절화된 외국인 하층 노동시장에서는 자본이―고용허가제와 같이 국가를 매개로―가혹한 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민권의 경계를 넘어서서, 노동기본권과 사회적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민주주의의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최저임금제나 노동자에 대한 각종 사회적 보호장치들은 사실 국민국가의 동일 구성원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정치적으로 규율하는 것이다. 지구화의 맥락에서는 타 민족국가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이러한 규율의 기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국적을 넘어 민주주의의 원리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구화에 있어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3번째 괴리가 지구화의 맥락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 수준에서 달성된 경제에 대한 정치적 규제가 지구화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이슈들에 적용되는 방식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공적 규율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실현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초국경적인 규율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어야 하고, 동시에 지구화의 영향으로 국내적 지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한 민주주의적 대응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국민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와 지구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적 규제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백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2차 대전 이후 국민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모델로서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모델과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사회주의의 모델이 병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불구화와 불작동, 그 결과로서의 체제적 붕괴가 발생하였고,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은 내적인 차원에서의 관료화와 외적 차원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영향 하에서 무력화되고 균열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아래로부터의 계획론’65). '시장사회주의론‘66), ‘시장의 사회화(the socialized market)’론67), 결사적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68) 등의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기본적으로는 국민국가적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국민국가적 모델이 지구적 모델로 어떻게 확장 혁신될 것인가 하는 것은 비판이론의 새로운 과제로 존재한다고 하겠다.



5. 요약과 맺음말 :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선도국’이 되자


이상의 논의를 요약한다면, ‘민(民)의 자기통치(self-rule of people)’라고 하는 정신 위에 존립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체(polity)의 구성원들이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동등한 지위에서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근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이른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로 구현되었다. 이 근대적 대의민주주의는 보편적인 시민적 권리, 정치적 참정권, 선거 등의 제도적 구성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관이다.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관은 이제 모든 근대국가에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자기발전해가게 된다. 근대민주주의의 ‘최소주의’적 요건 속에서,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사회적 힘이 작용하는 공간으로 작용하면서, 그 공간에서의 투쟁의 결과에 의해서 규정되면서 부단히 자기변화를 하게 된다. 즉 참여의 실질화와 형식화, 참여의 최대화와 최소화, 민주주의를 전사회적 차원의 원리로 확장하려는 지향과 정치적 차원으로 한정하는 지향 및 그러한 힘들이 각축하는 속에서 존재해왔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적・계급적 각축과정 혹은 투쟁과정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데, 이러한 계급적・사회적 투쟁에 매개되면서 민주주의는―예컨대 산업민주주의 혹은 생태민주주의 등으로―부단히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각축과정으로서의 근대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3가지 한계지점이자 갈등지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대의성(代議性)’의 형식화와 실질화 간의 긴장, 혹은 대의민주주의와 광의의 직접민주주의(적 요구) 간의 갈등이다. 둘째는, 근대민주주의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 간의 긴장, 혹은 소수자(의 권리)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긴장이다. 셋째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 간의 긴장, 혹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긴장이다.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역사는 이러한 3가지의 갈등지점들을 둘러싸고 민중들이 주체화되고 이에 따라 3가지 갈등지점에서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제도적 기제들이 발전되는 과정이었다. 민중들의 주체화에 따라 3가지 갈등지점에서 일종의 ‘강제된 개혁’이 일어나게 되면서 민주주의가 근대초기의 형태에서 실질성이 보완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민중들의 주체화에 따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성이 더욱 문제로 되고 대의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보완하는 여러 시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나아가 다양한 사회적 차별구조 하에서의 약자들이 저항적 주체로 전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 차별들이 쟁점화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약자보호조치와 같은―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나아가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투쟁이 강화되고 그것이 민주주의적 공간에서 조직화된 힘으로―예컨대 거대한 참정권 운동으로 혹은 사회민주주의정당운동으로―표출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혹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심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의 변화와 발전은 지구화의 맥락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지구화는 국민국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중적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경제적 성격을 지배적인 것으로 하는 지구화는 3가지 국민국가 내부 민주주의 차원 모두에서, 지배적 집단을 강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국가의 상대화를 통해서 국민국가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 시장에서의 약자들의 요구를 표출시킬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지구화가 동반하는 국민국가의 이질화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제기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초국경적인 노동이동의 증가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적 공동체의 인종적・ 민족적・종교적・사회적 이질성을 강화시키게 된다. 예컨대 외국인노동자나 외국인 영주자들과 같은 새로운 집단들은, 정치공동체의 영토 내에 존재하나 대의민주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대의되지 않는―시민권의 한계의 넘어서는―집단을 출현케 한다. 이것은 근대의 맥락에서 시민권이 국민국가적 경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권리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융합’ 혹은 통합의 범주로 작용하고 있었다면, 이제 지구화 시대에 시민권―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폐쇄적으로 규정된 바의 시민권―이 배제의 범주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동일한 경계’ 내에서 부단히 심화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민주주의의 ‘경계’ 자체를 확장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구화의 도전을 염두에 둘 때, 민주주의의 발전은 지구적 차원과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이중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첫째는 국민국가에서 확립된 민주주의의 원리를 확장한 지구촌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들을 마련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러한 지구촌 민주주의의 실현 노력과 함께 국민국가의 한계지점들을 진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고민하여야 하는 직접적인 과제들이다. 첫째와 관련해서, 지구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글로벌 가버넌스의 급진적 민주화이다. 국민국가의 한계 내에만 정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 이러한 지구촌 민주주의에는 다양한 의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데, UN질서의 급진적 재구축도 중요한 의제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함께 지구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단기적으로 그리고 중장기적 의제들도 소개하였다.

둘째와 관련하여, 국민국가의 3가지 갈등 지점 모두에서 새로운 노력들이 경주되어야 하는데, 먼저 정체의 광역화에 따른 다층적인 대의 기제를 확충해 가야 함을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지구화에 따라 새로운 하위 집단들이 존재하게 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초국경적 확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보편적 인권과 차이의 권리를 기초로 하는 지구적 시민권으로 가는 과도기에, 단일국적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중국적’ ‘삼중국적’문제도 제기될 수 있는데, 특히 나는 한국의 혈통주의적 국적관이 한국이라는 영토에 거주하는 외국인 정주민들을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성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한국에서 이중국적 문제는 상류층이 병역을 기피하는 문제로만 바라보아지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나는 이중국적, 삼중국적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나아가 국민국가 내부의 세 번째 민주주의 갈등지점과 관련하여,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공적 규제조치들을 확대하는 것과 함께, 지구화의 부정적 영향―비정규직의 확대 등―를 상쇄하는 국내적 조치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민주주의의 원리인 ‘1인 1표주의’의 평등주의를 급진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자본주의의 ‘1원 1표주의’를 공적으로 규제하는 과제는 일국적 자본주의뿐만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밀리반트(R. Miliband)도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형해화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각종 사회적 차별구조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적 형식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상시적으로 가지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국민의 민주주의, 민중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 엘리트의 민주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내재적 힘을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험성과 다양한 사회적 차별의 반인간성이 정정되는 계기를 확대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허구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은 아래로부터의 민중들의 진보적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내에서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부단히 허구화하면서 사회적, 계급적 차별구조의 법적 보증체로 작동하도록 하는 기득권적인 힘과, 반대로 이 공간을 통해서 약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차별구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힘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비인간적인 계급적・사회적 관계를 극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관계를 인간화시켜가는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공간을 통해서, 근대 이후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엘리트의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사회적으로 규율되는 ‘수정’자본주의로 정정해왔다. 이제 지구화가 몰고 오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민주주의의 경계를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민주화’해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로 되고 있다고 하겠다. 지구화의 맥락에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내적 한계지점들을 극복해가는 선도적 과제를 우리가 개척해가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시대・포스트-민주화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들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제3세계 나라들은 민주화의 도정에 놓여 있다. 민주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독재의 유산을 척결하고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를 공고화하는 것이 과제가 되고 있지만, 이른바 ‘포스트-민주화’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공고화된 민주주의가 어떤 질적 성격을 가질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과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근대 국민국가 민주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3가지 한계지점들과 갈등지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지구화의 맥락에서 이러한 국민국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재구축의 과제가 현 시기 아시아를 포함한 많은 제3세계 신생 민주화 국가의 민주주의자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의 경우 아시아와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같이 신생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구화의 맥락에서 국민국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질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과제에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나는 제3세계의 민주주의가 직면하는 이러한 과제들을 한국이 선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아시아, 나아가 지구촌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전통과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빠른 속도와 모범성은 인권, 과거청산, 민주주의, 투명성, 민주적 가버넌스 등의 측면에서 한국이 아시아의 선진적인 나라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이, 경제적 성장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민주주의 발전의 선도성을 통해서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이상을 ‘상상(想像)’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고되고 긴 고투(苦鬪)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갈등현장에서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논란이 되는 많은 이슈들을 국내적인 정쟁의 이슈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예컨대 과거청산을 ‘친일파 청산’으로 보고,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신군부세력이나 구 집권세력의 처벌의 관점이 아니라, 많은 아시아의 나라에서 전개되었던 식민주의의 유산이나 포스트-식민주의적인 폭력적 국가범죄를 극복하기 위한 보편적인 규범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대 문제도 ‘반일(反日)’적인 민족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성 억압을 동반한 군사적 국가폭력을 극복해가는 인류적인 보편규범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특수한 쟁점들과 다른 많은 국민국가들의 특수한 사례들을 관통하는 초국경적인 보편성을 통찰하는 노력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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