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영지주의다 - 기독교가 숨긴 얼굴, 영지주의의 세계와 역사
스티븐 횔러 지음, 이재길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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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사탄의 통로다. … 그대들은 사탄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자를 꾀었던 여자다. … 그대들 각자가 이브라는 사실은 아는가? 그대들의 성性 위에 내린 하느님의 선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필연적으로 죄 또한 유효하다.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위의 인용문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 있고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기 어렵겠지만, 초기기독교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여성들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과연 이런 혐오스러운 글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혹시 성서 문자주의와 교조주의 때문은 아닐까? 그는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유명한 문구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가 이 문구를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이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신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credo, credible)은 위험하다. 이런 믿음은 성서의 모든 사건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그 믿음에 의하여 창세기 내용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도 역사적 사실이 된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만큼 성서의 풍요로움을 제거하는 이들도 드물리라!) 여기에서 성서 문자주의가 탄생하고 교조주의가 태동한다. 이러한 공격적 사상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를 혐오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신화를 빌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성서 문자주의나 교조주의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지주의의 문헌은 대부분 실전되었고, 단편적으로만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성향의 교부들의 기록에 의해서만 후대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서구 정신사에서 영지주의는 항상 비난받아 마땅한 이단이었고, 육체와 물질세계를 혐오하는 이들이었고, 황당한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1945 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이러한 천 육백 년간의 왜곡과 편견의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었다. 그 문헌들은 역사속에서 주류기독교에 의해 거의 완전히 폐기되었던 영지주의의 문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발견은 1945년에 이루어졌으나 문서의 확보전과 학자들 특유의 공명심이 결합되면서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1970년에 발견되었으나 작년 봄에 처음 공개되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던 <유다복음>의 사례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소개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비로소 영지주의 관련서적들이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스티븐 횔러의 «이것이 영지주의다»(샨티, 2006)는 바로 이러한 유구한 역사적 흐름의 소산으로서, 탁월한 영지주의 입문서라고 할 만하다.

 

“영지靈知”는 희랍어 “그노시스γνωσις”의 번역어인데, 이는 대부분의 번역어처럼 일본인들의 결과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지”는 선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알음알이[知解]”나 “분별”과 대비되는 공적한 상태의 앎, 깨달음을 말한다. 이 용어는 우리나라의 태고선사나 나옹선사의 어록에서도 나타난다. 결국 영지주의의 “γνωσις”는 동양의 선불교와 맥락이 닿는다고 판단하고 “영지”라고 번역한 셈인데, 이는 매우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지주의는 서양의 선불교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저자는 “위대한 영지주의자 붓다”(43)라는 표현도 쓴다. 그렇다면, 과연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저자는 영지주의의 문헌들 중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도마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는 알려지고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빈곤케 되고 너희 자신이 곧 빈곤이 될 것이다.”(말씀3)

“태초를 알고 있어서 종말에 관해 묻느냐? 태초가 있는 곳에 종말도 있다. 태초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끝도 알게 될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말씀18)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너희가 낳은 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너희가 낳지 못한 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말씀70)

“나는 그 모든 것들 위의 빛이요, 나는 만물이니, 만물이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 이르렀다. 저 나무를 쪼개보아라. 나는 저기에 있다. 저 돌을 들어보아라. 거기서 나를 볼 것이다.” (말씀77)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저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표는 이해하면서 너희 앞에 있는 자는 알지 못하니, 너희는 이 순간을 이해하는 법을 모르는구나.”(말씀91)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알고 있는 이들은 위의 구절들이 너무 친근해서 혹시 불교의 가르침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살아계신 아버지”, “구원” 등의 낱말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이 전파되는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소할 것도 없다. 이처럼 불교와 영지주의 간에 근본적인 친화성이 느껴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와 인도종교의 교류관계를 파헤치려고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서로 간의 교류가 없더라도 충분히 고귀한 영역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먼 곳에 있는 벗이 찾아오듯. 저자의 말을 빌어서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이라는 바다에 퍼지는 통찰은,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점점 커져가는 동심원과 같다. 우리가 더 이상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바깥으로 확대되어 간다. 영지주의자들의 지혜는 이런 동심원과 같아서”(6) 다른 동심원, 가령 불교의 가르침과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후반 이후, 독단은 덜한 반면 영감은 훨씬 풍부한 가르침과 수행법을 찾아 동양의 종교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대안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지주의라 불린다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한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실재와 영혼, 그리고 깨달음의 필요성 등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영지주의와 동양 종교가 얼마나 유사한지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20)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공통의 분모는 분명 그노시스의 경험이다.(21)

영지주의가 과연 이런 것이었던가?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편견에 가득 찬 초기기독교 교부들의 비난을 통해서만 영지주의를 접했었다. 물론 그들의 비난이 부당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이제 우리는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함께 역사상 가장 쉽고 풍요롭게 영지주의의 문헌을 접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지만, 아직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는 초기기독교의 편견에 물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이후 지하에서 벗어나 권력을 등에 업기 시작하면서 소위 ‘이단’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지하의 기독교 시절에는 영지주의도 기독교였다. 이단이 애초부터 이단이었던 것이 아니라, 주류기독교(로마카톨릭)가 권력화되면서 주류기독교가 아닌 종파들이 이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2세기의 탁월한 영지주의자였던 발렌티누스가 약간의 표차로 로마 주교직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속의 로마제국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중에는 국교로 삼았다. 그 이후부터 주류기독교가 이단들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살육이 동반된 이 전쟁은 중세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스티븐 횔러는 이 역사를 추적하면서, 기독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살아났던 영지주의자들의 고귀한 삶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카타르 파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인들에게 더없이 곤혹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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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의 파피루스. 1~2세기 경에 작성된 희랍어 원본을 콥트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모두 52권이 발견되었다. 기독교 최초로 공동생활의 수도원을 창설했던 파코미우스의 제자들이 390년 경 주류기독교의 영지주의 문헌소각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나그함마디 절벽에 숨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이 영지주의다»는, 천 육백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불과 반세기 전에 세상에 드러난 나그함마디 문서를 토대로 영지주의의 역사와 기본 가르침을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 자신이 영지주의의 사제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이 책은 단순한 소개서 수준을 뛰어넘는 훌륭한 통찰들로 가득하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읽고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다소 풀렸다. 가령, 여성적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에서 성모 마리아의 원형을 보았고, 입교의식 및 성례전에서 카톨릭 성례전의 근원을 보았다.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서술도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그노시스(영지)”를 경험한 자는 필연적으로 그 경험을 신화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며, 그 경험이 없는 자는 그 신화적 표현들조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신화적인 표현들 때문에 이 시대의 독자들은 약간의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신화란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가장 자연스러웠던 이야기 구조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지”를 경험한 자, 아는 자는 소수이고, 그 경험에 관해 듣기만 하는 자들은 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영지주의가 탄압을 받았던 정치적 이유였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지주의는 언제나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부류의 비난은 인류 역사에서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빌자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 곧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41)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유일한 아쉬움은, 영지주의의 구체적인 수행법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나그함마디 문헌 중에 수행법에 관한 책이 없었나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됨으로써 비로소 영지주의가 제대로 소개되기 시작한 셈이지만, 영지주의의 소개가 더 이상 지속되리라는 보장을 못하겠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단으로 철저히 배격되었던 데다가 그 수행법이나 성례전을 담당하는 종교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내에서 영지주의를 연구할 만한 인력은 어느 종교, 어느 대학에서도 배출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워할 것은 없겠다. 어쩌면 이것이 “그노시스(영지)”의 고귀함에 어울리는 방식의 삶일 지도 모르므로.

그노시스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자신의 그노시스를 드러낸다면 치명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가슴 아픈 운명을 맞이한 것은 알지 못하는 자가 아는 자에게 터뜨린 눈먼 분노 때문이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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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5-1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희 자신, 태초, 나의 안, 나(참나?), 이 순간...
정말 그러하군요.
진리의 문화적 양식은 다르더라도 어차피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말의 낙처를 따라간다면 그것이 한 곳임을...
인용문이 마음을 떨리게 합니다.

반조 2007-05-14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그함마디 문서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들의 근본 바탕이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서양의 고대에 형성된 문헌인 만큼, 그 신화적 표현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yamaccokek 2007-05-1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그함미디 문서가 우리말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건 참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성서 밖의 복음서 (정신세계사)>에 나그함마디 문서 몇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지주의 사상이 동양 종교 사상과 얼마나 유사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바탕 깨달음은 비슷하나 봅니다.

반조 2007-05-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영지주의다>의 역자인 이재길의 저작이군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지주의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기독교 내부로 충분히 흡수할 만한 수준인 듯한데, 그것마저 철저히 배격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는 확실히 교의 내지 교리 중심의 종교인 듯합니다. 교의 중심의 종교도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폭력성이 항시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yamaccokek 2007-05-17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교의 중심의 종교라! 저도 동감합니다. 교의가 종교의 형성 단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겠지만 그게 화석화되면 종교를 죽이는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지주의는 주류 기독교의 좋은 보완제가 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