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IQ.
음... 중학교 때 측정했던 아이큐가 140대 중반이다. ( IQ에 기억력 테스트가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기억력 테스트가 들어갔다면 확 떨어졌을텐데..)
그런데 문제는.... 이 수치로도 우리 친정 가족 다섯명 중 4등에 해당한다.
우리 사촌들 간에 IQ 130대가 나오면 '난 머리가 나쁘니까 열심히 해야 해...' 라고 생각한다나......
결과적으로 IQ와 성적이 그다지 비례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공평하다.
1등은 150이 넘는 여동생. .... ㅎㅎ, 내가 볼때 여동생은 JQ가 대단하다.
가장 실용적인 능력이 JQ일진데, JQ도 IQ가 어느정도 뒷받침 되어야 하나보다.
2. 키 / 몸매
내 키는 162cm이다.
162cm면 요즘 청소년 키로도 중간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친정에 가면 '제일 작다'. ㅜㅡ
엄마가 165cm셨고, 여동생은 170, 올캐도 170, 남동생은 180......
게다가 여동생과 올캐는 날씬하다. 살이 좀 있더라도 키로 어느정도 커버가 된다.
특히 올캐..... 완존 모델이다...... 애 낳고 이제 4개월 되었는데, 벌써 처녀 적 몸매 (그 키에 44) 회복했다.
뭐야..... 나처럼 둥글둥글하게 살이 붙으면 안되냔 말이다...... 같은 아줌만데 말이야...
3. 공부
어렸을 때 버벅댔던 것은 예전에 페이퍼로 썼었고.......
당시에 별난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도 예전에 썼었고....
그래서 워낙 쟁쟁한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다보니 별로 기를 펴지 못했었다.
특히 중 2때가 죽음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었던 것 같다.
딴에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반에서 5-6등 정도에서 더 올라가지지를 않았었다.
아! 한번은 반에서 17등을 해서 엄마가 성적표를 북! 찢어버렸던 것도 중2때였다.
(조각난 성적표를 테이프로 붙여서 학교에 다시 냈는데, 선생님도 성적표를 보고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이거 왜 이랬니?' 라고 한번 물으실 만도 했을텐데...... )
이 학교 친구들의 문제는, 열심히 하기는 하되, 열심히 하지 않는 척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서로 "나 하나도 안했어~~" 라고 시치미 땐다.
학교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공부를 너무 무리해서 하지 말라. 잠안오는 약 같은 건 먹지 말라"고
훈시할 정도였으니.....
하하, 나도 당시에 약국에서 '잠 안오는 약' 을 사서 서랍 안에 넣어두고 정말 다급해지면 먹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정말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엄마가 그 약을 발견해 버려서 부모님께 야단만 맞았었다.
아, 난 정말 안먹었는데,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반에 유난히 좀 하는 애들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진학해서 우리가 대입 학력고사 칠 때 전국 수석을 한 애가 있었고,
또 한명은 예원 입학했을 때도 수석을 했던 앤데, 나중에 S대 음대를 수석으로 입학/졸업했다.
4. 실기
그렇다고 실기를 잘했느냐?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실기는 필기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콤플랙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전공할 때 좀 더 자신 있게 즐기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따른다.
우선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예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우리 반에 나 말고도 예원 가겠다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공부나 피아노를 극성맞게 하는 편이 못되었던 반면,
다른 친구는 피아노도 나보다 더 잘 쳤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반에서 반장도 했었다.
그 친구 엄마도 유명하게 극성이셨는데, 그친구가 1등을 놓치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 친구, 나중에 예원에 진학해서 첫 시험에서 반에서 5등을 했는데, 다음날 여기저기 멍들어서 왔다. 결국 중학교 때 유학을 가서 지금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
우리 엄마는? 음..... 당시 다시 다니는 대학의 졸업반으로, 국시 공부 하시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셨다.
아침에 우리보다도 일찍 집을 나서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지도 챙겨주지 못하셨었다.
으으..... 왜 하필 하고많은 반중에 이때부터 이런 아이들과 한반이 되어서 비교되어야 했냔 말이다.
5. 대학생 때...
우선, 고등학교 때, 우리 스스로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붙인 별명이 '회색 돼지'였다.
교복이 회색인데다가 영양상태가 워낙 좋다보니...... 하하....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 '엉뚱'이였다. '엉덩이가 뚱뚱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해 보니, 나만큼 영양 상태가 좋은 여학생이 없는거다.... OTL
게다가 평생 다이어트라고는 단 한번도 성공해보지 못한 유약한 의지로 인해
나의 체중은 또하나의 콤플랙스로 영구히 자리잡았다.
그러니, 소개팅도 그다지 재미 없었고,
대학 1학년 때 남학생을 잠시 사귀다가, 우리 나라 남자들의 보수성과 자기중심성에 기가 질린 후로는 거의 졸업할 때까지 - 지금의 남편을 만날 때까지 - 남자친구라고는 사귀지 않았다.
(물론, 성별을 떠난 그냥 친구는 많았지만 )
6. 결혼 후....
아,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집안 내에서의 남녀의 역할에 대해서는 '모던' 했던 친정 덕에 결혼 전까지 전통적인 여자의 역할 및 집안 간의 예절에 대해 무지했었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처음에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결혼 후 처음 지낸 명절의 문화적 충격은 정말 '충격'이었다.
지금은 명절이 되어도 그럭저럭 넘어가는데, 그때는 왜그리 힘들었는지.....
게다가 며느리 길들인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레지던트 하는 며느리에게 꼭 생신날 '아침상'과 저녁 '생일 잔치상'을 받아야 만족했었던 때도 있었다. 처음 1년차때는 그걸 모르고 당직 교대하고 점심때 가까이 돼서 와보니(아버님 생신이 양력으로 늘 공휴일이다) 아침상 안차려드렸다고 시누이 둘이 발칵 뒤집어 놓아서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져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사위 생일, 조카 생일잔치상까지 차려주어야 했었다. 본인들은 전혀 기억 못하겠지만....
양가 어른들의 가풍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인해 이혼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정말 우리 남편이 조금만 못됐다면 그때 이혼 했을거다. 그저 '남편에게는' 불만이 없다라는 이유로 위기를 참아 넘겼다. (흐흐, 그때만 해도 결혼 초기라 그랬겠지? )
7. 아직도 인정을 못받는다.
* 시부모님
우리 시부모님은 남편이 결혼 후 7년만에 얻은 2대독자라서 그런지, 자식 사랑이 대단하시다.
어제 페이퍼에도 썼듯, 오후에 청주 공예비엔날레를 보러 다녀왔다.
다섯시쯤 운전하고 있는데, 시어머님께서 전화 하셨다.
"아니, 아이를 집에 혼자 있게 하고 어디를 돌아다니는거니? 애들 공부 시켜야지 지금 나다닐 때냐?
## 혼자 집에 있다고 하니 내가 마음이 아파 죽겠다......... " 일장 훈시......
아이들은 낮에 나갔다가 5시에 돌아오기로 약속한 거였고,
나도 빈 집에 혼자 있느니 공예전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아이들보다 30분 늦게 돌아간 것. 그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인가?
시부모님이 서울 사셔서 몰라서 그렇지, 내가 퇴근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신다.
아이들을 몇번 노숙자 배식에 체험삼아 데려간 것도 싫어하시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봉사하러 다니는 것도 싫어하신다.
내가 '봉사' 하는거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셔서 그렇지, 만약 아신다면 난리가 나실거다.
지금도 우리 큰애가 공부 안하는 이유로 작년 1월에 내가 인도 다녀온 것을 꼽고 계실 정도니....
나는 이런 '가족에의 헌신'이라는 미명 하의 '가족 이기주의'가 정말정말 싫다.
* 남편
남편의 착한 점 하나는 내가 하는 활동을 싫어해도 그걸 시부모님께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흐흐, 내 활동에 불만이 많기는 해도, 만약에 어른들께 알려졌을 경우의 후폭풍이 두렵긴 두려운가보다.
그런데, 결혼하고 16년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했어'라거나 '수고했어'라는 말은 단 한번도 해주지 않았다.
늘 내가 하는 일은 '쓸데 없는 일'이고 '사서 고생하는 일'이다.
엊그제도 밤에 회의자료 정리하는 것을 읽어보더니 "이런 쓸데 없는 일 좀 안할 수 없어?"라고 핀잔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데 말이다.
* 친정
아까, 친정은 '모던'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모던'이란, 집안에서의 남녀평등 면에서의 모던함을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학생 때도 저녁 7시가 통금이었고, 학교 MT에도 거의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족 내의 남녀평등 외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보수적이시다.
혹시 부모님 세대의 평균적인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대선에서 이모 후보가 아닌 노모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것을 아신 지 이미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어머니는 화가 풀리지 않으셨다. 개인적인 불이익 때문에 더욱더 그러신 것이라고 이해해 드리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2년째 얼굴도 보지 않고 지낸다는 건 좀 심한 것 같다.
아마 노모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까지는 화가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회 봉사나 사회활동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도,
정작 내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면 별로 안좋아하신다. (친정도 다른 활동은 모르신다.)
'네가 직접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네 능력의 낭비다. 뜻은 좋지만 직접 밥을 짓는 것보다 돈을 내는 것이 나을거다'라고 만류하시는 편이다.
나는 그래서 부부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아내가 활동할 때 기꺼이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남편,
며느리가 하는 봉사활동에 시부모까지 같이 와서 밥을 퍼주는 분들.....
이런 가정들이 가슴아플 정도로 부럽다.
아, 쓰고 나니 정말 우울해졌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