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대학을 간 이후 아침식사를 애써 차리지 않았다.
먹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는데, 그러다보니 점점 더 게을러져 냉장고는 텅텅 비고, 온도를 낮추지 않아도 문을 열면 절로 찬바람이 슝슝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틀 동안 혼자 지내게 된 지난 주, 너무 심심해서 반찬을 몇 가지 만들었다.
음식솜씨가 별로 없는 편이라 음식을 만들 때면 꼭 레시피를 찾아보고 계량컵과 계량스푼, 저울을 사용한다.
이번에는 귀찮아서 계량도 하지 않고 대충 이 것 저 것 부어서 만들었는데 남편이 맛있다고 한다.
어제는 김치찌개 국물 내는 것이 귀찮아 다시마가루, 멸치가루 넣고 대충 끓였는데 또 맛있다고 한다. 헐~
그러니까 내 음식솜씨는 정성과 반비례했던 거다.
더 의욕이 안 난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을 할 때는 계기가 있다.
계기가 사소한 것이면 나처럼 심심해서 반찬을 만드는 것이고, 크면 이후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주말에 본 영화 두 편이 다 어떤 계기로 주인공의 인생이 변하는 이야기다.
법이 있는데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 법 위에서 공권력을 남용하거나(변호인), 흑인은 이상한 병을 옮긴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황당한 법을 만드는(헬프) 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고 죄가 없으면 벌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그지 없이 순진한 생각을 가진 변호사가 국보법사건을 공권력남용사건으로 바꿔보려다 실패한 '변호인'은 영화로만 보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송우석 변호사와 겹쳐보이는 한 사람의 일생을 알고 있기에 그냥 영화처럼 실패는 아니다라고 말 못하겠다.
누구에게나 계기는 있다.
그 이후에 어떻게 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의 말대로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송우석 변호사가 법으로 세상을 바로세우려고 했다면, '헬프'의 주인공들은 글로 바로잡고자 한다.
흑인 하녀는 물건처럼 엄마에게서 딸로 상속된다.
흑인하녀의 손에 키워져 하녀를 엄마로 알고 자라지만 어른이 되면 그 하녀의 주인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 딸들은 자선바자회를 열어 그 수입금으로 아프리카 아동들을 돕는다고 방송에 나와 설레발을 치지만,
한편으로 자기 집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가 이상한 병을 옮긴다며 하녀용 화장실을 야외에 따로 만드는 법안을 추진한다.
웃기는 건 그런 불결한 하녀에게 자녀의 양육과 식사, 청소 등을 맡긴다는 거다.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보복이 두려워 말 못하던 하녀들은 동료가 절도죄로 체포되자 용기를 낸다.
흑인 하녀들이 보고 겪은 자기 '주인들'의 인권유린, 부조리 등등,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라, 이제는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백인 여성의 손을 빌어서.
겉보기만 멀쩡할 뿐, 머리와 가슴은 텅 비어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 사랑할 줄 모르는 백인 여성들.
자기가 낳은 자식은 남의 손에 맡기고 백인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돌보면서 사랑과 긍지를 심어주는 흑인 하녀.
살아있지만 그림자 취급받고, 인간대접 받지 못하던 하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자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두 편의 영화는 언뜻 희망을 이야기하는 해피엔딩 같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다 부질없어 보이는 건 현실이 너무 괴롭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토요일자 한겨레신문에는 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 구자범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여성 단원을 성희롱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직했고 지금은 하는 일 없이 부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에 대한 진의야 본인들이 잘 알테니 왈가왈부 할 건 아니고 정말 심란해진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레슨 같은 것은 하지 않느냐는 말에 교수가 아니면 어렵다는 말.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곳에서는 간판이 중요하다.
어디 대학 출신이며 누구에게 사사 받았는지가 중요한거다.
대학 전공과는 상관없는 음악을, 독일까지 가서 배우고 온 구자범에게는 음악에 관한 한 스승이나 선,후배가 없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오전, 오후로 연주 연습을 시키는 지휘자 때문에 레슨하러 갈 시간이 없어서,
즉 가외로 돈 벌 기회를 놓쳐서 지휘자를 모함했다고 한다.
그가 한국에서 유명한 음대교수에게 사사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경력을 쌓은 다음 경기 필의 지휘자가 되었다면,
단원들과도 선후배 관계나 사제지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히 지휘자를 파렴치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다.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연습을 열심히 시킨 지휘자는 죄인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가외로 레슨지도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만큼 대우가 허술한가.
저 살자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내용의 포털 검색어까지 조작해야 할 만큼 절박한가.
선배에게 존댓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던 히딩크의 심정을 이해한다.
'우리'가 아닌 남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싫다.
영화에서는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싹을 볼 수 있었다.
현실에서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