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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일본의 신진 평론가 사사키 아타루의 책이다. 현재 일본에서 그는 아즈마 히로키와 더불어 가장 떠오르는 젊은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이 책의 출간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조금 의아했다. 2009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2010년에 국내에도 번역된 사사키 아쓰시의『현대 일본 사상-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에서는 2000년대 일본 사상계는 사실상 아즈마 히로키의 독무대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사사키 아타루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글쓰기 또는 문학이 가진 위대함, 그 혁명적 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가 드는 혁명의 범례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 아니 루터의 '대혁명'이다. 루터가 주도한 사건이 단순히 종교적 개혁이 아니라 혁명, 그것도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대혁명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0)

 

저자는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며,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지극히 편파적이고 비약이 심한 주장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왠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그만큼 언어와 텍스트의 힘에 대해 무지한 것일지 모른다는 자책감만 늘어날 뿐이다. 그만큼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의 차원을 넘어 강한 흡입력과 호소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논리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감응의 문제일 것이다.

 

혁명은 일의적으로 폭력혁명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폭력혁명이 유일한 혁명이고, 혁명의 ‘전부’일까요? 다른 혁명은 있을 수 없는 걸까요? 혁명의 다른 형식이 있을 수 있었고,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좌익이건 우익이건―보수혁명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모두 이 점을 눈여겨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폭력혁명이 아니면 혁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폭력이야말로 급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폭력을 입에 담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급진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거라고 겁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폭력혁명을 직접적으로 주창하면 놀랄 만큼 무참했던 학살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겁내고 있습니다. (p.69)

 

여기서 우리는 급진=혁명=폭력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저자가 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혁명의 본체는 텍스트다. 결코 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이 선행하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을 좌우하는 것이지, 폭력은 혁명에 있어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혁명을 폭력적인 것의 차원에서만 한정짓는 이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radical을 '급진적(인)'으로 번역하면서 그것을 '점진적(인)' 것과 대조시켜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급진적인 것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혁명이란 곧 단기적인 행동으로 과격하게 모든 것을 바꾸는 것, 그래서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급진적인 혁명은 언제나 점진적인 개혁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논리의 절차야말로 혁명을 (물리적) 폭력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닮아 있는 것이다.  


영어의 radical이란 단어는 보통 우리말로 ‘근본/근원적인’ 또는 ‘급진적인’으로 많이 번역된다. 특히 정치(학)과 관련해선 후자의 번역이 훨씬 일반적인 것 같다. ‘근본(적인)’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어단어인 ‘fundamental’이 있기 때문일 텐데, 영어에서도 radical과 fundamental이 politics와 결합할 때,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치/정치학/정치운동을 지시하므로 한국에선 대체로 radical을 ‘급진적(인)’으로 많이 번역하는 것 같다. 예컨대 라클라우와 무페로 대변되는 radical democracy를 ‘급진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일 듯. 아울러 정치적으로 근원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radicals’, 즉 ‘급진파/급진주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다.

 

문제는 radical을 우리말의 급진(急進)으로 번역할 경우, 그 의미가 “서둘러 급히 나아감”, 또는 “목적이나 이상 따위를 급히 실현하고자 함”으로 전이되어, 정치적 판단과 실천에 있어 비이성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주의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는 것. 그래서 급진적인 것의 대척점에 점진(漸進)적인 것이 놓이게 되고, radical은 점진적인 것과는 상반되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radical이 과연 점진적인 것과 상반되는 그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스럽다. 철저하게, 근원적으로, 발본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왜 무조건 과격하고 성급한 행동주의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radical democracy가 함의하는 실천의 원리에 점진적인 요소는 없을까?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발본적으로, 철저하게 변혁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radical democracy/radical politics를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제일원칙(상대성과 타자성의 인정)을 존중하는 가운데 실천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당연히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외면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우리가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려야 할 폭력이란 것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권력의 폭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폭력,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의 차원을 망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철저한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과격한 수사와 행동만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혁명은 제도와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기 위해선 그 제도와 구조의 재생산을 가능케하는 언어와 이데올로기, 담론, 지식, 텍스트 등을 함께 바꾸는 실천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켜 좀 더 생각해보자. 굳이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차원의 체제 변혁을 이야기해온 이념과 사상의 전통을 떠올리는 데 마르크스주의만큼 친숙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자본이라고 하는 ‘실재’(the Real), 즉 자본주의 사회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구성적 적대란 의미에서 계급투쟁 혹은 계급적대를 주목해야 하고 또 그만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교의’의 핵심이다(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치의 조건들은 역사의 “토대”(base)나 “경제적 구조”(economic structure)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결정(determination)이 없다면 더 이상 고유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속에 있지 않은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아가 구성적 외부, 사회의 불가능성과 같은 라클라우/무페적 '실재'의 개념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발리바르의 구조적 인과성, 즉 스스로를 부재화하는 원인, 정치의 세 개념(정치의 자율성, 타율성, 타율성의 타율성), 복잡한 사회적 전체의 구조를 전제한 최종심급에서 경제의 과잉결정 등등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radical한, 즉 근원적인 차원(사회적인 것 즉 경제의 정치에 대한 우위, 계급적대의 실재적 차원 등)의 문제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적 현실 이해의 기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원의 radical한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것이, 곧바로 정치적 과격주의나 성급한 행동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오히려 radical한 사고, radical한 실천의 내용을 채워나가는데 있어 ‘점진적인 것’으로 지시되어 거부되던 마르크스주의 외부의 사상 전통에서도 이제는 충분히 배울 것이 많아진 것이다. 따라서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듯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실천은 급진적이냐, 점진적이냐, 또는 폭력적이냐 비폭력적이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발본적이며 얼마나 총체적이냐로 그 의미가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진의를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저자가 문학으로부터의, 문학에 의한, 문학의 혁명을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혁명이란 우리의 언어, 사고, 개념, 세계관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우리의 텍스트 자체를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출발점이자 목표라고 말했던 것은 비단 사사키 아타루만이 아니었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책을 남기고 떠난 미국의 대표적인 유럽 현대사가 토니 주트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토니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pp.174-175)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적어도 내겐 단순히 어느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의 자아도취적인 문학주의 선언문으로 읽히지 않았다. 대신에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이란 무엇이고, 그 혁명이 맞서야할 폭력이란 또 무엇이며, 언어와 사상, 텍스트가 어째서 혁명의 과업에 필수적인 일부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문학의 가치를 탐구하는 책도, 루터의 열정을 추적하는 책도, 독서의 재미를 증언하는 책도 아니다. 오직 언어로부터 시작되어 텍스트, 곧 세계 전체를 바꾸는 것으로 귀결되는 혁명의 절차와 논리를 탐구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혁명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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