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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신간리뷰 대상도서로 선정되는 책들이 솔직히 내 취향과 전혀 맞지 않은 탓도 있고, 내가 내 연구와 관련하여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쁜 탓도 있고, 암튼 그래서 매번 리뷰를 남들보다 늦게 올리게 된다. 괜히 신간평가단을 자원했나 싶기도 하고, 이걸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나마 다음달에 리뷰를 써야할 책 두 권 중 한 권은 내가 읽으려고 진작에 사두었던 책이고 추천 페이퍼에도 넣었던 책이라 다행이다 싶은데, 문제는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암튼 다음달 리뷰는 마감 시한을 잘 맞춰서 써볼 생각이다.


오스트리아 이주민 출신의 사회학자로서 피터 버거 자신의 지적 모험담을 표방하는 이 책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는 (처음엔 많은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 3장을 넘어가면서 점점 그가 왜 우파 이데올로그가 되었는지를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자기궤변으로 읽혔다.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많은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 그러 했듯이, 피터 버거 역시 조국에서 경험한 파시즘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사회주의나 여타의 급진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들을 거의 도매급으로 비합리적인 광기에 휩싸인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일견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혁명적 열정의 폐해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런 적대감에 대한 학자로서의 명확한 근거는 별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경험과 성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책의 초반부는 상당히 재밌게 읽힌다. 가령 낯선 나라에 흘러 들어온 이주민으로서 얼떨결에 맞닥뜨린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기 원해, 뭣도 모르고 뉴욕 뉴스쿨에 입학해서 사회학 공부를 막 시작했던 20대 청년기에서부터, 점차 현대사회학의 한 흐름을 대변하는 영향력있는 사회학자로 성장해나가는 개인사도 흥미롭고, 그런 이력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 전후 미국사회의 혼란상과 역사적 변동에 대한 스케치도 문학적 세련됨이 느껴진다.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한 명의 사회학자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구성지게 회고하는 수준높은 지적 자서전의 면모도 처음엔 살짝 엿보였다. 자기가 들은 수업, 자기가 쓴 글, 자기가 했던 강의, 조사, 연구, 그외 다양한 관계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버릴 곳이 없었다. 그런데 3장을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노골적인 우파 사회학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턴 정말 읽고 있기 힘들었다. 가령 이런 대목.


하지만 그러다 곧바로 루크만도 나도 공감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미친 듯이 설쳐’댔다. 이런 문화적 격별이 일으키는 불협화음 속에서 차분한 논조를 띤 우리의 책은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123쪽)

 

위의 이야기는 피터 버거가 뉴욕 뉴스쿨 시절의 동료인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하여 1966년에 출간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국역본: 『지식형성의 사회학』, 박충선 역, 1989, 기린원)이 그 탁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 본인들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사실 이 대목부터 버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버거가 말하는 이상주의가 미친 듯이 설쳐대던 그 시절은 다름 아닌 ‘68혁명’이 일어난 때였다. 아무리 버거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인이 그토록 누누이 자랑하듯이 사회학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다면 20세기 역사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68혁명’에 대해 저렇게 쉽게 규정해선 곤란하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68혁명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반권위주의의 슬로건 아래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사회주의 체제 모두에 저항했던 최초의 ‘세계혁명’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비록 68혁명이 어느 지역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1970년대 공황기를 거치면서―운동의 여파가 여성운동, 생태운동, 점거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긴 했으나―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의 반격 아래 그 충격의 대부분이 흡수되면서 그 혁명적 의의가 망각되어 왔다지만(심지어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출현케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68혁명을 단순히 ‘록 페스티벌’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피터 버거의 사회학자로서의 역사적 소양이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은 68혁명을 록 페스티벌에 비유하고, 자신의 책을 실내악에 비유하면서 둘을 상반된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대조시키는 지점이다. 어떻게 한 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혁명적 사건과 사회학의 특정 진영에서나 그 가치를 겨우 인정받을 뿐인 사회학 책 한 권이 같은 범주에서 나란히 대조될 수 있는지, 버거의 맨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버거는 『현실의 사회적 구성』이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그 책이 나왔을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책이 성공을 거둔 데는 그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후 시대정신은 금세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 책이 죽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밀려드는 문화의 물마루를 탄 사람들 대다수가 그 책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탈취해 자신들만의 언어로 번역해버렸다. 말하자면 루크만과 나는 포스트모던화돼버린 것이다. 다소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우리 둘 다 한참 후에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127쪽)


버거의 얘기인즉슨, 루크만과 자신이 쓴 책은 결코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는데, 묘하게도 그 책은 그렇게 해석되었고, 그래서 자신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버거가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


모든 현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까닭에 객관적인 사실 같은 건 없거나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같은 건 없다. 사실상 사실은 없고 오로지 ‘서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서술들’을 인식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그것들을 ‘해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서술들이 하나같이 드러내고 있는 이해관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들은 언제나 권력 0의지의 표현이다. 계급, 인종, 또는 성의 권력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좌파 이데올로기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탈식민주의’, ‘제3세계주의’, 그리고 정체성 정치학의 그 모든 다양한 분파들(특히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과 연결된다. […]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다양한 ‘서술’만이 있다는—는 정신분열증의 정의와 거의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현실과 자신의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125~127쪽)


버거는 루크만과 자신이 현실의 사회적 구성을 이야기했을 때, 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객관적 사실 같은 건 없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단지 자신들은 현실이란 늘 사회적으로 해석되며 그런 해석에는 종종 권력의 이해관계가 들어간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며, 그렇게 구성되는 현실의 주관적 다양성과 조건적 차이를 강조했을 뿐, 아예 사회적 사실이나 객관적 현실 자체가 없다는 불가지론적/허무주의적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나로선 솔직히 버거가 비판하는 그런 극단적인 구성주의자들이 과연 정말 있을까 의심스럽다. 오히려 버거와 루크만이 사회적 실재가 객관적으로 또는 선험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대신에 그것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현실로 구성되어지는 과정을 진술하고 분석해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적 사실이건 실제적 현실이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그 어떤 것들은 기실 알고 보면 우발적이고 다양한 조건들 속에 불안정하게 존재한다고 인식했던 포스트 담론과의 접점도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버거의 진술에서 더 가관인 것은 그 아래의 대목이다. 버거는 자신이 이런 사실, 즉 루크만과 공저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이 포스트모던하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눈치채게 된 것은 1968년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 번역본이 나오고 얼마 뒤였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뉴스쿨 계간지인 《사회 조사》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책을 읽고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사내 둘이 찾아 와서 “우리는 혁명가다, 당신이 사회의 구성에 관해 썼던데 우리는 사회를 재구성하고 싶다. 우리 두목은 당신이 우리의 혁명 사업에 대해 충고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버거는 이들을 마치 무슨 건달이나 폭력배쯤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행간을 읽어보면 아무래도 이들은 정말로 라틴 아메리카의 무장 혁명조직 일원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들이 정말 혁명가들이었건 아니면 다소 모자란 몽상가들이었건 중요한 것은 그들을 대하는 버거의 태도이며, 또 그렇게 그들을 대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자신의 책이 혁명적 과업과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이 왜 그 책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된 결과물이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혁명을 꿈꾸는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둘 다 버거의 신념체계 속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주의적이고 정신분열증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것. 버거의 머리 속에선 그 둘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합치될지 모르지만, 독자들로선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조합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버거야말로 나에겐 대단히 분열증적이고 반동적인 보수주의의 이상을 가진 자로 보일 뿐이다(마치 한국의 수구꼴통들이 아무 데나 좌빨딱지를 붙이는 모습과 흡사해보인다).


이쯤에서 젊은 시절엔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사회학자 버거가 도대체 어쩌다 우파 이데올로그가 되어 이렇게까지 망가졌는가 몹시 궁금해졌다. 책에선 뉴스쿨에서 경험한 추방의 경험,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버거가 자신의 라인으로 사회학 교수진을 꾸리려다 좌파적 성향을 띤 동료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인데, 버거는 자신이 뉴스쿨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갈 수 있는 어떤 자격과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인양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뉴욕 뉴스쿨이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과학 연구를 주도하는 학교로서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버거 같은 보수주의자가 일찌감치 떠난 덕분일지도 모른다. 버거로서는 가슴 아픈 기억이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닌가 싶다.  


미국 공화당 당원이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이며, 종교적으로 중도보수 성향의 개신교도이고, 문화적으론 자유주의자인, 그러나 학문적으론 철저한 모더니스트를 자부하는 피터 버거. 어쩌면 그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보수성의 기저에는 그가 현실을 바라보는 대단히 나이브한 사회학적 관점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 예컨대 그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현상학적 사회학이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어떤 지점에서부터 버거의 보수적인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책에서 사회와 의식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전반적인 입장을 논했다. 우리는 그 관계가 ‘변증법적’이라고 말했다. 즉, 외재화, 객관화, 내재화의 세 과정이 계속 상호작용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외재화란 인간들의 공동으로 하나의 사회적 세계를 ‘생각해내는’ 과정이다. 객관화란 이런 사회적 세계가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을 넘어서고 초월해서 ‘단단해’ 보이는 실재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내재화란 이 객관적인 ‘외적’ 세계가 다양한 사회화 경험을 통해 개인의 의식 속으로 다시 투사되는, 어릴 때부터 시작돼서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다. 언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다. 그것은 다른 모든 제도의 패러다임이다. […] 그래서 언어는 사회와 의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다른 모든 제도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를 ‘안다’. (119~121쪽) 

자신의 스승인 알프레드 슈츠를 계승한 버거와 루크만의 이른바 현상학적 사회학이 실증적 사회학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현상학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생활세계를 사회학적 분석에 끌여들였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훗설에 따르면, 생활세계, 즉 내가 속하고 경험하는 세계는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속하고 경험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을 이 세계를 경험하지만 내가 경험하는 세계 속에는 항상 타인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상호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생활세계는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체들도 모두 역사성을 가진 존재이다. 한 주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과거에 축적된 생활조건들을 물려받는데 이것은 곧 다른 주체들의 역사이다. 한 주체의 역사는 다른 주체들의 역사와 만나면서 생활세계 속에서 공동의 역사를 만들어가게 된다. 


생활세계가 상호주관적 세계라는 주장은 버거와 같은 현상학적 사회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타인들의 삶을 기술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회학자들에게 있어서 생활세계가 상호주관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이 사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이라는 것과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들과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기술,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로 기능했다. 실증적 사회학이 사회를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물리적 사물의 총합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현상학적 사회학은 세계가 주체에 의해 주관적으로 이해되고 파악된다는 것, 즉 현실의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구성 과정을 이론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학의 생활세계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전유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훗설의 현상학도 그렇고 버거의 현상학적 사회학도 그렇듯이, 모든 종류의 언어와 이성을 중시하는 의식철학적 사유는 주체(및 의식과 언어와 이성의 일체)의 원환 바깥에 있는 타자들(및 무의식, 비언어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들의 일체)과의 관계에서 이론적 파산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쉐프가 훗설의 현상학과 관련하여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타자에 대한 경험이 나의 사적인 체험 안에서만, 또한 나의 전망에서만 전개된다면, 내가 타자에게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자아활동의 결과로서 나의 표상, 나의 의도, 나의 환상이 아닐까? … 나는 모든 감정이입과 이해 속에서 내 고유한 에고를 비추는 반사 상자 속에 갇혀 있는가?”(박영도, 「의사소통 이성과 그 불만」참조)


현상학적 사회학이 간과한 타자로서 지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식적 차원에서 언어화되지 못하는 무의식, 나아가 이 세계의 현실에서 오로지 그 증상을 통해서만 실재가 파악되는 자본주의의 구성적 외부라 할 수 있는 계급적대의 모순, 덧붙여 모든 정상성의 범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것들(이른바 잉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적어도 그런 점에서 같은 사회학이지만 사회의 구성에 있어 행위자들에 내재하는 담화적 의식 및 관행적 의식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적 동기/인지의 차원까지도 함께 고려했던 기든스의 사회구성론이 훨씬 사회학적으로 설명력이 풍부하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버거가 그토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더 정확히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실정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나 68혁명과 같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와 대결하고자 했던 이념이나 운동들에까지 극도로 적대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생활세계의 역사적 특수성 또는 구조적 결정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생활세계의 구성적 차원을 아무리 강조할지라도). 생활세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곧 생활세계를 역사적으로 특수화시키는 생활세계의 외부적 조건, 다시 말해 생활세계의 “상징화, 즉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언어로의 번역에 영원히 구성적으로 저항하는 ‘외상적 핵심’”, “주체화-상징화에 저항하는 잔여”를 버거가 인지하고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바로 여기서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총합(ensemble)임을 파악했던 마르크스의 상대적 탁월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버거의 현상학적 사회학이 견지하는 사회적 구성주의는 보다 큰 사회적 힘, 즉 구조나 체제와 같은 것이 상호주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생활세계의 사회적 현상에 대해 행사하는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버거에겐 현실이란 상식적 믿음이 구성되어 영속되는 것인 반면에, 이 믿음 자체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나 관료제와 같은 외부의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란 점이 철저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역시 그런 점에서도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에 근거한 사회구성론이 버거의 그것보다 훨씬 이론적으로 설명력이 풍부하다). 바로 이러한 이론적 무능력이 결과적으론 버거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배태한, 또는 지금까지도 가능하게 유지시켜주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는 것 아닐까?  


내 나름대로는 버거의 이데올로기적 보수성의 철학적 배경을 찾아보고자 시도했다. 다소 억지스러운 논증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나마 이런 작업을 통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유익을 찾아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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