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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 강신주라고 하는 철학자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도 없다(철학을 좋아하고 철학책을 즐겨읽는 편이지만). 알라딘 신간리뷰 때문에 처음 이번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오늘날 유난히도 잘 ‘팔리는’ 작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저자 강신주가 김수영을 해석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그건 단연코 ‘단독성’과 ‘자유’이다. 저자는 특히 3장과 4장에서 단독성을 중심으로 김수영의 생애와 작품을 해석하고 있고, 6장부터 마지막 10장까지는 반복해서 김수영이 추구했던 자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가 새로움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새로움을 추동하도록 한 동력은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한 집요한 이상이자 이념이었다. 과거의 낡은 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이 이런 강인한 이념을 한시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p.115)
아하. 그렇구나. 김수영은 단독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녔던 시인이었나 보구나. 이건 그 어떤 김수영 해석자나 연구자들도 잘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저자의 해석이 흥미로웠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단독성으로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자.
단독성은 글자 그대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이다. […]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개체나 사건들이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을까? 그래서 들뢰즈는 ‘일반성’과는 다른 ‘보편성’(universality)의 원리를 제안하다. 그것은 지극히 단독적인 것만이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p.117)
강신주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벤야민과 라시스의 사랑을 예로 든다. 두 커플 각각의 단독적인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두 커플의 사랑에는 사랑의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계속 읽어 나갔다.
사실 시인, 혹은 모든 예술가는 들뢰즈의 새로운 도식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살아 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 시인은 단독적인 삶을 통해서 인간적 삶의 보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것은 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시를 완성했을 때, 시인은 보편적인 시를 완성한 것이다. […] 김수영은 단독성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태든 자신이든 간에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종교나 진정한 시는 타자의 단독성, 혹은 타자만의 고유한 내면을 향해 열려 있어야만 한다. (pp.117-118)
여기까지 읽고 나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이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강신주가 단독성으로 번역하고 있는 들뢰즈의 singularité는 국내 철학계에선 일반적으로 ‘특이성’, ‘단독성’, ‘고유성’, ‘독자성’ 등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왔다. 특이성이건 단독성이건 고유성이건, 어쨌든 그 의미가 중요할 터.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세계 및 그 삶의 모습을 해석하는 키워드로 적용하고 있는 들뢰즈의 단독성이 정말 이런 방식으로 적용되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오랜만에 들뢰즈의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저 개념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게 됐다(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면서 알라딘 리뷰를 쓰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철학 전공자도 아닌 입장에서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실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변용을 통해 생성중인 ‘순수사건’이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의 용어를 빌려 어떤 경우에는 ‘주체 없는 개인화’는 또는 ‘엑세이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강신주가 김수영을 단독성의 화신이라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런 것, 즉 사람이나 주체, 사물이나 실체에 관한 개체화 양식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개체화 양식이다(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pp.241-243 참조).
다시 말해, 들뢰즈의 단독성 또는 ‘단독적인’(singular)은 보통 다수(plural)에 대립되는 ‘개체적인’ 대상이나 인물과 관련된 그런 의미로 쓰이는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강신주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런 방식의 단독성은 일반성/특수성 도식에 입각한 사유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그와 달리 들뢰즈의 단독성은 개별적이지만 일반에 포섭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 완성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타자와의 차이, 비존재와의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그 자체로 차이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갈무리, 2004, pp.299-300 참조). 물론 이 차이는 표상들에 의해 분류되고 정리되기 이전의 차이들, 즉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즉자적 차이들이다(이종영, 『정치와 반정치』, 새물결, 2005, p.63 참조).
좀더 자세한 이해를 위하여, 들뢰즈가 단독성(특이성)에 관해 직접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려 한다.
하나의 어떤 생명을 구성하는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이 그에 대응하는 정해진 한 생명의 우연한 일들과 공존한다. 하지만 이때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은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모이지도, 나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개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심지어 특이한 생명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어떠한 개별성도, 특이한 생명을 개별화하는 그 어떤 다른 동반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아이들은 그들 모두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그들은 미소, 동작, 찡그린 얼굴과 같은, 주체적인 성질들이 아닌 사건들을 지닌다. 말하자면 순수 역능인 내재적인 생명이, 고통과 연약함을 뛰어넘은 지복이기까지 한 내재적인 생명이 아주 어린아이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보여주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내재성의 평면을 채우는 한에 있어서, 또는 엄격하게 보면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선험적인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한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비결정을 떨쳐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은 결코 경험적인 의미의 비결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재성에 대한 결정 또는 선험적인 의미의 결정 가능성을 나타낸다. (들뢰즈, 「내재성: 생명」,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p.515)
나는 들뢰즈 자신의 특이성(단독성)에 관한 고유한 개념화가 강신주가 부연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이라고 하는 식의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설명하는 식으로 단독성을 이해한다면, 그건 그냥 개(별)성과 아무런 차이를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로서의 단독성은 무수한 매개들을 거쳐 형성된 개인의 개별성과는 전혀 다른 층위, 즉 이데아가 아직 개체 속에서 구현되기 이전의, 즉 선험적인 장에 속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개인화 이전의 자아, 주체화 이전의 자아이며 스스로 지각할 수 없는 자아인 것이다. 주위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과 식별이 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그런 들뢰즈의 섬뜩하기까지 한 비인격적이고 비주체적인 차원의 단독성 개념을 가지고 와서 김수영이란 인물을 단독성, 아니 다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이라고 하는 매우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개(별)성을 욕망했던 인물로 그려내는 강신주의 작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김수영을 한 명의 자유분방한 ‘리베르탱’(libertin)으로 그려내는 저자의 화려한 필치에 감동도 많이 받게 되고, 또 김수영의 인간적인 면모도 새롭게 알게 되어 재밌기도 했지만, 철학적인 개념을 진술하는 대목에선 계속해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영이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또 실제 시인으로서의 삶도 그러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굳이 맥락과 잘 맞지도 않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끌어들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엄밀한 개념을 상투적으로 적용하면서 일상과 철학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들뢰즈 철학 및 그 윤리학의 급진성(비인칭적/비인격적 익명성으로서의 주체론에 기초한)을 너무 단순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덧붙여, 이 책에선 지나치게 김수영에 대한 찬사와 정당화 일변도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은데,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김수영이 정말 들뢰즈적인 의미의 단독성을 가진 비인칭적 주체에 관한 대명사로서 김수영인지, 아니면 강신주라고 하는 인물의 ‘자아이상’(ego ideal)인 동시에 ‘이상적 자아’(ideal ego)인지 계속해서 의문스러웠다. 다시 말해 강신주가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상징적 위치이자 규범이며 가치로서 김수영으로 지칭되는 어떤 관념, 저자의 용어대로 하자면 ‘인문정신’이 결국 김수영이라고 하는 대단히 문제적이고 복잡한 역사적 인물에게 (그 인물을 우리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여 문제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정해진 답으로 제시하는) 무비판적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런 강신주의 자아이상으로서 발명된 김수영이 결국 강신주에게 있어선 타인들이(혹은 독자들이) 그렇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강신주 바로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김수영과 어떠한 거리두기도 없이 김수영을 인문정신의 화신으로 그려내는 이유가 나로선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시종일관 반복해서 김수영을 따라서 우리는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어떻게 그런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김수영이 저자의 자아이상이자 이상적 자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김수영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로서 김수영인 것이다. 그러니 애써 이 책에서 김수영과 강신주를 구별할 필요도 없고, 강신주를 넘어 김수영에게로, 김수영을 넘어 들뢰즈적인 단독성의 세계로, 혹은 인문정신의 자유로운 주체로 가는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비판적 거리두기의 상실! 곧 감상주의로의 투항!). 그저 이 책을 통해 강신주가 재현한 김수영(혹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이 아닌 미지의 다른 김수영을 만나고 싶다는, 그래서 강신주가 포착하려는 개념으로 쉬이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는, 그런 새로운 자극과 충동을 강하게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역설적인 의의를 발견했다.
나로서도 이 책을 읽고 김수영의 시와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에 대해 참으로 새로운 관심(의 의욕)을 갖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