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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샌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정의와 도덕이 자본과 만날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는 내내 샌델이 인용하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먼저 그의 성실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까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샌델의 저작들, 가령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나 『왜 도덕인가?』를 읽은 사람, 혹은 샌델의 하버드 강의 동영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만 봐도 샌델이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부제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이다. 시종일관 유지되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은 “시장화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시장화(혹은 상품화)로 인해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폐해는 무엇인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 폐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불공정성(또는 불평등성)이고, 둘째는 (가치 또는 도덕적 선의) ‘부패’ 또는 ‘타락’이다. 샌델이 시장화(상품화)의 폐해를 불공정성과 부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제기된 두 가지 문제의식, 즉 ‘정의’와 ‘도덕’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르러 마침내 “시장”, 더 정확히는 “자본”의 문제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종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는다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시장지상주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위기를 전세계에서 수집한 사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조금씩 다르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장지상주의와 같이 그 의미 전달 방식에 있어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훨씬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친숙할지 모른다.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혹은 소박한(?) 표현으론 도저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들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터. 그 단어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명칭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야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그 이름.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그러고 보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이상하리만치 잘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고, ‘시장화’니 ‘시장지상주의’니 또는 ‘경제화’니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너무나도 소상하게 밝혀내며,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지만, 정작 샌델은 그런 시장(지상주의)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시장화나 경제화 같은 용어들이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용어라 할지라도, 거기엔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법률, 사회적 관습 등을 포함하는 각종 제도나 국가의 정책,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더 나아가 미셸 푸코와 통치성 학파의 연구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는 일련의 이론적 원칙들과 사회-정치적 실천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각 개인을 자본주의적 주체로 구축하는 복잡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이며 지식과 정서를 아우르는 합리성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즉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특권적인 주체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도하는 후기 근대의 다양한 주체성의 형상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 혹은 통치성과 불가분한 것임을 의미한다.1)
예컨대 샌델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우정이나 인간의 장기(臟器), 어린 아이들, 명예, 대학 입학허가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장화에 반대하는 논리의 주된 근거를 공정성과 부패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자.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논쟁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시장 교환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항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농부가 굶주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이나 각막을 팔겠다고 동의할지 모르나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공정하게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 공정성과 관련한 논거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동의, 좀 더 정확하게는 공정한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동의이다. 시장을 이용한 재화 분배에 찬성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시장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재화를 주어진 가격에 팔지 말지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157~158쪽)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샌델은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패에 관한 반박은 다르다. 이는 시장의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특정 도덕적 ‧ 시민적 재화는 사고파는 경우에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된다. 부패에 관한 논쟁은 공정한 거래계약 조건이 성립됐다고 해서 충족되지는 않는다. 평등한 조건과 불평등한 조건 아래서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는 동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 평가와 교환 때문에 변질되었다고 여겨지는 재화의 도덕적 중요성에 호소한다. […] 부패 논쟁은 재화 자체의 특성과 재화를 지배하는 규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공정한 거래 조건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힘과 부에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7~159쪽)
샌델은 공정한 또는 평등한 거래계약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다시금 그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시장화로 인한 도덕적 위기는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델의 질문은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정한 계약조건을 가정하면서,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부정의나 불평등성,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착취’와 ‘계급적대’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공정한 계약조건 속에서 재화의 본래적 사용가치가 왜곡되고 부패하는 문제로 건너뛴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물건은 그것의 쓸모(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능성(교환가치, 즉 상품가치)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물건의 교환가치는 화폐 속에만, 그리고 그 물건의 사용가치는 상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식으로 시장지상주의사회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윤리적인 시장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공정한 계약조건’이라고 하는 샌델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싶다. 나는 시장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접근도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시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다는 것, 경제의 영역엔 그 나름의 윤리가 있겠지만, 그 윤리는 우리가 비시장의 영역에서 찾아왔던 그런 윤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라는 것, 따라서 시장, 자본주의, 경제학, 그 어디에 대해서도 우리는 ‘윤리적 정당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애초부터 시장의 성립과 그것의 작동방식이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서 공정함이나 평등함을 기대하며, 억지로 공정함과 평등함을 가정한 뒤에 다시금 재화의 가치의 부패를 논한단 말인가? 경제의 영역은 결코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인간이 선해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경제는 사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발상, 즉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발명하여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성의 전횡을 제한하고 통제하려 한 것이다. 사회적인 것이 과연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별도의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 문제를 여기서 다루긴 어려우니 일단 원래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데 자발적으로 계약한 주체들의 실천이 정말로 실천 그 자체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발견하려는 고투 가운데서, 그런 계약을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실은 체제가 규정한 틀 안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즉 생존을 우선시한 전략적 타협의 일환으로 계약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계약이 체제가 설정한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주체의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선택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체제 내지는 사회가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다시 말해 체제의 질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것일 때 비로소 자발적인 것, 즉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자유의 행위(act)를 선택한 주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주체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윤리적 선택,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얻게 되는 체제의 질서 바깥이란 곧 사회적/생물학적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를테면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개개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과 자기향상을 위해 노동 이외의 여가시간까지 모두 희생하여 자신에게 끊임없이 투자하고, 스스로의 비용과 편익을 철저하게 결산하며 삶을 관리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간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기계발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인적자본으로서 노동시장 안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체제의 질서를 내면적으로 규범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계발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체제에 의해 주체의 외부에 설정되어 있던 선택지의 조건을 주체가 벗어나는 순간, 그/그녀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죽음’이 아니고선 현재로서 이 체제의 바깥으로 완벽하게 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배치하고 규정해놓은 ‘삶의 자리’를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그런 위험이 뻔히 전제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안에서 주체들의 자발적인 계약이란 전혀 공정하지도, 전혀 평등하지도 않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시장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러한 우리의 삶의 조건, 즉 과거에만 해도 비시장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들에까지 시장원리가 파고든 오늘의 현실이 과연 정의롭고 선한 것인지 부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질문은 앞서 내가 말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제도적 차원의 메커니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분노를 넘어
샌델은 차마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의 관점에서 간단히 정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장의 논리를 사회 전체에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국가 개입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그 체제 내의 개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서, ‘경쟁’이라고 하는 시장의 제일원리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접합’시킴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식의 통치양식인 것이다. 요컨대 시장경쟁의 원리를 사회 전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전에 없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상품화가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사회의 시장화란 결국 자본이 국가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통치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비판이론가 하버마스 역시 샌델보다 수십 년 앞서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병리성의 본질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테제로 요약한 바 있다[물론 푸코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포괄, 즉 정부(통치)에 의한 시장원리의 전면적 증식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어온 또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생활세계는 이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하는 체계 논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 사회, 인격이라고 하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들이 파괴되며, 결국 문화적 의미상실, 사회적 규범들의 정당성 훼손, 개인의 인격성 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物化), 경제적 배제, 인간의 자기 소외 등이 나타난다.2)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복지국가에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후기자본주의적 통치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가 샌델의 시장지상주의 테제보다 훨씬 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적어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켜버린 체계를 말함에 있어, 그 체계의 하위범주에 시장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체계는 경제체계와 행정체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한 이중적 체계가 생활세계로 침입하여 그것을 식민화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식민화는 시장의 단독적인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시장이 국가를 통해, 혹은 국가와 더불어 관철시킨 것이며, 이는 복지국가의 시대나 복지국가의 위기와 더불어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나 본질적으론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복지국가의 시대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견인한 주된 요소가 국가적 관료제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엔 시장의 경쟁원리라는 것일 뿐. 물론 우리로선 국가의 억압적 지배보다 자본의 달콤한 지배가 더 강력한 지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모두 넘어서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요청되는 것이다.
샌델의 책이 주는 많은 교훈과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읽고선 우리 시대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건 시장지상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바꿔 읽을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다만,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계약조건의 불공정함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의 부패를 넘어) 우리 삶의 위기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을 탐구하려는 자극과 동기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주
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0); 사카이 다카시/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서울: 그린비, 2011).
2) 위르겐 하버마스/장춘익 역,『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서울: 나남,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