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봄이 시작되자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책 세 권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 두 권을 뽑아봤다. 물론 이 책들 말고도 좋은 책들이 더 있는데, 다음 주쯤에 한번 더 소개해볼 생각이다. 



1. 철학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들


먼저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젊은 철학자 로렌초 키에자(Lorenzo Chiesa)의 저작이 단행본으로선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미 계간 <자음과모음> 2008년 겨울호에 실린 "조르조 아감벤의 프란체스코파적 존재론"(http://story.aladin.co.kr/m/chiesa)이라는 글을 통해서 그의 사유의 단면이 소개되었고, 그보다 조금 전인 2008년 10월에 중앙대 대학원 신문을 통해 도서출판 난장을 이끌고 있는 이재원씨(<주체성과 타자성>의 발행인이기도 한)의 번역으로 "에스포지토, 아감벤과 네그리를 넘어서"라는 짧은 글이 소개된 바 있다(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48). 


사실 두 글 모두에서 키에자는 자신의 사유와 논리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의 선배격으로서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자들인 조르조 아감벤과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작업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고유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라캉을 해석한 책인 <주체성과 타자성>이 우리에게 도착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종종 "주체성의 과학" 혹은 "주체에 관한 과학"으로 이해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먼저 소개된 라캉 정신분석학의 철학적 측면에 관해 다루고 있는 여러 책들(예컨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 같은)과 함께 읽으면서 라캉이 말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해보면 유익할 듯. 

"라캉적 주체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계기의 떠맡음과 극복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여하는 주체나 불가능성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된 결여이다." (24쪽)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랭 바디우가 말했다. "진정한 철학자는 그 자신의 고유한 근거에 의하여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새로운 문제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철학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문제를 발명하는 것."(http://blog.naver.com/paxwonik/40121714947) 바디우만큼이나 유명하고 논쟁적인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도 비슷한 말을 했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73)


아마도 고대 이래로 철학의 역사에서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를 제안하고 발명하기 위해 즐겨 사용했던 것이 바로 아포리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언, “오컴의 면도날”과 같은 철학 명제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지성의 산물이자 철학사의 가장 대표적인 아포리즘이다. 물론 현대철학자들 가운데서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이 곧 실재다"나 데리다의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존재론에 선행한다" 같은 아포리즘들을 통해 우리는 그 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사유의 세계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은 아포리즘을 통해 철학사를 조명하는 신선한 접근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중 가장 근본적인 삶의 현상학자라고 불리는 미셸 앙리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된 책이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현상 그 자체를 특권적으로 다루는 철학이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의 생생한 의미가 현상학이 문제로 삼는 핵심적인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앙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현상학의 질문, 이것만이 철학에 고유한 대상을 부여할 수 있으며, 이것만이 철학을 다른 과학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사후작용으로서 반성의 활동이 아니라 자율적인 원리, 즉 지식의 근본적인 원리로 만들 수 있다. 이 질문은 이제 현상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주어지는 방식, 즉 그들의 현상성과 관계한다. 다시 말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남 그 자체와 관계한다. ...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주제이다." (10쪽) 

한편, 앙리는 가장 내가 알기로 그는 프랑스 현상학의 신학적 전회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말년에 남긴 책 세 권은 모두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책이 드디어 소개되었는데, 이제 앙리의 책 출간을 계기로 프랑스 현상학계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일군의 현상학자들의 신학적 전회(theological turn) 경향에 관한 연구서들도 번역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2. 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들

사실 이 책의 제목보다 부제가 더 인상적이었다.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라니?! 원서의 제목과 부제가 "What The Least Religious Nations Can Tell Us About Contentment"(최소한의 종교적 국가들이 미국에게 평안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인 걸 보면, 부제는 출판사에서 바꾼 것 같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 담론이 최대의 정치적/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다보니 북유럽 복지국가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기존의 북유럽 복지국가들(노르딕 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도 불리우는)을 다루는 책들과는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바로 그들의 '종교적'(또는 세속화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체제, 경제적 성공, 연대에 평등성의 사회문화를 다루는 책들은 많이 소개되었지만,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종교적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소개되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유토피아라고 하는 것이 제도나 구조의 선진성만 가지고는 말하기 곤란이 측면이 분명 있을 것이다. 종교적 삶이 없이도, 즉 신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비교적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본회퍼가 말한 "신 없이 신 앞에"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북유럽의 선진화된 복지국가들이 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준다. 


작년에 국내에도 소개된 <분노하라>로 유명한 94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 스테판 에셀. 바로 뒤이어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고 하는 정책 제안서라고 한다. 문제제기를 통해 저항과 비판의식을 촉발시킨 후에, 이제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다루는 정책 제안서라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현명한 운동가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정치의 본령은 이념과 구호가 아니라 정책임을 밝힌다. 그리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 인류가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물론 이념과 구호가 없는 정책은 항로를 잃어버린 배와 같을 것이다. 대안적인 정책 및 프로그램의 구상과 그 실천은 그것이 애초에 지향했던 이념이나 가치와 괴리되어선 곤란하다. 


그러나 이념이나 가치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역사적인 현실관계들의 영역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 분노할 수 있고 개혁이든 혁명이든 현실을 바꾸기를 꿈꿀 수 있는 것도 결국 이념과 가치의 힘이다. 어차피 이념과 정책, 구호와 프로그램, 이론과 실천, 추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질 수 없다. 그렇다고 둘을 결합시키기 위한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최선은 아니다.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둘 간의 긴장을 유지하되, 우리는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둘의 결합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념이 담긴 정책, 정책을 통해 현실화된 이념으로 말이다. 

"이제 성장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편을 가르고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의 리스트를 작성할 때가 되었다."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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