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로 간 코미디언 - 2007 제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2007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연수, 달로 간 코미디언
- 이해받지 못한 자의 슬픔

내가 ‘김연수’라는 이름을 처음 본 것은 분명 2004년도의 초겨울, 교양관 1층 로비의 테이블에 앉아 읽었던 <2004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였을 테지만, 그 책에 실려 있던 열 편의 최종후보작들 가운데 ‘김연수’라는 작가의 <뿌눵숴(不能說)>란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떠올리게 된 것은 분명, 2005년 겨울 자취방에서 <2005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 도중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자취방의 침대에 엎드려 <2005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최종후보작들 중 ‘김연수’라는 작가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란 작품을 읽던 그날 밤, 나는 왠지 모르게 ‘김연수’라는 작가를 읽어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가을, <2007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와 만났다. 이번엔 ‘최종후보작’이 아닌 ‘수상작’으로서. 그리고 그저 ‘김연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작가가 아니라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읽어 온, 이젠 좋아하는 작가가 된 김연수로서 말이다.

-
언젠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인터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9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인 그녀는 그 인터뷰에서 (정확하진 않지만)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매우 행복한, 운 좋은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글을 읽을 당시에 나는 그녀의 그 말을 그저 자신이 품고 있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여 끄집어 낼 때의 쾌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러나 김연수의 <달로 간 코미디언>을 읽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나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젠가 김연수는 한 작품의 맺음말에서 ‘이젠 larvatus라는 이름의 수명은 다 한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아니면 그의 블로그에서였던가?). 이제 더 이상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는’자신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그간 천착해오던 ‘진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의 세계로부터 나름의 답을 찾아 내었다는 의미이며 그와 동시에 자신을 붙들고 있던 ‘내 문학이란 과연 진짜인가’라는 물음 역시 극복해 내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이후 김연수 문학의 행보는 한층 다양해지고 넓어졌다. 요컨대, 한 봉우리에 올라서서 세상의 수많은 다른 봉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김연수는 그런 시선에 닿은 하나의 봉우리인 ‘이해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은 한 권투선수, 그 선수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합을 벌이다 링에서 죽은 한국인 권투선수의 고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치열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 것? 링에 쓰러져 죽은 것? 그런 것들은 ‘고통’이라는 것의 범주와는 거리가 좀 먼 것들이다. 그 권투선수의 고통이란 14라운드라는 긴 시간을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합을 바라본 관객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만리 타향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결국 링에 쓰러져 죽은 그의 시합은 그 관객들에겐 단지 ‘다리가 늘씬한 무희들이 펼치는 카니발쇼와 조련사를 등에 태우고 모터보트처럼 물 위를 달리는 돌고래들처럼 잠시 머리를 식힐 때 유용한 여흥거리’에 불과했을 뿐이다. 관객들은 점점 악몽처럼 되어 가는 시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을 뿐 어느 누구도 남한에서 온 그 선수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슬픈 이유는 결국 자신도 그런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이 부재하는 세계란 침묵과 암흑의 세계이며, 침묵과 암흑의 세계에서 인간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이해와 소통 안에서야 비로소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김연수는 책 말미의 수상 소감에서, 자신이 만약 작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꿔 말하자면 자신은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다. 김연수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루이스 부르주아가 이야기하는 의미의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을 더 큰 기회를 가진 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김연수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여러 개의 서사가 동시에 진행되며 서로 엮여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는 서사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는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와 조선족 아가씨를 동생과 결혼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와 맞선을 보는 형제의 이야기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텍스트와 연인이 자살한 뒤 그녀를 이해하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소설로 쓴 한 청년의 이야기가 얽히며 하나의 주제로 치달아 간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도 그러한 서사 방식이 이용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죽은 권투 선수의 이야기, 소설가 청년과 한 라디오 피디의 연애와 이별 이야기, 그 라디오 피디가 오래 전에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 버린 희극인 아버지를 이해해 가는 이야기라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며 얽힌다.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여러 가닥의 끈이 꼬이며 하나의 아름다운 줄을 만들을 만들어 내듯, 여러 이야기가 섬세한 구성에 따라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과정은 가히 아름답다고 할 만 하다.


+
<2007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말하자면 왠지 올해의 <황순원 문학상…>은 좀 싱거운 느낌이다. 2004년부터 매 해 늦가을마다 읽어 온 <황순원 문학상…>은 매 번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재미있는 단편들로 가득했는데 이번만큼은 어쩐지 힘이 좀 빠진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매력적인 작품들도 물론 있었다.

먼저 권여선의 <반죽의 형상>. 권여선의 단편집을 읽었던 적이 있다. <반죽의 형상>도 거기서 한 번 읽어 보았던 작품. 권여선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자신의 욕망을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결코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축축하고 끈적이며 눅눅한 욕망일지라도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 속으로 주워 삼키고 또 주워삼킨다. 작품의 종반부에서 욕망으로 가득 찬 주머니가 결국은 터져 버리지만,  권여선 작품의 매력은 욕망의 주머니가 터져 버려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만 상황을 결코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민규의 <깊>. 작품 목록에서 ‘깊’이라는 제목을 보고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참 생각했었다. 작품의 종반 즈음에서 무릎을 탁 치며 알게 된 ‘깊’의 의미란 결국 ‘딮’이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면 읽어 보시라. 당신도 아마 무릎을 탁 칠 것이다.)
박민규는 우주적 인간이다. 그의 사고는 언제나 먼 우주를 향해 있다. 이 작품에서도 박민규는 우주를 향해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이번에 내딛은 우주로의 한 걸음에서 박민규가 얻은 깨달음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 해저 19251미터를 향해 하강하는 ‘룸’은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다프네’와 다를 바 없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는 디퍼들이 다다른 곳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깊>은, 말하자면 SF랄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박민규가 그리는 SF란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무척이나 묘하다. 최소한 <깊>에는 카스테라로 변해 버린 세계라든가, 지구에 꽂혀 버린 거대한 탁구공 같은 건 등장하지 않으니까.

다음으로는 김애란의 <칼자국>. 나는 이 작품 이외에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요즘 문단과 평론계에는 ‘김애란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야단이라고 한다. 그만큼 김애란의 작품이 매력적이라는 말인가 보다.
<칼자국>도 한겨울 밤의 이불 속 아랫목처럼 따스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윤성희의 <이어달리기>. 이번 <황순원 문학상…>에서 <달로 간 코미디언>다음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었다. 어머니와 네 딸의 이야기인 <이어달리기>는 정말이지 최근 읽었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경쾌한 리듬감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이건 정말이지 심하다. 너무 재미있다. 윤성희씨, 그렇게 생기지는 않으셨는데 이렇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니요.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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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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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못하는 편도 아니었잖아?”

삼천포니 프랜차이즈니 삼미의 야구니 뭐니 해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핵심이란 결국 저 문장이 아닐까 한다, 못하는 편도 아니(었)잖아.

예전에 두어 번 읽을 때엔 그저 재미있네,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란 소설이 이토록 좋은 작품이었단 걸 이번에 다시 읽으며 퍼뜩 깨닫게 되었다. <지구영웅전설>과 <카스테라> 그리고 <핑퐁>과 비교해 보아도 박민규 최고의 작품은 역시 <삼미…>라는 생각이다. <지구영웅전설>이 소재를 소설 속으로 멋지게 끌고 들어와 놓고도 그것을 잘 풀어 내는 데에선 실패하고 말았다면, <삼미…>는 소재의 설정과 그것을 풀어내는 일 두 가지를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해 낸 작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박민규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그만의 언어적 감각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시기의 작품이 바로 <삼미…>가 아닌가 싶다. 몇 번을 읽어 보아도 그런 문장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직조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 정도의 리듬감과 균형미 그리고 세련된 감각을 가진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낼 수 있는 작가는 박민규가 유일하지 않을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박민규가 <삼미…>안에 담아 둔 그 문장들만큼은 결코 빛이 바래지 않을 것 같다.
<삼미…>에서 느껴지는 박민규의 언어적 감각은 <카스테라>든 <핑퐁>이든 읽어 보아도, 여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삼미…>와 비교하자면 무뎌진 느낌이다. <삼미…>의 문장들로부터 받았던 ‘감동’이랄수도 있을 그 느낌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박민규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작품이 <삼미>이고 <삼미>의 충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해서 역치값이 커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삼미…> 이후의 작품들은 단락을 너무 자주 나누어 두어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뭘 의도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 의도를 따라가며 읽다 보면 어쩐지 그 의도만 도드라져 읽히고 작품은 붕 떠버리고 마는 느낌이다. 작품에의 몰입이 쉽지 않고 가독성도 아무래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라도, 박민규 최고의 작품은 <삼미…>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이야기.
굳이 박민규라는 작가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삼미…>는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읽어야 할 소설이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2장 ‘그랬거나 말거나 1988년의 베이스볼’ 중간 즈음의, 세 명의 애인과 일곱 명의 섹스 파트너가 있는 여자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그 부분이 왜 필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기억해 보면 2004년 필수교양 시간에 <삼미…>에 대해 다인이가(기억 속에서는 분명 이다인이 조 대표료 발표했었다) 발표했던 내용 가운데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박민규에게 그 여자 부분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질문했는데 박민규는 그저 ‘8,500원을 주고 소설책을 사는데 그런 이야기도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의견에 따라’ 넣은 내용일 뿐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이었다. 그럴 수도… 하고 납득하기에는 50페이지도 넘는 분량을 생각해 보면 좀 심한 게 아닐까 싶다.
그저 대학에 입학해서 그저 세월을 흘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그저 하고 싶었던 걸지도… 라고 생각하기에도 50페이지는 역시 심하다. 의미를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어쩐지 소설이 좀 헐거워지는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 생각이 있다면 그 부분을 좀 고쳐 보는 건 어떻습니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지만, 역시 박민규인 관계로 역시 “못 쓴 편도 아니잖아.” 하며 넘겨버릴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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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4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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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공동 운명을 가지지 못한 자의 선의

1.
‘누군가를 위함’이라는 마음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순수할 수 있을까. 그 당사자들과 동일한 처지에 서지 못하는 이상, 선의(善意)란 결국 하나의 빛깔좋은 태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위함의 대상인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자 자신의 입장에서도. 빛깔좋은 태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나병 환자들을 위한 ‘환자들의 낙원’을 만들려 했던 조백헌 윈장의 선의와 열망은,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강한 것인지와는 상관 없이 사실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건강인’인 조백헌 원장으로서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사자인 환자들과 전혀 다른 운명을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소록도의 원생들처럼 문둥병을 앓고 있거나 앓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섬의 운명을 공유할 수 없는 이상), 처음부터 그와 환자들 양쪽은 각자의 운명을 따로따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한 인간의 선의와 열망과는 관계 없는 일이며 그야말로 ‘운명’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일 따름이다.

처음 섬의 원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조 원장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공동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순수한 선의와 열망이면 환자들의 낙원을 이루어 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섬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어 주겠다는 조백헌 원장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 넘길 뿐이었다.

공동 운명을 가지지 못한다는 부분으로부터 조백헌 원장은 원생들의 믿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소록도의 원생들은 조 원장 이전의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배반의 기억을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써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조 원장이 아무리 원생들 앞에서 권총과 성서를 앞에 두고, 만약 자신에게서 배반이 행해진다면 자신의 목숨을 원생들에게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해도 정해진 각각의 다른 운명이란 바뀔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원생들은 알고 있었다.
원생들의 조 원장에 대한 완전한 신뢰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그것이 원생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배반이 되어버리고 마는 잔인한 역설은 그 ‘공동 운명을 갖지 못함’ 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렇기에 오마도 간척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때에 황 장로는 조 원장의 선의에 대해,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 명의 환자로서 그에 대한 완전한 신뢰만은 끝끝내 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조 원장에게 섬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황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기 위해 섬을 떠나면서도, 어째서 원생들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만큼은 이해하지 못한 조 원장이었다.
5년 후 조 원장은 이상욱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공동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선의가 어째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곤 원장직을 사임하고 개인 조백헌으로서 섬으로 돌아간다. 원장이 아닌 섬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섬으로 돌아감으로써 조 원장은 미약하게나마 섬과 섬 사람들의 운명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되는 것이다.

2.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앞서, 내가 남자라는 이유에서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여성들과 공동 운명을 지닐 수 없다. 언제나 원하면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과 같은, 수능 시험 성적 줄 세우기에 따른 대학 서열화를 해체하자는 운동에 동참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나는 뭐가 어찌 되었든 고대생이므로.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의 이름이 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소리치는 구호와 휘두르는 팔짓 안에는 거짓과 배신의 가능성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페미니스트적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조용히 행동하는 것뿐이며, 아무런 비판 없이 앞선 세대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틀에 순응하며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왔던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것뿐이다.

시민단체는 탈북 이주민들에게 ‘새터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탈북 이주민들은 그들이 붙인 그 이름을 거부했다. 언젠가부터 장애인들을 ‘장애우’라는 이름으로 부르자는 운동이 일었지만 장애인 단체에서는 역시 자신들은 ‘장애우’라는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괜한 어깃장 놓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 역시 결국엔 같은 문제였다. 그 이름들은 당사자 자신들로부터가 아닌 타인들이, 마치 큰 호의라도 베푸는 양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름에 그대로 수긍해 버린다면 그것은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을 배반하고 마는 실마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국문학 작품들 가운데 현대의 고전을 한 권 뽑는다면 나는 <당신들의 천국>을 선택할 것이다. 작품이 쓰여진 후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불편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고전의 요건이라 한다면 <당신들의 천국>은 그 요건을 충족시키기 떄문이다. 누군가를 위함에 대해서, 선의에 대해서, 운동에 대해서, 진심에 대해서 <당신들의 천국>은 지금껏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뒤엎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만약 사회운동가를 꿈꾸는 친구가 있다면 그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은 맑스나 베버가 아니라 어쩌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일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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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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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이청준 선생님이 2007년 11월에 발표한 소설집이다. 그동안 명색이 국문과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문학 작품을 워낙 읽지 않아 왔던 게 마음에 걸려 한국문학 읽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작가가 바로 이청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작품들을 검색하며 대표작을 골라 보다 사실 깜짝 놀랬다. 아니, 2007년 11월이라니. 1965년 <퇴원>이라는 작품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셨으니 40년이 넘는 시간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토록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다니. 그것만으로도 이청준 선생님께서 존경 받는 문인으로 남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 <천년의 돛배>를 펼치곤 잠시 당혹스러워했다. ‘앗 설마 또?’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남도 연작> 네 편과 소설집 <눈길>을 통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미지ㅡ바닷가 언덕 위의 무덤 곁 콩밭, 어머니와 소년, 고향과 고향 떠남의 이미지ㅡ가 다시 한 번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 역시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성급한 생각이었다. 그와 같은 이미지로 시작된 <천년의 돛배>는 낯선(앞서 읽은 선생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만나지 못했던)방향으로 고물을 틀었다. 그것은 뒤에 이어질 수록 작품들의 방향을 미리 일러두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집에서 이청준 선생님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스로 ‘프란시스코 꼬로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선생은 각각의 인물을 그저 앞에 불러다 세워 둘 뿐이다. 선생이 앞으로 불러다 세워 둔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 나간다. 그렇게 풀어 나가는 이야기들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하나같이 흥미진진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갈 뿐인데도 그 인물들의 이야기로부터 나라의 주인이 며칠만에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던 시기의 난리통과 인민재판의 기억이 기어나오고 시골 동네에 마을 어른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온갖 기인들의 이야기, 온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기 물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함께 묻어 흘러 나온다. 억지스럽게 끄집어 낸 이야기들이 아닌, 사람 사는 이야기를 꺼내자니 그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시골 할머니댁 따듯한 아랫목 이불 아래에 발을 넣고선 고구마를 까 먹으며 할머니가 들려 주는 동네 옛이야기나 집안 어른의 일화를 듣듯 정말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아니, 책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들려 주는 그 이야기들은 어쩐지 한 구석이 믿기 어려울 만큼 과장된 것도 있고 또 그것인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것들 투성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에이 거짓말, 그런 게 어딨어요’하고 투정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할머니께서는 분명 그 가만 가만한 말투로 대답하실 것이다. 그게 세상살이라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이청준 선생님의 최근작인 이 작품집은 무척이나 편안하다. 그러나 그 편안함 안에 담긴 진중함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남도 사람>연작부터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까지 선생님의 작품을 대표작을 나름대로 골라 대여섯 권쯤 읽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노작가의 발표 작품을 따라 읽는 즐거움’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선생님께서 자신의 노모에게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다며(백발이 아니라며) 지었다는 호인 미백未白처럼 언제까지나 미백으로 남아 계속해 작품을 발표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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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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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언젠가 잡지 페이퍼에서 On the Road라는 책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리뷰라기보단 개인적인 감상글이라고 해야 할까? 그 감상글은 김원씨가 썼던 걸로 기억한다. 그 글을 읽고, 한 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했고 얼마 전 사서 조금씩 보고 있다.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 박준이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카오산 로드는 태국 방콕의 카오산에 위치한, 말하자면 배낭여행자들의 메카 같은 곳이라고 한다.

‘게스트 하우스와 여행사 등 여행자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곳, 카오산은 항상 전 세계에서 모여 든 배낭여행자들로 넘쳐난다. 늘 여행자들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가는 카오산은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면서 동시에 끝나는 곳이다. 일단 카오산으로 가면 된다는 말은 여행자들에게 걸린 주문 같다. 여행을 처음 나선 사람도, 몇 년씩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도 여행에 필요한 게 있다면 카오산으로 가면 된다.’

책 안에는 작가가 인터뷰한 열 네 명의 장기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사실 이 책은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다시 엮어 낸 것이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몇 년째 여행을 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는 우리나라 사람도 있고 외국인도 있으며 오십대의 부부도 있고 고등학생 소녀도 있다. 10년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떠나 온 사람도 있고 살아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온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유롭다.
사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별다른 큰 문제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은 아무도 내일에 대해, 미래에 대해 미리 앞선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가야 할 생활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며 하루하루를 반짝이는 즐거움으로 채워 나갈 뿐이다.

나도 그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아니 자유롭게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박준은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꿈만 꾸고 있는가. 한번은 떠나야 한다.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돌아와 일상 속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다.’


+
책을 읽는동안 지난 유럽여행에서의 추억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외국여행이란 분명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경험들을 우리에게 쥐어 준다.
가령, 지저분하고 오줌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나는 파리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멀리서 들어오는 지하철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차의 바퀴가 아닌 화물차의 바퀴 같은 커다란 타이어가 달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라든가, 루체른에서 퐁듀를 먹어 보겠다고 퐁듀가 메뉴에 있을 법한 식당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찾아냈지만 멀찌감치서도 풍겨 오는 그 냄새에 겁먹고 포기할 떄의 기분이라든가, 1리터가 넘는 커다란 사이즈의 사이다 유리병을 배낭에 넣어 가져갈까 말까 했던 진지한 고민이라든가,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하는, 실내 온도가 40도가 넘는 열차 안에서 정신은 혼미해져만 가는데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는 뜨뜻미지근하고 짭조름한 탄산수(!)밖에 없을 때의 기분이라든가, 세뇨르 세뇨리타- 하며 시작되는, 차장 아저씨가 직접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듯한 로마 지하철의 정거장 방송을 들으며 목적한 역에서 지하철 문 손잡이를 올려 문을 여는 기분 같은 것들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국여행에서는 현실에서 벗어난 나를 만날 수 있다. 현실에서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난다는 것. 그것은 분명 외국여행에서밖에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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