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이청준,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이청준 선생님이 2007년 11월에 발표한 소설집이다. 그동안 명색이 국문과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문학 작품을 워낙 읽지 않아 왔던 게 마음에 걸려 한국문학 읽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작가가 바로 이청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작품들을 검색하며 대표작을 골라 보다 사실 깜짝 놀랬다. 아니, 2007년 11월이라니. 1965년 <퇴원>이라는 작품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셨으니 40년이 넘는 시간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토록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다니. 그것만으로도 이청준 선생님께서 존경 받는 문인으로 남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 <천년의 돛배>를 펼치곤 잠시 당혹스러워했다. ‘앗 설마 또?’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남도 연작> 네 편과 소설집 <눈길>을 통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미지ㅡ바닷가 언덕 위의 무덤 곁 콩밭, 어머니와 소년, 고향과 고향 떠남의 이미지ㅡ가 다시 한 번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 역시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성급한 생각이었다. 그와 같은 이미지로 시작된 <천년의 돛배>는 낯선(앞서 읽은 선생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만나지 못했던)방향으로 고물을 틀었다. 그것은 뒤에 이어질 수록 작품들의 방향을 미리 일러두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집에서 이청준 선생님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스로 ‘프란시스코 꼬로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선생은 각각의 인물을 그저 앞에 불러다 세워 둘 뿐이다. 선생이 앞으로 불러다 세워 둔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 나간다. 그렇게 풀어 나가는 이야기들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하나같이 흥미진진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갈 뿐인데도 그 인물들의 이야기로부터 나라의 주인이 며칠만에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던 시기의 난리통과 인민재판의 기억이 기어나오고 시골 동네에 마을 어른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온갖 기인들의 이야기, 온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기 물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함께 묻어 흘러 나온다. 억지스럽게 끄집어 낸 이야기들이 아닌, 사람 사는 이야기를 꺼내자니 그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시골 할머니댁 따듯한 아랫목 이불 아래에 발을 넣고선 고구마를 까 먹으며 할머니가 들려 주는 동네 옛이야기나 집안 어른의 일화를 듣듯 정말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아니, 책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들려 주는 그 이야기들은 어쩐지 한 구석이 믿기 어려울 만큼 과장된 것도 있고 또 그것인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것들 투성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에이 거짓말, 그런 게 어딨어요’하고 투정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할머니께서는 분명 그 가만 가만한 말투로 대답하실 것이다. 그게 세상살이라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이청준 선생님의 최근작인 이 작품집은 무척이나 편안하다. 그러나 그 편안함 안에 담긴 진중함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남도 사람>연작부터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까지 선생님의 작품을 대표작을 나름대로 골라 대여섯 권쯤 읽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노작가의 발표 작품을 따라 읽는 즐거움’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선생님께서 자신의 노모에게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다며(백발이 아니라며) 지었다는 호인 미백未白처럼 언제까지나 미백으로 남아 계속해 작품을 발표하셨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