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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ㅣ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4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공동 운명을 가지지 못한 자의 선의
1.
‘누군가를 위함’이라는 마음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순수할 수 있을까. 그 당사자들과 동일한 처지에 서지 못하는 이상, 선의(善意)란 결국 하나의 빛깔좋은 태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위함의 대상인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자 자신의 입장에서도. 빛깔좋은 태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나병 환자들을 위한 ‘환자들의 낙원’을 만들려 했던 조백헌 윈장의 선의와 열망은,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강한 것인지와는 상관 없이 사실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건강인’인 조백헌 원장으로서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사자인 환자들과 전혀 다른 운명을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소록도의 원생들처럼 문둥병을 앓고 있거나 앓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섬의 운명을 공유할 수 없는 이상), 처음부터 그와 환자들 양쪽은 각자의 운명을 따로따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한 인간의 선의와 열망과는 관계 없는 일이며 그야말로 ‘운명’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일 따름이다.
처음 섬의 원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조 원장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공동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순수한 선의와 열망이면 환자들의 낙원을 이루어 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섬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어 주겠다는 조백헌 원장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 넘길 뿐이었다.
공동 운명을 가지지 못한다는 부분으로부터 조백헌 원장은 원생들의 믿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소록도의 원생들은 조 원장 이전의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배반의 기억을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써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조 원장이 아무리 원생들 앞에서 권총과 성서를 앞에 두고, 만약 자신에게서 배반이 행해진다면 자신의 목숨을 원생들에게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해도 정해진 각각의 다른 운명이란 바뀔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원생들은 알고 있었다.
원생들의 조 원장에 대한 완전한 신뢰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그것이 원생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배반이 되어버리고 마는 잔인한 역설은 그 ‘공동 운명을 갖지 못함’ 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렇기에 오마도 간척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때에 황 장로는 조 원장의 선의에 대해,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 명의 환자로서 그에 대한 완전한 신뢰만은 끝끝내 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조 원장에게 섬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황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기 위해 섬을 떠나면서도, 어째서 원생들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만큼은 이해하지 못한 조 원장이었다.
5년 후 조 원장은 이상욱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공동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선의가 어째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곤 원장직을 사임하고 개인 조백헌으로서 섬으로 돌아간다. 원장이 아닌 섬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섬으로 돌아감으로써 조 원장은 미약하게나마 섬과 섬 사람들의 운명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되는 것이다.
2.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앞서, 내가 남자라는 이유에서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여성들과 공동 운명을 지닐 수 없다. 언제나 원하면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과 같은, 수능 시험 성적 줄 세우기에 따른 대학 서열화를 해체하자는 운동에 동참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나는 뭐가 어찌 되었든 고대생이므로.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의 이름이 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소리치는 구호와 휘두르는 팔짓 안에는 거짓과 배신의 가능성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페미니스트적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조용히 행동하는 것뿐이며, 아무런 비판 없이 앞선 세대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틀에 순응하며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왔던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것뿐이다.
시민단체는 탈북 이주민들에게 ‘새터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탈북 이주민들은 그들이 붙인 그 이름을 거부했다. 언젠가부터 장애인들을 ‘장애우’라는 이름으로 부르자는 운동이 일었지만 장애인 단체에서는 역시 자신들은 ‘장애우’라는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괜한 어깃장 놓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 역시 결국엔 같은 문제였다. 그 이름들은 당사자 자신들로부터가 아닌 타인들이, 마치 큰 호의라도 베푸는 양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름에 그대로 수긍해 버린다면 그것은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을 배반하고 마는 실마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국문학 작품들 가운데 현대의 고전을 한 권 뽑는다면 나는 <당신들의 천국>을 선택할 것이다. 작품이 쓰여진 후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불편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고전의 요건이라 한다면 <당신들의 천국>은 그 요건을 충족시키기 떄문이다. 누군가를 위함에 대해서, 선의에 대해서, 운동에 대해서, 진심에 대해서 <당신들의 천국>은 지금껏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뒤엎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만약 사회운동가를 꿈꾸는 친구가 있다면 그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은 맑스나 베버가 아니라 어쩌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일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