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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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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꾿빠이 이상


<꾿빠이, 이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택시를 타다’에서 한 번 했으니 여기서는 패스-



1.
요즘 들어 김연수를 다시 읽고 있는데,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한 나름의(개인적인) 평가가 조금씩 바뀌었다. 각 작품들 사이에 주관적인 가치의 전환이랄까, 위상의 변화랄까 하는 것들이 내 속에서 꾸물꾸물 일어났다는 말이다.
올 봄에 김연수를 읽는 계획을 세우고, 한 권 한 권 읽으며 계획을 마무리지어 갈 때에는 내가 김연수를,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어떤 하나의 관념의 틀 안에 넣은 채로 읽어내려 했던 것 같다. 그 때에는 어째서인지 그런 식으로 그렇게 읽고 싶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 혹은 이해도 그 고정된 틀 안에서 이루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

지난 번 읽어 갈 때에는, 나는 김연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거나 추천할 때면 언제나 <스무 살>로 시작하곤 했다. 그게 김연수를 대표하는, 김연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평가에는 앞에서 말한 그 ‘고정된 관념의 틀’과, <스무 살>이 내 김연수를 읽는 계획의 맨 첫 작품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첫 작품을 읽으며 받았던 일종의 충격(도서관에서 주운 르네 마그리트의 책갈피라는 드라마틱한 경험까지도 포함해서)이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바로 그 ‘고정된 관념의 틀’이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것은ㅡ늦은 얘기인지도 모르지만ㅡ아마도 틀린 생각이었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김연수에게는 <스무 살>이란, 그의 젊은 날과 젊은 날의 문학을 마무리 짓는다는(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문학을 시작한다는)의미가 되는 작품이긴 하지만 대표작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상당히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지금에 와서도 <스무 살>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ㅡ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ㅡ새로이 내 안에서 형성된 김연수 작품들 위상의 순서를 적어 보자면 1. <꾿빠이, 이상> 2.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3. <청춘의 문장들>이다. <스무 살>이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그 다음 문제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아직 안 읽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읽는다고 해도 위에 적은 순서가 아무래도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이렇게 적어 둔 순서도 겨우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순서’에 불과한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 다시 김연수를 읽게 될 때, 또다시 작품들의 위상의 순서가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2.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은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다다른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표된 시기로만 따지면 바로 전 작품인 <스무 살>과 불과 일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작품인데도 <스무 살>과 비교했을 때, 그 문장들부터가 눈에 띌 정도로 세련되어져 있다. 1994년 첫 소설을 발표하고 다음 작품을 하나씩 발표해 나갈 때마다 김연수의 문장은 커다란 계단을 하나씩 오르듯 다듬어져 갔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에 이르러 드디어 문장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그 구성 역시도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완전무결한 구성으로부터 오는 흡인력은 두렵기까지 할 정도다. <꾿빠이, 이상>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만약 내용이 하나의 큰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분명 책을 펼친 순간부터 손을 뗄 수 없이 끝까지 읽어버리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더라면 나는 정말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영영 끝나지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나니까.

지난 <스무 살>이 가능성 있는 감독의 독립영화 같은, 거칠지만 에너지 넘치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 작품 같은 느낌이라면, <꾿빠이, 이상>은 자신의 어법을 완성해 낸 감독의 흠 잡을 데 없는 그야말로 마스터피스 같은 느낌이다. ‘정점’에 달했다고 할 만한 작품이니 말이다.
하지만 김연수라는 작가는 평지에서 불쑥 솟아오른 화산 같은 작가가 아닌, 말하자면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산맥 같은 작가다. ㅡ그를 화산으로 생각했던 것이 지난 시기의 내 실수였다ㅡ 그런 김연수는 한 개의 정점이 아닌 여러 종류의 정점을 가지고 있다. <꾿빠이, 이상>은 그야말로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달한 작품이지 김연수의 문학의 정점에 달한 작품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김연수가 앞으로 써낼 ‘또다른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달한 작품을 기다린다. 그리고 언젠가 꿈만 같이 펼쳐질 김연수 문학의 정점에 다다른 작품도.

<꾿빠이, 이상>을 읽는 내내 나는 김연수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의 글쓰기에 관한 능력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은 부러워할 종류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고마워할 종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자신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하고 취합하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그것들을 완전히 다 쏟아내어 <꾿빠이, 이상>이라는 구조물을 완성해 내었다는 점이다.
완전히 다 쏟아내어 하나의 구조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워 할 만한 일인데, 그 구조물이 빈틈없이 완벽한 아름다움 또한 가지고 있으니 어찌 더더욱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든 열정과 의지가 있다면 자신이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에 대해 공을 들여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지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결과물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성취감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의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운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힘이 관여해야 할 문제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김연수는 복 받은 사람인 것 같다. 김연수씨,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
지금 김연수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짓고 한창 다듬어 내는 중이다. 나는 그의 이번 작품이 무척 기다려 진다. 그 작품이 분명 장편소설 아니면 최소한 연작소설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연수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새로운 ‘긴 이야기’가 무척이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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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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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악령  


출판사 열린책들의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책날개에 적혀 있는 작가 소개글은,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1순위로 꼽히는 작가’라는 소개가 적혀 있다. 지난 2월 28일부터 4월 8일까지, 한 달에 걸쳐 <악령>을 읽으며, 나는 내 나름의 의미로 책날개의 소개글을 이해해 버렸다. 이를테면, 아직 나는 바로 그 ‘언젠가’에 도달하지 못했구나, 하는 정도의.

<악령>은, 내가 처음으로 읽게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이었는데,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내가 막연하게 · 커다랗게 가지고 있던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문호’에 대한 부담감 · 막막함을 여지없이 깨트려 버렸다. 예상외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유쾌하고 경쾌하며 재미있었다. '대문호'라는 도스또예프스끼씨가 이렇게나 유쾌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전까지의 그에 대한 이미지가 말도 결코 쉽게 걸 수 없고 그의 곁에서는 숨소리 발소리마저 죽여야 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면, 작품을 읽고 난 후의 이미지는 이웃집의 나이 지긋하지만 친한, 찾아가면 언제나 호탕하게 웃으며 반겨줄 듯한, 이를테면 <악령> 속의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와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악령>을 일고 난 나에게서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문호’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대한 부담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막막하게만 남아 있다. 바로 그곳에서, 책날개 소개글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가 비롯된다.

무척이나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어 나갔던 <악령>이었지만, 작품의 이해라는 측면에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나로서는 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작품 뒤의 여러 배경에 대한 이해(러시아혁명 직전의 사회상에 대한 이해 등)가 벅찬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지고 있고,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려 했던 생각 혹은 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내겐 너무나도 요원하리만치 벅찼던 것이다. 결국, 다시 말해서 그 ‘언젠가’에 나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한 달간의 독서에 대해, 나는 만족한다.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막연히 가지고 있던, 함부로 그의 작품을 펼쳐 볼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던 그에 대한 부담감을 씻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책 읽기를 끝마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서’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찾아 읽고 싶게 만들었던 독서와, 그렇지 않은 독서. 그렇다면 이번 독서 경험은 분명 전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작품의 분량이 주는 압박 때문에(<악령>은 천 백 페이지) 다음 작품에 대한 기약은 좀 미뤄 둬야겠지만. (그 압박에도 불구하고 읽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정말 성공적이구나.)



어째서 도스또예프스끼를 심리 묘사의 대가라고 하는지, 이제는 그 평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속에서 수많은 작중 인물들에 대해 행해지는 그의 심리 묘사는, 그 인물의 심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잇는 차원을 넘어서 묘하게도 소스라치게 공감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작중 인물의 심리를 나 역시 그 상황 속에서 그대로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심리들이라는 게, 보통은 불유쾌한·치욕스러운·떠올리고 싶지 않은·역겨운·숨어버리고 싶은 종류의 것들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뾰뜨르에 의해, 다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의뭉스러운 마음을 바르바라에게 들켜버리고야 말았을 때의 쓰쩨빤의 심리,
자실 직전 뾰뜨르를 피해 옷장과 벽 사이에 끼어 숨어 있는 끼릴로프의 심리 등등이 몸서리쳐지게도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처럼, <악령>이란 작품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그 장면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들의 심리에 의해 기억된다.

그러한 심리들과 그 심리를 발현해 내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악령>이라는 세계는, 참으로 생생한 ‘지옥’처럼 보인다. 책 뒷표지에 적혀 있는 몇몇 인사들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옥’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로는 <악령>을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다.

이 도스또예프스끼적 지옥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이 바로 지옥 그 자체다. 제대로 된 인물이란 천 백 페이지의 면면을 뜯어 보아도 찾아내기가 힘들다. 하나같이 역겹고·욕지기 나고·의뭉스럽고·음흉하고·바보이면서도 자신은 자신을 꽤 똑똑하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지껄이고·남의 말을 듣질 않고·터무니없이 장황하게 말하고·맹종하고·자신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횡설수설하고·더듬고·불쾌하고·구역질 나는 인간들 뿐이다. 그런 인간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인간들만이 횡행하는 세계란, 어찌 지옥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한 달간의 지옥에서 빠져 나온 내 눈에 다시 비추어지는 현실 세계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참 평온한 곳이기 그지없었다. 이런 게 ‘문학’을 통한 배움인가?;

특히나 특기해야 할 점은, 자신의 생각(사상)을 이야기하고(대부분은 장황하다), 책 또는 글에 관련이 있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인물들이, 굉장히 심하게 희화화된다는 점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다른 지위랄 게 없는, 변변치 못한 인물들에 대한 희화화는 아무 것도 아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나 까르마지노프, 그리고 그들을 숭앙하는 바르바라 뻬뜨로브나, 율리아 등에 대한 희화화를 지켜보고 있자면 대체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들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고 있긴 한 것인지 의아해질 정도이다.

그 <악령>이라는 지옥 속에서, 내가 매력을 느낀 인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작품 속에서도 그 숨길 수 없는 매력(charisma)으로 모든 이를 휘어잡는 주인공 스따브로긴(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이었고 또 하나는 샤또프였다.
샤또프는 묘하게도,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한 인물이었는데 작품이 진행되어 갈수록 알 수 없이 나를 끌었다.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다른 역겨운 인물들이 자신들의 역겨움을 중첩시켜가며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가운데서도 샤또프는 자신의 답답함(그리고 역겨움)을 계속해 유지해 나간다는 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당신도 도스또예프스끼적 지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인물을 좋아할 수 있다.)

스따브로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3부의 끝)까지 고결하고 나름대로 정상적인, 그리고 귀족적이며 매혹적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를 떠올리게도 하고 <몬스터>의 요한과도 무척이나 오버랩되었다. 스따브로긴은, 지옥을 읽어 나가는 내가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안식처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스따브로긴이건만... 3부까지의 <악령>을 전부 끝마치고 ‘찌혼의 암자에서를’읽고 나서 내가 받은, 마치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이란…… 말줄임표 서른 여섯 개로도 부족하다.



<악령>을 다 읽고 나서도 몰랐는데 뒤에 붙어 있던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악령>이 한 달간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굉장한 분량의 ‘대화’가 진행되고, 이야기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채화의 흐릿한 원경처럼 존재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천 백 페이지의 분량 속에서 펼쳐지던 바람에, 그것이 겨우 ‘한 달’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한 달 이라는 현실의 시간 동안, 책 속 한 달 간의 이야기를 읽은 것이었다. 생각해 볼수록 귀한 경험이다.



<악령>과 함께 한 한 달의 시간으로부터 인상적인 장면들은 고를 수 있어도, 문장을 고르는 일은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개가 있었다. 이야기의 막바지, 1077 페이지.


    “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께서 흡족해 하시고 우울하지 않으실 때면,
      우리들도 모두 즐겁고 재치 있는 말을 할 수 있습죠 ”
                                                         - 쓰따브로긴이 기억에 새겨 둔 쁘로호르 말로프의 말


아, 그러고보니 또 있었네, 270 페이지.


    “ 진정들 하십시오, 진정들 해요, 저는 미친놈이 아닙니다,
      맹세코 미친놈이 아닙니다. ”
                                                         -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역겨운 인물, 레뱌드낀의 고함


그리고 646 페이지.


    “ (…)난 우상을 좋아한다고요! 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당신이 그 누구를 모욕하지 않아도 모두들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이 모든 사람들을 무심하게 쳐다보아도, 모두들 당신을 두려워하죠.
     거참, 훌륭한 일입니다. 당신은 끔찍한 귀족이에요.
      (…)나에겐 바로 나에겐 꼭 당신 같은 인물이 필요해요. 난 당신 외엔
     그 어떤 사람도 모릅니다. 당신은 선구자고, 당신은 태양이고,
     난 당신의 버러지에 불과해요…… ”
                                                          - 뾰뜨르가 스따브로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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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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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ㅡ소년 김연수가 소설가 김연수, 혹은 시인 김연수가 되기까지.



무엇이었을까, 맨 처음 김연수를 읽어야만 하겠다고 나를 마음먹게 하고, 결국 그에게 흠뻑 빠져버리게 만들어 버린 그것은.

그래, 처음에는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그 ‘다름’에 끌려들었다. 지금껏 읽어 온 그 어느 글과도 다른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김연수를 읽어나가면 읽어 나갈수록, 그 ‘다름’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들이 나를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의 글의 ‘다름’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갈수록 나를 점점 더 잡아 끈 것은 그의 글에 투영된 김연수라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김연수라는 인간에, 나는 빠져들어갔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나를 흠뻑 빠져들도록 한 김연수라는 인물이란. 김연수라는 인물의 그 무엇이 나를 집어삼킨 것일까. 예전에도 몇 번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나서 비로소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미약하고 불완전한 자신을 끊임없이 닦고 여미는 모습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완전한 자신을 위해 쉬지 않고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는 모습,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미약함과 불안전함을 뚫고 나오는, 점점 더 밝은 빛을 밝혀 내는 모습, 그 모습에 나는 매료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청춘의 문장들>에는 미약하고 불완전한 소년 김연수가, ‘어둡고 어두울 만큼 어두운 어둠’을 이겨 내며 소설가 김연수, 혹은 시인 김연수가 되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시간들, 다시 말해 ‘청춘’이라는 시간들 속에서 깨달은 것들 혹은 청춘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에서야 먼 발치에서 그 시간을 돌이켜 생각하며 깨달은 것들이,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봄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던,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그 때에는 그런 줄 몰랐던,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눈꽃처럼 아름다우면서 왜인지 모르게 서글프기만 한 문장들 속에 담겨 있다.


<청춘의 문장들>을 마지막으로 정말 김연수를 다 읽었다. 이제는 마음 편히 김연수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적잖이 마음 놓이고 뿌듯하다. 김연수는 어딘가에서 ‘이미 한 번 읽은 책’이라는 것들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지만, 나는 그 부분에서 만큼은 그와 반대이다. 오히려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라는 것들은, 내게는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한 번 읽은 책을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을 때의 그 기분을 나는 좋아한다.
이제는 그의 모든 책이 정말로 ‘이미 한 번 읽은 책’이 되었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으로 쓴 글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 책 안에서 문장들을 골라 내 적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 책의 전부를 옮겨 적지 않는 한, 그것은 무의미한 일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다시 한 번, 당신도 김연수를 읽어야 한다는 것.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


20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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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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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해리스, 양들의 침묵


책 읽기는 어렵다. 왜일까? 제대로 읽어 내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제대로 읽어 내야만 한다는 부담 말이다. 단어와 단어의 연속이 가져오는 긴장감, 이어지는 문장들 사이에서 만들어 지는 리듬, 그리고 그런 긴장감과 리듬이 직조해 내는 글의 분위기. 한 권의 책이 품고 있는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흡수해 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책 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있다. 아니, ‘쉽게 읽을 수 있는’ 이라고 말하면 책의 성격에 따른 분류인 것 같으니 ‘쉽게 읽는’ 이라고 말하자. 나에게도 쉽게 읽는 책들이 있다. 보통은 내가 사지 않은 책들이다. 읽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는데, 어디에선가 눈에 띄어 어쩌다 보니 읽게 되는 책들. 그런 책들은 쉽게 읽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앞에서 적은 것과 같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은 ‘제대로 읽어야만 한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일단 읽기 시작한 거 뭐, 끝까지 읽어 볼까?’하는 생각으로 읽어 나가게 된다.

이번에 읽은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도 그런 책이었다.
요즈음 읽고 있던 다른 책은 잘 읽히지 않고(역시 위에서 말한 부담 때문에), 저녁을 잔뜩 먹은 배도 불러 대기실에서 그저 뒹굴뒹굴 하고 있던 차에 책꽂이에 꽂혀 있던 <양들의 침묵>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도 더 전에 후임이 가져다 두었던 책이다. 달리 해야 할 일도 없고, 그저 유명한 책이기도 하고, 또 대충 어떤 내용의 책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처음엔 중간 즈음을 무작정 펼치고 조금 읽어 보았다.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 박사와 여주인공 스탈링 수사관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부터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어느새 앉은 자리에서 50 페이지 가량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그저 중간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책인데 거기서부터 그렇게 읽어 나가다니.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는 뭐 처음부터 한 번 읽어 보자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역시 부담은 저만치 치워 두고서.

제대로 읽고자 하는 마음에서 책을 펼칠 때엔, 언제나 책 날개의 작가 소개부터 시작해서 맨 앞의 머리말 부분, 책 맨 뒤에 적힌 이 책이 언제 초판 본이 나왔고 또 이 책은 몇 번째 판본인지 하는 서지 정보 부분까지 꼼꼼히 읽고 난 후에 본문을 시작하곤 하는데, <양들의 침묵>에서는 머리말이고 뭐고 다 제껴 버리고 곧장 본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일사천리로 죽죽 읽어 나갔다. 단어와 문장은 염두에 두지 않고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눈과 손가락을 움직여 나간 것이었는데, 그렇게 읽다 보니 지난 밤 두어 시간과 오늘 낮에 걸쳐 다 읽어버리고야 말았다. 550페이지가 넘는, 그리 만만치는 않은 책이었는데 하루 밤과 낮만에 다 읽어 버리다니. 이거야말로 ‘읽어 치워 버리다’ 라는 표현에 제대로 들어맞는 정도의 일이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책을 읽던 그 시간을 되새겨 보아도 나쁘지 않은, 즐거운 독서였다. 기본적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흥미진진한 텍스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역시, ‘자 이제 이 독서는 이걸로 되었다.’싶은 만족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는 느낌 정도는 들어도 이제 이걸로 충분하다,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단어와 단어를 꼼꼼히 호흡하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에 마음을 충분히 적시며 읽어 나가는 독서에서는, 그 대상이 스무 페이지 내외의 단편이든, 몇 백 페이지의 장편이든 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는 나를 가득 채우는 충일감(充溢感)의 짜릿함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와 함께 한 권의 책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만족감 역시 나를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독서는 빠르면 일주일에서 보통 이주일 정도에 걸쳐 이루어 지는데, 하루 밤과 낮 동안 집약적으로 해 낸 독서가 주는 쾌감과 만족감이 그런 (단순히 시간적으로 비교하자면) 루즈한 독서가 주는 그것과 비할 수 없는 정도라니.
그렇다면 과연 문장의 리듬에 춤추지 않고, 글의 분위기에 충분히 취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그런 독서는 우리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가슴에 얼마만큼의 별빛을 쌓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그런 정도로, 그것도 한 번 읽고 지나쳐 버리는 정도의 독서에서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한 파악, 작가가 전하려 했던 생각 혹은 주제, 나도 <양들의 침묵>읽어 봤어 어느 어느 부분 굉장히 인상적이더라, 하는 감상 정도밖에는 얻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게 다 뭔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쾌감을 오롯이 느껴 내지 못한다면, 그건 한 권의 책이 가진 가능성의 극히 일부만을 어루만지고 마는 게 아닌가.

*

이렇게 쓰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이렇게도 읽어 보고 저렇게도 읽어 보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책에 따라 책을 읽는 방법을 변화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읽을 땐 이렇게, 실용서를 읽을 땐 이렇게, 하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말하자면 이런 식의 소설은 이렇게 또 저런 식의 소설을 이렇게, 하는 식의 변화 말이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나는 너무나도 궁금하다.

*

이제 <양들의 침묵>이야기를 좀 해 보자면,
한 인간 혹은 범죄자에 ‘괴물’이라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기 위한 기준은 아무래도 그 대상이 ‘선과 악’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관을 과연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맞춰져야 할 것 같다. 한 범죄자가 얼마나 잔인한 수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든,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든 자신이 한 행동이 악한(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세계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저 내키는 대로 일을 저지를 뿐이다.

정신분석의 이기도 한 렉터 박사가, 그의 환자였던 라스페일을 (그가 징징거리는 게 아주 질색이라는 이유로)죽이고 그의 몸에서 떼어 낸 췌장과 흉선을 집에 찾아 온 손님들에게 요리해 먹인 사실에 대해(렉터 박사는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손님들은 소고기 요리인줄로만 알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스탈링이 이야기하자 렉터 박사는, “손님은 들이닥치고 가게에 갈 시간은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 냉장고에 있는 걸로 그럭저럭 때워야지. 안 그래 클라리스?” 하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곤 참 내,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무슨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쁜 장난을 치려는 것도 아니고 또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밖에 비가 오는데 그럼 어떻게 해?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가야지, 하고 말하듯 담담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렉터 박사에게 붙은 ‘괴물’이라는 칭호는 적절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스탈링이 범인의 범위를 줄여 나가면서 하던 생각이다.
(…) 그는 백인 남성일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추정되는 근거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들은 대개가 같은 종족을 죽이는데, 이 사건의 희생자 모두가 백인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까닭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여성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여성에 의한… 부분에선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

이로써 입 부분에 나방이 그려져 있는 하얀 얼굴이라는 <양들의 침묵>의 포스터에 대한 한 개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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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 2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이청준의 <남도 사람>연작
-그 어떤 의뭉스러움

1.
이청준의 <남도 사람>은 연작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다섯 개의 변주라는 느낌이 든다. 한 인물이 어딘가를 찾아 오고, 그 곳에서 만난 또 다른 누군가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 이런 구조의 소설 다섯 편이 하나의 연작을 이루어 낸다. 그런데 그 두 인물 사이에서 술잔이 몇 순배씩 오고 가며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그렇게 의뭉스럽고 은근할 수가 없다.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이 원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어렴풋이도 아니고 꽤나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럼 어떻고 또 저럼 어떻겠나, 하는 태도로 은근은근 어물쩍 어물쩍 흘려 넘기는 의뭉스러움이라니. 다섯 편의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다들 그런 식이지만 그 태도로부터 어쩐지 참 인간적이고 푸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인 할머니댁 아랫목에서 느꼈던 온기, 그런 종류의 온기가.
그러한 태도의 대화 중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서편제> 소릿재 주막 여인의,
“아마 그 여자 어렸을 때 소리 장단을 부축해 준 북채잡이 어린 오라비가 한 분 계셨더라는데, 제가 여태 그걸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던가요?”
하는 마지막 말이다. 이 건 아무래도 너무 심하다.

2.
그러고 보면 이청준은 <남도 사람>연작을 통해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공부를 위해, 취업을 위해 떠나 온 물리적 고향, 혹은 ‘모국어’라는 정신적 고향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자주 이야기되곤 하는 한(恨)이라는 것도 결국엔 ‘떠나 온 고향’, ‘고향 떠남’과 동의어가 아닐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헤메이는 일, 떠나 온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도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삶’이고 그대로 ‘한’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작가인 이청준 역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주 오랫동안 타지에서 헤메였다. 자전적 소설인 <눈길>에서, 눈길 위에 쭈그려 앉아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 온 아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 보는 어머니의 한스러움은 그 아들의 한스러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작의 중심 인물인 사내가 어째서 그토록이나 찾아 헤메던 누이를 만나고도 자신이 그녀의 오라비임을 밝히지 않고 다시 떠난 것인지, 처음 읽을 때엔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그 오라비의 태도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이란 언제나 그리워 하면서도, 언젠가는 꼭 돌아갈 것임을 다짐하면서도 쉽사리 되돌아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눈먼 누이를 찾아 내고도 또다시 ‘누이를 찾는 길’을 떠나며 언젠가는 또 만날 것을 마음 속으로 기약하는 사내처럼, 어쩌다 한 번씩 찾아가 머물 수는 있어도 언제까지나 영영 자신을 매어 둘 수는 없는 곳이 바로 ‘떠나 온 고향’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청준이 ‘소리’라는 매개체를 빌려 온 것 역시도, 많이 잊혀져 버린 정신적 고향이라는 의미로서 ‘소리’를 생각했음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보았다. 지금은 한참이나 떠나 온, 이미 벌써 멀어져 잊혀져 가는 언어적 고향의 모습이 ‘소리’에는 그나마 온전히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구비 전승’이라는 그 전승 형식이란 또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3.
<남도 사람>연작을 읽고 나니 영화로 만들어진 그 것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서편제>든 <천년학>이든 지금껏 하나도 보지 않았었는데, 이번 외박에는 꼭 찾아서 한 번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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