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 꾿빠이 이상


<꾿빠이, 이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택시를 타다’에서 한 번 했으니 여기서는 패스-



1.
요즘 들어 김연수를 다시 읽고 있는데,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한 나름의(개인적인) 평가가 조금씩 바뀌었다. 각 작품들 사이에 주관적인 가치의 전환이랄까, 위상의 변화랄까 하는 것들이 내 속에서 꾸물꾸물 일어났다는 말이다.
올 봄에 김연수를 읽는 계획을 세우고, 한 권 한 권 읽으며 계획을 마무리지어 갈 때에는 내가 김연수를,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어떤 하나의 관념의 틀 안에 넣은 채로 읽어내려 했던 것 같다. 그 때에는 어째서인지 그런 식으로 그렇게 읽고 싶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 혹은 이해도 그 고정된 틀 안에서 이루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

지난 번 읽어 갈 때에는, 나는 김연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거나 추천할 때면 언제나 <스무 살>로 시작하곤 했다. 그게 김연수를 대표하는, 김연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평가에는 앞에서 말한 그 ‘고정된 관념의 틀’과, <스무 살>이 내 김연수를 읽는 계획의 맨 첫 작품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첫 작품을 읽으며 받았던 일종의 충격(도서관에서 주운 르네 마그리트의 책갈피라는 드라마틱한 경험까지도 포함해서)이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바로 그 ‘고정된 관념의 틀’이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것은ㅡ늦은 얘기인지도 모르지만ㅡ아마도 틀린 생각이었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김연수에게는 <스무 살>이란, 그의 젊은 날과 젊은 날의 문학을 마무리 짓는다는(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문학을 시작한다는)의미가 되는 작품이긴 하지만 대표작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상당히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지금에 와서도 <스무 살>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ㅡ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ㅡ새로이 내 안에서 형성된 김연수 작품들 위상의 순서를 적어 보자면 1. <꾿빠이, 이상> 2.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3. <청춘의 문장들>이다. <스무 살>이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그 다음 문제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아직 안 읽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읽는다고 해도 위에 적은 순서가 아무래도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이렇게 적어 둔 순서도 겨우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순서’에 불과한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 다시 김연수를 읽게 될 때, 또다시 작품들의 위상의 순서가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2.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은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다다른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표된 시기로만 따지면 바로 전 작품인 <스무 살>과 불과 일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작품인데도 <스무 살>과 비교했을 때, 그 문장들부터가 눈에 띌 정도로 세련되어져 있다. 1994년 첫 소설을 발표하고 다음 작품을 하나씩 발표해 나갈 때마다 김연수의 문장은 커다란 계단을 하나씩 오르듯 다듬어져 갔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에 이르러 드디어 문장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그 구성 역시도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완전무결한 구성으로부터 오는 흡인력은 두렵기까지 할 정도다. <꾿빠이, 이상>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만약 내용이 하나의 큰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분명 책을 펼친 순간부터 손을 뗄 수 없이 끝까지 읽어버리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더라면 나는 정말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영영 끝나지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나니까.

지난 <스무 살>이 가능성 있는 감독의 독립영화 같은, 거칠지만 에너지 넘치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 작품 같은 느낌이라면, <꾿빠이, 이상>은 자신의 어법을 완성해 낸 감독의 흠 잡을 데 없는 그야말로 마스터피스 같은 느낌이다. ‘정점’에 달했다고 할 만한 작품이니 말이다.
하지만 김연수라는 작가는 평지에서 불쑥 솟아오른 화산 같은 작가가 아닌, 말하자면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산맥 같은 작가다. ㅡ그를 화산으로 생각했던 것이 지난 시기의 내 실수였다ㅡ 그런 김연수는 한 개의 정점이 아닌 여러 종류의 정점을 가지고 있다. <꾿빠이, 이상>은 그야말로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달한 작품이지 김연수의 문학의 정점에 달한 작품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김연수가 앞으로 써낼 ‘또다른 어떤 종류’의 정점에 달한 작품을 기다린다. 그리고 언젠가 꿈만 같이 펼쳐질 김연수 문학의 정점에 다다른 작품도.

<꾿빠이, 이상>을 읽는 내내 나는 김연수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의 글쓰기에 관한 능력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은 부러워할 종류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고마워할 종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자신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하고 취합하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그것들을 완전히 다 쏟아내어 <꾿빠이, 이상>이라는 구조물을 완성해 내었다는 점이다.
완전히 다 쏟아내어 하나의 구조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워 할 만한 일인데, 그 구조물이 빈틈없이 완벽한 아름다움 또한 가지고 있으니 어찌 더더욱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든 열정과 의지가 있다면 자신이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에 대해 공을 들여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지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결과물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성취감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의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운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힘이 관여해야 할 문제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김연수는 복 받은 사람인 것 같다. 김연수씨,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
지금 김연수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짓고 한창 다듬어 내는 중이다. 나는 그의 이번 작품이 무척 기다려 진다. 그 작품이 분명 장편소설 아니면 최소한 연작소설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연수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새로운 ‘긴 이야기’가 무척이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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