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토머스 해리스, 양들의 침묵


책 읽기는 어렵다. 왜일까? 제대로 읽어 내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제대로 읽어 내야만 한다는 부담 말이다. 단어와 단어의 연속이 가져오는 긴장감, 이어지는 문장들 사이에서 만들어 지는 리듬, 그리고 그런 긴장감과 리듬이 직조해 내는 글의 분위기. 한 권의 책이 품고 있는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흡수해 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책 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있다. 아니, ‘쉽게 읽을 수 있는’ 이라고 말하면 책의 성격에 따른 분류인 것 같으니 ‘쉽게 읽는’ 이라고 말하자. 나에게도 쉽게 읽는 책들이 있다. 보통은 내가 사지 않은 책들이다. 읽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는데, 어디에선가 눈에 띄어 어쩌다 보니 읽게 되는 책들. 그런 책들은 쉽게 읽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앞에서 적은 것과 같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은 ‘제대로 읽어야만 한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일단 읽기 시작한 거 뭐, 끝까지 읽어 볼까?’하는 생각으로 읽어 나가게 된다.

이번에 읽은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도 그런 책이었다.
요즈음 읽고 있던 다른 책은 잘 읽히지 않고(역시 위에서 말한 부담 때문에), 저녁을 잔뜩 먹은 배도 불러 대기실에서 그저 뒹굴뒹굴 하고 있던 차에 책꽂이에 꽂혀 있던 <양들의 침묵>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도 더 전에 후임이 가져다 두었던 책이다. 달리 해야 할 일도 없고, 그저 유명한 책이기도 하고, 또 대충 어떤 내용의 책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처음엔 중간 즈음을 무작정 펼치고 조금 읽어 보았다.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 박사와 여주인공 스탈링 수사관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부터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어느새 앉은 자리에서 50 페이지 가량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그저 중간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책인데 거기서부터 그렇게 읽어 나가다니.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는 뭐 처음부터 한 번 읽어 보자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역시 부담은 저만치 치워 두고서.

제대로 읽고자 하는 마음에서 책을 펼칠 때엔, 언제나 책 날개의 작가 소개부터 시작해서 맨 앞의 머리말 부분, 책 맨 뒤에 적힌 이 책이 언제 초판 본이 나왔고 또 이 책은 몇 번째 판본인지 하는 서지 정보 부분까지 꼼꼼히 읽고 난 후에 본문을 시작하곤 하는데, <양들의 침묵>에서는 머리말이고 뭐고 다 제껴 버리고 곧장 본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일사천리로 죽죽 읽어 나갔다. 단어와 문장은 염두에 두지 않고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눈과 손가락을 움직여 나간 것이었는데, 그렇게 읽다 보니 지난 밤 두어 시간과 오늘 낮에 걸쳐 다 읽어버리고야 말았다. 550페이지가 넘는, 그리 만만치는 않은 책이었는데 하루 밤과 낮만에 다 읽어 버리다니. 이거야말로 ‘읽어 치워 버리다’ 라는 표현에 제대로 들어맞는 정도의 일이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책을 읽던 그 시간을 되새겨 보아도 나쁘지 않은, 즐거운 독서였다. 기본적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흥미진진한 텍스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역시, ‘자 이제 이 독서는 이걸로 되었다.’싶은 만족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는 느낌 정도는 들어도 이제 이걸로 충분하다,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단어와 단어를 꼼꼼히 호흡하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에 마음을 충분히 적시며 읽어 나가는 독서에서는, 그 대상이 스무 페이지 내외의 단편이든, 몇 백 페이지의 장편이든 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는 나를 가득 채우는 충일감(充溢感)의 짜릿함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와 함께 한 권의 책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만족감 역시 나를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독서는 빠르면 일주일에서 보통 이주일 정도에 걸쳐 이루어 지는데, 하루 밤과 낮 동안 집약적으로 해 낸 독서가 주는 쾌감과 만족감이 그런 (단순히 시간적으로 비교하자면) 루즈한 독서가 주는 그것과 비할 수 없는 정도라니.
그렇다면 과연 문장의 리듬에 춤추지 않고, 글의 분위기에 충분히 취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그런 독서는 우리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가슴에 얼마만큼의 별빛을 쌓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그런 정도로, 그것도 한 번 읽고 지나쳐 버리는 정도의 독서에서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한 파악, 작가가 전하려 했던 생각 혹은 주제, 나도 <양들의 침묵>읽어 봤어 어느 어느 부분 굉장히 인상적이더라, 하는 감상 정도밖에는 얻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게 다 뭔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쾌감을 오롯이 느껴 내지 못한다면, 그건 한 권의 책이 가진 가능성의 극히 일부만을 어루만지고 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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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이렇게도 읽어 보고 저렇게도 읽어 보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책에 따라 책을 읽는 방법을 변화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읽을 땐 이렇게, 실용서를 읽을 땐 이렇게, 하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말하자면 이런 식의 소설은 이렇게 또 저런 식의 소설을 이렇게, 하는 식의 변화 말이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나는 너무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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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양들의 침묵>이야기를 좀 해 보자면,
한 인간 혹은 범죄자에 ‘괴물’이라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기 위한 기준은 아무래도 그 대상이 ‘선과 악’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관을 과연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맞춰져야 할 것 같다. 한 범죄자가 얼마나 잔인한 수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든,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든 자신이 한 행동이 악한(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세계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저 내키는 대로 일을 저지를 뿐이다.

정신분석의 이기도 한 렉터 박사가, 그의 환자였던 라스페일을 (그가 징징거리는 게 아주 질색이라는 이유로)죽이고 그의 몸에서 떼어 낸 췌장과 흉선을 집에 찾아 온 손님들에게 요리해 먹인 사실에 대해(렉터 박사는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손님들은 소고기 요리인줄로만 알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스탈링이 이야기하자 렉터 박사는, “손님은 들이닥치고 가게에 갈 시간은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 냉장고에 있는 걸로 그럭저럭 때워야지. 안 그래 클라리스?” 하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곤 참 내,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무슨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쁜 장난을 치려는 것도 아니고 또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밖에 비가 오는데 그럼 어떻게 해?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가야지, 하고 말하듯 담담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렉터 박사에게 붙은 ‘괴물’이라는 칭호는 적절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스탈링이 범인의 범위를 줄여 나가면서 하던 생각이다.
(…) 그는 백인 남성일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추정되는 근거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들은 대개가 같은 종족을 죽이는데, 이 사건의 희생자 모두가 백인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까닭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여성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여성에 의한… 부분에선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

이로써 입 부분에 나방이 그려져 있는 하얀 얼굴이라는 <양들의 침묵>의 포스터에 대한 한 개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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