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또예프스끼, 악령  


출판사 열린책들의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책날개에 적혀 있는 작가 소개글은,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1순위로 꼽히는 작가’라는 소개가 적혀 있다. 지난 2월 28일부터 4월 8일까지, 한 달에 걸쳐 <악령>을 읽으며, 나는 내 나름의 의미로 책날개의 소개글을 이해해 버렸다. 이를테면, 아직 나는 바로 그 ‘언젠가’에 도달하지 못했구나, 하는 정도의.

<악령>은, 내가 처음으로 읽게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이었는데,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내가 막연하게 · 커다랗게 가지고 있던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문호’에 대한 부담감 · 막막함을 여지없이 깨트려 버렸다. 예상외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유쾌하고 경쾌하며 재미있었다. '대문호'라는 도스또예프스끼씨가 이렇게나 유쾌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전까지의 그에 대한 이미지가 말도 결코 쉽게 걸 수 없고 그의 곁에서는 숨소리 발소리마저 죽여야 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면, 작품을 읽고 난 후의 이미지는 이웃집의 나이 지긋하지만 친한, 찾아가면 언제나 호탕하게 웃으며 반겨줄 듯한, 이를테면 <악령> 속의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와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악령>을 일고 난 나에게서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문호’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대한 부담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막막하게만 남아 있다. 바로 그곳에서, 책날개 소개글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가 비롯된다.

무척이나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어 나갔던 <악령>이었지만, 작품의 이해라는 측면에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나로서는 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작품 뒤의 여러 배경에 대한 이해(러시아혁명 직전의 사회상에 대한 이해 등)가 벅찬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지고 있고,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려 했던 생각 혹은 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내겐 너무나도 요원하리만치 벅찼던 것이다. 결국, 다시 말해서 그 ‘언젠가’에 나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한 달간의 독서에 대해, 나는 만족한다.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막연히 가지고 있던, 함부로 그의 작품을 펼쳐 볼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던 그에 대한 부담감을 씻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책 읽기를 끝마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서’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찾아 읽고 싶게 만들었던 독서와, 그렇지 않은 독서. 그렇다면 이번 독서 경험은 분명 전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작품의 분량이 주는 압박 때문에(<악령>은 천 백 페이지) 다음 작품에 대한 기약은 좀 미뤄 둬야겠지만. (그 압박에도 불구하고 읽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정말 성공적이구나.)



어째서 도스또예프스끼를 심리 묘사의 대가라고 하는지, 이제는 그 평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속에서 수많은 작중 인물들에 대해 행해지는 그의 심리 묘사는, 그 인물의 심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잇는 차원을 넘어서 묘하게도 소스라치게 공감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작중 인물의 심리를 나 역시 그 상황 속에서 그대로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심리들이라는 게, 보통은 불유쾌한·치욕스러운·떠올리고 싶지 않은·역겨운·숨어버리고 싶은 종류의 것들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뾰뜨르에 의해, 다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의뭉스러운 마음을 바르바라에게 들켜버리고야 말았을 때의 쓰쩨빤의 심리,
자실 직전 뾰뜨르를 피해 옷장과 벽 사이에 끼어 숨어 있는 끼릴로프의 심리 등등이 몸서리쳐지게도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처럼, <악령>이란 작품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그 장면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들의 심리에 의해 기억된다.

그러한 심리들과 그 심리를 발현해 내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악령>이라는 세계는, 참으로 생생한 ‘지옥’처럼 보인다. 책 뒷표지에 적혀 있는 몇몇 인사들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옥’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로는 <악령>을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다.

이 도스또예프스끼적 지옥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이 바로 지옥 그 자체다. 제대로 된 인물이란 천 백 페이지의 면면을 뜯어 보아도 찾아내기가 힘들다. 하나같이 역겹고·욕지기 나고·의뭉스럽고·음흉하고·바보이면서도 자신은 자신을 꽤 똑똑하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지껄이고·남의 말을 듣질 않고·터무니없이 장황하게 말하고·맹종하고·자신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횡설수설하고·더듬고·불쾌하고·구역질 나는 인간들 뿐이다. 그런 인간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인간들만이 횡행하는 세계란, 어찌 지옥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한 달간의 지옥에서 빠져 나온 내 눈에 다시 비추어지는 현실 세계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참 평온한 곳이기 그지없었다. 이런 게 ‘문학’을 통한 배움인가?;

특히나 특기해야 할 점은, 자신의 생각(사상)을 이야기하고(대부분은 장황하다), 책 또는 글에 관련이 있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인물들이, 굉장히 심하게 희화화된다는 점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다른 지위랄 게 없는, 변변치 못한 인물들에 대한 희화화는 아무 것도 아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나 까르마지노프, 그리고 그들을 숭앙하는 바르바라 뻬뜨로브나, 율리아 등에 대한 희화화를 지켜보고 있자면 대체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들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고 있긴 한 것인지 의아해질 정도이다.

그 <악령>이라는 지옥 속에서, 내가 매력을 느낀 인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작품 속에서도 그 숨길 수 없는 매력(charisma)으로 모든 이를 휘어잡는 주인공 스따브로긴(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이었고 또 하나는 샤또프였다.
샤또프는 묘하게도,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한 인물이었는데 작품이 진행되어 갈수록 알 수 없이 나를 끌었다.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다른 역겨운 인물들이 자신들의 역겨움을 중첩시켜가며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가운데서도 샤또프는 자신의 답답함(그리고 역겨움)을 계속해 유지해 나간다는 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당신도 도스또예프스끼적 지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인물을 좋아할 수 있다.)

스따브로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3부의 끝)까지 고결하고 나름대로 정상적인, 그리고 귀족적이며 매혹적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를 떠올리게도 하고 <몬스터>의 요한과도 무척이나 오버랩되었다. 스따브로긴은, 지옥을 읽어 나가는 내가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안식처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스따브로긴이건만... 3부까지의 <악령>을 전부 끝마치고 ‘찌혼의 암자에서를’읽고 나서 내가 받은, 마치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이란…… 말줄임표 서른 여섯 개로도 부족하다.



<악령>을 다 읽고 나서도 몰랐는데 뒤에 붙어 있던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악령>이 한 달간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굉장한 분량의 ‘대화’가 진행되고, 이야기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채화의 흐릿한 원경처럼 존재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천 백 페이지의 분량 속에서 펼쳐지던 바람에, 그것이 겨우 ‘한 달’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한 달 이라는 현실의 시간 동안, 책 속 한 달 간의 이야기를 읽은 것이었다. 생각해 볼수록 귀한 경험이다.



<악령>과 함께 한 한 달의 시간으로부터 인상적인 장면들은 고를 수 있어도, 문장을 고르는 일은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개가 있었다. 이야기의 막바지, 1077 페이지.


    “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께서 흡족해 하시고 우울하지 않으실 때면,
      우리들도 모두 즐겁고 재치 있는 말을 할 수 있습죠 ”
                                                         - 쓰따브로긴이 기억에 새겨 둔 쁘로호르 말로프의 말


아, 그러고보니 또 있었네, 270 페이지.


    “ 진정들 하십시오, 진정들 해요, 저는 미친놈이 아닙니다,
      맹세코 미친놈이 아닙니다. ”
                                                         -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역겨운 인물, 레뱌드낀의 고함


그리고 646 페이지.


    “ (…)난 우상을 좋아한다고요! 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당신이 그 누구를 모욕하지 않아도 모두들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이 모든 사람들을 무심하게 쳐다보아도, 모두들 당신을 두려워하죠.
     거참, 훌륭한 일입니다. 당신은 끔찍한 귀족이에요.
      (…)나에겐 바로 나에겐 꼭 당신 같은 인물이 필요해요. 난 당신 외엔
     그 어떤 사람도 모릅니다. 당신은 선구자고, 당신은 태양이고,
     난 당신의 버러지에 불과해요…… ”
                                                          - 뾰뜨르가 스따브로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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