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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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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농장>, <1984> 등의 걸작을 남긴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에세이집이지만, 한편으로는 오웰이 살았던 시대상과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서전, 회고록 같은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위트에 감탄과 웃음을 연발했고, 문학인으로서 시대를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다는 안목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렇다! 적어도 문학인이고, 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정도의 문장력과 소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미 길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끼리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실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리를 쏜다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할 만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뜨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정기’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나는 소총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이미 그럴 것이라고 알린 셈이었다.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2000명이 졸졸 따라오는 가운데 총을 들고 여기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버린다-그런 것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중들이 날 비웃을 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37-38p>


  오웰은 1922~192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경찰간부로 활동한다. 그는 이 시기에 자본주의의 횡포와 제국주의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이 책의 전반부 분위기를 형성하고, 아울러 오웰이 왜 사회 민주주의 계열의 운동과 그런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작가다.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법적 권리가 있는 한 별난 작가가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나 있기도 하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책들을 쓰면서도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매주 몇 파운드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생활을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으며, 그런 일은 조만간 여기서도 벌어질 것이다. 때는 다가오고 있다. 당장 내년도 아니고 어쩌면 10~20년 뒤도 아니겠지만 때가 다가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특권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주까리기름이나 고무 곤봉이나 강제수용소에 맞서 싸우는 것과 매한가지 일이다. 그리고 길게 볼 때 언론의 자유를 감히 허용할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밖에 없다.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나는 작자로서는 끝이다. 즉 내가 가진 유일하게 쓸 만한 능력이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63-64p>


  오웰이 독립노동당에 가입하면서 쓴 자신의 입장인데, 비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필체가 엄숙하다. 마치 출사표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지금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젊은 시절 경험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고, 당대 현실의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집어냈다. 나는 오늘날에도 언론인, 문학인 등 사회 지식인들이 이러한 관점에서의 실천을 기대하지만, 이해득실에만 매여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러움을 느낀다. 오웰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지탄을 받기 이전에, 자신의 소신을 정당한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이 책을 밤에 자기 전에 읽었는데, 가끔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읽었다. 그만큼 매우 흥미로웠고 읽으면 읽을수록 오웰의 심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왜 그러한 작품을 썼고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오웰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고, “적어도 문학인이라면 이정도의 관점과 소신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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