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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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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에 다가서고자 하는 시도로 시작한 일-알라딘 인문/사회/과학분야 서평단-이, 한달 한달 거듭될수록 실제 이 학문이 내게 가까워지고 있다기 보다는 내 삶과는 저만치 거리를 두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리저리 달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학이나 물리처럼 -물론 이런 학문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뒹굴더라도 마지막 타겟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객관성을 가진 학문에 익숙한 처지라서 그러하겠지만 이 학문이 가지는 주관성은 어느 한 줄기를 골라 따라가는 지난한 시간을 거치지 않고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시읽기를 철학의 한 단편과 연관시키고 그러한 연관성 속에서 우리 삶의 희로애락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이 난해한 미로 속에서 자신이 올라타고 가는 줄기를 가늠할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시인이나 철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도 객관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독한 자신만의 관점, 자신만의 주관성을 담아 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나 시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공감을 유발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아마도 주관성, 자신만의 관점이라는 것이 가지는 한계일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 곁에 살아남은 이들은 그에 비하면 손에 꼽을만큼 소수라는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그래도 기억되는 이와 망각되는 이의 차이에 대한 의문은 남습니다. 누구는 사라지고 누구는 기록되는가? 저자는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만의 제스처와 스타일을 완성'한 이들이라고, '다른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한 이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학문, 고유 명사의 학문,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삶을 해몽하려고 하지 않고 삶이 주는 꿈에 취해 사는 법을 체득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전 책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그와 연관된 감상은 내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평들을 보면서 저자의 그 작업이 무척이나 성공적이었으리라는 느낌은 받습니다.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였겠고, 제목도 역설을 느끼게끔 분명 다르지만, 이 책은 그 책의 후속작이라고 평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혹시 그 책을 읽게 된다면 이런 편견(?)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열 네편의 시를 통해서 열 네명의 시인과 열 네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를 소개하면서 그 안에 담긴 시인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그 목소리와 공명하는 철학자의 목소리를 골라내어 우리 삶의 한 부분과 연결시켜서 시인과 철학자와 저자, 그리고 독자가 공명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노력이 각각의 장에 담겨 있는데,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이런 저자의 노력은 순수하게 서정적이던, 치열하게 참여적이던 언젠가 지녔을 시적인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루하루 밋밋하고 반복적인 나열을 거듭하고 있는 산문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반가움을 안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시들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움도 없이 대하였다면, 이 중 한둘을 제외한 대부분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고 사라졌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가움 또는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문득 떠오르는, 시인과 철학자를 가르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다른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한 이들이라고 했던 저자의 언급을 통해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느끼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 

 많은 사람들은 꿈을 꾸면 그 꿈 자체를 간직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궁금해 하곤 합니다. 꿈 자체보다는 해몽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꿈보다는 해몽'이라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물론 이 속담은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 문득 이 책을 통해서 독자로서 내가 얻은 것이 시인의 목소리와 철학자의 고뇌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몽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소개하는 시 한편을 가지고, 책을 읽는 동안 독자로서 나는 그 시를 음미하고 누렸다기 보다는 저자가 소개하는 해몽을 따라 그 시를 이해하는 멋진 스토리를 하나 들었다는 느낌, 명징한 시인과 철학자의 스타일을 느꼈다기 보다는 저자가 이해한 시인과 철학자의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더 무겁게 남겨집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부족한(?) 독자들에게 시인과 철학자들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알려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독자로서 나는 열 네편의 시를 지은 시인들과 그들과 함께 불려나온 열 네명의 철학자들의 명징한 목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소화한 저자의 명징한 목소리, 저자만의 스타일을 듣고 목격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결국 여기서 그치지 않고, 꿈보다는 해몽이라지만 해몽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향해 날아보는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나'라는 사람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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