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니체전집 1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찬.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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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판 서문
   
 

   자연이 수수께끼와 현란한 불확실성 뒤에 숨겨놓은 수치심을 보다 더 존중해야 한다. 어쩌면 진리는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이유를 가진 여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바우보Baubo가 아닐까?……오, 그리스인들이여! 그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표피,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며 가상을 숭배하고 형태, 음,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지만―그것은 깊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대 사상의 가장 높고 위험한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고 밑을 내려다본 우리들 정신의 모험가들도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서문 4)

 
   

 1부

   
 

   나의 친애하는 동포이자 이웃인 그대가 도대체 종족에게 불리하게, 다시 말해 "비이성적"이고 "악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종족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미 수천 년 전에 소멸되어, 이제는 신에게조차도 불가능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그대의 최선의, 혹은 최악의 욕망들에 몸을 맡겨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아라! 두 경우 모두 그대는 인류를 위해 진흥과 선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물론 조소도 함께. 하지만 그대는 개인인 그대의 가장 커다란 장점조차도 전적으로 조소할 줄 아는 사람, 그대가 파리나 개구리처럼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진실에 부함할 정도로 충분히 그대의 감정에 불어넣어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그래야 할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앎으로써 진리 전체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을 줄 아는 것―그러기에는 지금까지 최상의 인간들도 충분히 진리의 감각을 지니지 못했고, 가장 재능 있는 인간들도 지극히 미약한 천재성밖에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웃음에도 새로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종족이 전부이며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명제가 인류에게 체현되어 이 궁극적인 해방과 무책임에 이르는 길이 개개인 모두에게 항상 열려 있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는 웃음이 지혜와 결합되어 "즐거운 학문"만이 남게 될 것이다. (잠언 1)

 
   

 

   
 

  가상의 의식.―인식을 가지고 모든 현존재에 직면할 때 나는 얼마나 커다란 경탄과 새로움과 두려움과 역설을 느끼는가! 나는 예전의 인간성과 동물성, 아니 태고 시대와 과거의 모든 것을 느끼는 존재가 내 안에서 계속 시를 짓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추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갑자기 나는 이런 꿈에서 깨어나지만 내가 도달한 의식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꿈꾸고 또 계속 꿈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몽유병자가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꿈꿔야 하는 것처럼. 이제 내게 "가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의 반대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가상의 술어에 불과한 어떤 본질에 대해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가상이 미지의 X에 씌우고 또 벗겨낼 수 있는 죽은 가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게 가상은 활동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이다. 그것은 자기경멸 속에서 이 세상에는 가상과 도깨비불과 유령의 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게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꿈속에서 "인식하는 자"인 나도 나의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인식하는 자는 이 지상의 춤을 오래 끌게 하는 수단이며, 그러한 한 현존재의 축제를 주최하는 자에 속한다는 것, 모든 인식의 숭고한 일관성과 결합은 아마도 꿈의 보편성과 모든 꿈꾸는 자들의 상호 이해, 그리고 꿈의 지속을 유지시켜주는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잠언 54)

 
   

 2부

   
 

  오로지 창조하는 자로서만!―내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또 아직도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사물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소리, 이름과 외양, 유효성, 관습적 척도와 무게 등 원래 의복처럼 사물에 덧입혀진 것일 뿐 그것의 본질은 물론 피부에도 낯선 것들이 그것에 대한 믿음과 세대를 거친 성장을 통해 그 사물에 유착되고 동화되어 신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에 가상이었던 것이 결국 본질이 되어 본질로서 작용한다! 본질로 통용되는 세계, 소위 "실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과 모호한 망상의 껍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오로지 창조하는 자로서만 우리는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잊지 말자.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평가, 개연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잠언 58)

 
   

 

   
 

  예술에 대한 우리의 최종적인 감사.―우리가 예술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이런 종류의 교육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과학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비진리와 허구에 대한 통찰, 인식하고 느끼는 현존재의 조건인 광기와 오류에 대한 통찰을 전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정직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마도 구토와 자살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직성에 반대되는 힘이 있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결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데, 이것이 가상에 대해 우호적인 예술이다. 완성하고 마무리 짓는 일을 보는 것이 우리의 눈에 언제나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이때 그것은 더 이상 생성의 강을 건너 짊어지고 가야 하는 영원한 불완전성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신을 짊어지고, 이러한 봉사에 대해 긍지와 순진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미적 현상으로서 나타날 때 우리에게 견딜만한 것이 되는데, 바로 예술을 통해 우리의 눈과 손,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이 그러한 현상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07)

 
   

 3부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의 질서는 예외에 속한다. 이 질서와 그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 지속성이 다시금 예외 중의 예외인 유기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에 이 세계의 전체적 성격은 영원한 카오스이다.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서, 조직 구조, 형식, 미, 지혜, 그밖에 우리가 심미적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에 따라 판단하건대, 실패한 시도가 규칙이며, 예외는 은밀한 목표가 아니다. 그리고 이 음악상자 전체는 결코 멜로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더구나 결국 "실패한 시도"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비난을 내포하는 의인화이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우주를 비난하거나 찬양할 수 있겠는가! 우주에 무심함, 비합리 혹은 그에 반대되는 말들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것은 완전하지도, 아름답지도, 고귀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결코 인간을 모방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미학적 판단이나, 도덕적 판단도 우주에 적용되지 않는다! 우주는 자기보존 본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도대체 본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주는 법칙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자연에 법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자연에는 오직 필연성이 있을 뿐이다. 자연에는 명령하는 자도, 복종하는 자도, 위반하는 자도 없다.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연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목적의 세계에서만 "우연"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이다. 세계가 영원히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게하자. 영속적인 실체란 없다. (잠언 109)

 
   

 4부

   
 

  모든 행동은 일회적이고 재귀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미래의 행동도 마찬가지다.―행동의 모든 규범은 조잡한 외적 측면에만 관계된다(지금까지의 모든 도덕 중에서 가장 내적이고 섬세한 규범조차도).―규범을 통해서는 평등의 가상, 오직 가상에만 도달할 수 있다.―행동을 전망하거나 회고하는 경우 각각의 행동이란 꿰뚫어 볼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며, 또 그런 것으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선함", "고귀함",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는 결코 증명될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우리의 견해, 가치 평가, 선의 목록이 우리의 행동의 수레바퀴에서 가장 강력한 지렛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경우들에 작용한 역학의 법칙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해와 가치 평가를 정화하는 일, 새롭고 독자적인 선의 목록을 만드는 일에만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기로 하자!―"우리 행동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곰곰이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렇다, 나의 친구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늘어놓는 도덕적 수다는 이 시대에는 구역질이 나게 한다. 도덕적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의 취미에 맞지 않는다! 이 수다, 이 고약한 취미는 지난 시대를 이 시대에도 얼마 동안이나마 질질 끌고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사람들, 결코 현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요컨대 무수히 많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도록 하자!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한다! 새롭고,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고, 자기 스스로가 입법자이고,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잠언 335)

 
   

 5부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무한히 개별적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의식으로 옮겨지는 즉시 그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현상론이며 관점주의이다 : 동물의 의식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수반한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듯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민중의 형이상학인) 문법의 동아줄에 묶여 있는 인식론자들에게 맡겨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구분이 허용되는지조차도 전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인식을 위한, "진리"를 위한 기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무리, 종에 유익한 만큼만 "안다" (혹은 믿거나 상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용성"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도 결국 믿음, 상상,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우리를 몰락으로 몰고 갈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잠언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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