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사랑이 있었다 - 당신 곁에서 뜨겁게 울어줄 신부님들의 이야기
차동엽 외 지음 / 마음의숲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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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의 신부님들이 뭉쳤다. 차동엽, 박진홍, 조재연, 강석진, 송영오, 지영현, 김영호,

최정묵, 류해욱, 정인준, 조현철 신부님. 차동엽 신부님은 일전에 '바보 Zone'이라는

책으로 만나본 적이 있었고, 다른 신부님들은 모두 생소한 이름들이었지만, 신부님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똑같다. 바로 '사랑'이다.

 

 

 

 

1장 당신의 이름, 사랑

2장 사랑을 묻다

3장 사랑이 대답하다

4장 사랑, 사랑만

 

세속 여인들과의 사랑이 철저히 금기되온 젊은 신부님들이 왠 이리도 사랑 타령이신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책. 물론 여기서 사랑은 에로스와는 거리가 멀다.

마음의 평안을 주는 잔잔한 책이다. 특별히 독자들을 계몽하려 들지 않을뿐더러, 하느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했으니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덤덤하게 신앙고백을 하듯 자신들이 자라온 환경, 어린시절의 꿈, 그리고 신부가 된 후

사목활동을 하면서 만나온 사람들을 회상하고, 반성하고, 존경하는 이야기다. 매주 미사때

주보에서 읽음직한 이야기들을 11분의 신부님이 들려주고 있다.

 

큼직한 활자와 넓은 여백, 그리고 감성 사진과 짧은 글들로 쉽게 읽을수 있다는 것도 장점

이다. 또 신부님들의 글이면서 종교적인 색채나 교리등을 강조하지 않고, '좋은생각'류의

책을 읽듯 가볍게 읽을수 있어 비신앙인이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거부감이 들지

않으리라 보여진다.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한 차동엽 신부님은 가톨릭이면서도 처음 '신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개신교의 '네비게이토 선교회'였음을 추억하며 지금도 좋은 기억을 갖고있다고

얘기한다. 두번째 글에서 박진홍 신부님은 한달여간 수단의 톤즈에서 함께 있었던 이태석

신부님과 톤즈의 순박한 사람들을 회상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희망을 얘기한다.

조재연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활동을 하며 만나온 청소년들과 그들을 통해 어릴적 병약했던

자신을 훌륭하게 키워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추억하고, 강석진 신부님은 남자친구와의 이별

로 힘들어하는 여신도를 상담하면서 느낀 점을 제목 '놓아주는 것도 사랑입니다'에서 얘기

하는등 메 글마다 인생에 힘이되고, 현실을 돌이켜 볼수 있는 좋은 글들로 가슴을 따뜻하게

적신다.

 

사실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단 하나의 길만 제시해

주시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돌아서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전지전능 하시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신다고 제자들에게 얘기하셨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도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셨다는 말씀이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니..

다만 신자들이 어느 말씀에 무게를 두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무한한 희생과 봉사,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기도 하고, 총칼을 들이대며 전쟁을 일으키고, 이교도를 학살하기도 한다.

또 성실한 삶 자체를 최고의 전도로 알고 모범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는반면

거리에서 확성기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며, 눈쌀 찌푸리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다. 내 대부님이 해준 수많은 말씀중 가장 인상깊었던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건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나누어 질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와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만 내 이웃이요, 친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전교해야할 대상이거나 적이라고 간주하는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 대신에, 내 종교가 소중

하듯 타종교도 존중하고, 모두 큰 의미로 절대자 하느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가, 전 세계가 평화로워지지 않겠는가. 엊그제 읽었던 종교전쟁을 다룬 책 '위도 10도'

에서 처럼 종교가 전쟁의 이유가 되지도 않을테고 말이다. 진솔한 신부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종교인들이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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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한 연애
김영은 지음 / 팬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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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싹한 연애'가 연말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올해 유독 로맨틱 코미디 물이 약세를

보인데다가 '완득이' 이후로 화제가 된 한국영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싹한 연애'가

'완득이' 뒤를 잇는 대표 작품이 될수도 있겠다. 개봉한지 15일만에 관객 150만을 돌파해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 한다. 올 한해 한국영화의 흥행순위는 1위 최종병기 활, 2위 써니,

3위 조선명탐정, 4위 도가니, 5위 퀵, 6위 고지전, 7위 위험한 상견례, 8위 가문의 수난,

9위 블라인드, 10위 7광구다. 이 중 조선명탐정을 빼고 다 본 바로는 '오싹한 연애'가

위험한 상견례보다는 관객을 더 모을것 같고, 도가니보다는 못할것 같아 예상순위는

5~6위쯤으로 예상해 본다. 사실 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대신 책으로 먼저 접했다.

 

 

 

 

소설이 원작인 작품을 영화화 한것은 아닌것 같고, 반대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소설화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19 29 39>, <드렁크 인 서울>을 쓴 소설가 김영은이 황인호 원작을

소설로 옮겼다. 황인호는 영화 '오싹한 연애'의 감독이기도 하다.

겁많은 마술가 신우가 베일에 둘러싸인 신비한 여자 여리를 만나, 함께 마술쇼를 공연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물론 많이들 아시겠지만 여리는 귀신을 볼수있기도 하고, 끊임없이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도 한다. 이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귀신 상대하는 것도

일상이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런 사랑이라도 각오할수 있을까~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평을 보자니 소설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단지 남자주인공의

이름이 소설에서는 신우지만, 영화에서는 조구로 바꼈다는거 정도..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하기 살짝 애매해지는 이유중 하나가 달콤쌉쌀한 영화로 보기에는 귀신의 등장이 너무

공포스럽다는 점이라고 한다. 어쩌면 공포영화로 분류해도 좋을만큼. 공포영화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이 영화 자체를 피하라는 조언도 있는걸 보면 소설에서보다 더 강도가 센 장면이 영화에서

연출되는것 같다. 그런점에서 오히려 관객몰이를 하고있는건 아닌지~ 엉뚱하면서도 슬픈

여주인공 여리역을 손예진이 잘 연기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재밌다는 평이

재미없다는 평보다 훨씬 많은걸로 봐서 분명 기대되는 영화이긴 한데...다만, 소설은 그다지

임팩트가 있진 않았다. 원작 자체가 소설이었다면 좀더 많은 배경 설명과 심리묘사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화 시나리오를 소설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도저도 아닌 너무 가벼운

작품이 되버렸다. 스토리 자체는 탄탄한 재미가 있지만, 글로 읽다보면 그 재미가 반감된다고나

할까? 등장인물의 캐릭터 소개가 짜임새가 있지 못하고 엉성하다. 진행도 왠지 엉성하고...

책으로 읽는것보다 영화를 먼저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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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10도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엘리자 그리즈월드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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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종교 분쟁지역, 종교가 전쟁이 되는곳 '위도 10도'.

흔히 북아프리카나 서남 아시아 일부지역이 대표적인 종교분쟁 지역으로 알고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적도에서부터 위도 10도에 이르는 지역을 심각한 종교문제가

발생되는 지역이라고 꼽고 있다. 위도 10도는 적도로부터 북으로 약 1,126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으로 전세계 무슬림 13억 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 중 60퍼센트가 살고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종교분쟁. 바로 이슬람교와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가 서로를 압살하려는

분쟁이다. 말이 분쟁이지 기실 전쟁에 가깝다. 어쩌면 중세 십자군전쟁이 형태만 바꼈을뿐

지금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계 여러곳을 놔두고 왜 하필

북위 10도 지역에서 이들 종교의 대립이 극심할걸까. 저자 엘리자 그리즈월드가 보기엔

종교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이들 지역의 지리적 위치, 수자원, 석유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 실제적인 이유이다. 즉, 이들이 믿고있는 서로 다른 신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지리, 역사, 자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여자면서도

이들 분쟁지역에서 목숨을 건 취재활동을 무려 7년이나 벌이다 이 책을 집필했다.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돌아다니며 종교지도자들을

인터뷰하고 종교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이 책을 추천한 피디 김영미씨에 의하면 자신도 역시 이들 분쟁지역에 취재차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들은 처음 만나는 외지인을 보면 제일 먼저 "종교가 무엇인가?"를 물어온다고

한다. 어떤 신을 믿는가에 따라 친구와 적으로 양분되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종교에 민감

하다. 특히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있어 미국인=기독교인 은 악의 상징이다.

취재를 하면서 목숨이 위협받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슬람 지역과 기독교 지역을 왔다갔다하며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일이다.

 

 

 

 

이들 지역이 종교분쟁 지역화 된데는 오랜 반목의 역사와 자원 소유권 외에도 막 시작된

초보 민주주의의 영향도 크다고 한다. 아직 정립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여러곳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키우는데 대해 효율적인 대비책을 갖지 못하고, 비윤리적이며 무책임한

정부, 부도덕한 자본세력들이 종교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악용

하기도 한다. 따라서 몇몇 소수는 사회의 혼돈을 부추겨 부와 행복을 누리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있는 것이다.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는

그 자체로 끔찍하다. 무차별적인 학살, 강간, 폭력, 납치, 인신매매가 일상적으로 이루어

지는 곳, 이슬람교의 무함메드도, 기독교의 예수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후대의 신앙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는 소위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심도 톡톡히 한몫 하고있음은 물론이다.

나이지리아에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들의 충돌로 수천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기독교의 한 목사가 이렇게 저자에게 얘기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에

로마 군인에게 폭행당한 일화를 읽어주었다. 이때 예수는 다른쪽 뺨을 대는 대신 군인에게

손찌검의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한복음 18:23) "교인들은 늘 깨어서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저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겁니다. 저의 소임은 형제들에게

슌교를 준비시키는 것 뿐입니다. 여기 남아서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 목사는 종교충돌 당시 정당방위 차원에서 한 이슬람 남성을 도끼로 죽였다고도 털어

놓았다...

 

헐리우드 영화에 노출되어 자라온 한국사회에서도 역시 미국인의 시각이 정의로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선이요, 이슬람은 악이라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되어 왔다고

할수있다. 무슬림들은 대부분이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이요, 잔인하게 외국인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끊임없는 무슬림들의 테러에

상처받고, 좌절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 이슬람교인들의 시각에서는 정 반대의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순박한 이슬람국가에 잔인한 기독교인들이 처들어

와 그들의 종교를 강제로 전교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자원을 뺏어가며, 입맛에 맞는

정권을 만들기도, 없애기도 하는 흉악한 쪽이 기독교인 인 것이다.

 

위도10도, 상당히 어렵고, 불편한 책이긴 하다. 종교와 그 지역의 오랜 관습, 문화를 설명

하고 있기에 어렵고, 양쪽 종교진영간에 끊임없는 학살로 인한 피해상을 읽고있자면

나도 모르게 몸서리 쳐지며 불편하다. 하지만 좋든, 싫든 엄연히 지금 이시각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에 외면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금 깊이있는

책을 읽으려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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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반역 유광남 역사소설 1
유광남 지음 / 스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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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속 사건들 중에서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는 숱하게 존재한다.

오로지 전해 내려오는 문헌들에만 의지할 뿐이니, 그 사관에 따라 진실이 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는걸 알고있기에 궁금증만 커가는 사건들 말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던 최고의 장수가

왜 비단 마지막 전투였던, 그것도 치열한 격전이 아니라 도망가는 왜적을 쫒던 전투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쳤을까? 그리고 그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의 대상은

누구일까?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아군의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알리지 마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뜻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거라면?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이른바 '이순신 생존설'중 하나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전쟁영웅

으로 떠오른 이순신이 민심과 군을 이용해 역모라도 일으킬까봐 전전긍긍 하고있었고, 임금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이순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처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전쟁이 끝나

면 이순신이 갈 수 있는 길은 단 두가지, 순순이 도성에 입성하여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 당하

든지, 아니면 역모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던지.. 이도저도 할수없던 이순신으로서는 전투에서

죽은걸로 위장하고 남은 생을 숨어서 살았다는 설이 꽤 신빙성 있게 전해 내려왔었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의미는 반대로 '내가 살아있다는걸 아무도 모르게 하라'라는 의미

라고... 그런데 이게 단순히 재미로만 받아 들일수가 없는게 많은 역사학자들 역시 전쟁이

끝난후 이순신의 운명을 위에서 든 두가지 중 하나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없는 전쟁은 있을수 없었기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어도 전쟁중에는 어찌 할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필시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 했을거라는데 무게가 있다.

 

유광남 작가가 쓴 소설 '이순신의 반역'은 바로 이런 설을 바탕으로 하여 실존인물이었던

김충남(본명 사야가)를 이순신의 충복으로 등장시켜, 순순히 죽지말고 역모를 일으켜 이순신이

왕이 되는 상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순신이 불충하여 역모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충신들을

그저 권력욕으로 숱하게 누명씌워 죽이는 정부, 일본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지면서도 자신들만

살기위해 백성들을 포기하고 도망다니던 정부, 그 난리통 속에서도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끊이지

않던 당파싸움의 대신들, 이런 썩어빠진 정부를 뒤집고 백성들을 위한 나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충심에서의 역모를 뜻한다. 발칙한 상상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

듯이 어쩌면 상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역사에서 현실이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등장인물들중 이순신을 제외하고 단연 주인공은 김충선 이라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는 김충선을 일본에서 특수부대 훈련을 받고 전쟁전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간자였으나, 전쟁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조선에 투항하고, 일본의 총포기술과 화약

기술을 전래하고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군의 편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선조가 친히 '자헌대부'라는 직위를 주고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해 줬으며,

의병장 김덕령, 곽재우, 도원수 권율,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두루 교분을 쌓다가 마침내 이순신

의 양아들이자 충복이 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의금부에 압송되는 이순신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왕을 배신할수 없다고 할때 이순신을

설득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부추기고, 영의정 유성용, 도원수 권율 등으로 하여금 역모에

가담하게 하는 인물, 상대의 심리를 한눈에 꿰뚫어보고, 신출귀몰한 전략을 세워 문제를 해결

해 나가는 인물, 일본인이면서도 모국을 배신하고 조선의 부흥과 이순신만을 위해 모든것을

바치는 인물... 그 김충선이라는 인물이 오히려 이순신보다도 더 소설의 주인공인 셈이다.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실존했던 인물이고, 소설속의 설정도 많은 부분 사실과 들어맞았다.

다만 이순신의 양아들로, 이순신을 부추겨 역모를 추진했던 부분은 아마도 소설속의 픽션인듯

하다. 왜란때 혁혁한 전과를 세워 조정의 신임을 받고, 병자호란때도 스스로 참전해 성과를

걷었으나,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속국이 되자,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 향악

등을 가르치다 죽었다고 한다. 죽은후 그를 기리기 위해 '김충선 신도비'가 세워졌다.

 

 

 

사실 영웅이자, 충신을 등용하기 보다 어떻게든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던 조정과 대신들의 모습을

나무랄 것도 못된다. 1590년대 조선중기, 치열한 당쟁으로 나라가 망해가던 때의 케케묵은 나쁜

관습이라고 할수 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할수 있나?

안철수, 박원순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며 민심을 얻어가자, 정부와 집권

여당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곰곰히 지켜볼 일이다. 인정하고,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는지, 아니면 귀와 눈을 닫고, 어떻게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깎아 내리려 혈안이 되어 있는지,

어느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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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런
루시 크리스토퍼 지음, 강성희 옮김 / 새누출판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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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지켜봐오던 소녀를 납치한다. 그리고 세상과 격리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두사람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납치된 소녀는 처음에는 극심한 공포에 젖어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차츰 자신을 돌봐주는 납치범에 끌리게 된다...



어디선가 많이 봐오던 스토리다. 그렇다. 일본에서 발생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완전한 사육'을 시작으로 해서 이와 유사한 소설, 영화, 실화들이 수도없이 창작되고, 실제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납치되었다가 8년만에 돌아온 나타샤 캄푸쉬,

등교길에 납치되었다가 18년동안 성노예 생활을 하다 극적으로 탈출한 미국의 제이시 두가드

사건처럼 힘없는 여성, 특히 소녀들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성적 파트너로 만드는 패륜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나타샤 캄푸쉬는 감금생활 8년을 '3096'이라는 책으로 회상했고,

제이시 두가드는 '도둑맞은 인생'이란 책으로 심경을 고백했다. 이 책 '스톨런'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책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위 책들은 실제 피해자가 쓴 실화라는 점이고,

'스톨런'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위 책들을 다 읽어본 나로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이 소설같고, 소설이 사실같다.









'스톨런'은 부제에서 보는것과 같이 납치범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납치범을 처음

만났을때부터, 호감을 갖고 대화하다 커피에 탄 약을 먹고 의식을 잃어 납치당하는 순간,

세상과 고립된 곳에서 납치범과의 생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오심에서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 그러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세상과 부모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피해자 시각으로

납치범에게 얘기를 해주고 있다. 이 소녀의 감정이 소설의 핵심이다. 나를 납치한 이 사람은

사실 처음 봤을때 호감을 갖었었고, 사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악마처럼 느껴졌지만,

나중에 독사에 물린 나를 살리기위해 모든걸 다 바쳤던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되고 나니 이 사람이 가엾다. 그리고 마음이 간다...



결말부에 이 소녀를 살리기위해 병원에 데려간 납치범은 경찰에 자수를 하게된다. 감금됐던

시절 생활을 묻는 사람들은 소녀가 납치범에 일말의 동정심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소녀는 다시 이 세상에 이들과 어울려 살기위해 납치범은 흉악범이고, 감금됐던

시간동안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소녀는 납치범에게 전하지

못하는 편지를 통해 그럴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건가.



'스톨런'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나타샤 캄푸쉬가 쓴 '3096'과 비교가 된다. 등교길에 납치되어

8년동안 납치범에게 감금되어 살았던 나타샤 캄푸쉬는 그야말로 납치범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나를 납치했고, 때리고, 모욕하고, 자유를 뺏어갔지만 그 긴 시간동안 유일하게

나와 대화하고, 나를 도와주고, 먹여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나와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다.

탈출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납치범을 마냥 악당이라고, 흉악무도한 괴물이라고 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감정을 이해하거나 받아주지 못했다. 그리고는 간단한

한마디로 모든걸 결론지어 버렸다. '스톡홀름 신드롬'. 하지만 나타샤 캄푸쉬는 극구 부인했다.

자신의 감정은 결코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소설 '스톨런'에서도 피해 소녀는 부모곁으로 돌아와서 납치범이 자신을 흉악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납치되긴 했지만 진정으로 자기를 위해줬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이 안되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정의하고 정신치료를 하려는 사람들에

반감을 갖는다. 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그럼 이 경우는 뭐라고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사랑할수도 미워

할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하나? 내가 남자다보니 피해소녀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어쨋든 중요한건 납치범의 행위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납치해서 감금하고 내 여자로 만든다? 철저한 보쌈정신으로 무장한 납치범

들이 아닐수 없다. 피해자야 그렇게 내사람으로 만들지라도, 긴세월동안 사랑하는 딸의 생사

조차 알지못하고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려 인생을 망치는 가족들의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건가

말이다. 남자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나는 납치범에게 징역10년을 선고하는 바이다.

(너무 처벌이 약하다고? 소설을 읽어보시라.. 비록 납치는 했으나 납치범은 주인공 소녀에게

일절 폭언, 폭행, 강간도 없었고 시종일관 소녀를 기쁘게 해주기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편다.

그리고 독사에 물린 소녀를 살리기위해 자신이 잡힐것을 알면서도 소녀를 병원으로 데려가

살려낸다. 그런 전후사정을 다 안다면 징역10년이 결코 적은 형량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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