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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샤베르 대령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이 책은 천재 조각가 사라진과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던 샤베르 대령의 미스터리하고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발자크는 비극 작가, 소설가, 출판사, 활자 제조소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쓰라린 실패를 맛본 후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대충 1830년 전후 일 텐데 이때 원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앞으로 <인간극>으로 명명될 큰 범주에 포함될 모든 작품에 당대 프랑스 사회 전체를 녹여내려 한 것. 누가 되었던 <인간극>을 다 읽으면 프랑스 역사의 가장 격동의 시기였던 대혁명을 시작으로 제2 제정에 이르게 되는 1789~1848의 시대를 간접적으로 살아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진정한 예술은 실망과 고난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모양이다. 사업 실패로 가장 어려웠을 때 나왔던 <사라진/샤베르 대령> 같은 작품들이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인간극>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발자크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루겠다”라는 그의 야심찬 선언이 실현되었을까.
이 책의 첫 작품은 <사라진>이다. ‘사라진’은 18세기 초 프랑스 동부 출신의 조각가다. ‘사라진’이란 인물의 전형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치안 판사였던 아버지 밑에 태어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과 조각에 몰두하다 집안 망신이라며 두들겨 맞기까지 했던 미켈란젤로.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듯 결국 그의 능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실력을 쌓고 로마로 가서 명성을 떨치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사라진의 경우도 검사의 아들, 장래 직업에 대한 부모와의 갈등, 정신적 스승의 만남, 스승을 뛰어넘기 위한 각고의 노력, 이후 로마 유학을 거쳐 천재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사라진의 운명은 고전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로마로 유학 가면서부터 삐걱거린다. 우연히 방문한 오페라 극장에서 프리마 돈나인 잠비넬라를 본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장 이상적인 여인 조각상의 모델이란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충격적인 진실을 목도할 때까지 맹목적 사랑은 계속된다. 신념에 사로잡히면 의심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어 진실을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라진>의 이야기는 작품 속 화자가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녀는 랑티 집안에서 주최한 연회에서 봤던 그림 속의 미소년, 개츠비 같은 당시 파리 사교계에 갑자기 등장한 비밀 같은 랑티 가문, 그리고 그곳에 가끔 출몰하는 유령 같은 노인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전혀 별개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하나의 입체적인 서사로 직조되는지는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겨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시작과 끝,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 동전의 양면 같은 극과 극의 성질은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공존한다.
두 번째 작품인 <샤베르 대령>은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하게 된 1796년 이탈리아 원정부터 황제가 되어 19세기 초 감행한 동유럽 정벌까지 함께했던 ‘샤베르’라는 이름을 가진 대령의 이야기다.
고아였던 그는 오직 담력 하나만을 물려받았고,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면서 인정받아 대령까지 된 인물이다.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운명은 1807년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싸웠던 아일라우 전투에 참전하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러시아 군대를 기병으로 격파하고 귀환 도중 잠복에 걸려 머리에 크게 다치는데, 샤베르는 죽은 것으로 오인되어 시체 구덩이에 묻혔다. 정신을 차린 대령은 구덩이를 어렵게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고, 오랜 시간 회복 후 귀환의 길에 오른다. 그의 여정은 10년간 지중해를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해후한 오뒷세이스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샤베르 대령의 부인은 이미 페로 백작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샤베르 대령은 귀환의 여정 중 겪었던 고초에서 교훈을 배웠다.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큅클로스가 던진 바위에 맞아 좌초될 수 있다. 그렇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부인에게 접근했으나 부정당한다. 전쟁 중 머리에 입었던 상처도 샤베르의 관상을 변형시켰기에 더욱 자신이 샤베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몰린다. 그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려줄 아테나 여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인, 재산, 명예 등 삼 종 세트 모두 한꺼번에 잃은 대령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법에 호소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찾은 곳이 소송 대리인 데르빌의 사무실이고 이곳에서 <샤베르 대령>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변해있다. 제정시대에 파리를 떠났던 샤베르는 왕정복고 시대에 돌아왔다. 명예, 도덕 등의 훌륭한 가치는 사라지고 부와 출세가 미덕인 시대가 되어버렸다. “조국은 프랑스고, 세상 사람이 가족이요, 의지할 이라고는 하느님뿐”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 많아 보이질 않는다. 과연 샤베르 대령은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떤 중요한 선택들을 하게될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고 다시 왕정복고 된 19세기 초 샤베르 대령과 사라진은 숨겨졌던 각자의 이상을 좇아 고군분투하며 그 끝에 다다른다. 주인공들이 대면한 진실의 순간은 당시 프랑스 및 유럽의 시대상, 생활상, 말투, 옷차림, 미장센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삶이란 얼마나 부조리하고 역설적이며 환멸적인가에 관한 인간 본성의 탐구는 다양한 경험과 치열한 관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굴곡을 가진 미켈란젤로와 오뒷세우스의 서사가 새롭게 변주된 것은 또 다른 재미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