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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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돈, 권력 등의 달콤함에 중독될수록 우리의 이성은 마비된다. 진실은 심연으로 침잠하고 빙산의 일각 같은 겉모습만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이 제거되었으나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풍운아가 공백을 채웠고, 그가 몰락하자 다시 새로운 왕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1819년 즈음의 파리가 그러했다. 


왕이 다시 돌아왔으나 시대는 변했다. 귀족은 몰락했고 소위 땅 파먹고 사는 시대는 저물었다. 농업과 육체적 노동으로 돈을 버는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상업과 금융,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주도한다. 산업혁명과 해외 식민지 개발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온 유럽의 인간들이 이러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역동적인 파리로 몰렸고 파리는 거대한 욕망의 바다가 된다. 


보케르라는 50대의 여성은 센강 좌안의 라탱지구에서 하숙을 친다. 라탱지구는 중세부터 대학이 위치한 대학가로 젊은 사람이 하숙집에 많을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나이와 배경을 가진 일 곱 사람이 4층 구조의 건물의 각 방에서 산다. 보케르 부인은 고급 하숙집이라 생각하지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하숙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구두쇠 노인, 비밀이 많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 노처녀, 전직 재면업자, 법대생, 미망인, 부모에게 버림받은 처녀 등 하나 같이 음울하고 음침하며 비밀을 숨긴 듯 긴장해 있고 침울해 보인다. 각자 깊은 사연을 가지 사람들은 달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는 경주마처럼 개인의 욕망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이야기는 지방에서 올라온 법대생 라스티냐크가 파리의 화려함에 도취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온갖 욕망이 넘쳐흐르는 곳에 이제 막 사회 발을 내디딘 청년이 당도했으니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방의 가난한 소 귀족 출신이었던 라스티냐크는 싸구려 하숙집에서 사는 현실과 화려한 도시 생활에의 동경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낀다. 그는 이내 ‘출세는 곧 미덕이다’라는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짠다. 


당시 파리에서 출세의 등용문은 사교 파티였다. 이곳에 온갖 유력자들이 모여 구시대 귀족의 취미를 재현했다. 자신들을 핍박했던 귀족을 몰아내자 이제 자신들이 기득권이 되어 귀족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은가. 아무튼, 남녀 할 것 없이 젊은 애인을 두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요 자랑이었다.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최대 결점인 가난을 젊음이라는 유일한 장점으로 커버하고자 했다. 사교계에 드나드는 유력 여성의 애인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는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 파리에 사는 친척 누님을 발견한다. 멘토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시기, 질투, 배신으로 점철된 사교계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개인 교습을 시켜준다. 훈련을 마친 후 그토록 그리던 새로운 세계의 관문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대체 작품의 제목인 ‘고리오 영감’은 언제 나오는 것일까. 제목에 암시된 것처럼 그가 주인공이기나 한 것일까. 사교계에 진입한 라스티냐크는 한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고리오 되시겠다. 고리오는 라스티냐크와 같은 층에서 하숙하는 노인인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딸은 백작 부인인데 그녀의 아버지인 고리오는 왜 싸구려 하숙집에서 주인장 눈치를 보며 궁색하게 사는 것일까. 


라스티냐크는 이 궁금증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냥 화려하게만 보였던 파리의 민낯을 발견한다. 또한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배운다. 대부분 인물이 겉모습에 현혹되어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본다면 작품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고 많은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라스티냐크로 작품 제목은 ‘라스티냐크’가 돼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리오 딸이 작품 초반 지나가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봐요.”이라며 한마디 하는데, 응당 전체 서사의 주제가 될만한 문장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리오 영감이 전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9세기 최고의 작가로 알려진 발자크는 1834년에 이 작품을 썼다. 당시는 소위 낭만주의 시대로 문학, 예술 분야는 기계적으로 낭만/역사/공상적인 것에서 소재를 찾아 창작했던 시대였다. 발자크는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대신 당대의 현실에 관심을 두고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포커싱을 맞춘다.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일상에 초점을 맞추자 엄청난 역동성이 꿈틀거렸다. 그는 새로운 자신만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이 본격 시작 되었고 그 초기 작품이《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기존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생각을 시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한번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발자크는 더 나아가 당대 사회 전체를 자신의 거대한 작품 속에 녹여낼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는데 《인간극》이었다. 아쉽게도 이른 죽음은 프로젝트의 중단을 가져왔지만, 그가 남긴 90여 편의 작품은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즉슨 시간이 무수히 흘러도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일 텐데, 작품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통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고전이라 하는 것일까. 진실은 숨고 거짓이 난무하는 맹목적 욕구를 추구하는 현시점에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봐요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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