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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츠키 행진곡 ㅣ 창비세계문학 5
요제프 로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정확히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잊어버렸다. 츠바이크 였는지 아니면 베르디 혹은 앙리 뒤낭이 계기였을 수도 있다. 기억이 희미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전쟁소설인 줄 알았는데…웬걸… 새파랗게 젊은 그것도 지독히도 우유부단하고 눈치 없고 고지식한 장교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친다. 그 중심에는 늘 유부녀가 자리한다. 이 친구는 고통과 시련을 겪고 깨달음 비스무리한 것을 얻는 듯하다가도 그때뿐이고 다시 과거를 반복한다. 주인공이라면 좀 역경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그 과정이 너무 지지부진하다. 변하기는 했던가.
이 책을 읽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눈에 띄면 다시 읽다가 후회하고의 반복을 거치다 결국 정신 수양하는 마음으로 엉덩이를 의자에 고정하고 끝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좀 더 읽어가면 분명 흥미로운 사건들이 발생하리라는 기대하고. 결국, 기대했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은 초반 솔페리노 전투 몇 줄, 그리고 수미쌍관 구성을 의도했는지 마지막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전투 몇 줄이 전부였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반 오스트라아-헝가리 제국을 살았던 트로타 가문 3대에 관한 이야기다. 사건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발생했던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발생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주변 프랑스, 스페인, 프로이센 등과 달리 여전히 통일하지 못하고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오스트리아의 점령을 받았다. 이에 이탈리아 북부 유일한 입헌체제를 갖춘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시작된다. 이들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자신들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를 깨부쉈으니 바로 솔페리노 전장에서였다. 19세기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오죽했으면 그곳을 우연히 지나던 제네바 출신의 청년 앙리 뒤낭이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구호 활동을 벌일 정도였다. 그는 나중에 이 전투를 회상하며 국제적 구호단체인 적십자를 창설한다..
당시 이탈리아 민족은 베르디의 음악으로 하나 되어 분기탱천했고, 1848년에 밀라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오스트리아는 라데츠키의 성공적인 이탈리아 원정을 기념하는 의미로 <라데츠키 행진곡>을 만들었다. 이 역동적인 곡이 연주될 때마다 이탈리아 국민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꼬. 한 제국의 자랑은 다른 민족에게는 지옥으로 작용했다. 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게 천지차이다.
이런 피튀는 솔페리노의 전장에서 일개 보병 소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를 극적으로 구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솔페리노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으며 귀족의 작위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트로타 가문이 새롭게 신흥귀족으로 편입된다. 이후 그의 아들 프란츠 트로타는 군인이 아닌 모라비아 지역 작은 마을의 군수가 된다. 보통 아비의 직업을 아들이 따르지만, 솔페리노의 영웅은 국가가 자신의 행동을 왜곡 보도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전역했고 아들은 절대 군인으로 만들지 않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아비가 제국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면 아들 프란츠는 황제를 대리해 군수로서 마을을 잘 다스린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인다. 그래도 하나를 굳이 찾아보자면 그의 아들 카를 트로타 정도 되겠다. 군수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 원했고 출세를 위해 군인만 한 것이 없었다. 아들 카를 트로타는 일곱 살부터 기숙학교에 들어가 소년사관학교를 거쳐 소위가 되는, 전체 서사를 끌어가는 인물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그의 주변에는 늘 죽음이 어른거린다. 우유부단한 성격이 한몫한 듯하다.
이 인간은 생각은 엄청나게 하지만 정작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부류다. 덕분에 카를 트로타의 내면 묘사는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여러 죽음을 겪으며 트로타 또한 내면의 상처를 입고 서서히 파괴된다. 그의 모습은 마치 더는 손쓸 수 없이 몰락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다를 바 없다. 그의 할아버지는 황제 대신 총을 맞으면서 쓰러져가는 제국을 구했다. 그의 손자인 트로타는 누구도 구해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트로타는 두 번의 죽음 경험 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제국 동쪽 국경으로 간다. 귀족이라면 응당 기병을 해야 했으나 총병대대 소위로 부임한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정신 수양을 하려는 계획이었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오지에서 어떻게 젊은 혈기를 막을 수 있을까. 트로타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여성도 역시 유부녀, 게다가 부대 근처에 카지노가 들어오며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제 무슨 일이 안 일어나면 이상하겠지. 이렇게 서사는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삼대에 걸쳐 펼쳐지는 트로타 가문 3대의 이야기는 솔페리노 전투 이후 겉보기와는 달리 완전히 힘을 상실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은유다. 제국이란 문화에는 배타적이라도 민족에는 포용적이기 마련인데, 당시에도 여전히 저변에 유대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특히 명예를 둘러싼 결투를 보면서 리들리 스콧 영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20세기 직전까지 제국이라 불리던 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장교들의 명예 규범에 따르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끼면 상대방에게 결투 신청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비겁한 자로 낙인찍혀 버리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의 파문 정도의 파급력 정도 될까. 단순한 결투가 아니라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합법적 살인인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는 하늘을 나는 기계까지 나올 판인데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던 사회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결국 몰락으로 몰고 간다. 600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자멸해버린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은 오스트리아가 이룩한 영광을 위한 마지막 찬가이자 스스로 몰락을 예고한 조가였다. 이처럼 트로타 가문의 영예도 빛날 수록 심연은 더욱 어두워졌다. 우유부단했던 주인공은 몰락의 순간에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행복하게 자유롭”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