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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호 이야기 ㅣ 날개돋친고전 2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작은이야기 / 2010년 4월
평점 :
"너는 똑바로 서야지, 똑바로 세워져서는 안된다" <명상록>
로마의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장처럼 인간은 늘 주체적으로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고 여전히 고민한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주인으로 살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익숙한 삶의 관성에 대한 저항은 필연이기 때문이며, 그 순간부터 긴장이 고조되고 고통과 시련은 기정사실이 된다. 실패해 넘어지면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 주위의 비난과 비웃음과 같은 굴욕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겨우 똑바로 섰다고 해도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움직이기 위해 새로운 관성에 다시금 저항해야 한다. 영원히 저항을 저항해 하는 시시포스와 같은 운명을 가진 이들이 바로 똑바로 선 이들인 것이다.
관성을 극복하고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자기 잠재력을 발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텔레마코스는 멘토르의 도움으로 스스로 아버지를 찾는 여정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을 접하며 소년에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인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에서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이란 방랑의 시간을 거치며 꾀돌이에서 현인이 되어 무사 귀환하고 적들을 소탕한다. 이렇듯 개인의 가능성은 스스로 찾아내던지 혹은 타의에 의해 발견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그냥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 시인이었던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B.C 3C의 작품인 《아르고호 이야기》에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잠재력을 발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자식들은 성장해 트로이를 함락함으로써 또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트로이아 전쟁의 ‘프리퀄’이라 해야할까.
<줄거리>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조지프 캠벨이 언급한 ‘영웅의 여정’을 착실하게 따른다. 거칠게 한줄로 요약하면 '주인공이 모험의 소명을 받아 숱한 시련을 극복 후 영약을 가지고 귀환한다는 것'이다.
이아손은 이올코스의 왕 펠리에스부터 저 멀리 흑해 근처에 있는 콜키스로 가서 황금 양피를 가져오라는 미션을 받는다. 왕은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사람을 조심하는 신탁을 받았는데 이아손이 그런 모습으로 자신의 축제에 참여했기에 두려웠던 것이었다. 아이에테스는 분명 그 모험은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아손을 보낸 것이다.
의외로 이아손은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텔라몬, 펠리우스 등 당대 최고의 영웅 50명을 모아 아테네 여신의 도움을 받아 만든 아르고호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 그들은 콜키스까지 가는 여정에서 다양한 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여성들만 사는 렘노스섬에서 사랑을 나눴고 키지코스 섬에서는 오해와 실수로 상대방의 왕을 죽이기도 한다. 또 다른 섬에서는 아미코스 왕과의 권투 시합을 벌였고, 하르피이아이라는 괴조가 사는 곳에서는 그들을 물리치면서 피네우스로부터 조언을 얻어 심플레가데스(부딪히는 바위)라는 무시무시한 난관을 헤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콜키스의 왕이었던 아이에테스는 황금 양피를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왕은 두 가지 미션을 성공할 경우 황금 양피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들은 다시금 그 미션을 수행하러 떠난다. 첫 번째 사나운 청동 소에게 멍에를 씌워 땅을 갈고 용의 이빨을 땅에 뿌리고 두 번째, 그 땅에서 자라난 병사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르는 과업이었지만 이아손을 보고 한눈에 반한 아이에테스 왕의 딸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모든 과업을 성공리에 마친다.
이제 약속된 황금 양피를 받아 귀환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역시나 아이에테스 왕은 순순히 자신의 약속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웅들을 해치려 했다. 이에 이아손은 다시 한번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 양피를 탈취하여 귀환길에 오른다. 아이에테스 왕의 아들 압시르토스의 추격이 이어지고 이번에도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 아르고호 영웅들은 마녀 키르케사 살았던 섬을 지나 헤라, 테티스등 여신들의 도움으로 무서운 세레네이스 섬, 플랑크타이(떠다니는 바위), 리비아의 사막을 지나 크레테 섬에서 청동 거인 탈로스를 무찌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
이제 막 솜털이 갓 사라진 이아손은 모험을 떠날 당시 헤라클레스의 양보에 따라 리더가 되기는 하지만 존재감은 미약했다. 큰 나무 주변은 드리운 그늘로 주변에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없듯, 워낙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영웅이 함께 있는 한 이아손의 잠재력은 표출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모험 도중 헤라클레스가 요정에게 납치된 자신의 시동 휠라스를 찾는 과정에서 배를 놓쳐버리고 이아손은 마침내 영웅의 그늘에서 벗어나 합법적 리더가 된다. 그러자 그는 점차 숨겨졌던 헤라클레스와는 다른 그의 리더십을 발휘한다. 헤라클레스가 가공할 만한 힘을 상징한다면 이아손은 지혜를 대변한다. 완력보다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필요하다면 여성의 도움을 받아서까지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다. 이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전통을 벗어난 외교적이고 전략적 사고도 용인될 수 있다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이아손이 역량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헤라클레스가 용케도 초반에 사라져 주었기 때문이다.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존재가 자리를 비켜줘야한다.
소년의 껍질을 깨부수다
처음 이올코스의 파가사이 해변을 떠날 때 아르고호 선원들은 앳된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험의 여정에서 처음 여성과 사랑도 나누고, 살인도 했으며, 오해로 인한 살인을 하는가 하면 위기에 빠진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그토록 원했던 황금 양피를 얻었지만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전보다 위험한 항해, 배를 이고 사막을 횡단, 청동 거인을 물리치고 나서야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황금 양피였으나 그것은 일종의 맥거핀인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헤라클레스와 같은 전지전능한 영웅이 없이도 모험의 여정에 직면했던 난관을 능동적으로 해결한 것에 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더 현명하고 지혜로워졌으며 소년의 틀을 깨부수고 자기 잠재력을 자각한 영웅으로 탄생한다.
드디어 한 인간이 똑바로 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