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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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메 카브레는 모든 예술은 인간 영혼의 깊은 불만족으로부터 비롯된다.”라고 했다. 모세, 부처, 예수, 사마천, 보에티우스, 단테, 보카치오, 베르디 등 이들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시련과 역경의 시간을 조적하여 그곳에 단단한 기초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박차고 고난의 바다를 뚫고 올라 자신의 삶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어쩌면 내면의 어딘가에 영원히 잠들어 끝내는 자각하지 못했을 잠재력과 가능성은 이렇게 힘든 시절을 관통해야만 발현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벅은 세인트버나드와 셰퍼드의 피가 반반 섞인 덩치가 산만 한 개인데 시애틀의 어느 곳 철창에 갇혀있다. 붉은 스웨터를 입은 사내는 곤봉을 들고 그를 노려본다. 사내가 철창문을 열자 벅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목을 향해 뛰었다. 이후 곤죽이 되어 땅에 널브러진 벅은 인생 처음으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무기를 든 사내에게 덤비면 안 된다는 곤봉의 법칙을 배운다. 이제 벅은 살기 위해 음식을 훔쳐야 하고, 죽지 않기 위해 절대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아야 하며, 극한의 북극 눈벌판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야 하는지 배워야만 한다. 인간의 법이 아닌 곤봉과 송곳니의 법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로 입문한 것이다.

 

벅은 원래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어느 판사 집에서 왕처럼 편하게 살았다. 남부의 따뜻한 기후와 더없이 친절한 가족, 모나지 않은 반려동물들. 벅의 삶에 걱정은 사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가린 포르투나이 여신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렸고 벅의 삶은 단박에 심연으로 추락한다. 문제는 빌어먹을 황금이었다.

 

20세기가 들어설 무렵, 불과 반세기 전 펜실베이니아에서 검은 황금이 발견되었다면, 북부 클론다이크에서는 진짜 황금이 발견된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곳에 몰렸고 그들에게 편지를 전해 줄 썰매 개의 수요가 증가한다. 북미에서 덩치 크고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이 많은 개라면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집안 정원사 보조의 꾐에 넘어가 낯선 사내에게 팔린 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오게 된 경위다. 앞으로 벅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북극의 클론다이크로 끌려가 우편 썰매를 끌어야 한다. 불과 지붕으로 대표되던 문명적인 삶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오직 곤봉과 송곳니가 지배하는 야만적인 세계에 덩그러니 내팽개쳐진다.

 

다른 개들과 다른 벅의 탁월한 점을 한 가지 꼽자면 관찰능력이다. 따뜻한 남부에서 페르시아 왕자처럼 살다가 북극으로 온 수많은 개가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다. 벅은 달랐다. 곤봉과 송곳니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배우고 교훈을 얻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까지 옮기니 이렇게 기특한 개가 또 있을까. 흡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기존 대장이었던 스피츠와의 건곤일척의 대결에서 승리한 벅은 권력 유지를 위해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남부 시절의 유순하고 인정 많은 벅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리더가 돼야 했고, 그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을 실천했을 뿐이다. 때문에 벅은 새로운 주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썰매를 끄는 동료 개들로부터 합법적 리더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누구도 벅을 남부 출신의 개라 믿지 않는다. 그는 마치 태초부터 자연에서 살았던 것 같은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한편, 운명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았고 겨우 정상에 올라 이제 기 좀 펴보나 했던 벅의 운명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벅이 끄는 우편 썰매는 캐나다 정부에 의해 운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관료제는 효율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갈수록 황금을 찾아오는 이는 늘어나고 이와 함께 개들은 혹독한 노동으로 초주검이 된다. 정부는 얼마든지 젊고 싱싱한 개들로 교체할 여력이 있었으며 기존 개들은 말 그대로 개값으로 팔아치웠고 벅도 희생양이 된다. 벅은 또다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이번에는 정부가 아닌 황금을 찾아 떠나는 남부 출신의 뜨내기가 바로 그들이다. 과연 그들이 처음 접하는 북극이라는 엄혹한 환경에서 벅과 같은 적응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에 따라 벅의 운명도 결정 날 것이다. 아직은 인간으로 상징되는 곤봉과 야만으로 상징되는 송곳니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벅은 계속 성장했다. 내외부에서 들려오는 야성의 부름을 어느 순간 듣게 되었고 흥미를 느낀다. 그가 지금껏 해 온 것처럼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했던 법칙도 깨부술 수 있을까. 벅은 북극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 남부에서의 생활방식을 버림으로써 기존 세계를 깨뜨렸다. 그리고 곤봉과 송곳니의 법칙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법칙이 깨져야만 한다. 살아있는 것들의 역사에서 창조의 순간은 늘 기존의 관습과 새로운 생각의 충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벅의 행동으로 미루어 그는 늘 창조자가 되고 싶어 했다. 과연 그는 법칙을 깨고 야성의 부름에 응할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1903, 스물일곱 살에 이 작품을 썼다.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 뭐라도 해보겠다고 통조림 공장, 굴 양식장,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을 한 학기 등록했다는 것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늘 삶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작품에 나오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참가한다. 춥고 혹독한 환경에서 그는 황금만을 보지 않았다. 그곳의 대자연에 매료되었고 모험을 즐겼다. 작중 주인공 벅처럼 잭은 새로운 환경에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우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골드러시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을 썼고 명성을 얻었다. 자신 내부에 소리를 들었고 결국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작품에서 북극에 적응하는 벅의 모습보다 기존 법칙을 깨기 위한 고군분투가 인상적이다. 창조는 늘 시련과 역경을 거름 삼아 성장한다. 꼭 절망에 이르러야 깨달음을 얻는다. 돌이켜보면 그런 것 같다.

 



벅은 신문을 읽지도 않았고 악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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