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연장 가방
문수 지음 / 키위북스(어린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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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 탓인지, 며칠 전 아빠와의 통화 끝에 "아빠, 사랑해"라고 말했더랬어요. 마음은 늘 있지만, 입 밖으로는 잘 안 나왔던 말이었죠. 아빠는 저에게 "딸, 고마워" 하고 화답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끝에 닿은 고맙다는 인사가 어쩐지 죄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아빠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려왔을까요.


오늘 소개하고 싶은 그림책은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연장 가방>이라는 그림책입니다. 표지에서 꽤 젊었던 아버지는 그다음 장에서 세월을 건너 뛰어요. 늘 바빠서 얼굴 보기도 어려웠던 아버지인데, 어느 순간부터 소파 위에 망부석처럼 앉아 계시게 됐지요. 화자는 문득 아버지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왔던지를 묻습니다. "엄니, 아버지 어렸을 때 어떻게 사셨는지 아세요?"


1947년생인 아버지는 부산에서 태어나셨대요.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의 친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새엄마 밑에서 말도 못 하게 고생했다고요. 하지만 그 시절,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었나요. 먹을 것, 입을 것이 늘 부족하던 때에-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냈겠지요. 다만 아버지는 조금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바로 돈을 벌어야 했던 아버지. 아이가 공사판에 기웃거리면서 일 좀 시켜달라고 해봐야 큰 소득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득바득 심부름이나 잡일을 하면서 목수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진짜 목수가 되고 난 다음에는 어머니를 만나 결혼도 하셨지요. 표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연장 가방'도 이 즈음 마련하신 거라고 해요.


너무나도 낯익은 가방.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살펴본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꼈던 것이기도 하거니와,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하셨었거든요. 얼핏 들여다보기로 재미있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언젠가 아버지에게 연장에 대해 물었을 때는 아버지가 하나하나 연장들을 설명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들이 이 그림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해요) 


"망치질하는 법 좀 알려주세요."라는 아들의 말에 무뚝뚝하게도 "특별한 방법이 뭐 있겠나. 자루를 세워야 될지, 눕혀야 될지, 감이 딱 오믄 그 방향으로 내리치면 돼."라고 답하던 아버지였지만- 망치를 모두 꺼내서 장도리, 자귀망치, 벽돌망치, 유리망치, 돌망치, 볼망치같은 것들을 일일이 비교하고 그 특징을 설명하던 아버지를 화자는 아무래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대패나 톱도 마찬가지예요. 단 한 번도 대패나 톱을 사용해 본 일이 없지만, 아버지가 설명해 주시는 홈대패와 턱대패, 외원대패와 내원대패를 보면서는 뭔가 나무를 깎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뭐랄까, 장인의 세계를 엿본 느낌이었달까요.


말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 장인의 세계로 들어섰던 거겠지요. 하는 일도 많고, 오라는 데도 많았던 그 시절- 아버지의 연장은 철물점을 차려도 될 만큼 많아져서 집에 창고를 따로 짓기도 했었더랍니다. 땅을 사서 집을 지었던 것도 그 무렵일 테고요. 아마 그때가 아버지의 전성기였겠지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쪼르르 현관으로 나가 "다녀오셨어요" 하고 이야기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따뜻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녹였는지는 알지 못했었어요. 온종일 흘린 땀이 그 한 장면으로 모두 괜찮아졌던 날들이겠죠. 그렇다면 지금의 아버지는, 무엇으로 위로받고 있을까요. 낡은 연장 가방에 담긴 추억일까요, 혹시 무심하게도 가끔 걸려오는 우리의 목소리는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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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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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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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된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영어란 "Hello, How are you?" 하고 물으면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격언 같은 이 문장은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면 위태로워진다. 그러니까, 'I'm fine'말고 다른 대답을 했을 때. 요즘 어떤 일이 너무 신경 쓰인다거나, 어떤 일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괜찮지 않노라고 대답하면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그건 내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듯이. ...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지 않더라도 how are you?라는 물음에 으레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 이면에 말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더라도 굳이 꺼내들지 않는다. 상대는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으므로.


하지만 우리 삶은 언제나 'I'm fine'의 상태일 수 없고,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지-하던 순간에도 고민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 해 준다면, 언제고 모두 털어놓을 용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외로운 사람들일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도 수다스럽게 늘어놓으니까. 아마 자기 얘기를, 지금껏 살아온 긴 세월과 과거의 기억을 들려줄 것이고, 그것을 가만 듣고 있는 사이 모두의 인생은 스펙터클하며 동시에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이 책 <어떻게 지내요>는 그렇게 쓰였다. 주로 여성의 삶의 일화들, 나이 들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애틋함이 없고, 남녀 관계는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하게까지 여겨진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남편은 부인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삶의 기대에 부풀고, 평생 자신을 향한 딸의 적대감을 상대해야 했던 친구는 자살 계획을 세우면서도 딸에게 알리지 않는다. 사회의 온갖 악과 부당함을 향한 분노는 어쩐 일인지 다시 갈등을 빚어내고, 그렇게 삶은 갈수록 격렬한 전쟁터가 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그녀들 가까이에서, 하지만 그녀들은 아닌 채로 한 걸음 떨어져 기록자의 역할로 머문다. 직접 겪은 일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친구의 이야기이거나 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고 화자는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중립적인 태도로 들은 이야기만을 전달한다. 그렇게 'I'm fine'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건너 건너, 그것도 '책'이라는 형태로 내게 왔다. 그저 책이었으므로(사실 책 속에는 그녀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므로), 그리고 이 책이 소설이라는 이유로 나는 한동안 그녀들의 감정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화자의 태도도 나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내 친구가 암이에요,라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트레이너가 했던 "정말 안됐네요."라는 말은 나를 크게 뒤흔들었다.


누구나 항상 그렇듯 그도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식적인 말. 하지만 그의 탓이 아니다. 우리 언어가 거칠고, 속 비고, 말라비틀어져서, 감정 앞에서 언제나 어리석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니까. (본문 중에서, 165쪽)


그리고 그는 헬스장에서 나온 화자를 따라 나와 꼭 안아주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릴 수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어떻게 지내요'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내 친구여야 했는지- 원망하고 괴로워하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중요할까. (이미 고통은 친구의 삶을 잠식시켰는데) ... 친구에게, 또 화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렇게 따뜻한 마음 한 조각 아니었을까.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l est ton tourment? (본문 중에서, 122쪽)


어떤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안부를 물어왔는지 되짚어본다. 안부를 묻는 마음 안에 조금 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I'm fine'말고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 때, 열어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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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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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식상한 말도 없다. 하지만 '예술가의 일'을 생각하자면 이 상투적인 문장을 피해 가기가 어렵다. 실로 그들의 인생은 짧았고, 그들이 남긴 예술은 길게 남아 오늘의 우리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작품이다. 하여 그 작품이 오늘의 내게 어떤 말을 건네오는지가 그들의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부러 예술가의 삶을 멀리하려 애썼다. 알려진 몇 조각의 에피소드들을 아는 것이 작품을 더 깊고 넓게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외려 그 얄팍한 앎으로 말미암아 어떤 쪽으로든 편견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가의 삶과 그들이 했던 일들은 앎으로 불쑥 내 안에 들어왔다. 고흐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해져버린 고흐와 테오의 편지들이나 타히티에서의 고갱의 삶, 알폰스 무하의 파리, 전 세계를 여행하는 천경자까지. 작품에 비추어진 그들의 삶은 작품을 보는 나의 시선을 조금씩 비틀었더랬다.



이 책 <예술가의 일>은 '예술가의 삶'에 주목한다. 매경 프리미엄에 저자가 오랫동안 연재해 온 예술가에 대한 글 모음인 이 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의 사연을 다룬다. 인류의 유산이자, 시대의 상징이 된 작품을 남긴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한 사람분의 삶을 살았고, 세계적인 예술가이기 이전에 개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역사적, 예술적 소명을 업고 캔버스 앞에 선 이는 드물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했었더랬다. 누군가는 고독하게 혼자서, 누군가는 시끌벅적하게. 그렇게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르네 마그리트, 샤갈, 가우디, 프리다 칼로, 바스키아, 에드워드 호퍼처럼 이름만으로도 대표작이 떠오르는 예술가를 다루었는가 하면, 수잔 발라동, 페기 구겐하임, 조지 로메로처럼 다소 낯선 예술가도 다루었다. 화가를 많이 다루었지만, 영화감독, 사진작가, 무용수, 가수, 재즈 피아니스트 등 폭넓은 분야의 예술가를 다루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박남옥 감독이었다. 1955년 개봉한 <미망인>을 만든 그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의 미망인을 그렸다. 영화는 미망인인 주인공을 가련하게도, 타락한 모습으로도 그리지 않았다. 해바라기가 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듯, 자유의지에 따라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은 진취적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진취적인 장면은 카메라 뒤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은 한 살배기 딸을 등에 업고 촬영장을 누볐었단다. 제작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새벽에 직접 장을 봐서 스태프 먹일 밥을 만들고, 촬영 중간중간 아이 기저귀를 갈았을 그녀를 생각하니 '뜨겁다'는 말로는 표현이 다 안될 복잡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한 명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데 할애된 십여 페이지의 글과 그림이 그들 삶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화폭 앞에서, 무대 위에서, 그리고 거리를 누비며 자신의 세계를 꿈꾸고 실현했던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자니 어떤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전설'의 반열에 놓고 싶지는 않다.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모두 섞여 아름다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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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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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세계, 성별이 바뀐 나 자신, 내 분신인 엄주영의 망나니짓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 저 세계의 나 역시 당해야 했던 가정폭력과 무력하게 목격해야만 했던 배중숙 씨의 아픔, 그리고 내가, 엄주영과 심연재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다, 전부 다. 내가 엄주영의 결혼을 막고 싶어 한단 사실까지, 전부 다. (본문 중에서, 193쪽)



이 소설의 주인공 주영은 엄마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평행세계에 떨어졌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뿐인데,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니! 그것도 나의 이름을 하고서, 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맞다. 주영은 그곳에서 남자인 '나'를 만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엄주영은 시원찮다. 그 시원찮은 망나니가 앞날이 창창한 연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게 주영은 당황스럽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싶다가도 이 세계에서도 편치 않은 엄마 배종숙씨와 예비신부 연재를 위해서 남자 엄주영을 좀 나은 인간으로 바꿔보기로 결심한다.



해서 이 소설은 은근한 장르물에, 대놓고 성장 서사를 지향한다. 같은 부모,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성별이 다르다는 조건 하나로 완전히 다른 인물로 성장한 두 엄주영은 서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차다가도, 서로의 앞날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준다. 그 짠 내 나는 진심이 그들이 그러모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과 맞물려 뭉클한 마음을 빚어낸다.


"넌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네가 자라나야 했던 그 집, 그 지옥 같은 집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 누가 뭐라 해도 죽어라 너를 믿는 심연재의 운명을 너희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어? 그러면 행복하겠어? 그러면 만족하겠어?" (본문 중에서, 194쪽)



여자 엄주영이 남자 엄주영을 앞에 두고 다그친다. 아빠처럼 살고 싶으냐고, 그래서 저렇게 예쁜 연재를 엄마처럼 살게 할 거냐고. 남자 엄주영은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안 된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가려고 하는 길은 자꾸만 어긋난다. 한번 옮긴 발걸음을 다시 돌리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자꾸만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결국엔 시들시들 스스로를 말라 죽일 곳으로 간다. 그마저도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지금까지의 삶을 모조리 부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자갈밭을 향해 걷는 일보다 어려워서일까. 아니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서 계속 도망치고- 등 돌리고- 관계의 골을 깊게 만드는 것 아닐까.



같은 부모, 같은 가정환경에서 같은 폭력 아래 자란 여자 엄주영은 남자 엄주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깊게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자갈밭을 빠져나오기 위해 숱하게 노력했을 테지만, 그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알고 있으므로. 자갈밭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알고 있으므로.



"너는 어떻게 살았냐?"


"뭘 어떻게 살아."


"그 화를 다 어떻게 참아냈어? 복수하고 싶고, 누구든 괴롭혀서 억울하고 불행한 마음을 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참았냐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다른 집은 안 그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런 마음이 들면 아무거나 다 부수고 싶어졌는데. 너는 안 그랬어? 너는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며. 집 분위기도 똑같고." (본문 중에서, 236쪽)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 여자 엄주영과 남자 엄주영이 사는 세계는 비닐하우스가 하나쯤 더 많거나 적고,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한 명쯤 더 많거나 적다. 그 틈에- 누군가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사람을 잇고, 사랑을 만드는 것 아닐까. 그런 게 평행세계라면 어쩐지 요정을 믿어봐도 좋을 것 같다. ​(마주 잡은 손을 감각할 수 있는데 논리와 인과가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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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마르게리트 꽃잎 동물 공화국 1
자비에 도리슨 지음, 펠릭스 들렙 그림, 김미선 옮김 / 산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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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동지들, 우리들의 삶의 본질은 무엇이겠소? 우리 그것을 직시합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되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단지 우리 몸에 숨이 붙어 있을 만큼의 음식이 주어졌고, 우리 중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일하도록 강제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용성이 다한 바로 그 순간 끝이 찾아오고 우리는 끔찍한 잔학행위로 도살당하는 것이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이정서 역, 새움, 13쪽 중에서)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소설 중 하나이자, 세기의 금서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장원 농장에 소속되어 있었던 동물들은 그들 삶을 억누르는 모든 패악이 인간들의 폭압에서 비롯되는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해서, 인간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인간만 제거하면 노동의 모든 생산품은 그들 자신의 것이 될 테고, 금세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억압 속에 살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선택한' 억압이었다. 그래도 이건 우리가 선택했으니, 이전에 받던 억압보다야 좀 나은 것 아닌가, 싶다가도 혁명 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생활에 동물들은 어리둥절해하고, 당황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무력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 <동물 공화국: 흩날리는 마르게리트 꽃잎>은 <동물농장>을 오마주한 그래픽 노블이다. 인물 설정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물이 주인인 동물들만의 사회이며, <동물농장>이 그랬듯이 분명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수소인 실비오.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화제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는 진짜 공화국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들은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물들을 다스린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공포'를 이용했고, 공포를 퍼트리기 위해 무고한 동물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학살했다. 무엇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감히 그들에게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없도록 공포의 크기를 날로 키워나갔다.



그 라이터 갖고 싶다 했나? ... 라이터를 손에 넣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 나한테서 훔치든가. 사든가, 달라고 사정하든가. 아니면 내 친구가 되든가 말이야. 뭐가 좋겠나? ... 어떤 경우에라도 이건 자네 것이 되겠지만 말이야. 도둑질, 구매, 자선, 선물은 달라. 그래도 똑같은 라이터라고 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53쪽)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는 그것에 맞서기로 한다. 똑바로 쳐다보았고, 눈빛을 나누었고, 맞잡은 손아귀 안에서 함께의 힘을 느꼈고, 행동하기로 했다. 단번에 실비오가 구축해놓은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 어렵겠지만, 그것에 작은 돌이라도 던져보기로 한다. 심지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비폭력 저항! (지배계층의 물리적인 힘이 너무 세서 애초에 그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저항할 수 없기도 했다만) 거위 마르게리트가 처형당한 장소에 마르게리트 꽃 한 송이를 그려두는 것이었다. 이후에 '마르게리트' 꽃은 저항의 상징이자, 무고한 존재들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렇게 예술은 또 한 번- 무기가 되었다. 떠돌이 어릿광대 쥐 아젤라르의 무대처럼, 무고한 존재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복지를 돌려달라는 봉기의 목소리처럼 마르게리트는 이곳, 저곳에서 피어났다. 그렇게 피어난 꽃은 억압하고 금지시킨다고 쉬이 저물지 않았다. 흩날리는 나뭇잎 속 마르게리트에도 실비오와 지배계층들은 흔들렸고,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직은 거기까지. 이제 막 흩날리기 시작한 마르게리트 꽃잎은 동물 공화국을 뒤흔든 사건임에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유를 되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동물들도 행동하게 될 것이다. 마르게리트 꽃잎은 모두의 마음속에 굳어있던 자유의지를 깨웠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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