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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여섯 살 된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영어란 "Hello, How are you?" 하고 물으면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격언 같은 이 문장은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면 위태로워진다. 그러니까, 'I'm fine'말고 다른 대답을 했을 때. 요즘 어떤 일이 너무 신경 쓰인다거나, 어떤 일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괜찮지 않노라고 대답하면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그건 내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듯이. ...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지 않더라도 how are you?라는 물음에 으레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 이면에 말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더라도 굳이 꺼내들지 않는다. 상대는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으므로.
하지만 우리 삶은 언제나 'I'm fine'의 상태일 수 없고,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지-하던 순간에도 고민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 해 준다면, 언제고 모두 털어놓을 용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외로운 사람들일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도 수다스럽게 늘어놓으니까. 아마 자기 얘기를, 지금껏 살아온 긴 세월과 과거의 기억을 들려줄 것이고, 그것을 가만 듣고 있는 사이 모두의 인생은 스펙터클하며 동시에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이 책 <어떻게 지내요>는 그렇게 쓰였다. 주로 여성의 삶의 일화들, 나이 들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애틋함이 없고, 남녀 관계는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하게까지 여겨진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남편은 부인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삶의 기대에 부풀고, 평생 자신을 향한 딸의 적대감을 상대해야 했던 친구는 자살 계획을 세우면서도 딸에게 알리지 않는다. 사회의 온갖 악과 부당함을 향한 분노는 어쩐 일인지 다시 갈등을 빚어내고, 그렇게 삶은 갈수록 격렬한 전쟁터가 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그녀들 가까이에서, 하지만 그녀들은 아닌 채로 한 걸음 떨어져 기록자의 역할로 머문다. 직접 겪은 일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친구의 이야기이거나 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고 화자는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중립적인 태도로 들은 이야기만을 전달한다. 그렇게 'I'm fine'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건너 건너, 그것도 '책'이라는 형태로 내게 왔다. 그저 책이었으므로(사실 책 속에는 그녀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므로), 그리고 이 책이 소설이라는 이유로 나는 한동안 그녀들의 감정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화자의 태도도 나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내 친구가 암이에요,라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트레이너가 했던 "정말 안됐네요."라는 말은 나를 크게 뒤흔들었다.
누구나 항상 그렇듯 그도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식적인 말. 하지만 그의 탓이 아니다. 우리 언어가 거칠고, 속 비고, 말라비틀어져서, 감정 앞에서 언제나 어리석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니까. (본문 중에서, 165쪽)
그리고 그는 헬스장에서 나온 화자를 따라 나와 꼭 안아주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릴 수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어떻게 지내요'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내 친구여야 했는지- 원망하고 괴로워하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중요할까. (이미 고통은 친구의 삶을 잠식시켰는데) ... 친구에게, 또 화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렇게 따뜻한 마음 한 조각 아니었을까.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l est ton tourment? (본문 중에서, 122쪽)
어떤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안부를 물어왔는지 되짚어본다. 안부를 묻는 마음 안에 조금 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I'm fine'말고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 때, 열어줄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