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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평점 :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아파트 입구에 조형물이 하나 있었다. 오각형이 알록달록하게 붙어 축구공 모형으로 둥글게 설치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놀이기구 같았던지 자꾸 오르려고 했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넓은 앞마당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애물단지였다. 해서 설치된 지 만 4년을 넘기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철거 동의 여부를 묻는 설문에 나 역시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동의했더랬다.
미련 없이 떠나보냈던, 철거되고 나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는 그저 광장으로 주민들에게 돌아왔다. 조형물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철거되고 보니 꽤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 왜 굳이 조형물을 설치했다가, 금세 철거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졌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거리의 조형물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우선 동상과 조각 등 정부 주도의 기념 조형물이다. 두 번째, 문화예술진흥법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 건축비의 1%(2000년부터 0.7%)를 회화, 조각 등의 미술품에 쓰도록 한 이른다 '1% 법'에 따라 설치된 미술품이다. 세 번째, 서울의 경우 서울시가 공공미술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하는 '서울은 미술관'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제작한 작품이다. 마지막은 기업들이 건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설치한 사례다. (본문 중에서, 10쪽)
아파트의 조형물은 두 번째 경우에 속했던가 보다. 건축비의 0.7% 라면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일 테니, 조각을 광장 안쪽으로도, 바깥쪽으로도 설치한 것일 테고. 의외로 거리에 미술작품이 많다, 싶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의한 것이겠거니, 싶다. 그런데 거리로 나오면 그만인가. 건물 앞을 지키고 서서 누구나 오며 가며 감상할 수 있는 미술품은 대개의 순간 외면받는다. 왜 그럴까. 이쯤에서 우리는 수많은 거리 조형물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거리로 나온 대개의 미술품은 '조각'이다. 조각은 그 자체로 공간감을 지니기에 어디에, 어떻게 세워져 있는가에 따라 맛이 다르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미술관에서 예술의 아우라를 풍기며 전시되던 작품도 거리로 나오는 순간 처지가 달라진다. 미술관에서는 모든 환경이 작품을 떠받들어주지만, 거리로 나온 순간부터 조각은 일상의 풍경과 경쟁해야 한다. 알록달록한 간판, 근처 빵집에서 새어 나오는 빵 굽는 냄새, 어딘가로부터 시작된 음악소리, 자동차 소음- 여기에 더해 핸드폰 화면, 나란히 걷는 이의 이야기까지. 작품을 오롯이 감상하기에는 우리의 시선을 뺏는 요소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 사이에서 거리로 나온 '조각 작품'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아니, 어떤 작품이 거리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어떤 작품은 특정한 거리에서 고유의 의미를 생성해낸다. 그러니까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놓일지에 대해 입체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공공미술은 그랬던가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1% 법에 떠밀려 무엇이든 빨리 설치해버리고자 했던 관행으로 공공미술이 외면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이 책 <거리로 나온 미술관>은 숱한 고민을 안고 탄생한 공공미술의 뒷이야기가 실려있다. 공공미술의 좋은 사례라 하면, 해외의 것이 먼저 떠오를 법도 한데 저자는 끝까지 국내 공공미술 작품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광화문 흥국생명 앞의 '해머링 맨'같은 유명한 작품도 있지만, 인천국제공항의 아트포트 프로젝트, 국립중앙박물관의 건축 이야기, 녹사평역, 서울로7017, 중랑 용마폭포공원, 서대문 유진상가 등의 이야기도 실려 공공미술에 대한 시각을 보다 확장시키기에 용이했다.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던 것은 미술과 건축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뒷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기둥 양식이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의 남북 체제 경쟁의 산물이라는 점과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상이 그 자리에 설치되는 과정에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 등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피면, 거리로 나온 많은 작품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 늘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대할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내 삶은 미술관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현대의 조각들은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 삶에 와 안긴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순간들을 기대하게 됐다. 이제, 조금 더 두리번거리면서 걸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