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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9월
평점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식상한 말도 없다. 하지만 '예술가의 일'을 생각하자면 이 상투적인 문장을 피해 가기가 어렵다. 실로 그들의 인생은 짧았고, 그들이 남긴 예술은 길게 남아 오늘의 우리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작품이다. 하여 그 작품이 오늘의 내게 어떤 말을 건네오는지가 그들의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부러 예술가의 삶을 멀리하려 애썼다. 알려진 몇 조각의 에피소드들을 아는 것이 작품을 더 깊고 넓게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외려 그 얄팍한 앎으로 말미암아 어떤 쪽으로든 편견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가의 삶과 그들이 했던 일들은 앎으로 불쑥 내 안에 들어왔다. 고흐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해져버린 고흐와 테오의 편지들이나 타히티에서의 고갱의 삶, 알폰스 무하의 파리, 전 세계를 여행하는 천경자까지. 작품에 비추어진 그들의 삶은 작품을 보는 나의 시선을 조금씩 비틀었더랬다.
이 책 <예술가의 일>은 '예술가의 삶'에 주목한다. 매경 프리미엄에 저자가 오랫동안 연재해 온 예술가에 대한 글 모음인 이 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의 사연을 다룬다. 인류의 유산이자, 시대의 상징이 된 작품을 남긴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한 사람분의 삶을 살았고, 세계적인 예술가이기 이전에 개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역사적, 예술적 소명을 업고 캔버스 앞에 선 이는 드물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했었더랬다. 누군가는 고독하게 혼자서, 누군가는 시끌벅적하게. 그렇게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르네 마그리트, 샤갈, 가우디, 프리다 칼로, 바스키아, 에드워드 호퍼처럼 이름만으로도 대표작이 떠오르는 예술가를 다루었는가 하면, 수잔 발라동, 페기 구겐하임, 조지 로메로처럼 다소 낯선 예술가도 다루었다. 화가를 많이 다루었지만, 영화감독, 사진작가, 무용수, 가수, 재즈 피아니스트 등 폭넓은 분야의 예술가를 다루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박남옥 감독이었다. 1955년 개봉한 <미망인>을 만든 그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의 미망인을 그렸다. 영화는 미망인인 주인공을 가련하게도, 타락한 모습으로도 그리지 않았다. 해바라기가 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듯, 자유의지에 따라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은 진취적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진취적인 장면은 카메라 뒤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은 한 살배기 딸을 등에 업고 촬영장을 누볐었단다. 제작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새벽에 직접 장을 봐서 스태프 먹일 밥을 만들고, 촬영 중간중간 아이 기저귀를 갈았을 그녀를 생각하니 '뜨겁다'는 말로는 표현이 다 안될 복잡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한 명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데 할애된 십여 페이지의 글과 그림이 그들 삶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화폭 앞에서, 무대 위에서, 그리고 거리를 누비며 자신의 세계를 꿈꾸고 실현했던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자니 어떤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전설'의 반열에 놓고 싶지는 않다.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모두 섞여 아름다운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