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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1년 8월
평점 :
두 개의 세계, 성별이 바뀐 나 자신, 내 분신인 엄주영의 망나니짓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 저 세계의 나 역시 당해야 했던 가정폭력과 무력하게 목격해야만 했던 배중숙 씨의 아픔, 그리고 내가, 엄주영과 심연재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다, 전부 다. 내가 엄주영의 결혼을 막고 싶어 한단 사실까지, 전부 다. (본문 중에서, 193쪽)
이 소설의 주인공 주영은 엄마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평행세계에 떨어졌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뿐인데,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니! 그것도 나의 이름을 하고서, 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맞다. 주영은 그곳에서 남자인 '나'를 만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엄주영은 시원찮다. 그 시원찮은 망나니가 앞날이 창창한 연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게 주영은 당황스럽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싶다가도 이 세계에서도 편치 않은 엄마 배종숙씨와 예비신부 연재를 위해서 남자 엄주영을 좀 나은 인간으로 바꿔보기로 결심한다.
해서 이 소설은 은근한 장르물에, 대놓고 성장 서사를 지향한다. 같은 부모,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성별이 다르다는 조건 하나로 완전히 다른 인물로 성장한 두 엄주영은 서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차다가도, 서로의 앞날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준다. 그 짠 내 나는 진심이 그들이 그러모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과 맞물려 뭉클한 마음을 빚어낸다.
"넌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네가 자라나야 했던 그 집, 그 지옥 같은 집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 누가 뭐라 해도 죽어라 너를 믿는 심연재의 운명을 너희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어? 그러면 행복하겠어? 그러면 만족하겠어?" (본문 중에서, 194쪽)
여자 엄주영이 남자 엄주영을 앞에 두고 다그친다. 아빠처럼 살고 싶으냐고, 그래서 저렇게 예쁜 연재를 엄마처럼 살게 할 거냐고. 남자 엄주영은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안 된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가려고 하는 길은 자꾸만 어긋난다. 한번 옮긴 발걸음을 다시 돌리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자꾸만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결국엔 시들시들 스스로를 말라 죽일 곳으로 간다. 그마저도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지금까지의 삶을 모조리 부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자갈밭을 향해 걷는 일보다 어려워서일까. 아니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서 계속 도망치고- 등 돌리고- 관계의 골을 깊게 만드는 것 아닐까.
같은 부모, 같은 가정환경에서 같은 폭력 아래 자란 여자 엄주영은 남자 엄주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깊게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자갈밭을 빠져나오기 위해 숱하게 노력했을 테지만, 그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알고 있으므로. 자갈밭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알고 있으므로.
"너는 어떻게 살았냐?"
"뭘 어떻게 살아."
"그 화를 다 어떻게 참아냈어? 복수하고 싶고, 누구든 괴롭혀서 억울하고 불행한 마음을 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참았냐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다른 집은 안 그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런 마음이 들면 아무거나 다 부수고 싶어졌는데. 너는 안 그랬어? 너는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며. 집 분위기도 똑같고." (본문 중에서, 236쪽)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 여자 엄주영과 남자 엄주영이 사는 세계는 비닐하우스가 하나쯤 더 많거나 적고,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한 명쯤 더 많거나 적다. 그 틈에- 누군가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사람을 잇고, 사랑을 만드는 것 아닐까. 그런 게 평행세계라면 어쩐지 요정을 믿어봐도 좋을 것 같다. (마주 잡은 손을 감각할 수 있는데 논리와 인과가 무슨 소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