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왜 쓰는가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이종인 옮김 / 예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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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지난 70~80년 동안 '작가는 왜 쓰는가'하는 문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왔지만, 아직도 포괄적인 해답은 얻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로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작가가 되는 과정은 책을 한 권 발간하는 것으로 시작되거나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오히려 그 과정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어 작가가 타자기에 글자를 찍어내는 한, 아니 오늘날 같으면 워드프로세서에 글자를 쳐 넣는 한 계속된다. (제임스 A. 미치너, 작가는 왜 쓰는가,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 <작가는 왜 쓰는가>는 저자 미치너의 두 가지 작업을 담은 산물이다. 하나는 창작의 일반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특정 동료 작가들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분석해보는 것이다(이를테면 '서평'의 방식으로). 평생 40여 권의 책을 썼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7,500만 부 이상을 팔았던 그는 대단한 독서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는 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작가를 분석해 오며 느낀 것들의 일부가 녹아있다. 대가든 소가든, 때로는 잡가라 불리는 이들의 작품이든- 그는 그들 각자의 스타일과 테크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분석하는데 매진했다. 그 과정은 '그들은 작가라는 직업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했던가'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겠고, '어떤 실수를 저질러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적 물음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스타일과 테크닉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를 발견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발견한 '창작에 일관하는 몇 가지 신념'의 시작이 굉장히 철학적이고, 대자연적이라는 데 있다.  

- 나는 내가 동물 왕국의 일원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원칙은 내가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전도서 3:18-19에 나와 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사람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같다.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이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됨이로다.'
-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고 보존할 필요가 있는 이 유한한 지구에 거처하고 있다.
-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그 전체를 절대로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에 거처하고 있다.
- 나는 나처럼 동물인 다른 인간들과 이 지구 상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 인간의 행태와 제도는 충분히 연구하고 분석할 가치가 있다.
(제임스 A. 미치너, 작가는 왜 쓰는가, 102쪽)

이는 '위대한 소설은 작가가 외롭게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지 학술적 조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결국은 사람. 좋은 소설은 감동적이고 멋진 사람들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힐 여사의 감동적이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를 여러 번 강조한 데서도 드러난다. 100년이 가도, 200년이 가도 사람들이 계속 읽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지, 대학에 갇힌 소수의 문학 전공 교수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쌓아놓고 읽는 책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그런 책들이 중요할 수는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이 쓰인 방식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책은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 장인 '떠오르는 한 작가에 대하여'는 그 서술 방식이 에세이나 소설에 가깝고, 두 번째 장인 '다른 작가들에 대하여'는 서평이나 논평에, 마지막 장 '나이 들어가는 한 작가에 대하여'는 시에 가깝다. '작가는 왜 쓰는가'하는 실존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토록 다양한 형식을 빌려 쓸 수 있다니. 미치너의 창조성과 센스가 돋보이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아차, 그래서 '작가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직 그 대답을 얻지 못했노라고 책의 서두에 썼지만, 그는 책의 말미에 그 대답을 숨겨놓았다.

 

"밤에 글을 쓰기 위해 일어나 켜놓은 집안의 불빛을 보았어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나요?"
"내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오. 하나는 열심히 일하면서 내 심장을 자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지런히 글을 써서 내 영혼을 밝히는 것이오." (제임스 A. 미치너, 작가는 왜 쓰는가, 284쪽)

 

 

자기보다 선배이면서 위대한 명성을 획득한 작가의 원고 뭉치를 손에 들어볼 때, 그리고 그 작가가 초판 발간일에 친필 서명해서 친지에게 증정한 책자를 펼쳐볼 때, 같은 작가로서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그 위대한 작가들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흘렸을 땀이 손에 전해오는 느낌, 바로 그것이다. 이 순간 언어의 끊임없는 유산은 살아 움직이는 실재가 된다. (제임스 A. 미치너, 작가는 왜 쓰는가,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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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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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이라는 제목은, 방점이 '공간'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자 작가의 인테리어'를 다룬 책은 아니다. 작가의 창작 공간, 아니 나아가서는 그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글쓰는 공간'을 들여다봤다. 취재가 아닌 사진과 자료를 통해 상상하는 방법으로(그래서인지 책 속의 방대한 '사진자료'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때 그 시절의 그녀들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나는 기분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글을 쓰기 전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부터, 그의 글이 "구두점을 찍지 않고 반복되는 단어들이 굽이쳐 흐르는 듯"했다고 적는다. 결국 여자이기에 앞서 '작가'를, '작가의 삶'을 다뤘다.

그럼에도, 그들이 모두 '여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일찍이 가사노동과 육아로 여자들은 사회생활에 제약이 컸고, 그것은 글쓰는 작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쓸 장소가 집에 없었거나, 난방 시설이 열악했거나, 이래저래 여건이 안 되었던 여성작가들은 카페나 도서관을 전전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꼭 알맞는 '글쓰는 장소'를 찾기도 했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그렇게 쓴 글로 돈을 벌어 자신만의 '글쓰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녀들 모두,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고 작가로써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파리의 자그만 방 안에서 등나무 의자에 앉아 타자기로 이 글을 쓴다. 창문 너머로 정원이 보인다. 나는 벌써 1년이 넘도록 이 삭막한 거처에 살면서 일을 하고 있다. ... 내가 필요로 하는 단순함과 일시적인 고립감을 맛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장소다." -수잔 손택(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167쪽)

수잔 손택은 자신에게 글쓰기는 '차가운 호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즉, 처음에는 호수에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뛰어들고 나면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걱정과 별개로, 손택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글을 쓰지는 않았단다. 단, 한번 글쓰기에 몰입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노란색 종이에 연필로 천천히 글을 써내려가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녀가 가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내다보았을 창문 너머의 정원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아, 내게도 작은 서재가 있었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 내게도 서재 욕심이 있다. 신혼집을 꾸미면서 드레스룸과 서재를 겸한 방을 만들기는 했는데(내 취향을 듬뿍 담아 책상은 정말이지 널찍한 것으로 샀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니 책상에 앉을 시간이 좀처럼 없다. 수유하는 동안 수유쿠션위에 책을 올려놓고 짬짬히 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 그렇게라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깊은 한숨이 절로 새어나온다. 그러다 토니 모리슨을 만났다. "아이들이 어려서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전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글을 전혀 쓰지 않았어요.(124쪽)" 그녀의 한 마디에 힘을 얻는다. 수유쿠션위면 어때. 지금의 내게는 그곳이 최적의 공간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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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허벅지 다나베 세이코 에세이 선집 1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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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자를 알게 됐을 때 가장 깜짝 놀랐던 게 뭐예요? 가르쳐주세요."
"허벅지였습니다."
"허벅지?"
"아, 여자의 허벅지가 이렇게 굵은 것이로구나. 처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굵고 하얬어요."
(다나베 세이코, 여자는 허벅지, 268쪽)

여자의 '성(性)'을 다룬 책은 많지만, 대체로 그런 책들은 남자들이 쓴다. 그러다보니 진짜 여자가 빠져있기 십상이다. 판타지적 오류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쓴 책이라고 다 진짜 '여자의 성'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건조하고 이론적이어서 재미가 없거나 과도하게 낭만화되어 있어 같은 여자가 읽어도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되 불쾌하지 않고, 유머와 위트가 넘치되 지적이게. 그런 글은 불가능한걸까.

제목부터 흥미로웠던 다나베 세이코의 <여자는 허벅지>. 연애소설 대가로 불리는 그녀가(그녀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의 작가다) "여자라는 동물을 그렇게 몰라?"라는 문제의식에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주간지 '슈칸분슌'에 연재한 칼럼 중 일부를 묶었다. 집필을 시작할 때 40대였던 저자는 1928년생. 그러니까 올해 88세의 할머니다. 70년대에 40대 여성이었던 그녀가 쓴 여자의 성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발랄하다. 솔직하고, 유쾌하고, 때로는 발칙하기까지하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문학성을 놓지 않았다. 호시탐탐 바람을 피워대며 언제 어디서나 미소녀를 갈망하는 중년의 '가모카 아저씨'를 등장시켜, 온전한 1인칭 장르인 에세이를 유쾌한 대담으로 변모시킨 것 역시 신의 한수. "아내들은 과거 귀족처럼 30세가 넘으면 후임에게 침소를 물려주고 퇴소식을 해야한다"는 가모카의 주장에 "후임은 아내가 지정하는게 귀족들의 전통이었다"고 쏘아붙이고, 이내 "우리 마누라는 불감증으로 지정할 게 뻔하다"며 두려워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담은 것 역시 재미나다.

두 사람이 벌이는 음담패설의 핑퐁은 불륜, 바람기, 월경, 정관수술 등 다양한 성적 주제를 넘나들지만,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여자의 성욕은 평생에 걸쳐 만물과 닿아있는 것으로, 남자처럼 좁고 깊게 응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 "여자의 성욕은 남자처럼 좁고 깊게 응고돼 있는 것이 아니다. 침대 속뿐만 아니라 온갖 것에 넓게 퍼져 끝없이 이어져 있다. 남자에게 성욕은 주사기에 들어 있는 약간의 에센스이고, 여자에게 그것은 양치액처럼 희석해서 오래도록 쓰는 것이다. 넓고도 깊게 어디에나 이르러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여자의 성욕이다.(38쪽)" 한번쯤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열번쯤 끄덕이게 되는 그녀의 통찰력.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그녀의 음담패설이 단순한 음담패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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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 집 - 2016년 제4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하유지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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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떤 카페로 인터뷰를 나간 적이 있다. 카페는 '전혀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카페가 있을 것 같은 곳'들은 땅값이 너무 비싸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그녀는 베시시 웃어 보였다.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는 단순히 커피만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소통하게 했고, 이윽고는 마을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사회운동가라고 해야 할까?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특유의 소박함과 편안함, 그러면서도 왠지 비장미가 느껴졌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가 소설 <집 떠나 집>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소설은 그렇게 따뜻했고, 편안했고, 즐거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순간도 부담스럽지 않게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의 주인공 동미의 상황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삼복더위에 에어컨 한 번 마음대로 켜지 못해 서러움만 삼키던 스물아홉의 동미. 이야기는 그녀가 '이건 뭔가 좀 잘못된 인생이다'라는 깨달음에 집을 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짐가방을 끌고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갈 곳은 없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카페 '모퉁이'. 충동적인 가출에 일자리까지 얻게 된 동미는 '모퉁이'로 출근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어떤 사건도, 사고도 없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병렬식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 '삶'이 있다. 저녁을 준비하는 오후의 분주한 손길이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정성스레 올린 라떼아트, 사람을 이끄는 신비한 힘을 가진 고양이까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번듯한 회사에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들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가난하고 별 볼일 없다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알바생이 백수보다야 백번 낫다만, 알바생보다 나은 인생은 없을지 곰곰 생각해봐라. 인생 한 번뿐이야."
"한 번뿐이니까 난 좀, 즐겁게 살래요."
"에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퍽 즐거워는 보인다, 안 그래도."
"그러게. 누나 말이야, 인생의 쾌락 운운하고 꽤나 신여성이 되셨어?"
(하유지, 집 떠나 집, 241쪽)

피식, 픽픽. 그렇게 웃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멈칫하게 된다. 그 웃음의 꼬리를 한숨이 잡았다. 밀린 설거지와 청소를 해두고 뿌듯한 마음에 돌아섰는데, 거울 속의 내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다. 그래도 주위를 한번 쓰윽- 돌아보며 웃는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했던가. 소설은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우리를 일상의 행복 속으로 이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착하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예쁘다. 그래서인지 잘 만들어진 어느 일본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고, 일전에 만났던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렇게 소설은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행복의 무게를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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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여자 -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새로운 개인의 탄생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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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웹서핑하다가 네 블로그 봤다?"
순간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대개의 글이 전체 공개로 설정되어있고, 굳이 별명 대신 실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꽁꽁 숨겨놓은 일기장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 감정의 기원을 찾을새도 없이 그날 밤 당장 컴퓨터를 켜고 너무 개인적인 것 같은 포스팅들을 다 비공개로 전환해버렸다. 그렇게 드러나있으면서도 숨어있는 공간, 그게 바로 여기- 내 블로그였다. 한 오백 개쯤인가, 그간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내키지 않는 것들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나니- 그제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 그랬다. 모든 것을 드러내면서도 그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전체 공개이거나 비공개.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공개되는 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그런 관계가 주는 소속감 같은 것 역시 갑갑하다 여겨졌다. 그래서 때로 미치도록 말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꾹, 참고 애써 넘기기도 했다. 그런데 임경선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내게 좀 더 솔직해지고 싶어졌다. 깎다 말아 뭉툭한 내 연필을 더 오래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에 내 상처는 다시금 찔릴지 모르겠지만, 그 고름을 터트리고 나면 언젠가 말끔히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처'라는 단어는 '나 바빠'라는 말만큼이나 내가 금기시하던 것이었다. 스스로를 과대하게 보는 자기중심성처럼 느껴져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문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상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피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마치 내 상처나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전시하거나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나의 여건상 왠지 불평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무리한 겸손도 작용했다. 하지만 내가 자신의 결핍을 정면으로 바라보거나 받아주지 않는다면 대체 이 세상에서 누가 그걸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임경선, 나라는 여자, 에필로그:상냥한 상처 중에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는거지, 라는 생각은 에필로그의 몇 개의 문장 속에서 해결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핍과 상처의 맥을 조심스럽게 짚어가면서 '임경선이라는 여자'를 더 정직하고 선명하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나라는 여자>는 묘한 느낌을 준다. 분명히 상처투성이인데, 상처로 읽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그것들을 상처라고 말한 순간, 이미 그것들은 상처가 아니게 된 것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때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솔직한 그녀의 글들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 있던 단단한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간 꾹꾹 눌러 담아 꽤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표피만 단단해진 것처럼 보일 뿐- 그 속은 아직 액체 상태라는 것 역시 그녀의 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절대 단단해지지 않을 액체 상태의 무엇이야말로, 진짜 '나라는 여자'일지 모르겠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내게 솔직해져보려고 한다. 속마음을 들킬까 걱정돼 굳이 빙빙 돌려쓰던 글들을 좀 더 단순하게, 직설적으로도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운이 좋다면, 내 상처와 결핍들이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원시적인 힘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힘이 됐다. 그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힘을 얻으니 그것 역시 참 묘한 일이다. 산문의 힘이란. 허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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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0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블로그가 알라딘입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 블로그를 알면 괜찮은데, 반대로 책 안 좋아하는 사람이면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