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이상하든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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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갈 때는 계단 가장자리를 밟아 소리 나지 않게 하기, 맨홀은 피해 다니기, 출근하기 전에는 맞은편에 사는 멋진 언니 보고 가기. 침실에 드리운 그림자마저 반듯해서 좋다는 그녀의 이름은 '정해진'이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어딘지 하나씩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잠들지 못해 '불면증'이라는 편의점을 계속 확장해나가는 사장님, 외출이 싫어 집 앞 편의점에서도 배달을 시키는 극작가, 공항 가까이만 가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 7년째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영국인 마크, 사용하지 않는 우체통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매일 편지를 쓰는 초등학생 다름이. 아, 수녀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동갑내기 배우 지망생 승리까지. 그리고 급기야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만초씨까지 말을 걸어온다.


판타지이면서도 판타지가 아닌 해진의 세계는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에이, 말도 안 돼'를 중얼거리면서도 그녀의 오후가, 그녀의 내일이 궁금해 자꾸 책을 들추게 되는 것도 그래서였다. 마치 처음 자취를 시작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할 때보다 모든 것이 축소되거나 생략되기 일쑤였는데, 그런 것들이 불편하기는커녕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자취하던 원룸을 베이스캠프 삼아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좀 더 멀리 나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쪽 골목으로 돌아서면 무엇이 있을까?'하는 호기심은 나를 무작정 앞으로 걷게 했다. 그랬던 시절이 새삼스럽게도 떠올랐다. '정해진'대로 삶을 꾸리는 것 같지만, 승리를 집 안에 몰래 들인다거나, 짙어졌다가 옅어지기도 하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람은 아닌 존재 '만초씨'와 친구가 되는 과정이 그랬다.​


그런 해진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었던가,를 생각했다. 스무살이 되면,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면, 서른쯤 되면 막연히 어른이 되었을 거라는 청소년기의 기대와는 달리- 그 시기를 지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커리어라고 우기고 싶은 시행착오와 반성, 후회, 반짝였던 기대 같은 것들이 남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꼭 그때가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펼쳐질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마도 이렇게 평생을 성장하고 좌절하다가 고통과 고독 속에서, 혹은 상처와 슬픔 속에서 삶의 본질을 깨달아갈 것이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삶의 롤러코스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 둘 다 한걸음 더 나아가있기!'


라던 승리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굳이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뤄졌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해진은 맨홀 뚜껑을 밟을 수도, 밟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고- 숨어지내던 승리는 해진의 가족과 함께 마음껏 감탄하며 해물잡채만두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울컥한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그건 리뷰에서는 못쓰겠다. 읽어보시기를!)​


그런 작은 나아감들 사이에서 위로받는다. 어른이면서도 어른이 아닌 우리는, 어른이 뭐지? 언제 어른이 되지?를 고민하는 스무살 앞에서 말을 잃는다. 동시에, '언제 어른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어른이 되느냐'가 중요하겠다는 그녀들의 통찰 앞에 조용히 밑줄을 긋는다. 그들의 성장을 응원하며, 나의 오늘에 나아감이 있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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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전범선 지음 / 포르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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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별 다섯 개를 먼저 그려야겠다. 너무너무 좋았다는 진부한 말밖에 번뜩 떠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너무 좋았다. 이 책의 초고는 2021년 첫 열흘 동안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서 쓰였다. 사랑하는 이와 단둘이 산속 황토집에서 핸드폰을 끄고 지내는 사이, 그들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 사유의 과정을 글로 남겼다. 그러니까 이 책은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또 요가와 로큰롤을 오가는 '사랑'이야기다.



나를 비우고, 특권과 자존심, 자의식을 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을 채워 넣는 공부를 한다. 눈치 보지 않고 휘뚜루마뚜루 살았던 내가 세상 돌아가는 눈치를 본다. 사랑이란 눈치를 보는 일이다. 우리 모두의 하나뿐인 집, 지구에서 함께 고통받고 살아가는 식구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다. 사랑은 능력주의가 아니다.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랑은 비거니즘이다. (본문 중에서, 19쪽)



이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느낌표 열 개를 썼다. 그동안 내게 비거니즘은 '채식주의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곧잘 글루텐 프리나 키토처럼 다양한 식습관 중 하나로 치환되어 이해되었고, 그들 사이에서도 우유를 먹거나 안먹는 것, 계란을 먹거나 안먹는 것 등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 같아 어쩐지 불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건대 비거니즘은 '철학'이었다. 좀 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채식을 선택했다면, 그 역시 나를 '살리기'위한 것이다. 나를 살리는 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너를 살리는 일. 그 대상이 꼭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오래된 부족주의에 다름 아니다.



해서 '비거니즘'이란 무엇이었던지 다시금 뒤적여본다. 음식, 의복 등 어떤 목적에서든 동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와 학대를 최대한 배제하고, 나아가 인간, 동물, 환경에 이로운 식물성 대안의 개발과 이용을 장려하는 철학과 삶의 방식이라 정의되어 있다. 천천히 따라 쓰면서 '동물'에 다시 한번 밑줄을 긋는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겪으면서 의식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여성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물에게까지는 그것을 적용시키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무심한 착취와 학대가 가혹한 것이라면,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비거니즘은 취향이기 전에 엄연한 정치사상일지도 모르겠다.



요리에는 영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어 아무거나 먹던 날들이 많은 내게, 과일과 곡식으로 야무지게 차린 밥상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그것들을 상상하게 할 수 있다니!) 식물의 열매인 과일과 곡식을 그들의 '성기'라고 표현한 부분도 신선했다. 사과와 쌀을 먹는 것이 사과나무와 벼의 사랑을 먹는 일이라면, 씨앗을 뿌리는 일은 그들의 사랑을 세상에 나누는 일. 그렇게 사랑이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선순환적 구조를 상상하다 보니 에덴동산이 이런 곳이겠구나, 생각하게도 됐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그 무엇을 향한 학대나 착취가 없었다. 함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발 디디고 있는 땅, 먹고 마시는 것 모두가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고 내게로 왔다가 흘러나갔다. 당장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았지만, 그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름다웠다.



해서, '지금 우리의 관계는 틀렸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완전히 재정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됐다. 하나뿐인 지구라는 집에서 동고동락하는 식구를 전부 아우르는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 경계를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 여전히 흑인도, 여성도, 유대인도, 노동자도, 장애인도, 동성애자도- 그들이 그러하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오늘에.



놀랍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거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득시킨 그를 따라 오늘 저녁에는 고기를 줄이고, 채소를 올려보려고 한다. 그것이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행동'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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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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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벗 고갱에게,


내가 얼마 전 아를에 방 네 개짜리 집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소. 남부에서 작업할 마음이 있고, 수도승처럼 살아갈 화가를 찾게 된다면... 아주 기쁠 겁니다. 내 동생이 한 달에 250프랑씩 보내 주는 돈을 우리는 나눠쓰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내 동생에게 한 달에 한 점씩 그림을 보내면 되오. (스티븐 네이페,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에서 재인용)


이 소설 <아파트먼트>를 읽으면서 고흐의 이 편지가 떠오른 것은 나뿐일까.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이어가던 두 사람이 같이 생활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고흐 역시도 무척이나 설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를에서의 예술공동체를 꿈꿨더랬다. 어쩌면 영영 팔리지 않을 그림을 그리면서도 계속 그려야만 하는 명분은 필요했을 테고, 그런 그에게 동료는 분명 큰 힘이 되어줄 테니까. ... 이 소설 <아파트먼트>의 주인공 '나'도 어쩌면 고흐와 같은 생각으로 '빌리'에게 같이 살자는 제안을 던졌을 테다. 읽고 쓰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그들은 웬만큼 성공하지 않고서는 글 쓰는 것으로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설 쓰기에 매달린다. 서로의 가장 첫 번째 독자이자 멘토이며 든든한 조력자이기를 자처한 두 사람은 정말이지 빠르게 친밀감을 형성해나간다.


두 명의 작가가 데이트를 하는 건 재앙을 초래하는 일일 거라고 언제나 생각해왔고(작가들은 연기를 하듯 자신을 과시하거나, 말이 없거나, 아니면 그 두 극단 사이를 미친 듯 왔다 갔다 했고, 우리가 할 얘기라고는 그날 뭘 썼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못해서 얼마나 우울한지가 전부일 것이며, 그 모든 것이 고립된 섬 생활 같은 데다 근친상간적일 것이었다), 지리상으로 볼 때 장애물이 한둘이 아닐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나는 클레어와 문학적인 삶을 함께하는 환상을 품기 시작했다. 그 환상이란 우디 앨런 영화들에서 도용해온 클리셰였는데, 우리가 서로의 작품을 고쳐주고, 낭독회와 작가 사인회에 함께 다니며, 그런 다음에는 내가 원 나이트 스탠드와 2주쯤 이어지는 가벼운 관계들의 역사에서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그 모든 평범한 일들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102쪽)​


그래, 이 소설은 예술가-버디 소설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봐오던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 '다름'은 '나'의 솔직한 욕망에 있었다. 아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지원하에 글을 쓸 수 있었고, 어쩌면 곧 뉴욕의 아파트먼트를 갖게 될지도 모르는 '나'는 시골 출신에다 바텐더로 일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빌리'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할 줄 알며, 진지하면서도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통찰을 해낼만한 지식을 갖춘 '나'는 정제되지 않은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기도할 줄도 안다. 그런 '내'가 빌리에게 방을 하나 주기로 결정한 건 어쩌면 그의 도덕적/경제적 우월감에서 나온 결정일지도 모른다. 넌 언젠가 크게 성공하고 말 거니까, 난 그런 너를 알아봤으니까-하는.​


그것은 분명 진심이었을 테다. 하지만 빌리가 쓴 소설이 인정받았을 때, '나'는 아무리 해봐도 잘 안되는 관계들에서 빌리가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둘 때, 그리하여 그 옆에 서 있는 '내'가 빌리보다 더 작아진다고 느낄 때 '나'는 종종 무너져내렸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며,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느꼈던 최초의 매력이 변질되고 차이점은 두드러질 것이라는 생각은 '나'도 했지만, 그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의 인정투쟁기임과 동시에 패배의 기록들. ... 아프게도 작가는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두었다. 부러진 팔, 다리를 억지로 이어붙여 어찌어찌 '나'도 조금은 성공을 거두고 그리하야 두 사람의 우정은 영원했다,라는 식의 버디소설이 아니라서- 좋았고, 슬펐다. 그 슬픔은 아마도 또 다른 나에게서 나온 것. 지금의 나든, 언젠가의 나든- 나는 항상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으니까.


빌리가 나간 자리의 외로움은 이전의 쓸쓸함보다도 훨씬 컸다. 그제야 '나'는 돌아본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거지. 우리의 좋았던 시절은 '환상'이었을까. 나는, 계속 글을 써도 괜찮은 걸까. ... 아니, 내게 다시 '빌리'같은 사람이 생길 수 있을까.


​"날 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그 방을 쓰지 않는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

"아파트 얘기만은 아니고. ... 난 뉴욕에서 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거든. 그랬더라면 그냥 혼자서 군인처럼 헤쳐나가야 하는 좀 외로운 시간이었을 텐데. 특히 지하실에서 보낸 처음 그 몇 주는. 그래서, 고맙다고, 친구."

"나도 마찬가지야." (본문 중에서,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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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X다 - 부디 당신은 O를 골라요
김별로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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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인생, X다>, 저자는 '김별로'다. 그게 본명일 리 없을 테니, 이 책을 쓰는 동안 그는 스스로를 별로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제목에 적힌 X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대입해 보기도 했는데- 부제로 '부디 당신은 O를 골라요'를 쓴 걸 보니, X는 그냥 X였던 것 같다. 그는 왜 자기 인생을 X라고, 스스로를 별로라고 생각했을까. ...라고 썼지만 사실 내 인생도 O와 X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선뜻 O쪽으로 손이 가지 않는다. 그건 내 인생이 X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 아닐까,라고도 잠시 생각한다.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인생에서의 O는 아주 잠깐 왔다가 사라질 뿐, O가 지속되는 인생이란 없는 거 아닐까, 하고.



그럼에도 자기 인생을 X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O쪽으로 손이 선뜻 나가지 않았던 만큼이나 X를 선택하기도 힘들다. 그건 모두가 자기 삶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일 테다. X를 선택하는 순간,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을까 봐. 그 순간 스스로 자기 삶을 포기하게 될까 봐. ... 그렇게 우리는 O와 X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인생을 X라고 썼다. 문장이 짧아서 그런지, 비장하게도 느껴졌다. 그가 자기 삶을 X라 하게 된 데는 림프종이라는 암이 있었다. 림프종, 림프종... 병명을 계속 되뇌었다. 누가 그 병에 걸렸다고 들은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생각했었는데, 허지웅이라는 것을 한참 읽다가 알았다. 병명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게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 건지는 알지 못했다. 척수 검사, 무균실, 항암치료 같은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르는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맞다. 이 책은 일종의 항암 에세이다. 하지만 어떤 고통과 슬픔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 결국 이겨내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좌절했고, 힘들어했으며, 항암치료를 받기 전에 한참 동안이나 전국 각지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보기도 했다. 림프종에 좋은 것들이라면 뭐든 챙겨 먹었고, 안 하던 운동도 했다. (항암에 도움이 된다며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떠나기도 했더랬다. 이 에피소드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마음이 가는 것이었다) 물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스스로 암환자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을 즈음에는 연애도 했다. ... 결국은 환자였고, 혼자였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의 지난날과 함께 숱한 X를 그렸다. 처음에는 그에게 남은 날들이라던 2년을 달력 위에 그렸고, 나중에는 병원에 입원하는 날을, 밥을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을, 항암치료를 받은 날과 앞으로 더 받아야 하는 날을, 무균실에 있어야 하는 날을 X로 표시해나갔다. 그렇게 X가 계속 쌓였다. XXXXXX. ... X를 계속 쌓다 보니 그건 왜 X 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에 X가 아니라 별이나 하트 같은 거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다 문득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X와 X 사이에 만들어지는 다이아몬드. X의 인생에서도 뭔가 반짝이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다가, 또 하나를 더 깨닫게 되었다. O와 O 사이에도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인생이 O든, X든 결국 다이아몬드를 만들어가는 과정 아닌가. 다이아몬드도 원석은 보잘것없다던데, 과정이야 어쨌든 그렇게 인생을 다듬어 자기만의 반짝임을 찾아내야 하는 건가 보다.



그러니 치얼스!


가끔 O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X인 우리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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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법 빗자루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 지음, 용희진 옮김 / 키위북스(어린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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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마법과 마녀, 유령이 등장했다. 꼬맹이였던 나는 '으으으'하고 무서운 체를 하면서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때로 '에이, 거짓말'하고 할머니를 올려다봐도, 할머니는 '아닌데, 진짜 그랬어. 지금은 아니고, 아주 옛날 옛날에'라며 뻔뻔한 연기를 했다. 그러면 금세 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옛날 옛날에 일어난 어떤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이 그림책 <어느 날, 마법 빗자루가>는 그림책의 고전 작가라 해도 좋을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작품이다. (서지정보를 보니 1992년 작품인 것 같은데, 최근에 키위북스에서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영문 제목은 The Widow's Broom) <쥬만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마법사 압둘 가사지의 정원> 등으로 익히 알려진 그의 새로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환상과 마법에 기반한다.

마법 빗자루가 언제까지고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로 시작하는 이 그림책. 영원할 것 같던 빗자루도 하루하루 낡아갈 테고, 아무리 좋은 마법 빗자루라도 언젠가는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상상은 마녀의 소지품에 불과했던 '빗자루'에 주목하게 한다.

마녀는 떠났지만, 여전히 불시착한 상태의 빗자루. 마녀를 태우고 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법 빗자루'라 신비한 능력은 남아있었는데! 스스로 벌떡 일어나 집안을 깨끗하게 쓴다거나, 한 번만 말해줘도 척척 알아듣고 여러 가지 일을 해낸다거나(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닭에게 모이 주는 빗자루라니!)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연주했더랬다.


이 신비한 빗자루 이야기가 마을에 퍼지자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빗자루를 보고서는 '경악'하거나 '감탄'했고, 종국에는 빗자루를 '악마'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빗자루를 망가트리거나, 없애려는 시도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아이들이 빗자루를 괴롭히고, 강아지까지 빗자루를 물어뜯어도 쉬이 망가지지 않자 나중에는 마을 어른들까지 나서서 빗자루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다. (아니, 이게 이럴 일인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하고)

그러나 결국은, 모든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빗자루를 없애려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게 되고, 빗자루의 주인이 된 아주머니와 빗자루는 그 자리에 평온하게 남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그림책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를 :) 다만, 여기까지 읽은 그대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 사람들은 왜 빗자루를 없애려고 했을까?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처음 보는 물건.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빗자루가 한 일이라고는 길을 쓸고,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장작을 패는 정도의 일이었는데 (빗자루가 사람들을 해친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빗자루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신비한 물건을 가진 아주머니에 대한 시기심은 아니었을까.

- 마을 사람들과 빗자루 사이에서, 아주머니는 왜 (사람들이 아닌) 빗자루를 선택했을까. 아주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빗자루가 아무리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한들, (더 이상 날 수 없듯이) 언젠가는 지금 가진 능력도 사라져 그저 하나의 빗자루로 남을 텐데, 그럼에도 그것은 삶을 나눠왔던 이웃들보다 더 가치로울까. (지금 당장 좀 더 믿을만한 물건과 당장은 나를 뒤흔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어쨌거나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선택했고, 빗자루는 그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피아노를 연주했다. 한 번에 건반 하나만 치는 아주 간단한 곡이었지만,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속 장작과 어우러져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을 테다. 그 장면이 너무 평온해 보여서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아주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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