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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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겐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는 매우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일본 여성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신비하고 독창적이라 머릿속을 훔쳐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본인은 일상에서 소재를 찾는다는데, 그것을 자신의 관찰력과 상상력을 더불어 직조하는 ‘기술’은 타고난 재능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국내에서 오가와 요코를 다룬 기사나 인터뷰가 없다는 사실이 늘 애석하다. 내가 보기에 하루키 만큼 추앙 받아야 할 작가인데, 그녀의 책들은 마니아들에게나 읽히는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국내에 그녀의 에세이가 두 종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2021년에 #걷다보면괜찮아질거야 가  출간되었고, 작년엔 그녀가 자신의 작품 세계나 소설 쓰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이 전작과 같은 김난주 역자에 의해 번역, 소개되었다.

‘걷다 보면….’은 일상 에세이에 가까웠는데, ‘첫 문장이….’ 는 내가 궁금했던 그녀의 소설 작성의 방식 등을 소개하고 있어 귀하게 읽었다. 머릿속을 샅샅이는 아니더라도 회로라도 관찰할 수 있었달까. 

오가와 작가는 자연 과학, 이과적 두뇌를 가진 작가다. 수학과 과학, 자연, 논픽션에 관심이 많고, 사물이나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는, 건조하면서도 한없이 쓸쓸하고, 모래성이 무너져내리는 꺼끌한 허망함 속에서도 한 방울의 밀도 높은 눈물이나 진한 여운을 오래도록 흩뿌리는 글을 쓴다. 책을 덮고 나면 먹먹한 감정 때문에 머리가 얼얼하고 가슴이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다.  

"정말 슬플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하죠. 그러니 소설 안에 '슬프다'하고 쓰고 나면, 진정한 슬픔을 다 그릴 수 없어요. 언어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마음이 그 너머로 날아가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실은 슬프지 않은 거예요. 슬프다고 느낄 때의 사람 마음 속이 어떤지는, 사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그릇을 사용해서 언어로 표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소설이지요." (81)

오가와 작가의 글의 기저엔 항상 어떤 '슬픔'이 깔려 있다. 인간을 향한 연민. 애처롭고 안쓰러운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슬프다'라는, 언어 자체가 가두고 있는 감정 이상의 것을 경험하게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나 문학에 관심이 많고, 죽은 자들, 죽어가는 자들을 뒤에서 묵묵히 관조하면서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끌어 모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격조 높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그녀 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고매한 마음가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얇은 책은, 그녀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발상의 근원, 그녀 만의 창작 방식, 그리고 왜 그런 '끝' 혹은 엔딩으로 여운을 남기지 않으면 안된 이유 등을 이 책을 통해 내 나름대로 찾아볼 수 있었다. 

만약 오가와 요코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가 쓴 꽤나 기묘한 소설 '아이리스'에 대해서.
 
거기 등장한 혀가 없는 조카의 행방에 대해 너무 묻고 싶은데, 그녀는 과연 답을 해줄까.

"저의 곤궁한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정말 아주 좁고, 그 요소들은 사소하고 자잘합니다. 그러니 저의 작은 사고회로를 뒤집어엎을 수 있을 만큼 엉뚱한 곳으로 저를 데려가주는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재미가 없죠. 마지막 장면을 예상할 수 있게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작은 소설밖에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는 내게, 이 책에서 작가가 계속해서 반복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관찰'

그녀도 답을 모를 것 같다. 그 조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관찰하고 옮겼을 뿐인 자로서.

"자신이 경험한 과거를 쓸 필요는 없죠. 타인이 흘린 기억을 상상하면 되니까요. 과거를 본다는 것은, 작가가 관찰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화자는 늘 관찰자입니다." (98)

문득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관찰만 하고 평가는 아주 조금만 내리는 것이 작가라고. 

표본실, 병원, 인질의 벙커 등 제한된 장소와 풍경 안을 첨예하게 관찰하고 그 강렬한 잔상을 저마다의 가슴의 거울로 비춰 보이는 오가와 요코.

그녀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어 본다.

정말 슬플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하죠. 그러니 소설 안에 ‘슬프다‘하고 쓰고 나면, 진정한 슬픔을 다 그릴 수 없어요. 언어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마음이 그 너머로 날아가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실은 슬프지 않은 거예요. 슬프다고 느낄 때의 사람 마음 속이 어떤지는, 사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그릇을 사용해서 언어로 표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소설이지요.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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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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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문학의 비밀이 모두 이 책에 있다. 그녀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큰 해답을 얻은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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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혁명 - 세상을 바꾼 영광스럽고 충격적인 순간들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이수영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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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도 아니고 유명 출판사가 어떻게 이렇게 책을 만듭니까. 빳빳한 흰색 종이에 흐릿하고 얇은 폰트. 눈이 너무 아픕니다. 종이 색이라도 미색으로 바꾸지 그랬습니까. 좋은 컨텐츠를 조악하고 저렴하게 만들었습니다. 개정판 나오면 이 책 바꿔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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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리소스-THE FIRST SLAM DUNK re:SOURCE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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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 발표 후 2년 동안 기다리고 n회차 감상 중. 이노타케의 외골수 장인 정신이 빚어낸 예술 작품은 돈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는 괴롭겠지만 우리는 행복하다. 이 책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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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셰링 - DG, PHILIPS, MERCURY 전집 [오리지널 커버 44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도라티 (Antal Do / Decca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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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거 재판 안 하나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데, 언제 다시 한 번 더 나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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