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소린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산개하는 바늘 요새와 그 권역에 퍼진 이단을 제압할 적임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현재 여섯 명의 장교가 후보에 올라온 상태고, 슈오스 측에서 일곱 번째 후보로 자신들이 사용할 ‘거미줄 말‘을선정했는데, 그게 귀관이다. 체리스의 얼굴을 가진 복합체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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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었습니다 -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사사기 룻기
이익상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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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이 한 번 임했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늘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고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입니다.

p.147


가나안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명을 받은 모세는 파라오에 대항하여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숨을 거둔 모세에 이어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시작됐다. 여호수아도 숨을 거두고 이제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전역에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아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가나안에는 오랫동안 살던 가나안 원주민들 뿐만 아니라 모압, 암몬, 블레셋 등 강력한 세력으로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 민족들이 즐비하다. 시도때도 없는 위험에 직면한 민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 임한 선지자이자 정치가, 군사지도자가 나타난다. 그들이 사사이다.


저자 이익상. 현 춘천중앙교회 부목사.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구약성서학을 전공했다. 성서학 연구소 비블리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같은 이름의 팟캐스트도 운영중이다.


흥미진진한 구약 역사


초등학교에 다닐 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성경도 읽었지만 아무래도 읽기 어려웠기 때문에 성경을 풀어 놓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게 본 성경은 사사기와 열왕기서였다. 창세기는 규모가 너무 작았고 이야기가 단순했다. 선지서나 성문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고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사사기로부터 열왕기로 이어지는 역사에서는 온갖 전쟁이 일어나고 영웅들이 등장하고 통일왕국이 형성되더니 또 분열하는 등 온갖 스펙타클한 이야기가 주욱 펼쳐진다. 난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참 좋았다. 초등학교 때 하나님의 뜻 같은 것에 대해서 도대체 뭘 알았을까? 그저 그리스로마신화나 삼국지 읽듯이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땅에 들어서서 정착해 나가는 과정을 쓴 책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했다고 하지만 가나안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지들 살겠다고 쫓아내고 마구 학살하고 전쟁일으키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며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쨌든 순전히 기독교인 입장에서 성경을 보던 내 눈에는 사사기는 왼손잡이 에훗, 여자사사 드보라, 기드온과 삼백명의 전사들,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기 딸을 번제로 바친 정신빠진 입다(책에서는 번제로 바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들릴라에 빠져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삼손 등 별난 캐릭터를 지닌 영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왕이었습니다》를 읽고 사사기는 영웅들의 서사시도,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의 역사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의 사사들. 출처 비블리아( https://biblia.co.il/ ) 홈페이지


구약성서학 전문가가 해석하는 탁월한 사사기 해석


이익상 목사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처음 알았고, 성서학연구소 홈페이지인 비블리아(BIBLIA)에서 글을 읽으면서 그의 해박한 성경 지식과 탁월한 해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감리교 신학대를 나오고 이스라엘에 유학해서 히브리 대학과 텔아비브 대학에서 성서학을 전공한 이익상 목사는 정통 성서학자이다. 그가 쓴 글들과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성경에 대한 그의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지 금세 느낄 수 있다. 특히 나처럼 복음주의적이고 성경을 축자영감설로 설명하는 보수주의적 전통이 강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 성경을 문서설에 의해서 분류하고 잘못된 번역을 꼬집어 주는 이익상 목사의 해석은 처음 받아들이기에는 좀 충격적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거룩한 성경의 흠을 잡는 것 같아서 불편할 수도 있다. 마치 믿음없는 학자의 오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신실한 신자들을 실족케 하는 시험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한때 장래희망이 목사였던 나도 성경을 다르게 보는 관점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신앙과 거리가 멀어졌으니, 내 경험으로 볼 때 아주 말도 안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가 쓴 책이 아니다. 성경은 여러 전승을 어느 순간 한 사람이 편집하여 쓴 책이기 때문에 내용상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원본도 남아 있지 않고 필사로 베끼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번역도 할 때마다 다르고 당연히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너희는 간음하지 말지어다'라는 십계명을 '너희는 간음할지어다'라고 잘못 쓴 간음성서까지 있으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이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게다가 그 성경을 충분한 지식과 고민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목사들도 많은 것은 당장 뉴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성서를 학문의 영역에서 엄밀하게 연구해 온 이익상 목사의 사사기 해석은 비록 관점이 다르더라도 믿고 읽을 수가 있다.


입다 시대의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들. 출처: 비블리아 홈페이지


눈감고 보지 않았던 사사들의 본 모습


사사기는 그동안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사들의 모습과 이민족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설교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사사들이 영웅들이었나 하는 점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초기 에훗에서 드보라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사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사사 중에 한 명인 기드온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사사라고 알려진 삼손에 이르면 하나님의 영과는 상관없는 쓰레기같은 지도자들이 널려 있는 걸 알 수 있다. 영웅적인 이야기에 눈이 가려서 보지 못했던 사사기 시대의 이면을 이해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꿈이 깨지는 것과 비슷해서 참 불편하지만 사사기의 기록자가 알려 주려고 했던 사사 시대의 본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사사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준다.


충격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한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를 접하면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었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몇차례 통독했고 사사기는 좋아하는 성경 중에 하나라서 즐겨 읽었지만 도대체 내가 읽은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없이 의미없이 눈으로만 훑은 결과다. 읽기는 했지만 깊이가 없었고 실제로 그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왕이었습니다》를 읽으면 그동안 보지 않았던 사사기의 이면을 볼 수 있다. 사사의 시대가 어떻게 타락하고,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며, 어떻게 지파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성경에 없는 내용이 아니다. 단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읽던 성경에서 벗어나 관심이 없었던 부분을 명확히 보여주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 준다. 풍부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은 덤이다.


사자와 싸우는 삼손. 삼손은 단지파 출신의 사사로서 나실인으로 유명한 사사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일생 덕분에 수많은 예술작품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신앙과 성서 해석의 균형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위험한 점은 무오성을 헤쳐서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그랬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그 전철을 따라 가는 것 같다. 학문적인 신학으로 독일이 굉장히 유명한데, 오죽하면 '독일에는 신학자는 있지만 신자는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내가 왕이었습니다》가 좋은 점은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면서도 믿음을 가진 사람을 실족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실한 사사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시대라고 생각하면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사들의 승전의 역사가 신자의 승리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익상 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사사 시대야말로 인간이 어떻게 타락는지 끊임없이 설명하면서 믿는 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시대라고 설명한다. 한 때 하나님의 영을 받아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나갈 때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고 한다. 이익상 목사는 사사기의 이면을 보여주고 잘못된 번역을 알려 주고 풍부한 고고학 지식으로 알려 주지만 믿음의 선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이렇게 균형잡힌 점이 《내가 왕이었습니다》의 가장 좋은 점이다.


바알(Baal)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폭풍우와 번개의 신이다. 아세라와 함께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우상이기도 하다.


★★★★☆


성경을 해석한 책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내가 왕이었습니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성경에 대해, 사사기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려울 테지만 어릴 적 교회학교에서 사사기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혹시라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처럼 성경을 분해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할 것 같은 느낌에 꺼려할 이유도 없다. 기본적으로 이익상 목사는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이 부분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가 없다) 목사님이기 때문이다. 사사기를 비롯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을 수 있고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의 지리와 문화,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성경을 좀더 자세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읽어 두면 큰 도움이 될 책이다. 앞으로 나올 이익상 목사의 다른 책들이 기대된다. 《내가 왕이었습니다》처럼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고고학적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 강력하게 추천한다. 단지 이전 책인 《이스라엘 따라걷기》에 비해서 판형이 작아지고 종이의 질이 나빠진 점은 조금 아쉽다.


사족으로,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내가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써 있는데, 나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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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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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탈옥수, 최요섭


최요섭은 탈옥수이다. 어떤 죄를 짓고 수감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무기수이다. 탈옥 중에 한 여자아이를 인질로 잡아 경찰과 대치하던 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목에 걸고 있던 메달에 총이 맞으며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요섭은 메달의 원래 주인인 오나영에게 메달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 무성(지명)으로 향한다.


변호사, 최요섭


최요섭은 법무법인 '사해'의 변호사이다. 사해는 업계 순위 10위 이내에 들어가는 대단한 법무법인이다. 최요섭이 뛰어난 변호사라서 사해의 변호사가 된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장선배와 연이 닿아 어영부영 사해에 합류했고 이후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잘 버티는 중이다. 연봉은 2억 1천 5백만원. 미인 아내와 야구에 소질없는 초등학교 야구선수 아들을 두고 있다.


우연히 회사 앞에 있던 연정호의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강간 용의자인 연정호를 무료변론했다. 오로지 위로 올라가는 데만 관심이 있던 최요섭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다. 오랜만에 실력발휘를 하고 승소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수임중이던 유학생 강간사건을 라이벌 후배 권기용에게 빼앗긴 후 그나마 버티던 회사에서 미운 털이 제대로 박히고 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아들의 과외선생과 바람이 나고, 홧김에 아내를 때리고, 집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주식투자마저 실패하여 거의 빈털터리 신세.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요섭은 이 모든 불행의 배후에 회사의 개입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최제훈 1973 ~ .


참 묘한 작가, 최제훈


세 권째 읽는 최제훈의 소설이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현실에 상상을 묘하게 붙여놓은 후 마지막에 그 모든 이야기들을 붙여 놓고 연극화해 버렸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퍼즐 조각으로 쪼개 놓은 이야기를 일 붙이고 저리 붙여서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해 냈다. 두 권 모두 정말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나비잠》 역시 큰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최요섭. 같은 이름을 가진 최요섭이 주인공인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누가 봐도 하나는 현실-아마도 변호사 최요섭-이고 하나는 꿈이나 환상-아마도 탈옥수 최요섭-이다. 두 이야기는 조금씩 겹치는 사람도 있고 결국 마지막에는 변호사 최요섭이 꿈이든 환상에서 깨어나 결말이 나는 것으로 예상했다.


의외로 평범하네.. 하지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평범한 시작을 생각하면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어나가는데 역시 뭔가 이상하다. 굉장히 수상하다. 심상치 않은 전작들을 상기해 보면 이 책도 평범하게 풀고 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혹시 변호사는 과거, 탈옥수는 현재일까? 아니 그렇다기에는 두 명의 변호사 뿐만 아니라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간극이 너무 크다. 아, 사실은 탈옥수가 현실이고 변호사가 꿈인가? 그런데 읽다 보니 그것도 아니다. 현실이라면 물속에서 자전거를 탈출하고 멧돼지가 사람을 뜯어 먹고, 소복입은 여자가 끊임없이 유혹하고 남편이 나타나 머리가 깨지는 타임루프가 있을 수는 없다.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하려는 걸까?



나비잠이 뭔지 몰랐는데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이라고 한다.


갈수록 가관인 탈옥수, 갈수록 몰락하는 변호사


탈옥수는 소복입은 여자를 만나 타임루프에 빠지는데 결국 소복여인을 인질 삼아 탈출하고 소복여인과 남편은 불에 타죽고 만다. 그 후 십자가에 달린 아버지도 만나고, 장미정원에서 빨간두건과 피노키오도 만난다. 아주 소설이 제멋대로 흘러간다. 갈수록 가관이다. (장미정원이 퀴르발 남작의 소유라는 건 일종의 작품개그.) 탈옥수가 현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변호사는 아들의 중학진학을 위해 중학교 야구감독에게 뇌물을 줬다가 들키고 사회적 문제가 되어 회사에서 쫓겨난다. 잠시 기거하던 원룸에서 옆방 공시생과 싸우다 깨진 병을 밟아 발바닥에 열세 바늘이나 꿰맨다. 오토바이 양아치들에게 집단린치도 당하고.. 하지만 그중에 가장 가슴아픈 건 뇌물사건이 소문나 왕따에 시달리던 아들이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중태에 빠진 것. 점점 몰락해 간다.


도대체...... 두 이야기가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두 이야기에 모두 종규가 나오고 무성에 사는 오나영이 나오고 나영에게 돌려줘야 할 메달이 있고, 최요섭은 메달을 돌려 주러 무성으로 간다. 아버지는 여전히 목사님이고, 오소리는 나쁜 놈이다. 책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두 이야기가 합쳐질 기색이 없다. 그리고 그냥 그대로 끝난다.


작품 내내 두 이야기를 교차시켜 놓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이리저리 상상하게 만들더니.. 심지어 뭔가 있을 것 같은 냄새를 펄펄 풍겨 놓고는 두 이야기가 원래 별개의 이야기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냥 한 책에 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이리저리 쪼개고 붙여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더니 《나비잠》에서는 이야기의 요소를 더 잘게 쪼개서 재조합하여 두 개의 이야기를 만들고 평범한 것처럼 뻔뻔하게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또 뒷통수를 된통 맞았다. 하지만 즐겁다.


레고블럭은 단품일 때는 멋진 작품이 되지만 여러 개의 박스를 모아서 만들면 괴물같은 모양이 만들어진다.


전통적인 플롯에 대한 반항


최제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우선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 구조를 생명체라고 생각한다면 최제훈은 생명을 해채해서 유전자 단위로 쪼개고 그걸 재조합하는 것 같다. 비슷한 의미로 직소퍼즐도 함께 떠오른다. 아무 곳에나 꽂아도 들어맞는 직소퍼즐. 플롯이 흘러간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짜여진다는 느낌이다. 최제훈은 글을 쓸 때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 스크리브너를 써서 문단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면서 쓸 것 같다.


소설가마다 책을 쓰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최제훈은 소설을 쓸 때 여러 가지 소재를 잔뜩 모아 놓았다가 어느날 그 소재들을 쫙 펼쳐놓고 마음에 드는 것을 이리저리 맞춰서 써내려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아, 그러고 보니 레고블록이 가장 비슷할 것 같다. 레고블럭은 원래 하나의 주제로 출시된다. 한 박스에 들어 있는 블럭들을 잘 맞추면 주제에 잘 맞는 레고작품이 된다. 하지만 여러 박스에 있는 레고블럭을 분해하고 그걸 이리저리 조립하면 괴상한 모양의 작품이 완성될 것이다. 최제훈의 소설이 그렇다. 그런데 뒤에 쓴 소설일수록 그 블록이 더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책을 읽는 내내 타로의 탑 카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최요섭의 몰락에서 탑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연상된 것 같다.


★★★★☆


책을 2/3쯤 읽었을 때, 그냥 이대로 합쳐지지 않고 끝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고 예상이 들어맞았다. 세 권 쯤 읽으니 최제훈의 글에 적응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뒷통수를 맞기는 했어도 빗맞았으니 많이 아프지는 않다. 여전히 특이한 이야기 구조를 가졌고 각각의 이야기가 흡입력있게 흘러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예측을 벗어나는 책을 읽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세 권 읽고 난 후 최제훈은 내가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 중에 다섯손가락에 들 정도가 되었다. 이제 두 권 남았는데.. 아껴서 읽어야겠다.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는데,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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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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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도벽이 있는 말더듬이 책사냥꾼이 마흔 살이 넘어 모든 책을 잃고 쓰는 회고록이다.


단 한 권의 책


'세계의 책'은 모든 책의 책이다. 이 책 이외의 모든 책은 '세계의 책'의 주석이며 이 책을 아는 사람은 찰리 한 명 뿐이다. 오래전 알 모히드 바함이라는 술탄의 의전담당 신하가 쓴 아홉권 째 책이 '세계의 책'과 내용은 같았다. 하지만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술탄에 의해 참수당했다. '찰리 이야기'는 리차드 브라우티건이 지은 책 사냥꾼에 관한 책이고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세계의 책'에 관한 책이다.


뭔가 복잡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주인공인 반디가 자신의 경험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써내려 갔듯이 나도 읽은지 며칠되지 않은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내용이 가물거려서 정확하게 쓸 수가 없다.


오수완. 1970 ~ .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한 한의사.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으로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책사냥꾼에게 들어온 의뢰


반디는 한 때 유명했던 책사냥꾼이다. 책사냥꾼이 뭐냐구? 책을 찾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책을 찾아주는 사람을 말한다. 책을 '찾는 것'이 이들의 일인데 그 방법을 따로 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때로는 책도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책강도가 되기도 하고 책사기꾼이 되기도 한다. 책사냥꾼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딱히 합법적인 일만 하는 것은 아닌 걸 보면 많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반디는 처음 '찰리 이야기'를 읽고서 책사냥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저 헌책방을 운영하는 중이다.


지루하게 헌책방을 지키는 반디에게 책사냥꾼 사이에 전설로 일컬어지는 책방인 '미도당(헌책방의 끝판왕)'으로부터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찾으려는 책은 '베니의 모험'. 이윤희라는 미도당의 실장이 찾아와서 의뢰한다. 원래는 검은별이라는 반디의 라이벌이기도 한 책사냥꾼에게 의뢰했으나 책을 찾던 검은별의 행방이 묘연하다. 어쩌면 검은별은 책의 가치를 알아채고 '베니의 모험'을 찾은 후 잠수를 탈 수도 있다. 검은별보다 먼저 책을 찾아 미도당에 가져오는 것이 반디의 미션이다.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묶어 놓았다


저자는 오수완. 한의사이면서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멋진 경력을 자랑한다. 아마도 다독가인 듯하다.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모두 아울러서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이다. 설정이 흥미로운데, 오수완이 만들어 놓은 책의 지도에는 '세계의 책'이 그 정점에 놓여 있고, 그 주변의 다음으로 중요한 책 아홉 권이 자리잡고 있다. 아홉 권의 책을 찾는 실마리가 '베니의 모험'에 있고 '베니의 모험'은 반디를 다른 책으로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다른 책들과 존재하지 않는 책들에 대해 내용까지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실제 책과 가상의 책이 섞여서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또다른 재미있는 설정은 책파동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한다든지, 미하엘 엔데의 《모모》, 《끝없는 이야기》같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들인데!) 이런 장치들을 굉장히 그럴싸 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책파동 시위가 있었나 검색해 보기도 하고 있지도 않은 책이 정말 있는 책은 아닌지 찾아 보면서 책을 읽었다. 현실과 상상을 참 절묘하게 엮어 놨다.



모든 것은 미도당의 안배


우여곡절 끝에 반디는 모든 책을 찾고 미도당의 중심부로 들어간다. 거기서 미도당의 주인인 윤선생의 아버지를 만나고 그는 반디에게 미도당을 물려받을 것을 제안한다. 이 노인을 찾아가는 곳은 미로인데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이 연상되는 장치이다. 어쨌든 반디는 노인의 제안을 받으들이지 않고 열시 우여곡절 끝에 미도당의 서가는 허무하게도 불에 타고 소중하게 보관되어온 미도당의 고서들은 재가 되고 만다.


현학으로 도배되어 있다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초반부를 읽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굉장한, 혹은 굉장해 보이는 '세계의 책'에 관한 역사를 늘어놓는데, 사실이 아니다.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 놓고 그 틈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역사의 한 부분을 새로 만들어 낸 현학적인 모습은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도 싫어하는 글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어서 짜증이 올라왔다. 대명사를 남발해서 적절하지 않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소리와 만나는 장면에서 그렇다. 대명사를 온통 남발하고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이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게 아니라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다. 덕분에 초반부에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대단하지도 않은 내용을 흐릿하게 표현하고 그 순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한다. 물론 뒷부분에 가면 그런 부분들은 잊혀진다. 70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내가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는 읽는 속도도 나지 않는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읽다가 앞에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쓸데없이 계속해서 앞장을 들춰봐야 했기 때문이다.



★★★


초반은 어지럽고 중반 이후는 명쾌하다. 초반에 읽다가 지칠 수 있다. 굉장히 여러가지 책을 요약했고 가상의 책을 만들어 냈고 또 그 책들을 인용했다. 각종 책들의 개요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았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으면 쓸 수 없는 장치다. 좋게 말하면 지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직후에 곱씹어 봐도 내용의 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체적인 플롯이 흥미롭지는 않다. 특히 책을 찾는 과정이 정교하지 않다. 다음 책을 찾아가는 과정은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더라도 가장 흥미로운 장치인데 도대체 별다른 실마리없이 다음 책을 찾고 또 찾는다. 전체구조는 만들어 놨지만 각주가 약했다. 추리소설에서 발생한 사건이 충격은 줬지만 트릭이 형편없어서 읽는 동안 투덜대면서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홍보용 수사이긴 하겠지만 하루키의 위트, 보르헤스의 상상력, 움베르토 에코의 지식을 모두 갖췄다고 쓰인 부분은.. 너무 나갔다. 각 분야의 끝판왕들을 모두 겸비했다고 평가를 받을 때, 나는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초반의 지루함을 잘 이겨내야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중반 이후에는 읽는 속도가 잘 나오고 사뭇 흥미롭기도 하다. 책에 관한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부은 것은 좋지만 잘 정리되지 않아 번잡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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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의 마녀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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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연히 닥친 자연 재해, 우연히 죽은 사람

우하라 마도카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훗카이도에 있는 외갓집에 왔다. 원래는 아빠인 젠타로도 함께 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잡힌 급한 수술 때문에 아빠는 같이 올 수 없었다. 할머니,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가 약주 한 잔 걸치고 운전을 하고 집에 온다고 고집을 부린다. 엄마는 발끈해서 음주운전은 안된다고 하며 엄마가 가서 운전하고 올테니 할아버지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마도카는 뒷자리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가던 중.. 운이 없었다. 엄마는 갑자기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휩쓸리고 시신으로 발견된다. 마도카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몇 년 후..


다케다 도오루는 경찰출신 프리랜서 경호원이다. 새로운 경호의뢰를 받아 가이메이 대학에 가서 기리야마를 만난다. 그리고 굉장히 건방져 보이는 10대 중후반 여자아이에게 면접을 본다. 이 여자아이가 경호해야 할 대상인 마도카이다. 절대로 어떠한 질문도 하지 말 것을 다짐받은 후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채용 결정. 그런데 이 아이, 뭔가 좀 이상하다. 우연히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예측한다. 예측 뿐만 아니라 분명히 상관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의도된' 것처럼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연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찜찜하다.


마에야마 요코는 아카쿠마 온천에서 마에야마 여관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얼마전에 미즈키 요시로라는 유명한 영화 프로듀서와 그의 아내 치사토가 여관에 묵었다. 그런데 부부가 산책하던 중에 미즈키 요시로가 땅에서 솟아 오른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황화수소는 공기 중에 노출되자마자 공기중에 퍼지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농도가 짙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0%는 아니다. 남자가 운이 나빴다. 물론 거의 40살의 나이차가 나고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 분명한 치사토가 의심을 사기는 했다. 미즈키의 어머니는 아내가 재산을 노리고 남편을 죽였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미즈키 요시로는 사고로 죽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곧 의심에서 벗어난다. 나카오카 유지라는 형사가 아무리 열심히 조사해 보고 다녀봐야 나올 것도 없다. 아오에 슈스케라는 지구과학 교수도 자주 와서 사고가 아니라 의도된 사건일 가능성을 찾아 보지만 별다른게 없다. 단지 걱정되는 건 사고가 나서 위험해 보이는 온천에 손님이 줄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다시 발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1958 ~ ) 일본의 소설가.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 중 한 명.



조금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는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었다. 게이고 데뷔 30주년 기념작이라는 떠들썩한 홍보도 주효했고, 유명한 '갈릴레오 시리즈'나 '가가 형사 시리즈'가 아닌 새로운 작품이라는 점도 어필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에게는 게이고의 소설 중에 꼭 읽어봐야 할 몇 권 중에 한 권이었다. 아껴뒀다기보다는 게이고의 작품이 하도 많다 보니 사놓고서도 그냥 뒤로 미뤄 놓았던 책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지만(사실 너무 많아서 모두 읽을 수도 없다. 이 책과 몇 권만 더 읽고 이제 그만 읽을 생각이다) 대체로 추리소설을 주로 쓴 작가라고 생각한다. 《라플라스의 마녀》 역시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있다. 형사가 나오고 그 형사를 돕는 지구과학 교수가 나온다. 하지만 이전에 읽은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판타지라고 볼 수는 없고 추리소설을 쓰면서 SF적인 요소를 차용했다고 할 수 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소설은 온천을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알고보면 능력자 배틀물

있을 수 없는 사고는 또 일어난다. 나스노 고로라는 무명배우가 또다른 온천여행지에서 역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한다. 이것 역시 첫번째 사망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 확률이 0%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다. 확률이 8백만 분의 1인 로또에 한 번 당첨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매주 누군가에게는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연속으로 로또에 당첨된다면 이건 행운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한 번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우연한 사고가 두 번 발생한다면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나카오카 유지 형사와 아오에 슈스케 교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두 사건 장소에 모두 나타난 마도카에게 주목한다.


아마카스 겐토는 영화감독인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아들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마도카의 아버지인 젠타로가 시행한 뇌수술로 소생한다. 마도카의 어머니가 죽은 날, 젠타로가 수술하고 있었던 환자이다. 그런데 회복을 하는 동안 사물의 위치와 운동성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약간의 간섭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우연처럼 보이는 현상'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연에서 벌어지는 온갖 현상들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해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초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뇌를 수술한 탓에 우연히 갖게 된 능력이다.


마도카는 겐토와는 좀 다르다. 토네이도에 의해서 어머니를 잃은 후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니가 수술한 겐토가 가진 능력이 바로 자신이 갖고 싶었던 능력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자신도 겐토와 같은 수술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젠타로는 겐토의 능력이 정말 수술로 인해서 얻어진 것인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고, 때마침 딸이 조건에 딱 맞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원하기도 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압박감은 뒤로 한 채 딸에게 뇌수슬을 감행한다. 그리고 마도카 역시 겐토와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겐토와 마도카는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정부로부터 보호관찰을 받게 되지만 겐토는 복수를 위해, 마도카는 겐토를 막기 위해 대학 연구소를 탈출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한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Pierre Simon Laplace (1749. 3. 23. ~ 1827. 3, 5,)​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수리물리학, 천체역학 등에 업적이 있다.


라플라스의 악마

과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라플라스의 악마'를 들어 봤을 것이다. 고전물리학이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이후 우주에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이 설명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 극단에 있었던 과학자가 프랑스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이다. 라플라스는'어떤 지적인 존재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고 이 모든 정보를 충분히 분석할 능력이 있으면 미래까지도 정확히 예측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라플라스의 마녀》는 이 악마가 된 두 소년소녀가 주인공이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알고 있다면 처음 마도카가 등장했을 때, 마도카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태클을 걸어 보자면 라플라스의 악마는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주창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 입자(미시입자를 말한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상태를 동시에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의 주장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애시당초 입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거시적인 세계에서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이론이 미시 세계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라플라스의 마녀'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플라스의 마녀》의 소설적 상상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이런 마녀를 생각한다면 오산.


참 대단한 작가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동안 써왔던 소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작품이다. 사실상 겐토와 마도카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느낌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에 SF적인 요소를 슬쩍 첨가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충분히 즐길만 하다. 좋아하는 SF소설 중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SF소설에 추리소설 요소를 집어 넣어서 흥미를 돋우는데 《라플라스의 마녀》는 비슷하지만 반대로 추리소설에 SF요소를 집어 넣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열 편 이상 읽었지만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다. 몰입도가 뛰어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고, 금세 읽을 수 있어서 하루 이틀이면 모두 읽는다. 하지만 하도 많아서 도저히 그의 책을 모두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게이고의 소설만 읽을 수는 없으니 내가 읽는 책의 숫자보다 그가 써내는 책이 늘어나는 숫자가 더 크다. 대충 몇 권 더 읽고 나서 이제 그만 읽으려고 생각 중이다. 한때는 뒤에 고스트 라이터가 붙어서 책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기도 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팬인 일본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한 소리 듣고 그 의심은 거두기로 했다.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책으로 써내는 건 더 대단해 보인다.

거시세계에서 상식인 것이 미시세계에서는 상식적이지 못하다. 참 골치아픈 문제.


★★★★☆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SF가 붙어 있어서 사실상 추리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후 그 근거를 설명해 줘야 하는데, 실체적 진실 자체가 상식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결론은 마도카의 입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포기한 소설이다. 하지만 새로운 소재를 추리소설의 틀 안에 집어 넣어 설득력있게 써내려갔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엄청난 몰입감도 여전하다. 대표작 중에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가 많이 떠올랐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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