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스름 뜬 눈 사이로 불빛을 등진 채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나타났다. 짐이 어찌나 무거운지 어머니 걸음이 비틀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얼른 내려놓고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나를 버리고 어머니에게 달려간 아버지가 서운해서 나는 목청 놓아 울었다. 목에 걸린 누룽지를 뱉어내며 나는 섧게도 울었다. 어머니가 등을 내밀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결국 한 손에 어머니 짐을 받아든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등을 자장가 삼아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한 손으로 나를 받치기 힘들었는지 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치켜올리는 통에 잠시 잠에서 깼다.
"딴 집 애기들은 엄마가 젤 좋다는디 우리 아리는 당신이 최곤갑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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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집으로 학수를 데려갔다. 여러번 같이 밥을 먹었지만 그때까지 집에서 밥을 먹인 적은 없었다. 척추협착증이 심한 데다 손님 하나 오면 접시까지 접대용으로 싹 다 새로 꺼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어머니를 배려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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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의 나는 호의가 악의보다 더 비참하고 자존심 상하는 못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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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먼 놈의 남자가 형광등 한나도 못 갈아 낀대? 윤재는 그 옛날에도 혼차서 뚝딱 해치우등만. 멋 하나 윤재보담 낫응 것이 읎당게. 인물이 낫기를 해, 다정하기를 해. 아이, 니가 전등 쪼까 비춰봐라."
"윤재가 누군데?"
그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형광등을 갈아 끼우려 의자에 올라간 어머니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넙죽 말을 받았다.
"누구긴 누구겄냐! 늬 어매 첫서방이제. 서방 앞에서 첫서방 야그를 저래 당당허니 꺼내는 사램은 대한민국에 늬 어매 하나배끼 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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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담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만날 수 없는 아버지는 없는 것과 같았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온몸으로 놀아주던 아버지를 잃고 나는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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