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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水害)의 역사

우리나라는 지리적인 위치와 기후조건으로 6,7,8월 3개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60%나 되어 홍수는 연중행사처럼 되었으며, 또한 계절풍의 시기와 강약에 따른 한해(旱害)로 인해 자연에 의한 재해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역대 군주들 중에도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들은 치산치수에 힘써 홍수와 한해(旱害)를 예방하려 하였다. 그 예로 조선시대 영조는 한성부의 수해를 막기 위하여 청계천의 준천역사(濬川役事)를 크게 일으켰으며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서를 설치하였다. 고종 2년(1865)의 을축년 홍수로 동년 3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준천역사를 벌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니 집권하던 흥선대원군의 치수정책을 비난할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고종 16년(1879) 7월에도 큰 비가 내려 한강의 수위가 10.61m나 되었다. 그리하여 한성부내의 가옥전파가 933호나 되고 가옥반파 이상이 148호, 일부파손이 277호나 되었으며 물위에 뜬 가옥이 30호나 되었다.
[註1] 고종 22년(1885) 7월에도 홍수로 한성부내 가옥전파가 520호나 되는 피해가 있었다
서울의 수해 원인은 기상이변으로 인한 집중호우에도 있지만 한강의 범람이 더 큰 원인이었다. 따라서 한강의 범람을 측정하여 기록하는 것이 치수의 방법도 되므로 일찍이 세종도 한강수위 측정에 관심을 두었다. 즉 한강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암석위에 척(尺), 촌(寸), 분(分)까지 눈금을 새긴 수표를 만들어 강도승(江渡丞)이 수위를 측정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註2] 그러면 19세기 중엽부터 일제시대까지 한강의 최고수위를 나타내 보면 다음 <표:한강의 수위변동>과 같다.[註3]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1865년과 1925년의 한강수위가 제일 높았는데 이상하게도 모두 을축년이었다. 따라서 항간에는 을축년과 홍수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일제 때 서울의 홍수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피해가 많았다. 이것은 한성부 때에 비해 인구가 증가하여 한강범람은 물론 서울 안의 하천범람까지 주거지가 확대되어 홍수 때 침수와 도괴(倒壞) 그리고 인명피해가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때의 홍수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11년 7월 중순 … 홍수로 인축사상(人畜死傷)등 피해액이 587,000원에 달하였다.
[註4]
② 1912년 … 홍수로 침수가옥이 1,467호 유실이 1호
③ 1913년 … 홍수로 침수가옥이 80호
④ 1915년 7월 23일, 24일 … 북한강 유역 일대에 300 ∼ 380mm의 비가 내려 피해를 입었다. 그 해 8월 22일, 23일 서울의 강우는 262mm로 침수가옥이 많았고 농작물에도 피해가 막심하였다.
[註5] ⑤ 1916년 6월 13, 14일 … 서울의 강우는 156mm로 가옥침수 농작물 피해 교량 도로의 파손이 심하였다. 경성부에서는 각 처에 구호소를 설치하고 이재민 피난을 주선했다. [註6]
⑥ 1920년 7월 …홍수로 한강의 수위가 9.53m나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용산에는 침수를 막기 위해 12.12m의 높이로 제방을 쌓았다.
1925년 7월 … 서울의 역사적인 대홍수로 일컫는 을축년홍수가 이 해에 일어났다. 이 당시 두 차례에 걸친 집중호우와 한강의 범람으로 큰 수해를 일으켰는데 특히 인천만의 만조(滿潮)로 호수가 한강으로 역류되어 더욱 큰 수해를 입게 되었다.
[註7]

을축년 1차 홍수(1925년 7월 9∼12일)때 서울의 강우량은 383.7mm였고 2차 홍수 (동년 7월 15∼19일) 때의 강우량은 365.2mm를 나타내어 공전(空前)의 대홍수를 가져왔는데 7월 12일자 동아일보 호외에는 1차 홍수 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모진 빗발은 11일 밤에도 의연히 줄기차게 내리어 홍수는 더욱 흉포를 다하여 시각마다 늘어가는 상태에 있어 연안 일대의 주민들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저주하는 듯이 달려드는 홍도(洪濤)에 위협되어 어쩔줄을 모르고 캄캄한 어둔 밤에 찬비를 맞아 앞을 다투어 피난하기에 ……(중략)……아이를 등에 업고 철벅거리며 달아나는 잔약한 여자, 늙은 노인, 세간을 구해내기에 망지소조하는 남자들이 한데 섞여 연안일대에는 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으며 사정없는 홍수는 더욱이 인천해의 조수가 밀려 올라옴을 따라 맹렬한 상태로 증수되야……」

이와 같은 홍수의 큰 피해로 수마의 할퀸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2차 홍수가 재차 엄습해 왔다. 젖은 옷을 말리고 흙벽이 채 마르기도 전인 사흘 뒤 7월 15일 저녁부터 19일 17시까지 집중호우가 내림으로서 1 · 2차 홍수 때 9일간의 강우량(降雨量)은 748.9mm를 나타냈고 특히 7월 17일 하루의 강우량은 184.6mm를 기록하여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7월 16일 21시부터 높아지기 시작한 한강수위는 6시간이 지난 17일 오전 5시 현재 20척(6m 5cm)을 돌파하여 매시간 평균 1m씩 증수(增水)현상이 일어났다. 2차 홍수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 17일 오후 8시에 37척 4촌에 달하여 위험이 경각에 달렸고 한강연안 용산 일대에는 동 11시 반경에 38척 4촌에 달하여 수백년 이래에 처음있는 큰 홍수이므로 경성부출장소에서는 위급함을 일반시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경적까지 울리었는데 용산 관내의 침수가옥은 마포방면까지 합하여 2,876호에 달하였으며 더욱이 그날밤 7시 30분경에는 경정(현 문배동), 대도정(현 용문동) 뎨방 등의 약 20여간이 터지어 무너진 뎨방으로 붉은 물이 폭포 쏟아지듯이 수세가 맹렬하여 백여명의 인부와 구호반 30여명이 급거 방수에 노력하였으나 사나운 물결은 미쳐 걷잡을 수가 없어서 삽시간에 용산일대는 거의 전부가 침수되어 17일 12시경에는 2,000여호가 침수하였는데 용산일대의 피난민들은 비를 맞아가며 앞을 다투어 피난민 수용소인 군사령부와 본원사(本願寺) 등으로 피난하여 수용되었더라
[註8]

고 보도하였다. 2차 홍수 때의 서울 수해를 살펴보면 우선 한강 제방이 유실되고 한강 제1 · 제2철교 중간교각이 파손되었다. 철도(鐵道)의 침수로 열차운행은 일시 불통되고 용산역 구내도 물바다를 이루었다. 통신이 두절된데다가 송전선의 고장으로 전차도 운행이 중단되고 밤에는 암흑세계로 지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수원지의 침수로 식수의 공급도 끊어졌다.
인축의 사상 및 행방불명 그리고 각종 시설의 파손, 농토의 매몰, 유실 등 피해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서울의 수해상황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
<표:1925년 7월 서울의 수해상황>과 같다. [註9]
을축년 홍수로 인한 전국적인 총피해액은 모두 5,964만 5,149원(圓)에 달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註10]

「1925년 7월 수해손해(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조사)

- 토목관계피해 1,731만 499원
- 가옥, 가재(家財) 피해 1,598만 8,090원
- 농작물피해 1,387만 7천원
- 철도관계피해 400만원
- 전답 등 경지피해 383만 7,400원
- 각종공장피해 200만원
- 수리조합공사피해 189만 6천원
- 직접구조비 42만 5천원
- 체신관계피해 28만원
- 가축피해 31,160원
계 5,964만 5,149원」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심하게 입은 곳은 북한강 하류 일대였다. 따라서 한강 하류에 해당되는 서울의 연안일대는 증수로 수위가 높아져 용산, 마포, 뚝섬, 영등포 방면 저지대는 침수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았다. 이 때의 「한강범람도」는 당시의 피해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참고가 될 것이다. 먼저 용산, 마포 지역의 각 동별 가옥피해를 살펴보면 <표:침수피해 상황>과 같다. [註11]


용산강 연안일대는 비교적 저지대로서 욱천은 한강수위가 조금만 높아져도 오히려 역류되어 내수로 인한 침수 피해를 입곤하였다. 조선말기부터 용산일대에 모여 살게 된 일본 거류민들은 수해예방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을 선출한 뒤 욱천하구에 제방을 쌓는 일을 추진하였다. [註12]

그러나 이 제방은 을축년 홍수에 붕괴되면서 용산 일대를 수몰시켰다. 이때 원효로 1가의 수심은 8척, 삼각지 로터리 일대는 2척, 용산역 구내는 10척, 용산우체국 앞은 7척, 원효로 4가 전차종점 부근은 무려 22척이나 침수되었다. 당시 서울의 총 침수면적은 198만9,200평이 되었다[註13]고 하니 그 피해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서울의 각 지역별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이촌동에는 600호의 가옥이 거의 침수되어 주민 700여명은 용산역 구내 기차내로 대피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뚝섬은 당시 경기도 고양군에 속한 면이었는데 1 · 2차 홍수 때 모두 침수되었다. 피해 상황을 보면 가옥 1,200여호가 유실 도괴(倒壞)되어 이재민 4,000명이 발생되었다. 이들은 인근 학교 예배당, 면사무소 등에 피신하게 되었다. 7월19일자 동아일보 호외 기사에는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뚝섬 가운데로 한강줄기가 생겨 한강이 두 곳으로 흐르게 되었고, 뚝섬 건너편 신천리의 120호 700여명 주민들은 기와집 지붕위와 배 2척에 빽뺵이 올라 앉아 끼니도 거른 채 구조를 기다리는 중이며 한강 인도교 밑으로 산사람과 시체가 떠내려 가는 것이 많이 눈에 뜨인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가는 거의 지붕만 내어 놓고 침수되었으며 종묘장(種苗場)의 과일나무도 꼭대기만 뾰죽뾰죽 보일 뿐 망망대해를 이루었다. 드디어 7월 18일 오후 9시 뚝섬의 한강수위는 42.2척을 돌파하였다. 운래 뚝섬 주민 수효는 약 7,000명인데 그 중 2,000명은 왕십리로 피난하였다.


자양동의 수해도 역시 비참하여 동네에서 가옥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겨우 한 채 뿐이었다고 한다.[註14]
뚝섬 수원지도 침수가 되어 탁류에 휩쓸리게 되니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차 홍수 때는 이곳의 수위가 33척 8촌에 이르러 겨우 침수를 면했으나 2차 홍수에는 무려 43척 3촌에 달하여 위험수위 38척을 능가했던 것이다. 경성부에서는 이에 긴급조치로 부민(府民)에게 제한급수를 하고 또한 급수차를 동원시켜 30만 부민 중 일부에만 식수를 공급하였다. 물이 빠지자 7월 25일 수백명의 인부를 독려하여 복구한 결과 송수(送水)가 가능해진 것이 7월 26일이었다. 이때 수원지 침수 피해액은 7,700원에 달하였다.


그리고 청량리 일대의 수해는 역 부근의 50호가 침수됨으로서 400명의 이재민이 생겨 대학예과(현 미주아파트 · 동산병원 자리)에 수용되었으며 용두교까지 물바다를 이루어 배 4척을 이용하여 왕래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註15]


장안평 일대는 1913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개간한 곳으로 농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관천(箭串川) 연변에 64척 8촌 높이로 제방을 견고하게 쌓았다. 1920년 홍수 때 제방의 손상이 약간 있었지만 을축년 1차 홍수에 수위가 63척 5촌에 이르러 제방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다시 2차 홍수 때에는 수위가 72척 6촌에 달해 이 일대가 모두 침수됨으로서 농작물은 전부 물에 떠내려 갔다.


영등포 김포방면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영등포는 이미 여러차례 홍수에 시달려 왔으므로 이에 대비했었다. 1920년 홍수에도 시가지가 거의 침수되었던 관계로 제방을 5척 이상 높이 올려 1,400간(間)을 쌓았다. 그러나 을축년홍수에는 제방보다 수위가 2∼3척이나 높아 영등포역전은 한 길 이상의 수심으로 참담한 광경이 재연되고 말았다.


을축년홍수의 후일담으로 서울의 세(貰)집값이 나날이 폭등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1 · 2차 홍수로 인하여 가옥을 잃은 이재민들이 남부여대하여 도성내로 들어와 세집과 셋방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울의 인구는 홍수 이후 8월 8일까지 20일 동안에 523호가 급증[註16]했다고 하니 이는 이재민의 계속적인 유입이 주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서울 5백년사(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9-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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