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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문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생이 그렇게 풀렸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락하는 동창들 사이에서 유행한 책이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스무 살 무렵이었나. 얼떨결에 휩쓸려 읽었다. 사실 조르바의 극단적인 자유주의가 꼭 동경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물레를 돌릴 때 새끼손가락이 거치적거려 절단한다는 건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라는 문장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 년에 한 번 책장의 책을 솎아내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늘 책장에 남았다. 방에서 빈둥빈둥 책장에 꽂힌 책 이름을 읽는 것이 지금도 여일한 취미이니, 당시에 수없이 마주한 책등에서 '이윤기'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것, 그 이름을 어느새 친숙하게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 중 故이윤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생전 200여 권을 번역했다는 양적 압도만이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만만치 않은 작가들이 그의 번역 목록을 다수 채우고, 스스로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어디에서건 그 이름 세 글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멈칫하게 된다. 그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의 첫 에세이에서 말한대로 너무 익숙해서 막연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몇 세대를 한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에게 시골길을 물으면 가르쳐주는 내용이 지극히 막연하다. 그 시골 사람에게는, 객관화시키기 어려울 만큼 익숙한 풍경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낮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조차 있다.'(20)

 

 

익숙해서 막연한 존재가 편애의 산물이라면, 이윤기가 그렇다. 작고하신지 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건재하다. 잘 모르던 사람을 조금 알았을 때, 어쩌면 우리는 더 실망하게 된다. 나는 이윤기를 잘 몰랐고, 에세이집을 읽기 전에 어렴풋이 난독을 예상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어느 기자가 이윤기의 번역을 보고 조르바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무슨 외국인이 그러냐고 재미로 따져 물은 이야기에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펼쳐보니 정말 그런 부분들이 보였다. 이윤기에게 이것은 조르바에게 '난폭한 입말'을 돌려주는 과정이었다. 만약 이윤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두목' 대신 '주인님'을 섬기는 다소 복종적인 조르바를 기억하게 됐을 지도 모르겠다.

 

 

조르바는 자유인이다. 타인을, 그것도 연하의 자본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자유인 조르바에게는 일어날 수 없겠다 싶었다.(145)

 

 

신화와 문학, 외국어와 모국어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 역시 '껍진껍진한 입말'이다. 번역가답게, 말의 무게를 생각하는 그의 고뇌가 묻어났다. 유려한 문체보다, 펄떡이는 날 것의 변화를 추구하는 태도가 기계적 언어 변환이 아닌 번역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더불어 그 변환이 꼭 언어에 가두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이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들게 된 화두이자, 나와 남이 지어내는 행위를 평론할 때 자주 써먹는 잣대이기도 합니다.(70)

 

 

책을 엮은 이가 그의 길을 따르는, 이다희 번역가인지라 딸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학생 시절 그 세대 친구들처럼 문법이 파괴된 해괴한 글을 종종 쓰던 딸을, 아버지는 잠깐 그러다 말겠거니 기다렸다. 언어를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자식의 뭉개진 언어를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윤기는 스스로 태연하게 서술한다. 오히려 환경단체의 소식지가 딸의 글을 게재해 자녀가 상처받은 경험을 우려한다. 그러면서 젊은 피가 기성 세대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젊은 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파괴가 새로운 문법으로 고정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며 태연자약하다. 그 딸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고한 서문이 아주 인상적이다.

 

 

나는 (.....)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을 읽었다. 말에 대한 그와 같은 태도는 문학과 번역, 나아가 삶과 세상에 대한 이윤기의 철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산문집에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우연일 리 없다. 이윤기의 글은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가 이중적으로 보인다면 보는 사람의 잣대가 옹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을 가거나 이 길을 가지 않는 방법,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혼란에 빠졌었던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9)

 


유심히 관찰하는 의식과, 무심코 발화하는 무의식 두 세계에 주목하며 언어를, 그리고 그를 통해 사람의 본질에 더 다가서려했던 그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추천사대로 '그보다 더 밀도 높은 공간을 소유한 정신을' 끝내 찾기 힘들게 할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대로 '사라진 과거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도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故이윤기 선생 스스로 증명한다. 우리 문학사에 이렇게 씩씩한 사람이 있었다니, 돌아보면 아쉽고 한편 크게 위안이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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