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황해문화] 겨울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황해문화] 편집위원이 되고서 처음 쓰는 권두언이네요. 


이번 [황해문화] "특집"이 <젠더 전쟁>이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황해문화] 겨울호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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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전쟁과 을의 민주주의

 

1

 

지난 해 가을과 겨울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의 열기에 힘입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지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18 기념사에서 문재인 정부는 5.18 광주 정신과 촛불혁명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하면서 국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 이후 촉발된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가 살얼음판 같은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온 국민의 관심은 북한의 통치자와 미국의 통치자가 주고받는 살벌한 말의 전쟁에 쏠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수동성의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우리 자신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상황,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자체가 타자에 의해 압도적으로 규정되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를 규정하는 이러한 외재적 조건은 내재적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지난 촛불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더욱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한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수구세력과 언론이 촛불혁명 이후 급격하게 위축된 보수 세력의 결집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위기를 더욱 조장하고 군사적 대결의 양상으로 몰고 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현재 당면한 위기 상황을 우리가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부의 민주적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구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난 6개월 간 문재인 정부는 참신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사 실패와 정책의 혼란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이러한 다소 불안한 행보는 국민주권이라는 말이 지닌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국민이라는 말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편으로는 독재 정권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이라는 말과 더불어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의 주체로 호명되어 왔다. 독재자들이나 야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국민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가사로 한 헌법 제1라는 노래가 널리 사랑을 받은 것도 국민이라는 말이 갖는 저항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하지만 우리가 국민이라는 말이 지닌 이러한 저항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동질성은 실제 국민을 구성하는 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와 대립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및 사회화가 산출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10 : 90’, ‘1 : 99’ 같은 숫자로 표현되어 왔다. 이 숫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것은 성적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이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의 전체성에는 다양한 개인들 및 소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차별이 식별되고 정정될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말이 정상성의 기준이 될 때 그것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차별, 무시의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이라는 말에서, 그리고 국민주권이라는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을들을 정치적으로 재현하고 대표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을의 민주주의를 이제 사고하고 실험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촛불혁명이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신기원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

 

이처럼 을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젠더 문제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우리 사회의 가장 많은 을들이 공유하는 문제, 또는 우리 사회의 가장 많은 사람들을 을로 또는 을의 을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특집의 제목인 한국 사회 젠더 war’의 장면들의 문구를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에 젠더 war’, 젠더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그렇게 격렬한 젠더들 사이의 갈등, 특히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전개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이 과연 󰡔황해문화󰡕에서 특집 주제로 다룰 만큼 중요한 의제인가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할지 모르겠다.


첫 번째 의문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이전에 비하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이나 불평등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번 특집에 수록된 글들에서 여성필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준다. 가령 2016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한국의 성별격차지수는 144개 국 중 116위였으며, 이는 경제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 벌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특집의 필자들과 더불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시각의 차이(또는 명백한 현실에 대한 남성들의 맹목과 외면)가 왜 생겨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 사회 젠더 문제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의문은 나와 같이 SNS를 별로 활용하지 않고 온라인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은 구세대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의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이른바 여성들에 대한 각종 여성혐오 발언과 무차별 신상털이’, ‘조리돌림이 횡행하고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영상들이 남성 초과 사이트의 게시판들과 웹페이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 SNS 계정들을 통해 공유되고 확산되고 있지만, 많은 남성들은 이를 일부 젊은 아이들의 일시적인 치기와 일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집에 실린 글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고 또한 훨씬 더 구조적이며 뿌리 깊은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집중적인 피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20~30대 젊은 여성들, 더욱이 그들 중 일부의 문제로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증상이자, 젠더 차원의 갑질과 폭력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번 호 특집은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여성혐오에 대한 많은 여성들의 분노와 조직적 대응, 그리고 이에 맞선 이른바 일베를 비롯한 여성 혐오자들의 역공격과 강화된 혐오 표현들로 촉발된 젠더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배경으로 마련되었다. 따라서 특집의 문제의식은 최근 몇 년 간 심각하게 증폭된 여성혐오와 젠더 갈등의 문제에서 기원하지만, 이 특집에 실린 글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듯이 여성혐오의 문제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며 또한 일정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요인들이 누적된 역사적 성격을 띤 것임을 드러내고 공론화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정치적 주체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신경아는 총론에 해당하는 젠더 갈등의 사회학에서 현재 전개되는 젠더 전쟁의 상황 및 그 사회적 요인들을 요령 있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젠더 갈등은 길게는 지난 20, 그리고 짧게는 지난 10년 동안 전개된 사회적 실천의 결과이며, 특히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핵심 이유는 “‘차별을 인정하는 것보다 우대를 강조하는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여성 정책은 불평등과 차별의 시정을 위한 정책보다는 특정한 집단으로서 여성에 대한 시혜 정책으로서의 성격을 띠어 왔으며, 그 결과 생활 전반에 걸쳐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기보다는 예컨대 내각 30% 여성 할당 목표치를 달성하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 우대 정책이 오히려 사회 구조와 일상적인 삶에서 여성 차별을 방치하고 누적시키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필자에 따르면 이는 비단 노동시장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폭력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축학 개론󰡕을 많은 남성들이 실패한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하는 이유,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치안 당국과 일부 언론이 여성혐오 사건이 아닌 정신질환자에 의한 우발적 강력 범죄로 해석하려 드는 이유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불평등과 폭력,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섣부르게 봉합하기보다는 터져 나온 갈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김영희는 시선의 주체와 포획된 신체: ‘몰래카메라보는 눈보이는 몸에서 최근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 폭력을 주제로 삼으면서 시선의 폭력이라는 문제를 살피고 있다. 한동안 소라넷이라는 이름의 국내 최대의 불법 음란물 유통 사이트가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10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각종 불법 음란물을 게시하고 유통하면서 20년 가까이 성황을 이룬’(?) 이 사이트는 2016년에 폐쇄되었지만,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변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라넷이 폐쇄된 이후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불법 음란물과 영상들은 훨씬 더 은밀하고 산재된 형태로 계속 유통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상들 및 음란물들을 게시하고 서로 돌려보면서 남성들은 남성 연대의 끈을 형성하며, 이를 통해 여성 및 여성의 신체는 더욱 상품화되고 물신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물들은 제대로 단속하거나 제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적발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가 적발된 현직 판사가 약식기소 처분을 받은 것은 특권 여부를 떠나서 이 문제에 관한 법적 인식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준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필자에 따르면 더 심각한 문제는 디지털 성폭력의 근저에 놓여 있는 남성 중심적인 젠더 구조가 법원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할 만한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그렇거니와, 여성은 영상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촬영자에 대해 격렬한 저항의 표시를 제시해야 비로소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관점의 소산이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언제 어떻게 은밀한 촬영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을까 늘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훔쳐보는 시선의 일부만을 범죄화하고 다른 시선은 정상적인 것으로 묵인하는 젠더 위계 질서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필자의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영미는 노동시장 구조변동의 부수적 피해와 피해자 경쟁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사회적 뿌리를 밝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사회나 우리사회 모두 여성혐오의 뿌리에는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재편이 존재한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이 지속되던 황금의 30이 지나고 신자유주의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경쟁에서 탈락한 남성들이 생계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여성혐오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사회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하위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시장 경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았으며, 2000년대에는 저학력 청년 남성들이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저학력 중년층-장년층 집단에서 남녀 임금 격차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고학력층의 전 연령 집단에서도 젠더 격차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저학력 남성과 여성만 공히 프레카리아트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재편 이후 전개된 계급 편향적인 노동 개혁에 있으며, 이러한 구조적 원인의 비가시성으로 인해 그 직접적 피해 대상인 청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본 소득 비율은 크게 증가한 데 반해 노동 소득 비율은 줄어들었으며, 이처럼 줄어든 몫을 둘러싼 노동자들 내부에서의 경쟁, 배제, 차별과 반목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던 것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현재 전개되는 젠더 전쟁의 사회적 뿌리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두 가지 측면에서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 지난 20여 년 간 줄어든 노동소득의 몫을 키우고 특히 지금 악화되어 있는 중하위 소득집단의 소득분배율을 높이는 것은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또한 고학력 여성의 경력 단절과 유리 천장을 깨는 것 역시 남성의 이익과 부합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생계부양자로서의 지위를 위협받으면서 이로 인해 남성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남성들이 젠더 과수행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좀 더 평등한 젠더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선희의 퓨리오숙 현상의 이율배반성과 젠더전쟁의 주체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던 종합편성채널의 한 예능프로그램의 여성 연예인의 별명 퓨리오숙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낸다. 미국 영화 󰡔매드맥스󰡕에서 절대 권력의 독재자에 맞서 여성들을 해방의 땅으로 이끄는 여성 전사 퓨리오사의 이름을 본따 퓨리오숙이라고 불리는 이 연예인은 마치 가부장 구조의 남성 가장을 여성 가모장으로 바꿔놓은 듯한 캐릭터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다. 아내의 호통에 남편이 쩔쩔 매고 순응하는 것을 보고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대리 만족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퓨리오숙은 가부장의 희화화된 전도물에 불과할 뿐이며, 가모장 퓨리오숙은 현실의 젠더 전쟁에서 여성 전사의 모습을 형상화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IMF 외환 위기 이후 치열해진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이 인터넷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일베를 비롯한 여성혐오 사이트의 기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딸기녀’, ‘된장녀’, ‘김치녀등을 비롯한 각종 ○○를 생산하고 또한 여성의 신체를 촬영한 불법 영상물을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경쟁자로 등장한 여성들을 제압하거나 통제하려고 시도해온 것이다.


필자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선 퓨리오사, 페미전사들은 도처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불법 영상물과 음란물은 근절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방관하거나 묵인하는 사람들에 맞서 그것을 디지털/사이버 성폭력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근절하고 방지하기 위한 각종 대책 및 피해자 지원에 나선 많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더 많은 퓨리오사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관심과 연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 많은 남성들의 과제일 것이다.


나영은 얼굴을 가린 목소리들과 혐오의 디파워링(depowering)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에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과 그로부터 1년 뒤에 일어난 여성 왁싱사에 대한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 여성혐오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영이 주목하는 것은 이 두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여성들이 한결같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고 또 운동권이나 단체와의 연대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6년 여름 86일 간의 본관 점거 투쟁을 통해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에서도 학생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것은 나중에 이른바 일베를 비롯한 남성 중심 온라인 사이트에서 신상이 털려각종 성희롱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지난 20여 년 간 한국 사회에서 누적되어온 여성혐오와 이에 맞선 여성들의 투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간주한다. 2015년 일어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선언,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성폭력에 대한 공론화, ‘메르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유명한 미러링작업은 많은 여성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지만, 역으로 새로운 형태의 격렬한 반발과 강화된 혐오를 초래했다. 특히 운동을 주도하거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신상털이와 인신공격은 많은 여성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글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점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처해 있는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이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바탕으로 구성된 페미니즘 운동과 온라인을 기반으로 조직된 메갈리아나 워마드 같은 그룹들은 지향이나 연대의 방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낳고 있다. 특히 워마드 등이 대표하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생각하는 입장과 성적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입장 사이의 차이는 꽤 의미 있는 쟁점으로 보인다. 특히 동성애가 보수 집단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데 반해, 문재인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 시점에서 보면 더 그렇다. 따라서 “‘진짜 여성이 누구인지를 대신하여 지금 누가 여성의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라는 필자의 말은 많은 울림을 낳는다.

 

3

 

비평에도 을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여러 글이 실렸다. 이진오는 종교인 과세! 낼 건 내고 받을 건 받자는 글에서 종교인 과세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2015년 종교인 과세를 명문화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8년부터 종교인 과세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지만, 일부 개신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2년을 더 유예하자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인 과세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여 왜 종교인 과세가 필요하며 또 정당한 일인지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특히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 논리의 허점을 간명하게 밝혀주고 있어 이 주제에 관해 익숙지 않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적폐 청산과 관련하여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MBC, KBS 등과 같은 공영방송의 정상화 문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공영방송이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공정성과 신뢰도가 크게 하락했을 뿐 아니라,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방송국 내부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등을 무차별적으로 징계하고 해고함으로써 방송국 내부에도 큰 균열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MBC 해직기자인 박성제는 내부인의 시각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던 MBC가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점 중 하나는 이명박 정권 시절 MBC는 청와대와 국정원 같은 외부의 강한 압력과 통제를 통해 장악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외부의 압력 없이도 MBC 스스로 정권의 충실한 홍보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MBC KBS의 현재 경영진이 물러난다고 해서 공영방송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필자가 강조하듯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혁을 통해 다시는 공영방송이 정권의 꼭두각시가 되는 길을 막아야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송 환경 속에서 공영방송이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찾을 수 있도록 내부 개혁과 쇄신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적폐청산 과제는 사학비리 청산의 문제다. 상지대는 시사 문제에 웬만큼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학비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각종 비리와 불법의 책임을 지고 퇴출되었던 김문기 중심의 구()재단이 2010년 다시 복귀하여 상지대 정상화에 앞장섰던 교수, 학생, 직원들에게 각종 징계를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고 다시 상지대가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상지대 구성원들은 지역사회 및 각종 단체와 힘을 합쳐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 끝에 두 번째의 상지대 민주화를 이룩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상지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고 이제 상지대 총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정대화는 상지대 민주화 투쟁의 교훈과 과제에서 그동안 지난했던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상지대 사태에서 가장 큰 책임이 교육부에 있음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교육부는 김문기의 상지대 인수와 장악, 각종 비리의 자행 등을 묵인하고 방조했을 뿐만 아니라 부실한 감사로 이 사태를 장기화한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학의 발전을 위해서 교육부와 정부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하나인 공영형 사립대학모델에서 사학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80% 이상 사학대학인 만큼 사학비리 척결과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상지대가 선도적으로 모범을 보인 공영형 사립대학의 모델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김애령은 인문한국’(HK)이라는 실험에서 지난 2007년에 시작되어 올해 8월로 1기 사업이 마무리된 인문한국 사업의 의미와 한계를 다루고 있다. 필자가 말하듯 인문한국 사업은 인문학 지원 사업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학과 중심의 인문학 연구 이외에 학제 연구 및 융합 연구에 기반을 둔 연구소 중심의 인문학 연구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10년 동안의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이전까지는 유명무실한 껍데기 연구소에 불과했던 대학의 인문학 연구소들은 활력과 창의력을 갖추었고,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인문학의 오랜 학문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도전을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다움의 규범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인문한국 사업은 수행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1기 사업 종료 시점을 두 달 앞두고 기존 인문한국 사업단이 새로운 인문한국플러스 사업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지난 10년 동안 구축해놓은 인문학의 새로운 인프라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100여 명에 달하는 인문한국 연구교수들을 실업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교육부는 이러한 방침에 대한 기존 인문한국 사업단의 항의를 플러스 사업에 새로 진입하는 연구소들과의, 혹은 인문한국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인문학 연구자들과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함으로써 인문학자들에게 큰 모욕감마저 주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인문학이 당장의 실용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 의미와 시대적 가치를 성찰하고 구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라면, 그리고 1기 인문한국 사업이 그 작업을 위한 중요한 인프라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을 계속 살리고 육성하는 방향의 정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포토에세이 및 문학, 문화비평, 서평 등에서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러 글을 실었다. 하나하나 거론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젠더 문제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고 값진 통찰들을 담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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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대면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이 바로 그런 역사적 사건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군사 독재의 강고한 틀이 시민들의 작고도 거대한 힘에 밀려 깨어지는 것을 감동적으로 체험했고, 또 얼마 뒤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70여 년을 지속해왔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내 생애 또 다시 그런 거대한 역사성의 시기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지난 겨울 다시 한 번 내가 역사의 거대한 현장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 역사성의 시간은 지금도 진행 중일 것이다. 이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되고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진부하지만, 우리의 실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많은 을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를 정치화하는 것이 바로 그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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