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안녕하세요?
아주 흥미롭고 유익한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내용에 대해 저도 충분히 수긍하고 ˝품행˝이라는 번역이 갖는 장점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conduct/conduite 개념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풍부하게 잘 설명해주셔서 저도
공부가 됐습니다.

다만 제가 각주에서 이 개념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conduite라는 개념이 일종의 도덕적, 규범적 코드 속에서 이해되고 실행되는 행위 방식을 뜻한다는 점에서 보면 `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푸코가 이 개념을 [주체와 권력]을 비롯한 몇몇 텍스트에서 일반화하려고 할 때, 푸코는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 조금 더 일반적인 행위이론 속에서 이 개념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제가 각주에서 이 용어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바로 [주체와 권력]이라는 텍스트를 인용하고 논의하는 맥락에서였습니다.

2) 제가 ˝일반적 행위이론˝이라고 한 것은 바로 <주체화>(subjectivation)의 문제설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970년대 푸코가 시도한 계보학 작업에서 중심적인 개념 중 하나는 <예속화> 또는 <예속적 주체화>라고 번역할 수 있는 assujettissement(불어 발음대로 읽으면 `아쒸제띠스망` ) 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conduite 개념은 <예속적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때와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때 조금 상이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2-1)
<예속적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하게 되면, conduite/conduct는 바로 지배적인 규범, 도덕적 코드에 따라 규격화된 행위, 실천 등을 뜻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보면 <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잘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contre-conduite의 경우에는 이러한 <품행>에 전제되어 있는 도덕적, 규범적 코드에 저항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가 되겠고, 따라서 <대항-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할 듯합니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미셸 페쉬(Michel Pecheux)는 <자명한 진실>(1975)이라는 책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면서 <대항-정체화>(contre-identification)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는데, <대항-품행>과 비슷한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반대로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경우, <품행>이나 <대항-품행> 같은 용어들은, 그것들이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에 대해 저항하고 반역한다고 해도,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러한 도덕적, 규범적 체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푸코가 1980년대 초에 [주체와 권력]을 비롯한 몇몇 텍스트에서 제안하려고 했던 것은, <예속적 주체화>의 틀 바깥에서 conduite/conduct와 sujet/subject를 사고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페쉬의 경우에는 contre-identification과 구별되는 desidentification이나 desubjectivation 같은 개념으로 이런 길을 사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바 있습니다.

3) 그런데 이렇게 볼 때 conduite/conduct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할까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저 <품행>이라는 번역이 어떤 경우에는 푸코의 의도를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주체화>의 문제설정에서 볼 때에는 푸코의 conduite 개념의 함의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반면 <행위>라는 번역은 <품행>에 비해 conduite 개념에 더 넓은 여지를 마련해주기는 하지만, 막연하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말에서 <행위>, <행동>, <행태>, <활동>, <작용> 등은 개념적으로 아직 미분화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가 각주에서 지적한 것은 새로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한 가지 문제제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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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ray 2015-10-1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렇게 단시간에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저는 푸코를 처음에는 근대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사상사 관련 공부를 시작하면서 점차 그의 텍스트를 역사적 설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예속 및 저항에 관한 ˝일반행위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층위를 전제하니 특히나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난점을 마주치게 되는군요.

제가 선생님을 작은 문제로 지나치게 귀찮게 해드리는 게 아니라면, 추가적인 의문점을 적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저로서는 몇몇 짧은 글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만 읽은) 80년대의 푸코와 ˝주체화˝의 문제가 언젠가는 좀 더 깊게 이해해보고 싶은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2에서 설명해주신 내용이 곧 사회적으로 이미 주어진 예속적 주체화를 ˝주체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푸코의 기획을 의미한다면, 저는 여기에 두 가지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1) ˝주체화˝는 기존의 체계 바깥에서 작동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바깥`이 없다는 전제 하에) 체계의 내부에서 주체화 양식의 재구축을 통해 작동할 수 있는 것인가? 2-2에서 해주신 설명에 따르면 후자는 대항-품행에 속하며 진정한 주체화는 전자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며, 적어도 <주체의 해석학>에서 탐구된 주체화 양식의 암묵적인 지향점 또한 (정신분석적 용어를 빌어오는 게 허용된다면) 대타자를 갖지 않는, 자기창조적인 주체화 과정의 탐색에 있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푸코가 ˝예속적 주체화˝를 벗어난 주체화 양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가 기존의 사회적 체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물론 말년의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갖는 오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주체와 권력>을 읽으면서, 푸코의 뉘앙스를 충분히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그것이 새로운 주체화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서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의 틀 바깥에서 가능한 주체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2) conduit 번역의 문제와도 희미하게 이어진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주체화의 가능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체화 과정을 구성하는 행위conduit 개념 자체에 어떤 도덕적인/윤리적인 속성이 함축되었는지의 여부를 질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어떤 행위가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혹은 주체화 과정 자체가 어떤 규범적인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혹은 푸코가 여러 용어 중에서 conduit를 선택했을 때, 이러한 뉘앙스를 염두에 두었는가로 옮길 수도 있겠지요). 제 질문이 충분히 명확하지 못한 것 같아서 부연하자면, 예컨대 찰스 테일러와 같은 이가 인간의 자아self 혹은 자기이해에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수행하는 기제 자체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공부하신 입장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다 읽지 않고 성급하게 던지는 질문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알기에, 동시에 블로그에 적힌 것만으로도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지 짐작할 수 있기에 이런 질문을 추가로 제기하는 게 죄송스럽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간략하게 답변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balmas 2015-10-13 13:25   좋아요 0 | URL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바깥˝이라는 통념의 애매성을 먼저 지적해야 할 듯합니다. 기존 체계의 ˝바깥˝이라고 할 때, 그 바깥은 공간적 바깥이나 제도적 바깥 또는 논리적 바깥, 메커니즘의 바깥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때의 ˝바깥˝은 ˝안˝이라는 것과 이항 대립적인 배타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바깥도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화 양식이 예속화 양식의 ˝바깥˝이라고 할 때는 기존에 작동하고 있는 예속화 양식의 공간적이거나 제도적 바깥이라는 점을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속화 양식의 제도적인 실현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예속적 효과를 발휘하는지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안과 밖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조금 더 분명히 규정하는 게 가능하겠죠.

두번째 질문의 경우, 아마도 새로운 주체화 양식 자체도 이미 어떤 규범적 틀이나 규칙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인 듯합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규범, 규범적인 것, 규범 체계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는 아니겠죠. 푸코는 어떤 경우에는 법칙이나 코드로 형태화된 규범 체계(도덕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체화 양식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톨릭의 고해성사에 기반을 둔 근대적 형태의 고백의 기술(정신분석을 포함하는)에 입각한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서 탈피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도 합니다. 사실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은 이러한 근대적 주체화 양식의 한계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다른 식의 주체화 양식을 모색해볼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체화 양식이나 conduite 개념이 반규범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고, 또 그것이 푸코의 의도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푸코가 이 문제들에 대해 무언가 명확한 답변, 적어도 책을 출판할 수 있을 만큼의 답변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푸코의 말년의 강의록들은 이 문제들을 사고하고 새로운 이론화, 문제화 방식을 탐색하기 위한 역사적, 이론적 실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강의록들에서 무엇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린 일이겠죠.